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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주, 영은미술관 facebook

출생

1972, 부산

장르

회화, 조각, 사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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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 빌딩, 2015

캔버스에 오일파스텔, 아크릴, 122 x 80.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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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암흑지점들

여러 나라 말이 조합된 전시부제 ‘Maniere-noir: Gray징(京)’은 회화와 사진의 경계 위에서 여러 차원을 담으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전시된 작품들은 부제 그대로 회색 톤의 베이징이다. 흰색/회색/검정색의 세 가지 톤으로 조율된 베이징 풍경은 자금성이나 고택같이 오래된 시간의 층들이 보존된 장소부터 공장이나 공장을 개조한 현대식 스튜디오처럼 기계적 즉물성이 두드러진 장소에 이른다. 어느 곳이건 단순하고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작가가 발견한 장소의 특수성도 있지만, 벨벳 같은 느낌을 주는 진한 블랙의 추상적인 색 면과 분석적으로 포착된 피사체의 각도에 힘입은 바 크다. 오일 파스텔로 칠해진 면을 니들로 긁어서 만든 섬세한 톤은 강한 구도와 색 면을 보충한다. 이번 전시는 2009년 열렸던 ‘Maniere-noir: Beijing Photos’ 전과 작품 자료를 공유하지만, 드로잉과 회화적 과정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신선주는 국내외에서 회화와 사진을 모두 전공했다. 그러나 회화를 먼저 시작한 그녀에게 손끝 하나하나를 통해 만들어지는 회화는 도구나 매체의 역할을 할 뿐인 사진에 비해 더 애착이 간다. 
 장소성이 어느 정도 유지된 상태에서, 블랙과 화이트를 대조하는 회화적 게임은 작가에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흥미진진한 과정이다. 인적이 없는 풍경들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흰색과 회색, 검정의 색 면으로 치환된 건물과 건물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흐름만이 차분함 속에 잠재적 움직임을 부여할 뿐이다. 신선주의 작품은 장소성에 충실한 풍경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기하학적 면 분할이 두드러진다. 장소를 찍을 때부터 구도는 세밀하게 조율된다. 서로 다른 톤의 두 건물이 맞물려 있는 작품 [2 chimneys]는 여러 가지 무채색이 적당한 비율로 배치된다. 작품 [MK2 art space]는 검정으로 무게 중심을 준 아랫부분, 흰 면으로 표시된 빛의 영역, 회색 하늘, 여러 회색 톤의 건물 배치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다. 화면의 추상적 균형을 위해 실제 장소는 변형되기도 한다. 공장처럼 군더더기 없는 기능적 장소가 정면으로 포착된 작품 [hmmmmmm...상상재설계]의 오른쪽 날개부분은 사진을 뒤집어 다른 장면의 어깨에 붙인 것이다. 고전적인 정면성에 충실한 신선주의 작품은 문처럼 대칭적인 구도를 가진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정면성이나 대칭성은 화면의 블랙과 함께 관객을 깊이 몰입시킨다. 작품 [順貞門]은 아치형 안에 건축물을 보여주는데, 건축적 구조가 하얀 하늘 부분을 감싸 안는다. 작품 [Old house in Beijing university]는 블랙으로 감싸인 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다. 장소의 폐쇄성은 문을 에두른 블랙에 의해 강화된다.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작품 [gap]이나 [HeiQiao-studio]처럼, 원근법적 구도를 가지는 경우에도, 화면은 육중한 자물쇠로 감겨있다는 느낌이다. 하늘은 블랙과 회색 톤의 인공적 구조물 사이에 놓인 하나의 틈일 뿐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 사이의 대화를 통해 작품을 진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닫힘은 열림을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신선주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명암 대조는 풍경이라는 소재와 어우러져 빛과 어둠 사이에 펼쳐진 드라마를 낳는다. 인간의 상징적 우주에서 빛은 명백함을, 어둠은 혼돈의 영역을 차지한다. 그래서 빛은 진리나 계몽의 은유로 간주되었지만, 신선주의 작품에서 빛은 어둠을 강조하는 배경에 머문다. 사진이 빛을 인화지에 고정시킨 것이라면, 회화는 손으로 꼭꼭 눌러서 칠해지거나 긁어낸 무채색의 면이다. 투명한 형식이라기보다 불투명한 질료의 영역에 가까운 블랙은 끝없는 동굴이나 바닥모를 심연 같다. 
