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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래, 남포미술관

출생

1961,  

장르

조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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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1, 2008

종이에 잉크, 20x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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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응집의 조각 - 이길래 Gil Rae Lee 조각의 형상론과 의미

신묘한 것의 문
조각가 이길래의 작품 중에는 <흙에서 땅으로 From Soil to Earth>라는 세 개의 연작이 있다. ‘흙에서 땅으로’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으나(흙과 땅을 구분하기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 언어의 맥락이 이후의 작품들과 밀접하게 상관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말 ‘흙’은 토양으로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 이루어진 물질”이다. ‘땅’은 “강이나 바다와 같이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지구의 겉면”이다. 흙이 ‘흙가루’나 ‘흙 한줌’이라 했을 때처럼 손에 잡히는 물질이라면, 그런 흙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땅이요 대지라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흙에서 땅으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흙이 아니고 땅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흙을 땅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인지 아리송하다. 흙을 바꿔 땅으로 만들자는 뜻으로도 읽히고, 흙에서 땅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흙과 땅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굳이 흙과 땅을 구분해야 되는지 의문이 든다. 구분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일! 흙이 땅이고 땅이 곧 흙이잖은가! 둘을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 땅에 흙이 있고 흙에 땅이 있다. 조각가 이길래는 흙과 땅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땅에 집중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땅의 상징을 더 크게 가져가고 싶었던 것일 게다. 부스러진 흙을 뭉쳐 대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렇다면 대지는 또 무엇일까? 세 작품의 형상에 비밀이 숨어 있다. 세 작품은 오랫동안의 풍화를 간직한 흙덩어리들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플라스틱 종류인 합성수지에 흙을 섞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덩어리들은 풍화의 흔적이라고는 하나, 달리 보면 최초의 대지 같고 이제 막 잉태한 땅의 씨알 같다. 태곳적의, 생명의 근원을 포태한 땅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땅의 형상이라고는 덩어리마다 세 개의 발이 달렸다. 삼족오(三足烏)의 그것처럼 이 형상은 삼족지(三足地)다. 삼족지의 의미를 삼족오에서 찾아보자. 삼족오는 고대 신화로, 태양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다. 고구려 벽화에서 찾을 수 있는 이 신화의 이야기는 태양이 하늘을 건너가는 풍경에서 비롯되었다. 한나라 때의 책인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는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은 세 개라고 했다. 또 세 개의 발은 천(天)?지(地)?인(人)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대 신화는 『단군세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이미 오래전부터 ‘삼족(三足)’은 중요한 상징체계로 전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이 의미를 차용했던 하지 않았던지 간에 3은 지지대로서 가장 완전한 수임에 틀림없고, 이 작품에서도 그 의미는 뚜렷하게 전달된다.
