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벨
유행의 빠른 물살을 타고 있는 오늘의 미술계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졌고 그만큼 흥미진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일관적 주제에 대한 진중하고 꾸준한 접근이 적어져 대단히 소모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전시들과 매년 출현하는 새로운 작가들의 홍수 속에서 개념과 스펙타클이 넘치지만, 정작 두뇌와 망막 이상을 건드리는 감상의 경험은 드물다. 자칭 진정성 있는 작업에서는 종종 개념이나 형식의 진부함이 발견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옛 노래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많으니 뾰족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중견 작가들의 적정한 역할이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김승영의 개인전은 주목할 만했다. 신진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중견 작가의 관록과 더불어, 작가가 오랜 동안 일관적으로 모색해왔던 기억과 소통에 대한 주제의 현대적 진화를 함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김승영이 근간 그룹전이나 오픈 스튜디오 등을 통해서 발표했던 여러 작업들의 맥락을 한 장소에 모아 볼 수 있음으로써, 그의 최근 작업을 이루는 주제의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최근 해외에서 스트라스부르그와 밴쿠버에서 개인전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웨이방갤러리와 공간화랑 등에서의 개인전이 있었지만, 여러 작품들의 상호관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내 개인전의 형태는 2003년 해이리에서의 전시 이후 실로 오랜만에 열린 셈이다. 흡사 작은 회고전과 같았던 이번 전시에서는 사운드, 설치, 영상, 조소 작업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는데, 특히 1층의 공간을 지배하는 스피커 설치 작업이 눈에 띄었다. <Tower>이라는 이름의 이 작업은 각기 다른 186개의 중고 스피커를 높은 천장까지 쌓아 올려서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조형물을 이루었는데, 각각의 스피커에서는 사운드 아티스트 오윤석이 디자인한 음향이 흘러 나온다. 2007년 웨이방갤러리 전시에서 첫 시도된 사운드 설치 작업 이후, 김승영은 음향으로 형성되는 입체적 공간과 그 안에서 관람자가 공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작품 개념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2009년 기무사에서의 「플랫폼」전시에서 볼 수 있던 벽면을 활용한 스피커 설치 작업 <벽>도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작업들은 사운드 아트에 대한 최근의 유행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매체나 쟝르 실험 자체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김승영이 모색해온 일관된 주제의식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정확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2010년 공간 해밀턴에서의 「사운드 이펙트 서울」전에서 볼 수 있었던 김승영의 사운드 설치 작업 <쓸다>의 경우, 전시장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만이 공간을 꽉 채우며 공명되고 있었다. 소리는 빈 공간의 질감을 풍성하게 부각시키면서, 그 독특한 장소에 누적되었을 과거의 알 수 없을 사건들과 개인의 역사들을 상상하게 했다. 물건이나 사건의 부재가 오히려 공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드러내준 것이다. 비질하는 소리는 과거의 온갖 잔재들을 깨끗이 비워내는 정화의 의식처럼 느껴져서, 번잡한 일상으로 지친 스트레스도 쓸어내려지는 기분이었다. 축적하는 것이 아닌 버리는 것의 미학을 보여준 이 작품은 더없는 담백함으로 필자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사운드 설치작업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공(空)’이라는 것은 김승영의 작업의 근저를 이루는 미학이다. 생성과 공존하는 소멸에 대한 의식, 무위(無爲)가 무한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사유가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비나미술관의 이번 전시에서 시선을 끌었던 또 다른 작품인 <Strasbourg>는 레지던시 체류 중에 발견한 장면을 기록한 영상작업으로, 소멸의 무상함과 시간의 오랜 축적이 만들어내는 힘이 느껴지는 폐허의 장소를 찍은 것이다. 허물어진 시멘트 벽 앞에는 비둘기 시신의 잔해가 있고, 그 옆에 상품 선전을 위한 광고판 이미지가 무심하게 돌아간다.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이 교차되는 함축적인 장면이다. 쟝 그르니에는 「공(空)의 매혹」에서 “누군가 나에게 세상의 덧없음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세상이 비어있음을 경험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르니에의 산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김승영의 <구름>은 ‘무(無)’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의 중력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삶이 드러나는 상태임을 이야기하는 듯, 끝없이 변화되고 생성되는 구름의 움직임을 통해 무상한 동시에 충만한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다.
자연 풍경은 김승영의 작품에서 종종 사유의 출발점이 되어왔다. 초기 작업에서 종종 등장하는 <reflection>이라는 제목은 그가 자주 사용했던 물, 빛, 그림자와 같은 자연적 요소를 활용한 ‘반영’ 혹은 ‘투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반추하는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2003년 해이리에서의 설치 작업 <기억의 방>에서는 이와 같은 자기 성찰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낡은 책장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고요한 수면 위에 물방울이 일정하게 떨어져 소리가 공명되도록 설치된 이 작업은 고요한 산사에서나 느낄법한 침묵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서의 침묵은 단지 소리의 부재 현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정지 상태이다.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원형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는 순간인 것이다. 김승영의 작품은 자연 속에서의 인식과 무한과의 소통과도 같은 순간의 현전을 불러오기 때문에, 자기 성찰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관람자의 경험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잔잔한 수면에 파동을 남기는 규칙적인 물소리는 이른 새벽 산사의 목탁 소리에서 누구나 느끼는 감성과도 같은,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내적 체험으로 관람자를 인도해준다.
김승영의 지난 작업들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의 관조에서 자기 성찰로, 성찰에서 타인과의 소통으로 점진적인 주제의 이행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 중 <의자>는 실제 작가의 어머니가 추운 겨울 사용했던 전열 의자를 활용한 작업으로, 실제 앉을 수 있는 작품이며 의자에 앉았을 때 인간의 적정 체온인 37°에 맞게 따뜻한 온도가 전해진다. 현대미술 전시를 보다 보면 난해한 작품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적 지성을 온통 동원하면서 곧잘 신경이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너무도 쉽고 평온한 이 작품 위에 앉아 있노라니 긴장이 풀려서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김승영의 작업이 정서적으로 반응이 빠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게 감상적이 되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개인의 센티멘탈한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고독한 개체로서 살아가는 인간 조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벽면과 스피커를 활용한 최근의 사운드 설치 작업들은 개인적 기억보다 좀 더 보편적인 소통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바벨탑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바벨은 서로 다른 언어들로 인해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 대한 은유이지만, 김승영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있는 스피커들의 음성들이 혼재시키면서 탈코드화된 또 다른 차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언어는 심장박동, 신호음, 새의 날개짓 소리 등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하나의 소리 형태로서, 제도적인 언어의 범주가 아닌 인간의 감각과 영혼만으로도 충분히 수신과 발신이 가능한 추상적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웨이방갤러리의 전시 작품 <Hello>에서 음향으로 활용된 것은 아들에게 자장가처럼 글을 읽어주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는데, 중요한 것은 말하는 내용 보다도 어린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낮고 다정한 음성, 자장가의 일정한 리듬과 같은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수많은 스피커가 쌓여있는 작품 <Tower> 앞의 관람자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리는 듯한 음향들을 듣는다. 불규칙한 소리들의 교차 앞에서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흡사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쌓여있는 고대의 사원 벽 앞에 선 것처럼 제도적 언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을 거대한 삶의 서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삶’이란 나의 삶 혹은 너의 삶으로 구분할 수 없는 영역으로, 생명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다. 이 원형적 삶 안에서 인간들은 개체인 동시에 공유된 존재이다. 그 안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언어가 다른 이들끼리의 소통도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김승영이 원하는 미래의 바벨, 뉴미디어 시대의 바벨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은주 (독립 기획자,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