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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훈, 대산미술관

출생

1967,  부산

장르

조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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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의 쇠울림, 2014

철, 520 x 150 x 2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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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훈 조각의 에너지

20세기, 90년대에 들어서 현대미술의 국제교류가 더욱 활발해진 가운데 아시아의 조각도 이 흐름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한국조각가 성동훈역시 이와 같은 국제적인 움직임 안에서 그의 작업으로 자신만의 독특함을 표출해왔다. 일찍이 그는 출간된 그의 작품집 에서 노마디즘에 대한 공감을 드러낸 바 있다. 작가에게 있어 노마디즘을 어떠한 형식과 의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유의 그것이라고 할 때에, 그는 얽매임 없이 혼재하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창작활동을 이어왔다. 그에게 노마디즘은 창작활동의 사상적인 근거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구체적인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는 그의 의식을 반영한 전형적인 작업으로 마치 두개골 속에 신경회로처럼 퍼져 있는 철근은 인간이 외부의 각종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처럼 성동훈의 작업에서 특별한 점은 그가 작품의 내부에 굉장히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종 작품이 열리도록 만들어 그 안에 상징적인 오브제들을 배치한다. 작품이 열리고 닫히는 움직임은 그의 작업의 형태와 그 속에 깃든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마치 조각의 내부 모습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성동훈은 90년대에 <돈키호테> 연작으로 한국 미술계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99년 이후 그는 더 이상 <돈키호테>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의 틀을 깨기 시작했으며 이는 다양한 창작활동으로 이어졌다. 사실 그는 90년대에도 다른 유형의 작업을 다수 보여주었다. 이 작업들은 시공을 넘나들며 예술가로서 갖게 되는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한 사유과 그 책임의 무게 그리고 부담을 표현하고 있다. 단지 그의 <돈키호테>라는 대표작이 마치 작가 성동훈은 <돈키호테> 창작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성동훈의 <돈키호테> 역시 고정불변하는 것은 아니며 돈키호테 시리즈 안에서도 작품의 재료나 조형 안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성동훈의 <돈키호테>에 대해서는 이미 접한 몇몇의 훌륭한 한국비평가들의 자세한 분석과 정확한 판단을 통해 알 수 있다. 대신에 본 글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초기 작품 <돈키호테>가 예술적으로 성동훈의 이후의 창작활동에 미친 큰 영향이다. 작품의 전체적인 조형성과 힘이 느껴지는 무게감 등은 모두 내재적인 힘찬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선보인 성(性)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생물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에너지와 원초적인 생명력이 표현된다.
성동훈의 작품에서 보이는 각양각색의 형상은 자연스레 중국의 고전 『산해경(山海經)』을 떠올리게 한다. 『산해경』에는 수많은 기이한 형상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고대인들의 상상 속에서 나온 괴수(怪獸)들이다. 이 괴수들은 각기 다른 동물의 부분들이 어우러져 탄생한 새로운 형상으로, 성동훈의 작업과 흡사하다. 그의 작업들도 각기 다른 물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많은 작품이 여러 동물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합은 그저 단순하게, 형태들이 쌓여지거나 층층이 포개 놓은 것이 아닌 약소한 개체가 무거운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어서 사회적으로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성동훈은 평상 시 여러 가지 물건을 수집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다. 그의 작업실에는 그가 도처에서 모아 온 물건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그래서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 형상이 저장되어 있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그의 이‘보관소’를 동원하여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때문에 성동훈의 작품을 순전히 공상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 상상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상상력은 전세계적으로 현대미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통해 작품의 공간을 무한히 확장할 수도 있고, 예술가의 주체성을 확립하기도 한다. 또한, 성동훈은 종종 사막과 같은 불모지를 찾아가 작업을 한다. 사막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사막은 낭만적인 상상이 더해진 모험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런 극단적인 환경에서 성동훈의 창작에너지도 솟구쳐 오른다. 바로 이 부분들이 일반적인 창작활동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성동훈의 작품은 물체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정교하다. 