여러 의미를 더해서 이 작품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흩어진 흙을 덩어리로 만들어 대지 즉 땅을 탄생시킨다. 그 흙과 땅은 조각의 근원과 같다. 흙을 빚어 인간의 형상을 창조했던 기독교의 창조 신화를 생각해 보라. 흙이 땅이요, 땅이 곧 흙이라는 진리야 말로 가장 완전한 조각의 실체임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바로 그것으로부터 조각은 시작될 수 있다. 성서는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이길래의 작품은 ‘생령의 땅’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단순히 흙에서 땅으로의 전화(轉化)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생령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밝히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땅의 생령으로부터 모든 조각은 탄생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부터 출현하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실제로 땅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작품을 ‘중묘지문(衆妙之門)’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노자의 『도덕경』 제1장은 말한다.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던 안 붙이던 묘를 보건 요를 보건, 내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신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생성과 응집으로
이길래는 <흙에서 땅으로>를 제작한 뒤에 <점에서 선으로>을 연달아 발표했다. 1997년에서 1998년으로 이어지는 이 연속적인 작품세계가 참 흥미롭다. 그는 <점에서 선으로>의 연작을 끝낸 뒤에는 또 <생성과 응집>의 연작을 제작했다. 2001년에서 2006년의 일이다. 그러니 1997년부터 그는 10여 년 동안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조의 틀을 완성해 나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흙과 땅’이라는 조각적 질료가 가진 근원적 생명성의 사유에서, ‘점과 선’이라는 조각의 가장 기초적인 형상태로 나아갔고, 그런 다음 자신의 조각적 형상을 창조하기 위한 ‘생성과 응집’의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점에서 선으로>의 작품들은 ‘점’과 ‘선’이라는 말의 의미보다는(‘흙과 땅’의 언어가 차지했던 의미의 비중과 달리), 조각의 형상을 점과 선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형상태’에서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점’을 둥근 계란형 형상으로 실험했고 ‘선’은 원과 사각의 기둥들이다. 바닷가의 굴 껍질 즉 석화껍질을 쌓아 올리거나 덧붙여서 만든 이 작품들은 재료의 특수성도 그렇지만 ‘둥긂’과 ‘기둥’의 형상들에 의해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주지하듯 조개무더기는 신석기 시대의 역사적 유물로 출토된다. 하얀 석화껍질이 조개무더기는 아니지만, 그것들이 엉겨 붙어서 만들어내는 점과 선의 형상은 지금 여기의 시간을 훌쩍 월경해 버린다. 월경(越境)해 간 그곳은 어디일까? 신석기 시대? 아니면 그 즈음의 고대 어디? 아니다. 그가 은연중에 들통 내는 월경의 장소는 역사 속의 어디가 아니라 그 물질과 그 형상이 어우러져 상상케 하는 심미성의 공간이다.
심미성은 눈으로 보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며 영혼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조각을 완성했고 보이지 않는 소리를 조각했다. 만질 수 있는 조각을 창조하면서 보이지 않는 혼을 불어넣었다. 점이 모아져 선을 이루듯이 숱한 껍질을 모아서 자연의 원형상을 창조했다. 바다와 바람과 파도와 모래와 햇살과 달빛과 물비늘의 풍경이 그 안에 새겨졌다. 보이지 않는 소리와 혼이 작품의 결마다 가득하다. 호리병 같고 목탁 같고 집게 같고 거대한 홀 같은 형상들은 손에서 탄생했으나 그 내부에 아로새겨진 것들은 손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탄생했다.
‘점과 선’의 작품들이 인위와 무위의 순간들을 나눌 수 없는 상태였다면, ‘생성과 응집’은 무위의 자연을 어떻게 인위의 순간들로 재창조할 것인가를 묻는 작업들이다. 이때부터 그는 조각가의 역할이나 조각가의 창조성에 대해 고민한 듯하다. 작품은 ‘마늘’, ‘호박’, ‘전구’, ‘인간’, ‘사과’와 같은 자연물과 인공물의 형상을 ‘조각화’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조각화’의 인위성이 커지자 그의 작품들은 다소 생기를 잃은 듯 하나의 기념물들처럼 비춰지기 시작했다. 마늘의 기념물이나 호박의 기념물들처럼 자연은 자연이 아니었고, 조각으로서의 미학적 상징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나는 이 시기가 조각가 이길래에게 있어 다소 침체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여의 시간을 조각미학의 구조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조각이 무엇인지 되묻는 긴 침잠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린 듯하다. 작품에 대한 의문을 마치 작품에서 찾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자연형상과 인공형상을 번갈아가며 제작했고, 그 형상들이 탄생해가는 과정에서 결국 해답을 찾았다. 문제의 핵심은 ‘생성과 응집’이라 제시한 그 자신의 미학적 화두에 있었다.  
        
