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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영, 스페이스몸 미술관

출생

1973,  

장르

회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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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망, 1999

캔버스에 유화, 181.8 x 22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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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영의 회화: 건축적 공간과 시간성의 '흔적'

정보영의 작업은 1997년부터 현재까지 회화라는 매체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해왔다. 그의 그림에는 ‘빛'이 지배적으로 등장하며, 이와 더불어 건축적 공간, 풍경이나 정물 등과 같은 재현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정보영은 서구의 시각체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구축했던 원근법과 바로크 미술의 특징인 키아로스큐로(Chiaroscuro)와 연극성을 수용했지만, 작가가 10년 넘게 구축해온 회화적 공간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빛이나 연기, 대기 등의 '흔적'을 캔버스와 붓을 이용해 지표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찰나에 존재하는 빛은 정보영이 표현하는 '시리즈'를 통해 영속적인 모습으로 '여기,' '이곳'에 위치한다. 
정보영은 형상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려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한 대상에 대한 관찰과 '응시'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가 그려내는 시간성이란 선적(linear)인 관점이 아니라 순환적인 관점이며, 비가시적인 시간과 빛을 '붓'을 통해 심리적으로 밀도 있게 구현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을 연상시키는 회화 연작들은 대개 사건이나 빛의 추이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정보영은 이러한 변화를 즉물적으로 단계화시키지 않고, 화가의 눈과 마음을 통해 '재해석'된 궤적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컵에서 엎질러진 물을 포착한 <나뉘어지다>(2004)는 무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연속적인 동작 사진처럼 엎질러진 순간이라는 사건을 시간적으로 배열하는 작품이다. 그림과 그림 사이의 행간을 읽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2001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최된 정보영의 개인전은 ‘여기/지금’이라는 관점을 강조한 전시였다. 특히 이 전시는 빛의 흐름에 따른 시간성을 느끼게 해주어 작가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 역할을 했다. <어두워지다>, <한계지어지다>, <겹쳐지다>, <보다 밝은, 보다 어두운> 등은 시간성이 회화적 공간에서 ‘기록’되어 있는 변화를 보여주는 주요 작품들이었다.
2009년 갤러리 인과 2011년 스페이스 몸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정보영은 과거에 비해 화가의 응시가 주축이 되어 빛과 어두움이 투영된 건축적 실내외 공간을 많이 다뤘다. 이러한 작업들은 사물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글쓰기에 비유될 수 있다. 즉, 정보영의 작업은 개념미술가인 카와라 온(Kawara On)이 검은 화면에 오늘의 날짜를 써 둔 '날짜그림' 연작을 연상시킨다. 카와라의 날짜그림들은 ‘연작’이 서로 함께 모였을 때에만 완전한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이러한 작품들은 관람자들에게 연속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하고 시간성을 축적한다.
물론 카와라와 달리, 정보영은 물이나 불과 같은 일시적인 변화의 속성을 지닌 모티브를 사용하여 삶에 있어서 알레고리적인 측면을 부여하며, 여기서 작가는 빛과 공간의 대화를 전달하는 이중적인 화자(畵者/話者)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정보영이 다루는 건축적 공간은 '시간화된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의 회화에서 재현된 건축물은 투시도법에 의해 단정하게 배열된 환영적 공간이 아닌, 작가의 말대로 "일종의 '피부'와 같은 살아있는 공간"을 표현한다. 여기서 물과 불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정형적인 요소를 띠며, 물과 불의 흔적은 지표적인 특징으로 존재한다. 같은 이유로 정보영은 건축물의 얼룩, 촛불, 의자, 테이블, 조명등, 한옥 문, 고가구 등과 같은 모티프를 사용해 사물의 경계를 모색하며, <바라보다>, <흐르다> 등에서 침묵과 빛의 교감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흔적은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를 그린 그림들과 이 두 공간이 만나는 창문에서 빛이 변화하는 양상을 그린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정보영 스스로 "내 작품에서 이 소재들은 부재를 지시하는 '지표'로 기능할 뿐 '도상'으로서의 기호는 아니다. 