그는 종종 제철소의 폐기된 쇳덩이와 같은 아주 독특한 것들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 이러한 쇳덩이는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동일한 규격의 철강이 아니라 거칠고 불규칙한 느낌의 강한 질감(마티에르)을 지니고 있어서 현재의 모습이 유지 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여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쇳덩이가 바로 성동훈의 작업에서 시간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이것이 바로 그의 작업을 마치 땅 속 깊은 곳에서 발굴한 오래 된 유물처럼 느끼게 한다.  조각가로서 성동훈은 물성과 재료에 예민하다. 그의 작품을 본 후 처음 든 생각은 재료의 대비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단단한 재료와 부드러운 재료들이 그의 작업 안에서는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더불어 성동훈은 단단하고 부드러운 속성의 재료를 단지 대비만을 위한 것을 넘어, 여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단단한 것은 용맹함과 강인함, 의지, 결심을, 부드러운 것은 허황됨, 상상, 아름다움, 덧없음을 대변하는 식이다. 대개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방식은 작가의 재료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작가가 재료에서 어떤 특별한 느낌을 받으면 여기에서 재료를 다루는 방식이 정해지고, 그 다루는 방식과 최종적으로 드러난 시각적 결과물이 바로 작가의 독창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동훈의 작품과 이력을 보면 동시대 중국의 걸출한 조각가 수이젠궈(隋建國, Sui Jian Guo)와 묘하게 통하는 점이 있다. 그들은 80년대에 미술 공부와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90년대에 각자 자국 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혔다. 2000년대 들어 지난 십여 년간 그들의 창작활동은 다시 한 번 내용이 풍성해졌다. 성동훈 그리고 수이젠궈는 재료를 조각의 기본이라고 본다. 수이젠궈는 90년대 초 철근으로 돌을 둘러싸는 등 돌과 철이 어우러진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성동훈의 모든 작품에서 철과 돌의 대비 또한 최적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밖에 철과 나무가 주는 효과도 매우 훌륭하다. 수이젠궈는 대체로 재료에 강한 관념적인 형상을 부여하지만 성동훈은 재료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고 재료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비시키지는 않는다. 수이젠궈가 기본적으로 조각에서 조형을 포기하였다면 성동훈은 조형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재료에 일정한 형상을 부여하고 있다. 때문에 성동훈의 작업에는 항상 설치적인 요소가 내재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설치 작업만으로 한정할 수 없고 아직 조각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조각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였다. 많은 조각가들이 조각이라는 개념 자체에 한계를 느끼고 조각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리하여 많은 조각가들의 작품이 이미 완전히 조각의 범주를 벗어났다. 전체적으로 보아 위와 같은 조각계의 외부에 대한 탐색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조각 자체에 대한 연구에는 소홀한 감이 있다. 성동훈은 조각의 외부는 물론 그 자체에 대한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조각 외부에 대한 탐색 때문에 조각 자체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조각 자체의 재료, 형태, 구조 등의 측면에서 큰 진전을 보았다. 또 하나 주의 깊게 볼 것은 조각 하단부의 받침대이다. 그의 작업마다 다양하게 등장하는 받침대 중에서 활처럼 굽은 반원형 받침대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성동훈은 이 반원형의 받침을 산으로 간주한다. 이는 상부 조각을 안정적으로 견고하게 지탱해주는 한편, 조각의 받침에 조형적으로 좀 더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거시적인 시점에서, 성동훈작가가 앞으로의 창작활동에서 작업의 추상적인 요소(사실 적지 않은 작품이 이미 추상적이다)를 강화하기를 감히 제안해 본다. 강한 추상적 표현은 그의 작업에서, 실제와 다를 바 없는, 케케묵은 진부한 인상을 줄여 작업의 형식과 영속성을 강화시킬 것이다. 조각이 그 표현의 대상을 구체적인 형태에서 찾을 필요가 없어지고 조형물 자체의 형식이 가지는 생명력으로 작업의 수준을 가늠하게 되는 그 지점에서 그의 조각은 더욱 더 독립성과 완전함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동훈의 작품에서, 보는 이는 더 이상 어떠한 동물적 형태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형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즉 그가 어떻게 부분들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는가를 보고 매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각과 경제발전은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대개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서 조각에 대한 후원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도 조각에 대한 후원이 상당한 편이나 성동훈은 전 세계 각지로부터 요청을 받아 많은 작업을 진행하였다. 성동훈은 작품과 전시 환경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여 항상 현장에 직접 가서 작업에 몰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현장의 환경은 창작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낮이건 밤이건 그의 작품은 모두 현지의 환경과 어우러져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내가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은 바로<소리 나무>다. 