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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현, 헬로우뮤지움

출생

1967,  

장르

회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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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Red_124, 2011

린넨에 유채, 150 x 1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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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흔히 우리가 DMZ라고 부르는 비무장지대는 남북한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며 한반도를 가로지른다. 간혹 냉전의 최전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곳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문명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산악지대처럼 보이는 이 지역은 또한 전 세계에서 가장 묵직한 상징적 의미가 내포된 풍경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DMZ는 가장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탈자연화된 풍경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흔한 표식들지난, 또는 현 정권을 나타내는 기념물, 정치 지도자들의 동상은 발견할 수 없지만, 대신 어느 의미에서 풍경 전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엄중한 이데올로기 내러티브 중 하나의 막강한 위력을 암암리에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작가 이세현의 작업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 위치해 있다. 그의 회화작업은 DMZ의 풍경을 재구성하고 재조립한다. 지형의 편린들, 땅과 강의 토막 단위들을 재작업하면서 이세현은 자체적인 논리에 따라 기능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철저히 불가지적인 세계이다. 그리고 작가가 묘사한 영토가 철옹성 같이 단단한 경계들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콜라주와 유사한 작업방식을 택한 이세현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편린들을 계속해서 섞어놓는다. 그래서 Between Red 연작은 언뜻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다. 이 풍경 연작은 엷게 펴 발린 붉은색 물감의 흔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이사이 물감이 칠해지지 않는 면적은 마치 하얗고 거대한 띠처럼 심홍색 섬들 사이를 구불거리며 지나고, 이 공백들은 섬세하게 묘사된 불그레한 형상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각 화면마다 흠잡을 데 없이 구현된 통일성과 총체성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세현의 풍경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 총체성 이면의 단편화이다. 단순하게만 보이는 풍경들이 복합적인 이중성, 모순과 균열의 거대한 산사태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억지로 틈새를 벌리는 이 제스처는 화면의 단단한 총체성과 대조를 이루지만, 동시에 그것에 활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개념적인 수준과 순수하게 심미적인 수준 모두에서 그의 풍경화에 힘을 싣는다.

 

작가는 진행 중인 Between Red 연작과 관련하여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군복무시절, 나는 군사분계선 근처 전략지대에서 야간 보초를 서곤 했다. 그 때마다 야간 투시경을 썼는데,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다. 나무와 숲이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 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풍경이었다.

 

그의 풍경화에서 재창조된 것은 바로 이 시절 작가가 받았던 인상이다. 야간투시경은 시야 전체를 붉게 물들이면서 그것을 과장하고 탈자연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작가가 받은 느낌의 실체는 아름다움, 소격감, 그리고 낯설고 일시적인 전치역사 또는 현재에서 벗어나 상이한 시간적 연장 속으로 들어선다는 의미의이다. 감각과 사고의 이 복잡한 연결은 거의 아무 무리 없이 이세현의 풍경화 속으로 옮겨져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소통을 이룬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사실, 거의 육체적인효과를 넘어, 작가가 야간투시경을 재활용했다는 사실은 그가 정치적인 것을 미적인 것에 어떠한 방식으로 통합시키는가를 보여준다. 작품의 주제와 방식을 고려할 때 이것은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세현의 작품 속에서 정치적인 것은 봉합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교묘하게 미적인 것 안으로 스며들어가 포착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가 언급한 이데올로기는 도처에 있으되,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물론 더 큰 메시지는 이것이다. 군사적 함의를 띤 붉은 색의 형상들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의 풍경화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 안에서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미묘하지만 화면 곳곳에 퍼져있는 붉은 색처럼, 그리고 형상의 구체적인 요소 내부와 외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모두 관통하는 문자 그대로의 필터처럼,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작동한다.

 

이데올로기는 풍경이세현은 그 풍경이 무수한 단편들의 섞임이라고 말한다의 특정한 부분이나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시각 속에서 가시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시각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도무지 떨쳐내기 힘든 무엇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스크린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구체적인 메시지 속에만 들어있지 않으며, 대신 사물을 보는 방식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이세현의 회화는 어째서 회화그리고 좀더 일반화시키자면 예술가 정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격인지, 또는 최소한 정치적인 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통찰하는 데 적절한지를 예시해준다. 그는 정치와 미학을 둘로 가르지 않으며, 미학이 시각 방식을 구축하는 데 대한 것이라면 정치 역시 마찬가지라고 이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세현의 풍경화를 이루는 핵심 요소들의 많은 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은 정치적인 층위와 미학적인 층위 모두에서 작동한다. 작가가 사용한 상징들엷게 발린 붉은 물감이든, 그가 상상한 풍경이 남북한 산악지대의 요소들을 결합하는 방식이든은 풍경화의 시각적 조건을 설정하는 동시에 간결한 정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이 때 발휘되는 것은 약간의 실용성, 그리고 고도의 예술적 효율성이다.

 

 

II.

