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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영, 사비나미술관

출생

1963, 서울

장르

조각, 설치, 사진, 미디어, 퍼포먼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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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2016

브론즈, 88 x 42 x 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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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영의 작품세계

시공(時空)을 초월해 소통을 꿈꾸는 「기억의 단편들」 작가 김승영은 「소통(communication)」과 「기억(memory)」이라는 테마를 인스털레이션이나 사이트 스페시픽작업(site specific work)으로 연출해왔다. 숲에서 거두어 온 무수한 낙엽들로 전시장을 메우고 그 한가운데에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연출하는 전시 공간. 작가개인의 삶을 공유하거나 스쳐간 인명들이 자막으로 흘러가는 영상 등 그의 작품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찰나적 만남과 기다림, 망각과 기억 속에 위치한 살아있는 존재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연출한다. 과거와 현재,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고정 관념화 된 경계를 허물고 時ㆍ空間의 접점과 미끄러짐 사이에서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의 감응기재가 온전히 작동하여 세계와 만나게 되는 희열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 초대받은 관객은 물질과 물질의 찰라적 만남과 기다림, 미끄러짐 사이의 여백과 여운에서 존재들의 내밀하고 근원적 가치들과 대화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를 제시하는 미술의 지표를 넘어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일상의 문맥에서 벗어나 art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지, 또 그 아크가 우리의 삶에 있어 어떠한 기능과 가치로 작동하는 지를 자명하게 드러내 준다.
일상의 상품이나 사물을 미술담론(discourse)의 장(field)에 들여와 본래의 문맥을 비틀거나 잘라내어, 현대미술의 계보를 형성해 온 것은 다다이스트와 쉬르리얼리스트, 팝아티스트 들 사이에서 흔하게 채용되어 온 기법이다. 그들의 작업에 관류되고 있는 수법은 일상의 관용화 된 산물들-당대의 신지식과 신기술에 의한 산업사회의 레디메이드-을 담론의 미디어로 차용하여 조크나 냉소적 패러디를 부가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충격효과를 발신하는데 목표를 맞추고 있다. 그것은 서구의 이성 중심적 가치관에 기초한 미술담론의 장에서 형성된 진보주의 미술사관의 성과들이었다.
그러나 김승영 의 일상으로부터의 변용과 새로운 차원의 연출효과는 그것들과 부분적으로는 세계를 공유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지평을 달리한다. 그의 작업은 소비 산업자본주의 산물을 차용하더라도 그 산업사회의 일상적 표피나 관용구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차용된 일상은 도시생활에서의 일상을 빌려오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일탈하고자 찾아 간 고즈넉한 산사에서나 문득 발견하게 되는 생명의 비의(秘意)와 문화적 자취들을 불러들인다.
바위틈새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름 모를 초목들이나 풀벌레들의 존재에서 발견하는 신선한 생명의 존엄성과 존재의 불가사의, 유적들의 잔허(殘墟)가 환기 시켜주는 인간 삶의 자취나 문화적 기억들의 무게와 의미들을 소생시켜 주는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의 명징함과 처마 끝 풍경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거기에는 도시의 바쁜 일상과 기계소음 속에 잊혀 지고 소모되고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지각기재들- 우리의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을 다시 건강하게 소생시켜주는 마술이 펼쳐지고 있다. 그것은 시각적 진실이나 미술이란 존재의 물질적 규명에만 몰두하던 근대미술담론이나, 온전한 감각기재의 균형을 되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마샬ㆍ맥루언 식의 전자기술시대에 안이하게 편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승영의 작품세계에는 문명과 자연, 이성과 감성, 이지와 지각세계가 분별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존재의 이법과 지혜에 눈뜨게 하는 현자의 메타포가 빛나고 있다.

김영순 (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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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바벨