상징체계와 현실의 이중주
‘생성과 응집’의 화두는 ‘생성과 응집’의 형상이 아니라 형상의 근원이 ‘생성과 응집’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터졌다. 그때부터 그는 나무 형상을 선보였다. 동 파이프를 고리 모양으로 절단한 뒤 산소용접으로 하나씩 이어붙인 이 나무들은 생성과 응집이라는 미학적 방법론에 의해 탄생했다. 이 나무들은 최대한의 인위에 의해 탄생했으나 그 맥락은 무위에 가 닿았다. 어느 누구도 이 나무를 두고 그 이전의 사과나 전구를 보듯 ‘과도한 무위’의 결과로 읽지 않았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약 6년 여 동안 그는 ‘흙과 땅’의 미학을 나무형상에 결집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삼근목(三根木)’은 그의 삼족지의 개념에서 창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세 개의 뿌리로 이뤄진 나무는 나무이면서 사람이고 사람이면서 대지이며 또한 하늘이다. 둥근 파이프 고리들로 제작된 이 작품은 투명하다. 땅덩어리의 형상과 달리 삼근목들은 대지에 섰으나 바람의 집이고 하늘의 집이다. 삼족오나 삼족지처럼 역사적 상징이나 그 무게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조각의 투명성은 무건운 미학적 상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그는 다른 상징을 엿보인다.
<나이테>는 단 하나의 통나무(혹은 가지)다. 한 점의 뿌리에서 둥글게 커져가며 거대한 원을 이룬 이 형상은 그러나 나무도 아니고 뱀도 아니다. 이 작품 앞에 서면 관객은 마치 원 홀에 빠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작아지고 커지는 원의 중복성이 착시를 일으켜 현기증을 유발시킨다. 순간 바람이 일고 숲이 일어서며 어디선가 종소리마저 들려온다. 조각의 언어가 시각적 언어로 분절되면서 내 안에 상징의 언어로 울려 퍼지는 기이한 체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들은 나무에 있지 않으며 나이테에 있지도 않다. 눈앞의 나무는 나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나무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상실했던 나무의 신화다. 숲의 신화이며 생명의 신화다. 그 나무들은 우주의 신목이라 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신목은 삼족지의 나무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삼족지에서 탄생했으며 삼족지가 그의 조각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면 그 미학적 근원은 지금 여기의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다만 상징의 체계로만 존재하는가?
근대 이후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기 위해 쉼 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해체했다. 자연조차 인공자연으로 만들어 버려서 야성의 순수자연 따위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자연을 자연이라고 해야 할지 인공낙원이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길래의 자연은 인공낙원도 아니고 눈앞의 자연도 아니다. 그의 자연은 ‘후경’이다. 눈앞의 전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신령하게 살아있는 후경. ‘점과 선’에서 ‘생성과 응집’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어떤 사물들은 전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수년의 침묵수행 끝에 발견한 것은 전경이 아닌 후경이었다. 그 후경의 나무들이 현실로 넘어와 우리 앞에 섰다.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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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집의 구조, 소나무로부터