각각의 소재들은 부재를 지시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 자체가 대상의 사라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냄과 동시에 사라짐을 지시"한다고 논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차적 행위는 화가가 모방의 논리를 따라 사물과 가장 닮은 방식으로 이미지를 '재현'해왔다. 이러한 측면은 실제의 사물과 캔버스 속의 이미지가 서로 닮은 도상을 구현하는 것이었고, 이는 회화가 과거의 역사를 통해 끈질기게 고민해오던 과정이었다.
그러나 정보영은 회화가 가진 닮음의 과정을 벗어나 '지표'라는 용어를 통해 사진과 그림을 연계시켜나간다. 사진에서 지표성은 흔적, 연기, 자국, 그림자, 얼룩 등으로 실체의 물리적인 존재를 지시해주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나의 지문이나 X-ray도 가장 지표적인 흔적이다. 이 둘은 내가 부재해도 나의 존재를 알려주는 '흔적'이고 기호들이다. 특히 지문은 나의 신원을 지시하는 기호다. 이 점에서 정보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흔적과 얼룩은 부재하는 실체를 매개해주는 기호 역할을 한다.
정보영의 그림 그리기는 일차적으로 사물을 카메라 렌즈에 담는 작업으로 출발하며, 이러한 과정이 그림으로 옮겨지는 순간, 부재하는 실체들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지표화된다. 그림 속의 공간과 정물은 붓으로 포용되고 다듬어지며, 형태의 윤곽선은 용해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주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재현의 논리나 원근법의 논리, 혹은 회화의 내적 논리로만 풀 수 없는 층위들을 정보영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보영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카메라를 이용하여 같은 공간을 끊임없이 찍어나간다. 그러나 그는 특정 공간이 지닌 장소의 개성이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공간 속에 축적된 빛과 공기, 비가시적인 요소들의 힘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작가는 빛이라는 비물질화된 요소를 그림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문의 프레임이나 실내에 놓인 가구 등을 사진 프레임 안에서 끊임없이 재배치하여 실내공간에 심리적인 잔상이 감돌도록 변화시킨다. 그림 속의 이미지는 정적으로 멈춰있지만, 이미지의 잔상은 관람자의 마음속에 계속 맴돈다.  
그의 작업에는 인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의자로 대변되는 주체의 시선은 빈 공간에서 긴장감과 안도감을 부여하는 이중성을 띤다. 작가는 디지털 사진이 대두하기 전에도 사진을 통해 드로잉적인 사전작업을 시도했으며 방대한 작업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일종의 포토폴리오를 만들었다. 이는 정보영이 장시간 구축한 공간연구 그리고 시간연구를 입증해주는 도큐먼트, 혹은 아카이브다. 이러한 사진들을 살펴보면 작가는 한 공간을 끊임없이 관찰한 후, 창문의 틀, 벽, 문턱 등 수직과 수평으로 나오는 선들을 화면 안에서 구축한다. 세 단계에 걸친 장시간의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회화의 그리드는 사라지고, 공간은 아련하게 감도는 ‘색'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보영은 1997년 ‘재현에 대한 다층적 접근’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개최하면서 공간연구를 본격화했다. <대상에의 반복 충동>을 비롯해 <‘사물'에의 의지>, <두 개의 공간에 대한 바로크적 상상>, <죽음에 관한 두 개의 풍경> 등을 통해 북유럽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극도의 사실적인 요소뿐 아니라 바로크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연극성과 알레고리적인 해석 등을 거침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이는 사물에 대한 단순한 모사나 재현이 아니라는 점을 작품제목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작가가 반복해서 그리는 캔버스, 모과, 거울, 천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회화적 재현을 통해서 작가가 도달할 수 없는 실재를 ’그림을 그리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서 제시한다. 작가의 말대로 "화가는 욕망이라는 재현의 형태로 ...그림을 만들어내지만 실은 그림이 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2004년 이후의 작품에서 주로 보이듯이, 건물의 안팎을 보여주는 건축적 공간은 작가의 심리적 추이와 시간적 추이를 공간속에서 풀어주는 ‘기호’로 작동한다. 결국 정보영의 근작들에 나타나는 이러한 건축물은 공간 속에 비가시적으로 존재하는 '힘'을 지표화하는 것이며, '부재'의 흔적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숙고하는 사유과정을 구축한다. 