작품의 외형이 매우 아름다워 심지어 작품 주변의 진짜 나무보다도 아름답다. 바람이 불면 나무에 매달린 수천 개의 풍경(風磬)들이 내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창작의 희열까지 느낄 수 있게 한다. 밤이 되면 <소리 나무>는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 마치 암흑 속에서 희망을 찾아낸 어떤 충만한 느낌을 받게 한다. 마치 삶 속의 믿음처럼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때에 큰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 중국에는‘?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작품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로 작품에는 언제나 작가의 사상, 입장과 세계관이 반영된다는 의미다. 이 말에 따르자면 성동훈은 찬란하게 밝고, 청량한 솔직한 사람이다. 운 좋게도 나는 한국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의 여러 작업들이 끝없이 자라는 식물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보았다. 그가 생활하고 작업하는 공간 역시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온 평론가에게 이 모습은 아주 친근했다. 산수가 아름다운 바로 그곳이야 말로 중국 고대예술가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환경이 아니던가. 중국인들에겐 정신수양 끝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사람과 우주의 합일(合一)이니 말이다. 한국의 조각가와 중국의 조각가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비슷하다. 모두 현대미술의 국제적인 틀 안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업을 찾아야 한다. 국제적인 동시대미술의 흐름 안에서 아시아 미술로써의 특징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아시아 미술 역시 국제적 현대미술의 시스템 속으로 적극적으로 융화되는 것과 동시에 함께 자신만의 특별함으로 기여할 바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조각가 성동훈이 한국 조각의 독특한 면모를 전세계에 보여주고 있다.

두안 쥔(段君, Duan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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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의 유목, 의식의 유목

돈키호테, 자화상 혹은 예술가의 초상. 조각가 성동훈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돈키호테다. 돈키호테는 작가로 하여금 처음으로 제도권에 입문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90년대 들어 그 다양한 버전들이 집중적으로 제작된 바 있다. 그런데, 설핏 제도권과 돈키호테는 그 성격이 서로 어울리거나 부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꿈과 몽상, 비현실과 초현실, 시대에 대한 비판과 풍자, 그리고 광기를 상징하는, 이른바 제도에 반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혹 그동안 제도권의 조각계가 이런 비현실과 광기를 포용할 만큼 유연해졌거나, 아니면 은연중에 이런 기질을 은근히 그리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이 비상식적인 캐릭터, 저돌적인 캐릭터, 무식한 캐릭터(나는 무식한 것이 좋다는 작가의 공공연한 언술은 직설화법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를 매개로 고루한 제도권 미술을 돌파하려던 작가의 전략은 먹혀들었고, 또한 그 만큼 그 처사는 현명했던 것 같다(현명했다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돈키호테는 시대를 돌파하는 작가의 자화상으로, 그리고 나아가 제도와 대면하고 있는 모든 예술가의 초상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더욱이 그 초상은 쉽게 공감하게 만드는데, 그 캐릭터가 우리 모두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비이성과 광기(제도의 정상성과 비교되는 비정상성으로서, 평소에는 억압돼 있는)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원전에서 돈키호테는 말을 타고 나타나지만, 작가에게서 돈키호테는 말과 함께 곧잘 소를 타고 등장한다. 문명사적으로 말은 유목민족과 관련이 깊고, 소는 농경민족과 관련이 깊다. 정착민에게 소는 농사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가축이며, 더욱이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마저 부여받는다. 이를테면 인도의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며, 불교의 선종에서 소는 십우도(十牛圖)의 메타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소는 말하자면 중생들 저마다의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본성(진아 眞我)을 상징한다. 십우도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소에 빗대어 인간이 자신의 본성(소)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열 단계로 표시한 것으로서, 그 이면에는 모든 신화적 서사가 함축돼 있을 뿐만 아니라(모든 신화는 길 위에서 맞닥트린 사건과 우여곡절 끝에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서사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다), 요새말로는 로드무비에  해당하는 자기반성적 사유와 그 과정을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랄까,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는 길들여진 가축으로서보다는 하나같이 저돌적이며 야생 그대로이다. 본성이 길들여진 것(이미 소여된 것)이기보다는 길들여야 하는 것(찾아내야 하는 것)임은 당연하다. 이렇게 작가는 야생(야성)의 소를 탄 광대(예술가)의 캐릭터를 빌려 오히려 진정 비이성의 시대를, 광기의 시대를 돌파하고, 나아가 자신의 본성(진아)마저 거머쥔다(혹은 최소한 겨냥한다).