 이 영역은 블랙홀처럼 시선을 급속하게 빨아들이지만, 시선은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여기에는 기계적 시점(=사진)의 순간성과 시간성을 담지 하는 육안의 운동이 공존한다. 블랙 영역에서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의 차이가 없다. 현전에 충실한 시각적 인식의 모델은 근저로부터 무너진다. 이 보이지 않는 영역은 플라톤이 말한 코라와 닮았다. 플라톤은 [티마에우스]에서 ‘볼 수도 없고 형식도 없는 어떤 것이면서도 모든 것을 담고서 영원한 본질들을 생성의 유희로 끌어들이는 그 그릇(=코라)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 대상들에 관한 우리의 시각은 우리가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시각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시각의 맹목이다. 혹은 맹점(盲點)이다. 존 맥컴버는 이러한 주제를 다룬 논문 [데리다의 시각폐쇄]에서 맹점 주변에 조직된 시각은 볼 수는 없지만, 우리 시계의 형태와 범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신선주의 작품은 맹점 주변에 조직된 시각인 셈이다. 그것은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 (한스 블루멘베르크)이라는 ‘형이상학을 낳는 시각의 폭력을 파열하는’(데리다) 또 다른 시각이다. 
 존 맥컴버에 의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맹점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태양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인해 맹점은 형식 자체의 영역, 존재를 넘어선 그 어떤 것을 근원으로 하는 충만함을 구조화하는 것이다. 신선주의 작품에서 시각의 대상은 더 이상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형식이라기보다는 ‘흔적’(데리다)이다. 자신의 맹점 주위에 조직되는 시각이란 흔적 그 자체를 향해 열린 시각이다. 안료의 진한 밀도로 뒤덮인 블랙은 역설적으로 공이나 허의 공간처럼 보인다. 맹점과 맹목으로부터 시각이 가능하듯이, 이 공과 허의 공간으로부터 실재가 가능해진다. 이 암흑의 지점(들)은 작품 속 현실 그 자체를 구조화하고, 실재적인 것에 내적 일관성을 부여하는 허구이다. 이 허구가 사라지면 나머지 현실도 힘을 잃는다. 그것은 미란 보조비치가 말한 ‘암흑지점’과 같다. 그는 [암흑지점]에서 근대 초기 제러미 벤섬이 고안한 원형 감옥, 즉 완전히 투명하며 빛으로 가득한 판옵티콘 우주 속에서 비가시성의 실체를 논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죄수를 응시할 수 있는 암흑 지점이라는 하나의 허구(상상, 비존재)가 일망 감시체제를 작동시킨다. 조망적 시점이 많은 신선주의 작품--가령, 대칭적 풍경 중심이 블랙으로 채워져 있는(또는 뚫려있는) [불향각](2009)같은 이전 작품의 예--에서 이 모델은 발견된다. 
 판옵티콘은 근대사회의 정치경제학적 구조와 연결되지만, 동시에 결여를 통해 작동하는 힘(권력)의 기제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시각 예술에서도 의미 있는 모델이 된다. 감시하는 자의 응시는 가시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 비가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감시자가 검은 실루엣으로만 드러나는 감시등실은 모든 것을 보는 응시의 재생을 위한 도구이다. 신선주의 작품 속 블랙은 투명한 거울이 아닌, 불투명한 그림자의 모델에 가깝다. 르네상스 이래로 주도적이었던 거울의 모델은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오며 유기적인 질서로 조직되는 재현적 공간을 낳았다. 이에 부합되지 않는 무질서는 결여와 부재로만 정의된다. 그러나 신선주의 작품에서 짙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블랙은 이 무질서의 영역을 활성화한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최초의 유사물이 만들어진 것은 그림자로부터였다는 사실, 즉 예술적 재현의 탄생이 음화(陰畵)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고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서 회화가 선으로 윤곽을 그린 인간의 그림자에서 최초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회화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체의 부재와 그 투영된 형상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경우 실물에 대한 그림자의 유사성은 결정적이다. 사진 역시 대상과의 물리적 연관성을 가지는 지표(index)로 간주된다. 신선주의 작품에서 블랙은 도상적 유사물인 지표를 잠식한다. 그것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처럼, 반(反)재현적 본성을 보여준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무대의 커튼으로 처음 착상되었다고 밝힌다. 커튼은 재현이 아니라 가리는 것이고 혹은 걸어놓음으로서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신선주의 작품 속 블랙 역시 사각형을 채운 블랙처럼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의 체계들을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또는 원근법과 통합된 그림자 투사로서 ‘그림자로 그리기’(스토이치타) 라는 방식이다. 현대에 와서 미메시스의 대표자가 된 사진은 그 정점에서 미메시스의 힘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신선주의 작품에서 고전적 균형을 이룬 신비한 고요 속 블랙은 ‘광학적 공간을 만드는 손가락이 아니라, 촉각적 공간을 만드는 손’(들뢰즈)을 복구하는 장이다. 그것은 기력이 쇠해진 회화에 잠재태들이 우글거리는 야생적 바탕을 복원시킨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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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음영