하지만 관객들이 그의 풍경화에서 정치적 진술이나 미적인 계산을 발견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어느 쪽도 아니며, 간단히 말해 둘 다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세현의 그림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의 것들로, 과거 그리고 그에 관련된 상실에 대한 작가 자신의 감정을 참조로 한다. 여기서 그는 노스탤지어와 유토피아라는 두 가지 친숙한 관념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 두 개념에 대해 단순하거나 회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를 채운 것은 정교화된 노스탤지어 개념과 뒤틀린 유토피아 개념이다.

 

물론 이세현은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그의 풍경화는 잃어버린 과거, 사라져가는 풍경, 그리고 잠식당하는 기억에 대한 것이다. “더 이상 풍경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그려야 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럼에도 그의 회화들은 단순히 과거를 회복하고자 갈망하지 않는다. 차라리 회복의 과정 자체에 대한 그림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다시 말해,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그 과거를 재탈환하려는 끝없는 시도 속에도 상주하는 트라우마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Between Red 연작은 노스탤지어의 성격을 짙게 품으면서 한편으로는 철저히 현대적인 작업이 된다. 또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생각보다 훨씬 모호한 개념이라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그리하여 이세현의 풍경화는 통일과 치유의 이미지라기보다는 균열과 파열의 이미지가 된다. 모순과 차이의 복잡한 지형도를 그려내면서, 외견상 드러난 이 통일성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것이라며 우리를 위협한다.

 

과거를 이상적으로 복원해내는 기억의 메커니즘 이면에는 무수히 화해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 Between Red 연작은 바로 그 저변에 깔린 모순들의 재현이다. 이세현의 풍경화를 보는 관객들은 강렬한 시각적 화려함 앞에 거의 수동적인 최면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이 완벽성은 점차 시각의 분열, 다중 원근법, 그리고 거의 충격적인 수준의 시각적, 심리적 왜곡에 자리를 내주며 물러난다. 모순과 비논리적 반복이 등장하고, 눈은 이 시각적 간극을 메우고자 발버둥치게 된다.

 

Between Red 연작이 눈을 떼기 힘들 만큼의 매력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그 같은 효과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물리적 효과, 원근법의 조작을 통해 획득된다. 이세현은 평면적인 전통 동양화의 시점과 서양의 원근법을 자주 결합한다. 그리고 이 둘의 한 데 어울림은 기묘한 낯설음을 자아낸다. 서양식 원근법에 입각하여 그려진 개별 풍경들이 평면적이고 비원근법적인 좀 더 큰 풍경을 배경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최근 작가가 런던 첼시 대학에서 수학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한국에서 사라졌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향수를 자주 언급한다는 점 등을 특히 감안할 때, 두 가지 원근법의 이 같은 절묘한 조합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낳는다. 하지만 이중 원근법이 화면 위에서 생산한 효과는 사실 의미와 무관하다또는 아마도 그 너머에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그 안에 함축된 문화적 충돌보다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섞임이 주는 충격효과, 그림에 묘사된 심리적 불일치에 더 큰 흥미를 보이는 것이다.

 

그 불일치와 모순이 유독 두드러지게 부각된 곳은 Between Red 45이다. 이 작품은 길쭉한 반도 풍경들이 수직으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대형 풍경화이다. 각각의 육지 풍경들은 원근법에 입각하여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들의 전체적인 배열은 원근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최종적으로 화면은 평면화되는 결과를 맞는다. 화면 이곳저곳을 오가는 관객의 시선은 각 부분들을 하나로 조화시키지 못하고, 어느덧 극도로 불안한 느낌에 봉착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 Between Red 연작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풍경의 부분들이 자칫 인공적으로 보이리만치 명증하게 구축된 단일한 총체성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Between Red 44에서는 풍경의 이미지가 둥근 달의 선명한 외곽선 속으로 자연스레 흡수되며, 달은 섬세한 주름처럼 구름의 형상을 주위에 드리우고 있다. 작품은 이제 풍경화의 책략으로, 그리고 풍경의 부분들이 조작되고, 형상화되고, 배치되는 방식으로 관심의 축을 이동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론적 경험을 구성하는 방식총체성을 지각하는 순간과, 세계에 관하여 구축해 놓은 의미에 다양한 균열이 생기며 파열되는 순간 사이를 오가는과 많은 부분 닮아있다. 이세현의 회화들은 그 각각이,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총체성과 단편화 사이의 기묘한 공간 속에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그의 그림들은 우리의 현실감을 훼손하는 분열과 모순, 그리고 이와 함께 그 무질서를 쫓아내기 위해 애써 상기하는 총체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이세현의 회화가 지닌 정서적인 힘이다. 트라우마의 표현뿐 아니라, 트라우마 자체와 그것의 증거를 반박하기 위해 우리가 애용하는 장치들의 묘사 속에도 그 힘은 존재한다. 작가는 전체성과 총체성 내러티브를 향한 인간의 충동, 그것의 무익함에 대한 통렬한 인식, 그리고 조금이나마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나란히 버무린다. 단편화의 풍경과 복원되고 완전해진 풍경을 동일한 수준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Between ed 44 의 경우처럼) 때로는 복원을 향한 시도가 지나치게 과도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은 작가 이세현의 풍경화를 보는 것을 즐겁게 만드는 이유 가운데 일부가 이다. 그의 그림들은 보기에 매우 유쾌하다. 노스탤지어가 가득하고, 시각적으로 풍성하며, 한눈에 관객을 매혹시킨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좀더 미묘하게 복잡한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쾌락이란 그 자체가 이미 단편들 속에 뿌리내린 것이며 본질적으로 변덕스럽다는 사실, 그리고 총체성과 단편화, 쾌락과 트라우마는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엮여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이세현의 유토피아는 직접적이되 매우 세련되고 정교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서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으며 욕망을 추동하는 주된 동인이 부재와 불가능성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의 회화가 공포와 갈망 등의 정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어쩌면 이세현은 자신의 작업에 기름을 붓는 욕망의 역학을 잘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며, 그래서 그 역학의 매혹에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절대 아이러니나 냉소에 빠지지 않는, 그럼으로써 결코 그 마력을 잃지 않는, 날카로우리만치 자의식적인 작품이다