그 소가 근작에서 현저하게 순해졌고, 더욱이 예뻐졌다. 자잘한 조화(造花)들로 온 몸을 치장한 꽃 소로 변신한 것이다. 그동안 작가의 본성이 유순해진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작가와 소와 돈키호테는 하나다). 폐철이나 고철로 된 골격과 시멘트로 된 몸(살)으로 구조화된 소, 과장하자면 산업 쓰레기 더미에서 태어난 지금까지의 소와는 거리가 멀다. 재료에서의 인상에 관한한 작가의 작업은 신사실주의와 정크아트로부터 나아가 팝아트와 키치를 덧입기 시작한 것 같다. 향후 어떤 식으로든 이렇듯 거친 재료와 예쁜 재료와의 조우가 작가의 작업이 변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여기서 재료는 재료 자체로서보다는 방법과 형식과 의식 모두를 아우른다).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상, 의식의 만화경. 사람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할까, 하고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앙드레 말로는 사람들은 저마다 미의식의 소재를 머리에 이고 사는데, 그것을 상상의 미술관이라고 불렀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람들의 의식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순차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인 개연성도 없다고 본 의식의 흐름기법으로써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를 열었다. 온갖 잡다한 의식의 편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하는 정신분열증은,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의식만이 곧추 선채 다른 의식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편집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은 의식적인 동물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동물인가. 인간의 의식은 정신의 소산인가, 아니면 몸의 산물인가. 도대체 이 온갖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경하기조차 한 생각들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일까. 그 생각들은 나에게 속한 것일까(내적 필연성?), 아니면 바깥에서 주입된 생각이 마침내는 내 머리 속에 내면화된 것일까. 생각은 생각에 대한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좀 무식한 말 같지만 그것이 궁금하다면 실제로 사람의 머리를 열어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된다. 너무 간단한가? 그러나 성동훈은 이 단순무식한(직접적인) 방법을 말 그대로 실행해 보인다. 열고 닫을 수 있는 개폐식 얼굴을 통해서 그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압력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그 얼굴은 관객이 다가서면 이를 감지한 센서가 작동하면서 서서히 열린다. 그리고 그 머리 속에는 전쟁(이를테면 팬텀기 모형)과 역사, 폭력과 린치, 그리고 종교 등 동시대의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가로지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생각의 편린들이 오브제로 만들어져 매달려 있다. 그 두상은 관객의 참여로 인해 비로소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호작용성을 실현한 것이며, 또한 머리 속에 매달린 오브제들이 움직인다는 점에서 키네틱아트를 실현한 것이다. 작가의 작업 중에는 이처럼 움직이는 조각이 많다. 이때 그 동력원으로는 압력을 조절하기도 하고, 전기에 의한 모터로 작동하기도 한다(전자식). 기본적으론 작가의 생각을 옮겨놓은 자기반성적 사유(이를테면 자신의 존재를 되묻는 식의 문제의식과 연동된)의 소산이지만, 그 생각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이 거대한 두상은 그대로 작가의 자화상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며,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만개한 연꽃이 이 두상을 떠받치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그가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투명하게 관조하는 사람, 자신의 생각이 흐르는 것을 보는 사람이면 모두 부처로 본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말하자면 잠재적으로 현대판 부처이며, 세속의 부처인 것이다. 에로티시즘, 본성의 한 유형으로서의 욕망. 작가의 작업은 본성에 충실한 만큼 직접적이고 솔직한 편이다. 