풍부한 중간계조와 흑과 백이 대비되는, 그러면서도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주고 있는 신선주의 그림은 흑백사진을 닮았고 메조틴트 판화를 닮았다. 핍진성 곧 대상과의 영락없는 닮은꼴이 하나같이 사실적인 묘사와 재현에 바탕을 둔 회화와 사진과 판화를 아우르게 한다. 특히 중간계조 혹은 검정 색조의 방식으로 알려진 메조틴트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특히 초상화 제작을 위해 가장 널리 쓰였던 판화 제작방식이다. 이처럼 사진과 판화와의 관계는 각별한 점이 있다. 어쩌면 사진은 판화와 관련한 형식실험의 와중에서 발명된 것일 수 있다. 초기에 형성된 그 영향관계는 지금도 석판화와 같은 평판화에서 사진제판법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연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사진을 평판화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사진과 평판화 사이에는 지난한 형식실험에 의한 잠재된 형식의 지점들이 흥미진진하고도 의미 있는 가능성으로서 예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메조틴트는 비록 평판화가 아닌 요철판화이지만, 사실적인 묘사로 나타난 형식적인 결과로 보나, 판(메조틴트의 경우)이나 캔버스의 표면(작가의 경우)에 미세 요철을 새김질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 과정이 작가의 작업과 닮아있다. 메조틴트 판화는 로커라는 도구를 이용해 동판에다가 메(요철)를 새기는데, 메가 촘촘할수록 잉크를 묻혀 찍었을 때 더 새까맣게 나온다. 그리고 끝이 뾰족한 주걱처럼 생긴 스크레이퍼로 그 메를 뭉그러트려 이미지를 새기는데, 잉크를 묻혀 찍으면 그 부분이 하얗게 나온다. 메를 촘촘하게 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그 메를 뭉개는(이미지를 새기는) 정도에 따라서 흰색에서 검은색 사이의 풍부한 색조의 스펙트럼이 가능해진다.
작가의 그림 역시 재료가 다르고 찍어내는 대신 그린 것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런 메조틴트 판화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전통적인 판법의 회화적 변용이라고나 할까. 작가의 그림은 크게 흰 여백 부분과 회색 톤의 중간 계조의 영역 그리고 칠흑같이 검은 색 화면으로 구분된다. 여백 부분은 대개 하늘처럼 대기를 향해 열린 공간을 표현할 때 주로 적용되고, 이와 함께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혹은 건물 끝에 보이는 빛이 지나가는 통로를 표현하는 것에 할애된다. 그리고 그림에서 흰색과 검정색 부분은 단색조의 평면으로 나타나고,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극적 긴장감을 더하며, 실재로부터 취해온 소재임에도 기하학적 패턴이나 구도를 보는 것과 같은 추상적 형식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중간 계조의 영역으로서, 오일 파스텔(크레용)을 칠한 후 동판화에서처럼 끝이 뾰족한 도구인 니들로 칠해진 부분을 미세하게 긁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사물 형상이 드러나게 한다. 이로써 그림은 그 속에 사실적인 묘사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 여백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한 묘사와 함께 흑과 백이 대비되는 화면 그리고 기하학적인 구도가 특징이랄 수 있겠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회화가 물질적인 매체라고 한다면 사진은 순수하게 비물질적이고 환영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작가의 작업은 사진 고유의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이미지를 견지하면서도 여기에 회화적인 물질성을 더한 경우로 보이고, 작가의 작업을 두드러져보이게 하는 특유의 아우라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는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인그레이빙 곧 새김질은 동판화 기법에서 차용되고 응용된 기법으로서 거의 결정적이랄 수 있다. 작가는 전사된 이미지 위에 덧그리기도 하고, 아예 이미지를 전사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그린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 이처럼 물질성이 주는 아우라는 더 풍부하고 더 깊고 더 결정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물질적인 아우라로 치자면 단연 검정색 화면이 주목된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감각적이고 인상적인만큼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림에서 검정색은 때로 작가가 인위적으로 처리해 그린 부분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건축물의 음영 부분에 적용된다. 실제로 그림자는 그림자 속에 일정정도의 중간계조의 빛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이를 무시하고 칠흑 같은 균일한 단면으로 그림자를 처리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분명한 이 단색조의 검정색 면으로 인해 작가의 그림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뚜렷해 보이고, 기하학적 구도가 두드러져 보이고, 실제보다 더 단순해 보이고 정리돼 보인다. 그리고 현실로부터 소재를 취한 것임에도 그리고 적어도 외관상 현실 그대로 재현한 것임에도 추상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부분이 작가의 그림과 사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일 것이다.
