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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조, 대산미술관

출생

1970, 서울

장르

회화, 사진, 미디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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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눈물, 2011

라이트박스, 색상변환, 154 x 1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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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조: 순결한 아이들

박대조는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차가운 미디어 세상과 그보다 더 거대한 환경을 얼마간의 비애감을 담아 보여줌으로써 강렬한 감정을 유발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작가다. 그는 아이들의 사진 위에 채색작업을 한다. 일종의 지옥도 속에 있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표현수단을 결합하는 것이다.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진지한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그가 광범위하고 철학적인 현실의 비전에 집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그와 같은 세대의 다른 중견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직면해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아우른다.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과 뒤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 양상을 전제로 삼는다. 또한 작품들이 지닌 표면적인 우아함을 보면 박대조가 꾸며낸 이미지의 매혹, 즉 비록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사진의 힘을 잘 알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이미지들은 보는 즉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동시에 그 안에 함축된 진지한 의미에 맞게 깊이 성찰해 볼만한 가치도 있다. 이것은 이 시대에 속한 작업이지만, 문제에 직면하고 또 도전하는 세계 속의 한국을 기록한 자료로 남을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사의 윤리적 기준 중 하나는 우리가 원자폭탄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관련이 있다. 원자폭탄이라는 사건 전후로 우리의 도덕적 논증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검은 스카프로 얼굴 아래쪽을 반쯤 가린 동양아이의 눈을 담은 사진작품 <쾅쾅(Boom Boom)>은 아이의 양쪽 동공 한가운데 그려진 핵폭탄 버섯구름만 아니라면 강렬한 순수성의 이미지일 것이다. 응시하는 눈빛 속에 죽음을 담고 있는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던지는 이 엄청난 무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진부한 이미지가 아니지만 분명 도발적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문학의 역사를 통해 아름다움과 죽음이 서로 연관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처럼 그 두 개념이 명백한 연결성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핵폭탄의 파괴성을 완곡하게만 표현하는 데 대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어린 소녀의 눈은 표면적으로는 아름답지만 고통의 영향으로 가득 찬 현실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는 아이의 얼굴이 지닌 빛나는 아름다움을 뒤엎는 엄숙함이 있다. 대대적인 파괴가 야기하는 끔찍한 결과를 고찰한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쾅쾅(Boom Boom)>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도시에서 자란 아이(A City-Bred Child)>는 다양한 표현수단을 사용하여 소녀의 눈과 머리카락을 담은 투명양화 이미지이다. 이 작품 속 소녀도 얼굴 아래쪽을 천으로 가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밝은 초록색의 정사각형들이 얼굴 위쪽을 구성하고 있으며 <쾅쾅(Boom Boom)> 시리즈보다 단순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효과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 소규모 연작은 분명히 위험을 내포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시각적 표현도 구현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깨어진 동심(Broken Heart)>은 대리석에 음각을 한 후 아크릴 채색한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점점 짙어져서 몇 군데는 검은색에 가깝게 표현된 초록색으로 완성되었으며, 이미지의 표면 전체에 걸쳐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표현된 일련의 선으로 이루어진 양식적 배치를 보이는 강렬한 작품이다. 유려한 기법의 측면에서도,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라는 면에서도 역작이라 부를만한 이 작품은 아이들의 존엄성과 영적 가치가 여전히 작가에게 강력한 흥미를 유발하고 있으며 그의 예술적 관심사 중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포괄적으로 볼 때 그의 모든 작품 이미지에는 사진에 나타난 표면적인 부드러움의 이면에 우리가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눈치챌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심오한 목적과 진지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진지한 목적 의식은 모든 생명을 지극히 존중하는 불교와 박대조를 연결해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 본인도 언급하듯이 작품 속 이미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다루고 있다. 앞서 설명한 작품들에서 작가는 상상력의 틀 속에 이미지를 가둔다. 그렇지만 익히 알려진 대재앙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쉽사리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어린 한국인 소녀의 응시는 재앙의 경험을 주로 도덕적 측면에서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작품을 보는 이들이 여자 아이의 눈을 통해 대량학살을 떠올리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는 역사적 경험의 실상과 대면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버섯구름을 찾는 모순성이 존재하지만 아이의 얼굴 표정은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이미지가 피상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개념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박대조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리얼리즘을 통해 작품은 유형의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지고 이 존재감은 아이의 순진무구함뿐만 아니라 원자폭탄의 지독히도 잔혹한 폭력성을 내비친다. 그 결과 작가는 경험의 편에 서서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우리가 애써 부정하는 사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같이 잔혹함에 가까운 리얼리즘이 선호되는 것을 보면 악의적인 사건과 뇌리를 떠나지 않는 순결한 아이들의 모습을 대비시킬 때조차도 파괴적 충동을 묘사하는 데 몰두하는 작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택의 길은 뚜렷하다. 우리의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상태 그대로 자라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을 죽음과 파괴로 내몰 것인가. 예술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술이야말로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다루는 광범위한 주제가 오로지 결백성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삶의 단면인 폭력성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박대조는 윤리적 유죄를 인지하고 우리를 에워싼 문제를 조명하는 이야기를 소소한 광경에 담아 보여준다. 아름다움과 폭탄을 결합하여 윤리적 전복을 꾀하는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죄업을 보여준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아무리 정직하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에 아무리 감동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지닌 잠재적 폭력성에 정면으로 대처해야 한다. 박대조는 아름다움을 동지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삼켜야만 하는 쓰디쓴 약을 달콤하게 만든다. 우리가 여전히 그대로라 해서 이를 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조나단 굿맨 Jonathan GOODMAN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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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순수