정연심 (미술비평/전시기획, 홍익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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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숭고의 경계 - 정보영의 근작들

1.
회화가 공간예술이면서 공간 자체를 직접 다룬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서구의 경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떠나 근대 미술에서 이러한 전통의 맥을 찾기란 쉽지 않다. 왜 그럴까를 생각하게 된다. 모더니즘의 사조가 등장하면서 회화는 본질적으로 2차원 평면이라는 것과 이를 준수하는 한에서만 예술이라는 ‘그린버그의 필요충분조건’이 공간전통의 맥을 차단하는 족쇄의 역할을 했던 게 틀림없다. 도상들이 가져야 할 3차원 자질들을 2차원으로 환원해야 했던 사정은 물론, 무엇보다 지구촌의 주축국가들이 이에 동조했던 게 주요 원인이었다. 이제는 이 금기를 깨트려야 할 때인데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을 찾아 나서는 과감한 실험을 찾기가 어렵다. 이를 여전히 막고 있는 이유들이 있다는 뜻이다.
매체에 대한 몰입(?)이 이를 가로 막고 있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1980년대 이후 ‘매체의 시대’를 맞으면서 공간에 대한 사유실험이 절하되어었던 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양자론과 우주론이 가져온 공간에 대한 ‘다차원 사유’는 한없이 개화되고 있다. 미술계는 목전의 것에 눈이 멀어 공간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 매체에 의한 이미지들의 회화는 우후죽순처럼 번창하고 있는 반면, 공간에 대한 회화적 탐구는 너무나 미진한 채 있다. 공간 탐구가 이미지의 재생산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보영이 십수년 여를 공간에 대한 회화적 사유실험을 지속해오고 있는 데 즈음해서 이 말을 하는 건, 그녀를 위해서는 아주 시의적절한 게 아닐까싶다. 1997년 첫 개인전(한전프라자) 이래, 정보영은 대상물 내지는 사물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이것들을 ‘공간을 빌려’ 접근하는 발상을 반복해오고 있다. 초기에는 라캉의 ‘거울’의 개념을 등장시켜 공간의 형이상학을 실험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공간의 죽음, 1996>, <두 개의 공간에 대한 바로크적 상상, 1997>, <안으로부터, 1997>, <밖으로부터, 1997>를 시작으로, <깊은 공간으로부터, 1998>, <일시점에 의해 고안된 완벽한 공간, 그것의 열림, 1999>, <현재를 비켜가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공간, 2000>을 거쳐, <한계지어지다, 2001>, <나누어지다, 2003>, <가까워지다, 2003>, <방문, 2004>, <바라보다, 2005>, <밝은 방, 2005>, <머물다, 2006>, <바라보다, 2007>, <바라보다, 2008>, <함께-속해-있다, 2009>, <바라보다, 2009>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들이 모두 공간 탐구의 계보를 줄기차게 전개시켰다.
일련의 작품들을 앞에 했을 때, 그녀의 회화사적 선례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리 르네상스시대 일베르티(Leon B. Alberti)의 ‘창’(window)이 떠오르는가 하면, 바로크 시대 베르메르(Jan van Vermeer)와 지난 세기 지오르지오 데 끼리코(Giorgio de Chirico)의 형이상학적 공간을 차례로 상기하게 된다. 한마디로 ‘일시점(一視點) 투시공간과 다(多)시점 투시공간을 허용하는 것 말고도 정신분석적 왜곡과 치환 등 그 녀의 공간실험은 다양한 면면을 중첩하고 있다. 이 시도는 작가가 특히 2007년 이후 빈번히 등장시키고 있는 <바라보다>라는 명제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기하적 실재로서의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바라보는’ 화자의 주체를 포함시킨 공간들에서 말이다. 따라서 공간들을 다차적으로 연계하면서도 앞서의 선례들과의 차별성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가 정보영의 주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