그리고 사진과 다른 점으로 치자면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검정색 면의 색감이며 질감이다. 검정색 오일 파스텔을 수도 없이 덧칠하고, 여기에 일일이 손가락으로 눌러 펴는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의 올을 완전히 채워 편평하게 만든다. 육안으로 두께가 감지될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상 일정한 두께의 피막을 덮씌워 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로써 수묵화의 먹빛보다도 더 검은, 아마도 카본보다도 더 깊은 색조의 검정색이 만들어진다. 더욱이 그 검정색은 조금의 빛도 반사하지 않는 탓에 실제보다 더 깊고 더 검어 보인다. 외부의 빛이란 빛은 모조리 자기 내부로 흡수해 들이는 블랙홀 같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같은 검은 색이지만 흑연을 수도 없이 덧칠하면 표면에서 번쩍거리는 광물성으로 인해 빛을 자기 외부로 난반사하지만, 작가의 검정색은 외부 환경을 자기 내부로 낱낱이 빨아들여 점점 더 새까매지는 마치 칠흑과도 같은 어둠, 어둠 자체인 어둠, 심연과도 같고 연옥과도 같은 어둠, 원형적인 어둠, 어둠 자체인 어둠에 직면케 한다. 흑연은 결코 표면을 뚫고 이면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재료적으로 흑연이 표면적이라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오일파스텔이 만들어내는 검정색은 그 깊이가 심연에 맞닿아있다.
그렇게 깊고 검은 검정색 면이 부드러운 벨벳의 질감이며 촉감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색의 물질성이 시각의 경계를 넘어 촉각적인 경우로까지 확장되는 것인데, 일종의 촉각시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예시되고 있는 것이다. 보면서 만져지는, 만져질 듯 보는 어떤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자기 외부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어둠) 속으로 열리는, 심연과 무의식마저 파고드는 그 차원은 말하자면 그만큼 물질성이 강하게 어필돼 온다는 말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며 없는 풍경이다. 디지털 사진도 이처럼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작가는 이와는 다른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인위적인 조작과정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지난한 수공과정의 결과물이며,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한 감각적 해석의 결과물이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이미지며 정보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날로그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다르다. 과장하자면, 어쩌면 풍경 자체가 이미 이처럼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자연이 개념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이라면, 풍경은 개념화된 자연이며 해석된 자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작가의 그림은 비록 현실과 실재의 지평으로부터 그 소재를 취해온 것이지만, 그리고 가급적 원형 그대로의 재현에 충실한 편이지만, 그래서 외관상 현실 그대로를 닮아 있지만, 사실은 생략과 강조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작가의 남다른 감각이며 감수성이 투여된 검정색의 물질성으로 인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이며 없는 풍경이 된다.
이처럼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은 일종의 모순어법이며 역설이다. 그리고 그 역설은 재현과 생략 혹은 숨은 재현과의 긴밀하고 숨 막히는 관계로 인해 강화된다. 숨김으로써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재현 혹은 숨김을 통해서만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재현의 차원을 열어 놓는다. 특히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벨벳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어두운 검은색은 자기 속에 무엇을 재현하고 있으며 무엇을 숨겨놓고 있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심연? 연옥? 어둠 자체? 어둠의 원형?


고충환(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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