박대조는 자연과 함께 삶에 존재하는 여러 사건들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의 인물화를 만들어 낸다. 달리 말해서 그는 삶을 관통하는 가파른 언덕에서 고통 받고 있음에도 아이들을 통해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연을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해 보이는 이 아이들은 그들의 눈동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독, 상실과 고통의 상처들을 견뎌내고 있다. 박대조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몰이성적 욕구로 인해 우리의 자연이 훼손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가 묘사한 사진 속 모델은 삶의 토대뿐만 아니라 삶 자체의 의미를 묻는 실존적인 순간을 그린 은유이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와도 관련이 있으며, 우리의 목적론적인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며 우리가 우리의 손에서 세속적인 욕구를 놓기 전까지 인류는 계속 고통 받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포용한 것이다. 불교의 교리를 가까이 접하며 성장한 그는 자연과 함께 오롯이 선다는 것을 강조하는 도교적 믿음을 불교 교리와 융합하였다. 그의 작품과 에세이들은 이러한 그의 두 종교철학에서 기인한다. 박대조는 자연을 존중하며 살아야한다고 믿는 노자와 장자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것은 종교로 귀의하고자 하는 의도라기보다는 조화로운 자연의 혜택을 강조하는데 역점을 두는 실천철학으로서 환경에 대한 진정한 염려를 생겨나게 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오존층파괴, 수질 및 토양오염이나 핵은 우리 선조 때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들이었다.

DOS의 디지털 언어와 사진을 결합시킨 랄프 윌츠회퍼(Ralph Ueltzhoeffer)의 텍스트 포트레이트(Text-portrait)와 달리 박대조는 돌이라는 자연적 재료위에 아이들의 사진을 옮겨 놓는다. 그는 모든 색이 하나에 포함되고, 자연으로의 회귀처럼 다른 색에서 부재하는 모든 색을 표현하기 위해 보통 단색이나 흑백을 사용한다. 인간은 죽고 나서 자연의 일부로 환원된다. 박대조에게 돌은 인간의 시간이 아로 새겨져있는 자연의 연료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순수한 아이들의 초상으로서 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 노력한다고 볼 수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처럼 박대조는 인물사진 기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리히터는 사진 속 주인공들을 매체에 등장하는 사람들, 실제 혹은 상상 속의 사람들로 변형시킨다. 이 두 아티스트는 예술 매체의 스탠다드한 모델에 도전하면서 인물사진의 정의를 넓혀오고 있다. 박대조의 작품은 회화와 사진분야에 걸쳐있는 리히터의 작품과 유사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조각이라는 장르를 받아들이면서 경계를 확장시켰다. 그는 이미지가 그려진 돌을 자르거나 깎는다. 그의 2008년작 Binarity 2에서 볼 수 있듯이 돌에 새겨진 그리드나 층들은 얼굴을 한줄기 빛처럼 만든다. 리히터는 사진위에 바로 유화물감으로 채색하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박대조는 독창적인 재료들로부터 만들어지는 우연한 점, 균열 등을 즐긴다. 2009년 와일드 플라워 시리즈에서 그는 토파즈 오닉스를 채색하고 새긴다. 그는 이미지 뒤에서 밝히는 빛이 통하는 돌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향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진의 시작은 회화와 논쟁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이러한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수단 간의 대화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사진에서는 하나의 표현으로서 또는 회화에서 포토리얼리즘으로서 비주얼 언어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 두 장르는 서로 이종결합(cross-pollinate)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사진은 표현수단의 경계를 넘나들고, 풍부한 대화로 나아기기 위해 오랜 제약들에 저항해오고 있다. 서울의 상명대학교에서 수학한 박대조는 이러한 컨셉들로서 표현된 그의 작품들에 서양철학을 포함시킨다. 그는 아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암시하고, 삶으로 이미지들을 끌고 온다.

탈리아 브라호플러스 Thalia Vrachopoulos (전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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