초기에서 최근까지 치열한 열정으로 전개해온 정보영의 작업세계를 일관하고 있는 건 그녀가 자신의 공간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다 위치시킨다는 거다. 그녀가 응시하고 이해하는 공간의 키워드는 이 점에서 알베르티의 그것이 결코 아니다. 알베르트의 공간이 보이는 것들의 경계라고 한다면, 정보영의 공간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계 쪽으로 상당히 편향해 있다. 여기에다 베르메르의 회화에서와 같은 밝음과 어둠의 교차를 강조한다든지, 데 끼리꼬의 형이상학적 공간을 추가함으로써 적어도 그녀의 공간은 다층적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어디에도 편승하고 있지 않다.
이 정황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境界)를 회화적으로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 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언급될 수 있다. 하나는 보이는 사물들을 그처럼 현전케 하고 존치시키는 동인의 측면이다. 이게 없어서는 사물들이 존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말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보는 건 사물들이지 공간은 결코 아니다. 굳이 공간을 본다고 한다면, 보이는 것들을 감싸는 ‘경계’라는 뜻에서다. 다른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이를테면 보이는 사물들에 가리어 있거나, 거기에 깊숙이 내재해있거나 초월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건 물론, 미생물이나 원자와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거나, 우주 같이 아주 큰 것들, 아니면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 등 미스터리한 것들을 포함한다.
정보영의 공간은 전자를 빌려 후자의 맥락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점에서 칸트와 리요타르(Jean?Francois Lyotard)의 해석을 빌리자면, 정보영은 ‘숭고’(崇高)의 경계를 붙잡는다. 그녀의 작품들이 베르메르가 그랬던 것처럼, 건축원근법을 사용하면서도 일부 기하학적 3차원 공간을 비틀어놓는다는 뜻에서는 물론, 이것들에다 ‘침묵’과 ‘빛’이라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개인적 동기들을, 흡사 끼리코가 그랬던 것처럼 투사함으로써 ‘숭고의 경계’로서 공간을 다룬다. 숭고의 경계는 공간과 주체간의 엄청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성난 파도’가 밀려올 때처럼, 예상할 수 없는 힘에 밀리는, 이를테면 자아의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계가 숭고다. 이를 ‘타자적’이라 하는 건 자아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공간과 주체간에 거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정보영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그녀의 사유주체의 시각적 등가물이 결코 아니다. 굳이 말해, 작가의 ‘몸주체’ 전체에 대응하는 ‘응시체’(凝視?)라고 할 수 있다. 응시체란 주제에 대해서 타자로서 근접해오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공간을 사유 공간으로서 간주할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이전의 불가사의한 세계의 것이다. 이 세계가 자아와 관련을 갖는 것은 겨우 자아의 내심(內心)에 저장되어 있는 무의식적 리비도가 육화된 ‘환상적 등가물’ 일 경우에 한해서다. ‘무엇에 응(凝)해서 본다’ 는 뜻의 응시는 ‘그냥 본다’ 라든가 ‘보기위해서 본다’라고 할 때의 ‘무관심적 시선’ 이 아니다. 철저하고도 뜨거운 관심으로, 말하자면 몰(沒)주체적으로 대상이나 공간에 관여하게 된다.
정보영의 공간은 일상의 사물들이 그 안에 정교하게 자리하는 알베르티의 공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신의 신화가 숨을 쉬는 공간이다. 그의 공간은 이를 위해 일찍이 존재했던,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물들을 빌리긴 하지만, 이것들이 한번도 그처럼 존재한 적이 없는, 이른 바 보이는 것들의 경계로부터 이것들을 이탈시킴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계에 존치시킨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계로부터 보이는 사물들, 이를테면 사과?의자?촛불?밝음과 어둠?실내외의 풍경, 미지막으로는 실내의 건축공간 전체를 다시 보게 한다. 숭고의 경계가 최종 이것이다.

