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음영
풍부한 중간계조와 흑과 백이 대비되는, 그러면서도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주고 있는 신선주의 그림은 흑백사진을 닮았고 메조틴트 판화를 닮았다. 핍진성 곧 대상과의 영락없는 닮은꼴이 하나같이 사실적인 묘사와 재현에 바탕을 둔 회화와 사진과 판화를 아우르게 한다. 특히 중간계조 혹은 검정 색조의 방식으로 알려진 메조틴트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특히 초상화 제작을 위해 가장 널리 쓰였던 판화 제작방식이다. 이처럼 사진과 판화와의 관계는 각별한 점이 있다. 어쩌면 사진은 판화와 관련한 형식실험의 와중에서 발명된 것일 수 있다. 초기에 형성된 그 영향관계는 지금도 석판화와 같은 평판화에서 사진제판법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연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사진을 평판화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사진과 평판화 사이에는 지난한 형식실험에 의한 잠재된 형식의 지점들이 흥미진진하고도 의미 있는 가능성으로서 예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메조틴트는 비록 평판화가 아닌 요철판화이지만, 사실적인 묘사로 나타난 형식적인 결과로 보나, 판(메조틴트의 경우)이나 캔버스의 표면(작가의 경우)에 미세 요철을 새김질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 과정이 작가의 작업과 닮아있다. 메조틴트 판화는 로커라는 도구를 이용해 동판에다가 메(요철)를 새기는데, 메가 촘촘할수록 잉크를 묻혀 찍었을 때 더 새까맣게 나온다. 그리고 끝이 뾰족한 주걱처럼 생긴 스크레이퍼로 그 메를 뭉그러트려 이미지를 새기는데, 잉크를 묻혀 찍으면 그 부분이 하얗게 나온다. 메를 촘촘하게 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그 메를 뭉개는(이미지를 새기는) 정도에 따라서 흰색에서 검은색 사이의 풍부한 색조의 스펙트럼이 가능해진다.
작가의 그림 역시 재료가 다르고 찍어내는 대신 그린 것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런 메조틴트 판화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전통적인 판법의 회화적 변용이라고나 할까. 작가의 그림은 크게 흰 여백 부분과 회색 톤의 중간 계조의 영역 그리고 칠흑같이 검은 색 화면으로 구분된다. 여백 부분은 대개 하늘처럼 대기를 향해 열린 공간을 표현할 때 주로 적용되고, 이와 함께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혹은 건물 끝에 보이는 빛이 지나가는 통로를 표현하는 것에 할애된다. 그리고 그림에서 흰색과 검정색 부분은 단색조의 평면으로 나타나고,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극적 긴장감을 더하며, 실재로부터 취해온 소재임에도 기하학적 패턴이나 구도를 보는 것과 같은 추상적 형식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중간 계조의 영역으로서, 오일 파스텔(크레용)을 칠한 후 동판화에서처럼 끝이 뾰족한 도구인 니들로 칠해진 부분을 미세하게 긁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사물 형상이 드러나게 한다. 이로써 그림은 그 속에 사실적인 묘사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 여백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한 묘사와 함께 흑과 백이 대비되는 화면 그리고 기하학적인 구도가 특징이랄 수 있겠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회화가 물질적인 매체라고 한다면 사진은 순수하게 비물질적이고 환영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작가의 작업은 사진 고유의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이미지를 견지하면서도 여기에 회화적인 물질성을 더한 경우로 보이고, 작가의 작업을 두드러져보이게 하는 특유의 아우라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는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인그레이빙 곧 새김질은 동판화 기법에서 차용되고 응용된 기법으로서 거의 결정적이랄 수 있다. 작가는 전사된 이미지 위에 덧그리기도 하고, 아예 이미지를 전사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그린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 이처럼 물질성이 주는 아우라는 더 풍부하고 더 깊고 더 결정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물질적인 아우라로 치자면 단연 검정색 화면이 주목된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감각적이고 인상적인만큼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림에서 검정색은 때로 작가가 인위적으로 처리해 그린 부분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건축물의 음영 부분에 적용된다. 실제로 그림자는 그림자 속에 일정정도의 중간계조의 빛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이를 무시하고 칠흑 같은 균일한 단면으로 그림자를 처리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분명한 이 단색조의 검정색 면으로 인해 작가의 그림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뚜렷해 보이고, 기하학적 구도가 두드러져 보이고, 실제보다 더 단순해 보이고 정리돼 보인다. 그리고 현실로부터 소재를 취한 것임에도 그리고 적어도 외관상 현실 그대로 재현한 것임에도 추상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부분이 작가의 그림과 사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일 것이다.