Katie Kitam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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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피하는 길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그 환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림은 유토피아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디스토피아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세현의 그림이 보여주는 풍경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집들만 보일 뿐 사람이 없다. 아름다우나 사람이 없는 세계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아니다. 다시 보면 그의 그림은 유토피아이다. 그 유토피아는 미래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사실은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다시 디스토피아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그림은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 사이에 붉은 다리처럼 걸려 있다.

 

이세현의 그림은 전통적인 한국의 산수화와 서양화의 종합적 교배이다. 먼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식적인 특성이 그렇다. 게다가 그가 그런 그림을 그린 최초 장소가 한국이 아니라 영국의 런던이며, 일반에 공개된 곳도 런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흥미로워 진다. 왜냐면 그의 그림의 배후에 있는 고민들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동양, 한국을 포함한 중국과 일본, 더 나아가면 유렵과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현대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정치, 경제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인 것도 그러했다. 대중문화든 고급문화든 자신의 전통적인 문화와 해외에서 강제로 유입된 문화 사이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 딜레마, 즉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사용 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방법이 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다른 관점을 적용시켜 통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등의 구호가 그것이다. 모두 다 서양의 기술과 전통적인 정신을 결합하여 딜레마를 극복하자는 내용의 이 구호들은 여러 방면에 폭넓게 적용 된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이용되기도 한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여서 전통적인 재료들을 서양적, 현대적 방법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서양의 재료와 도구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용해왔다. 이세현의 그림들은 후자에 속하며 시간을 더듬어 올라가면 그 계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유럽,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이세현의 풍경은 오리엔탈리즘적이거나 아니면 이국적인 풍경을 유화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시각에서 이세현의 풍경은 겉보기와는 달리 고통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정체성의 문제와 문화적 딜레마, 작가의 생존에 관한 문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그의 풍경은 전통 산수화를 닮았지만 산수화는 결코 아니다. 시점들은 다시점과 이동 시점을 취하고 있고 전체적인 구성도 그러하다. 그러나 대상에 관한 묘사 방식은 산수화의 준법이 아니라 서양식 묘사이고 색깔을 붉은색 하나이다. 그 붉은 색은 전통적인 산수화에 사용되던 먹색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좋아했던 색이며 한국에서도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한국 사람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세현의 그림은 형식적인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의도적으로 일관성을 배제한다. 그렇게 해서 이 세현의 작업은 논쟁적인 내용을 풍경화라는 외형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의도적으로 붉은 색을 택하고, 바닷가 시골 출신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한국의 기억-민주화의 고통스런 과정, 경제적 근대화와 분별없는 개발과 건설로 사라진 바다와 섬과 산들을- 서양식 화법으로 그린다. 이는 그의 그림이 현재의 상태에 이른 과정을 보아도 알수 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린 그의 초기 그림은 도시의 거리에 있는 풀들이다. 그 풀들은 문명 이전, 인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며 인간의 선조들이다. 즉 자연에 대한 경의와 그에 대한 인간의 횡포를 전통을 빌어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 뒤에 이 세현은 지금의 작업 스타일을 발견한다. 그것은 겸재 정선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대가들에 주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세현에게 전통 풍경이란 박제된 파편이 아닌 현재형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세현의 풍경 이미지들은 라캉을 빌어 말하면 상징계의 한 예이다. 질서와 언어로 구조화된 체계인 상징계는 무의식을 반영한다. 그 무의식이 발현된 이 세현의 그림은 전통 산수화의 일종인 관념 산수와 겹친다. 그리고 관념 산수는 유토피아를 담고 있고 그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화가는 사소한 디테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제거한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이세현의 그림은 서양인의 입장에서 일종의 타자이다. 타자로서의 그의 작업들은 서양 중심의 단일문화 mono-culture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동양, 한국에서는 익숙하지만 서양에서는 낯설 것이다. 낯섬과 새로움을 넘어선 이해에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현이 탐색해야 할 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길은 그의 그림 속에 이미 그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은 그 길 밖으로 나와야 온전한 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피해가는 길일 수도 있다.

 

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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