응집
궂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충북 괴산에 있는 이길래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마당에는 여러 그루의 나무가 비를 맞으며 다소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그것 중 일부는 딱히 나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고 서로 뒤엉겨 있어서 흡사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변형, 왜곡한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털을 뽑아버린 날짐승의 살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은 몹시 구불구불하고 작달막할지언정 하늘을 향해 가지가 뻗어있어 나무를 지시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작품들로 이루어진 작은 숲은 마당에 심어놓은 실제 나무와 대비되며 묘한 조화와 대비를 연출하는 듯했다. 짧은 가지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한 줄기, 허리부분이 잘려나간 채 거꾸로 놓인 나무, 수직으로 성장하기보다 자궁이기도 한 대지를 향해 회귀하듯 원을 그리고 있는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한마디로 ‘마법의 숲’이었고 과장을 하자면 생태학적 재앙의 현장을 보는 듯했다. 생태학적 재앙이란 말은 그의 작품이 나무를 만든 것인데도 불구하고 나무와 전혀 닮지 않은, 그것보다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상상의 숲에나 자라고 있을 나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이 기괴한 나무는 마치 낯선 행성과 충돌한 이후 지구에 새롭게 출현한 식물이거나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이상 증식된 나무의 형태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상상을 자극한다. 이것은 그가 재현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려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정형의 추상적 형태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작품의 모티브가 나무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도 소나무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목조건축을 지어온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건축자재 공급원이자 가구의 원료였으며 한때는 땔감으로써 온돌을 데우기도 했다. 이처럼 소나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가장 친숙할 뿐만 아니라 늘 푸른색을 유지하는 상록수이므로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절개나 지조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길래는 소나무의 형태를 재현하는 것 너머의 것을 포착하기 위해 소나무를 만들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에게 있어서 소나무는 ‘응집’을 의미한다. 즉, 수직으로 쭉 뻗어 올라간 소나무를 통해 군자(君子)의 기개를 배운다거나 절조를 표상한다는 것은 애초에 그의 관심권 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응집이란 입자가 모여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의 방법과도 일치한다. 그는 얇게 절단한 동파이프 토막을 서로 용접하여 나무의 형태를 만든다. 반지보다는 크지만 팔찌보다는 훨씬 작은 이 고리들이 촘촘하게 엮여 만들어내는 표면은 마치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소나무의 표피를 보는 듯하다. 고리를 연결하여 표피를 만들기 때문에 비록 속은 비어있을지언정 그가 만든 소나무는 견고함을 지닌다. 나아가 그 제작의 과정에 투여된 지독한 노동은 작품의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동인이기도 하다. 그로서는 덩어리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를 닮은 입체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제작된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자기완결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비록 바늘과 같은 잎이 무성하지 않더라도 이 응집된 구조체를 통해 상록수의 생명력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누적된 시간
이길래는 작업실에서 막 진행 중이던 한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작품과 비교할 때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가는 동봉(銅棒)을 잘라 수많은 침엽수의 잎을 만들어 가지에 붙여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줄기와 가지만 지닌 나무에 비해 실재에 가깝다. 그것을 보며 마치 한 그루 노송도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재현은 역시 목적이 아니다. 그는 한때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집을 작품구상과 독서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재미있는 드로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업실 벽에 걸린 잎이 무성한 소나무를 위해 그린 드로잉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밑그림에는 실제 작품의 형태는 물론 규격까지 빼곡하게 기록돼 있었다. 게다가 그는 철필로 많은 드로잉을 그려놓은 상태였다. 내가 다녀가기 전 이 작업실을 방문했던 후배들 중에서 한 시인이 이 드로잉을 보며 즉흥적으로 썼던 시(詩)도 놓여 있었다. 내 기억에 그 시는 그를 ‘철필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사내’로 표현했던 듯하다. 그 시의 전문을 적어오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길래의 작업에 대해 매우 압축적으로, 더욱이 시적으로 잘 표현한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그곳에서 본 드로잉들은 그의 작품이 순전히 직관에 의해, 작업하는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즉, 그의 작품의 형태는 드로잉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도 설계도 수준의 치밀함과 신중함을 지닌 드로잉은 입체로 확대되었을 때 결과를 충분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 벽에 부착할 수 있는 부조들이다. 이 부조들 중에는 마치 암모나이트처럼 나선형구조를 지니고 있거나 수많은 줄기들이 켜켜이 쌓여 산맥을 이루는 것도 있고 소나무 줄기만 포착한 숲도 있는데 조각이면서 다분히 회화적인 것도 특징이다. 대지의 주름처럼 쌓인 나무줄기들이 만들어내는 구조는 ‘시간의 누적과 지속’에 대해 암시한다. 그것은 수많은 고리들로 연결된 나무의 표피와 줄기와 가지의 잘려나간 부위에 표현해 놓은 나이테에서도 발견된다. 이 흔적은 또한 시간의 지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길래는 이 나무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소나무의 강인함에 자신을 투사(投射)하고 있음은 누구든 알 수 있다. 그 너머의 것을 찾는다면 이 누적된 시간의 흔적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유한함을 일깨우려 한 것은 아닐까. 일면 우직해 보이는 그의 작업방식은 시간을 쌓는 행위이자 또한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지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이 지둔한 과정을 통해 그것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가 만든 나무의 표피는 우리 피부에 각인된 주름으로도 외연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작품이 무엇을 표상하기보다 응집된 형태 자체를 제시하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인생을 반추라는 것은 우리의 감성의 문제인 것이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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