그리고 사진과 다른 점으로 치자면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검정색 면의 색감이며 질감이다. 검정색 오일 파스텔을 수도 없이 덧칠하고, 여기에 일일이 손가락으로 눌러 펴는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의 올을 완전히 채워 편평하게 만든다. 육안으로 두께가 감지될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상 일정한 두께의 피막을 덮씌워 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로써 수묵화의 먹빛보다도 더 검은, 아마도 카본보다도 더 깊은 색조의 검정색이 만들어진다. 더욱이 그 검정색은 조금의 빛도 반사하지 않는 탓에 실제보다 더 깊고 더 검어 보인다. 외부의 빛이란 빛은 모조리 자기 내부로 흡수해 들이는 블랙홀 같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같은 검은 색이지만 흑연을 수도 없이 덧칠하면 표면에서 번쩍거리는 광물성으로 인해 빛을 자기 외부로 난반사하지만, 작가의 검정색은 외부 환경을 자기 내부로 낱낱이 빨아들여 점점 더 새까매지는 마치 칠흑과도 같은 어둠, 어둠 자체인 어둠, 심연과도 같고 연옥과도 같은 어둠, 원형적인 어둠, 어둠 자체인 어둠에 직면케 한다. 흑연은 결코 표면을 뚫고 이면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재료적으로 흑연이 표면적이라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오일파스텔이 만들어내는 검정색은 그 깊이가 심연에 맞닿아있다.
그렇게 깊고 검은 검정색 면이 부드러운 벨벳의 질감이며 촉감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색의 물질성이 시각의 경계를 넘어 촉각적인 경우로까지 확장되는 것인데, 일종의 촉각시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예시되고 있는 것이다. 보면서 만져지는, 만져질 듯 보는 어떤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자기 외부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어둠) 속으로 열리는, 심연과 무의식마저 파고드는 그 차원은 말하자면 그만큼 물질성이 강하게 어필돼 온다는 말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며 없는 풍경이다. 디지털 사진도 이처럼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작가는 이와는 다른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인위적인 조작과정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지난한 수공과정의 결과물이며,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한 감각적 해석의 결과물이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이미지며 정보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날로그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다르다. 과장하자면, 어쩌면 풍경 자체가 이미 이처럼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자연이 개념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이라면, 풍경은 개념화된 자연이며 해석된 자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작가의 그림은 비록 현실과 실재의 지평으로부터 그 소재를 취해온 것이지만, 그리고 가급적 원형 그대로의 재현에 충실한 편이지만, 그래서 외관상 현실 그대로를 닮아 있지만, 사실은 생략과 강조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작가의 남다른 감각이며 감수성이 투여된 검정색의 물질성으로 인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이며 없는 풍경이 된다.
이처럼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풍경은 일종의 모순어법이며 역설이다. 그리고 그 역설은 재현과 생략 혹은 숨은 재현과의 긴밀하고 숨 막히는 관계로 인해 강화된다. 숨김으로써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재현 혹은 숨김을 통해서만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재현의 차원을 열어 놓는다. 특히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벨벳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어두운 검은색은 자기 속에 무엇을 재현하고 있으며 무엇을 숨겨놓고 있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심연? 연옥? 어둠 자체? 어둠의 원형?
고충환(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