  유행의 빠른 물살을 타고 있는 오늘의 미술계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졌고 그만큼 흥미진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일관적 주제에 대한 진중하고 꾸준한 접근이 적어져 대단히 소모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전시들과 매년 출현하는 새로운 작가들의 홍수 속에서 개념과 스펙타클이 넘치지만, 정작 두뇌와 망막 이상을 건드리는 감상의 경험은 드물다. 자칭 진정성 있는 작업에서는 종종 개념이나 형식의 진부함이 발견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옛 노래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많으니 뾰족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중견 작가들의 적정한 역할이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김승영의 개인전은 주목할 만했다. 신진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중견 작가의 관록과 더불어, 작가가 오랜 동안 일관적으로 모색해왔던 기억과 소통에 대한 주제의 현대적 진화를 함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김승영이 근간 그룹전이나 오픈 스튜디오 등을 통해서 발표했던 여러 작업들의 맥락을 한 장소에 모아 볼 수 있음으로써, 그의 최근 작업을 이루는 주제의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최근 해외에서 스트라스부르그와 밴쿠버에서 개인전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웨이방갤러리와 공간화랑 등에서의 개인전이 있었지만, 여러 작품들의 상호관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내 개인전의 형태는 2003년 해이리에서의 전시 이후 실로 오랜만에 열린 셈이다. 흡사 작은 회고전과 같았던 이번 전시에서는 사운드, 설치, 영상, 조소 작업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는데, 특히 1층의 공간을 지배하는 스피커 설치 작업이 눈에 띄었다. <Tower>이라는 이름의 이 작업은 각기 다른 186개의 중고 스피커를 높은 천장까지 쌓아 올려서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조형물을 이루었는데, 각각의 스피커에서는 사운드 아티스트 오윤석이 디자인한 음향이 흘러 나온다. 2007년 웨이방갤러리 전시에서 첫 시도된 사운드 설치 작업 이후, 김승영은 음향으로 형성되는 입체적 공간과 그 안에서 관람자가 공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작품 개념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2009년 기무사에서의 「플랫폼」전시에서 볼 수 있던 벽면을 활용한 스피커 설치 작업 <벽>도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작업들은 사운드 아트에 대한 최근의 유행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매체나 쟝르 실험 자체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김승영이 모색해온 일관된 주제의식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정확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2010년 공간 해밀턴에서의 「사운드 이펙트 서울」전에서 볼 수 있었던 김승영의 사운드 설치 작업 <쓸다>의 경우, 전시장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만이 공간을 꽉 채우며 공명되고 있었다. 소리는 빈 공간의 질감을 풍성하게 부각시키면서, 그 독특한 장소에 누적되었을 과거의 알 수 없을 사건들과 개인의 역사들을 상상하게 했다. 물건이나 사건의 부재가 오히려 공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드러내준 것이다. 비질하는 소리는 과거의 온갖 잔재들을 깨끗이 비워내는 정화의 의식처럼 느껴져서, 번잡한 일상으로 지친 스트레스도 쓸어내려지는 기분이었다. 축적하는 것이 아닌 버리는 것의 미학을 보여준 이 작품은 더없는 담백함으로 필자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사운드 설치작업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공(空)’이라는 것은 김승영의 작업의 근저를 이루는 미학이다. 생성과 공존하는 소멸에 대한 의식, 무위(無爲)가 무한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사유가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비나미술관의 이번 전시에서 시선을 끌었던 또 다른 작품인 <Strasbourg>는 레지던시 체류 중에 발견한 장면을 기록한 영상작업으로, 소멸의 무상함과 시간의 오랜 축적이 만들어내는 힘이 느껴지는 폐허의 장소를 찍은 것이다. 허물어진 시멘트 벽 앞에는 비둘기 시신의 잔해가 있고, 그 옆에 상품 선전을 위한 광고판 이미지가 무심하게 돌아간다.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이 교차되는 함축적인 장면이다. 쟝 그르니에는 「공(空)의 매혹」에서 “누군가 나에게 세상의 덧없음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세상이 비어있음을 경험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르니에의 산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김승영의 <구름>은 ‘무(無)’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의 중력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삶이 드러나는 상태임을 이야기하는 듯, 끝없이 변화되고 생성되는 구름의 움직임을 통해 무상한 동시에 충만한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다. 
 자연 풍경은 김승영의 작품에서 종종 사유의 출발점이 되어왔다. 초기 작업에서 종종 등장하는 <reflection>이라는 제목은 그가 자주 사용했던 물, 빛, 그림자와 같은 자연적 요소를 활용한 ‘반영’ 혹은 ‘투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반추하는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2003년 해이리에서의 설치 작업 <기억의 방>에서는 이와 같은 자기 성찰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낡은 책장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고요한 수면 위에 물방울이 일정하게 떨어져 소리가 공명되도록 설치된 이 작업은 고요한 산사에서나 느낄법한 침묵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서의 침묵은 단지 소리의 부재 현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정지 상태이다.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원형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는 순간인 것이다. 김승영의 작품은 자연 속에서의 인식과 무한과의 소통과도 같은 순간의 현전을 불러오기 때문에, 자기 성찰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관람자의 경험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잔잔한 수면에 파동을 남기는 규칙적인 물소리는 이른 새벽 산사의 목탁 소리에서 누구나 느끼는 감성과도 같은,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내적 체험으로 관람자를 인도해준다.       
 김승영의 지난 작업들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의 관조에서 자기 성찰로, 성찰에서 타인과의 소통으로 점진적인 주제의 이행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 중 <의자>는 실제 작가의 어머니가 추운 겨울 사용했던 전열 의자를 활용한 작업으로, 실제 앉을 수 있는 작품이며 의자에 앉았을 때 인간의 적정 체온인 37°에 맞게 따뜻한 온도가 전해진다. 현대미술 전시를 보다 보면 난해한 작품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적 지성을 온통 동원하면서 곧잘 신경이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너무도 쉽고 평온한 이 작품 위에 앉아 있노라니 긴장이 풀려서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김승영의 작업이 정서적으로 반응이 빠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게 감상적이 되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개인의 센티멘탈한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고독한 개체로서 살아가는 인간 조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벽면과 스피커를 활용한 최근의 사운드 설치 작업들은 개인적 기억보다 좀 더 보편적인 소통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바벨탑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바벨은 서로 다른 언어들로 인해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 대한 은유이지만, 김승영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있는 스피커들의 음성들이 혼재시키면서 탈코드화된 또 다른 차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언어는 심장박동, 신호음, 새의 날개짓 소리 등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하나의 소리 형태로서, 제도적인 언어의 범주가 아닌 인간의 감각과 영혼만으로도 충분히 수신과 발신이 가능한 추상적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웨이방갤러리의 전시 작품 <Hello>에서 음향으로 활용된 것은 아들에게 자장가처럼 글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는데, 중요한 것은 말하는 내용 보다도 어린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낮고 다정한 음성, 자장가의 일정한 리듬과 같은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수많은 스피커가 쌓여있는 작품 <Tower> 앞의 관람자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리는 듯한 음향들을 듣는다. 불규칙한 소리들의 교차 앞에서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흡사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쌓여있는 고대의 사원 벽 앞에 선 것처럼 제도적 언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을 거대한 삶의 서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삶’이란 나의 삶 혹은 너의 삶으로 구분할 수 없는 영역으로, 생명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다. 이 원형적 삶 안에서 인간들은 개체인 동시에 공유된 존재이다. 그 안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언어가 다른 이들끼리의 소통도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김승영이 원하는 미래의 바벨, 뉴미디어 시대의 바벨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은주 (독립 기획자,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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