3.
정보영이 그려내는 경계는 일찍이 데 끼리코가 1920년대에 제시했던, 그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보여주었던 ‘자아론적 경계’ 는 결코 아니다. 그 대신 ‘타자를 위한 경계’ 로서의 공간을 보이고자 한다. 쉽게 말해, 공간을 빌려 자신의 내심을 토로하는 게 아니라, 타자를 빌려 타자 안에서 타자와 더불어 숨쉬고자하는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 시간의 지속을 내재시키고 있는가 하면, 객체적 진실 같은 당당한 실재를 상기시키는 데가 있다.
이를 회화적으로 실험하는 방법론으로서 작가는 실내 건축공간을 빌리고 여기에 촛불을 도입한다. 옥외의 빛을 끌어들이고 어둠과 빛의 조합을 시도하는 것도 물론이다. 작품명제 <함께-속해- 있다, 2009>처럼, 자신이 응시하는 바를 촛불이나 실내건축 같은 당당한 크기와 질량을 갖춘 ‘사상’에다 투사하고 동일시함으로써, 타자와 자아가 공유하는 공간을 창출한다. 그녀의 <바라보다> 역시 자아와 타자가 ‘소속을 함께 하는’ 하나의 사건을 그린다. 내관(內觀)의 외화가 아니다. 관념의 증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실내건축에 드리운 어둠과 빛은 이것들이 촛불이나 태양, 나아가서는 전기불, 그 어느 것으로부터 광원을 빌린다 할지라도, 단순한 사유의 등가물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이자 객체의 자질을 갖는 빛이고 어둠이다. 이것들을 포용하기 위해 공간 매체인 실내 건축을 차용하였다. 간혹 옥외와 옥내를 연결하는 거대 풍경도 곁들이지만 말이다.
실내건축 공간은 단순한 생활공간을 보이려는 게 결코 아니다. 어둔 곳이나 밝음이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한 호젓한 의자는 작가가 앉았던 자리와 체취를 간직한 특수한 위치값을 간직하고 있다. 벽의 얼룩이 유난하고, 어두운 실내의 견고한 격자와 냉엄한 벡터 공간이 자아내는 무거운 분위기는 숭고를 시사한다. 외부로 통하는 창문과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와 외광의 풍경 모두가 엄연한 알베르티의 창을 상기시키면서도 타자적이다. 자아가 거기에 저항하면서 다가가야 할 숭고 그 자체다. 작가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다. 초는 불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빛 그 자체에로 다가가며,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어둠의 깊이를 더한다. 자신이 놓여진 건축물 바닥의 비정형의 얼룩들을 희미하게 밝히며 촛불은 자신에게 수여된 시간 만큼의 빛과 어둠 모두를 감싸안는다(작업노트, 2005). 여기서, 촛불, 어둠, 얼룩, 빛이라는 속성들은 모두 작가가 자신을 타자와 동일시하고자하는 건축공간의 객체적 성질이다. 작가는 이것들을 타자적 속성들로 내놓는다. 자신의 욕망의 품목들이면서 동시에 숭고와 타자적인 것들의 성질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근작들의 발아점이 이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보영은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추억을 되살린다. 더 적극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다차원 공간개념을 회화적으로 실현한다. 거대 3차원계에 감추어진 미시적 다차원계를 그린다. 이른 바, 멀티 디랙셔널 월드컨셉을 불러들인다.
애초 그녀는 초기작업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방향을 줄곧 추적해왔다. <두개의 공간에 대한 바로크적 상상, 1997>에서 시작해서 <현재를 비켜가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공간, 2000>을 거처, 근자의 <함께-속해-있다, 2009>와 <바라보다, 2009>에 이르기까지, 모순된 다자의 것들을 하나의 공간에 병존시켜 왔다. 사과나 인물, 의자와 같은 현존사물들을 모순된 공간의 와중에 현존시키는 한편, 이것들이 현전하는 미묘한 방식들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촛불과 전깃불, 창밖의 빛이나 빛의 정경들을 실내건축 안으로 투사시켜 실내공간이 의외의 빛과 어둠으로 채워지고 나눠지는, 이른 바 하나의 실내공간이 여럿의 정경으로 분리되고 병합되는 정황을 연출해왔다.
정보영의 ‘공간회화’는 겉으로 보아서는 알베르티와 베르메르를 병합하면서도, 이면으로 가면 갈수록 끼리코에서처럼, 모순과 현실의 전복가능성을 상기시킨다. 3차원의 재현인가 하면, 빛과 어둠을 빌려 단일소실점을 이간시키고 모순을 야기시킨다. 이것들을 빌려, 작가가 현실 가운데서 겪고 있는 억압과 트라우마를 투사할뿐 아니라 현실의 개조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이를 위해, 촛불의 명상을 통해서 공간을 사유하는가 하면, 이내 이러한 공간의 사유는 모순에 직면한다는 가설을 불러들인다. 전후가 꼬여 하나가 되고 전체를 이루는 방식을 빛과 어둠의 교점에다 존치시킨다. 이 순간이야 말로 작가가 화자(話者)의 주체로서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작가는 자신을 화자(話者)로서 보다는, 단지 화자(畵者)로 돌아가 침묵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사유하는 데 전심한다. 이것이 그녀의 매력이다.

 

김복영 (미술평론가, 철학박사?숙대 조형예술학과 박사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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