억압된 욕망, 특히 성적 욕망 역시 예외는 아닌데, 이를테면 에로스를 드러내기에 거침이 없다(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통한 억압된 욕망의 무분별한 분출에서 건강한 민중성을 발견하는데, 여기서 카니발을 지지하는 동기가 바로 에로스다. 이외에도 에로스를 내적 생명력과 연결시키는 문헌들은 많다). 근작에서는 역삼각형으로 된 거대한 조형물이 바로 이 에로스를 테마로 한 것이다. 전작에서 이미 한차례 유사한 작품이 선보인바 있는 이 조형물은 말하자면 일종의 소파를 재현한 것이다. 금속성의 몸체에 가죽으로 된 쿠션으로 안감을 댄 이 조형물은 실제로 그 안에 앉을 수도 있다. 속이 오목하게 파인 그 형태는 흡사 여성의 팬티 같고, 개화한 꽃봉오리 같다. 혹자는 그 형태를 보고 수소의 머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역삼각형의 구조로부터 자연스레 연상되는 이 대상물의 리스트는 남자와 여자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며(이를테면 수소로 변신한 제우스와 에우로페와의 관계와 같은), 특히 여성의 성적 메타포를 떠올려준다. 팬티는 말할 것도 없고, 만개한 꽃잎 형상이 성적 메타포를 암시하는 예는 많다. 이를테면 조지아 오키페의 꽃 그림이랄지,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벽>에서의 애니메이션 등등. 여하튼 역삼각형의 구조나 그 속이 파인 오목한 형태, 그리고 특히 부드럽고 우호적인 촉감이 그대로 여성의 자궁을 암시한다. 그 속에 내가 앉는다. 그 속에 내가 안긴다. 그리고 내가 유래했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아니, 되돌아가고 싶다. 모든 성행위는 이런 근원에로의 회귀 욕망과 관련이 깊다. 이렇게 나는 내가 유래했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려지고, 그곳에서 생명의 근원과 그리고 죽음 자체와 대면한다. 빛보다 먼저 어둠이 존재했듯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해서,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작은 죽음이라고 일컬었다. 그것이 팬티든, 꽃봉오리든, 아니면 수소 머리든 여하튼 그 조형물은 이렇듯 존재에 내장된 원초적 생명력과 대면하게 해준다. 인공정원,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 작가는 전시공간에다 일종의 인공정원을 조성한다. 그 정원에는 나무를 비롯해 개미와 딱정벌레 그리고 장수하늘소와 같은 곤충들이, 그리고 뱀과 같은 파충류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 조형물들의 중심은 나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거대한 스케일이나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상징적 의미로 인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주요 소재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무는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과실을 맺는 것으로 인해 생산과 생명을 상징한다(당집 나무는 이런 생산과 관련이 깊다). 세계수가 존재의 유래와 근원을 상징하며, 나아가 프로이드에게 나무는 남근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들로 인해 작가의 작업에서 나무는 그동안 여러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제시된 바 있는데, 근작에서와 같은 철 나무를 비롯해, 일종의 유사 발굴 프로젝트의 형식을 빌린 나무 형태의 구조물 작업, 그리고 2007년 세계도자비엔날레에 출품한 소리나무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발굴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작가는 땅 속 깊이 나무 형태의 구덩이를 파내고 그 속을 시멘트로 채워 묻는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경과한 연후에 묻힌 조형물을 재차 파내는데, 마치 고대 유물이나 거대 화석을 발굴하는 것 같은 유사고고학의 학적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나무 조형물로써 대중성을 획득한 경우로는 소리나무를 들 수 있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나무 형태의 조형물을 만든 연후에 그 잔 가지마다 2000여개의 도자기 풍경을 만들어 매달아 놓은 것이다. 해서, 그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게 한 것인데, 조형물도 조형물이지만 바람과 풍경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소리의 하모니가 가히 환상적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고정된 형태의 조형물에서 나아가 동력(키네틱아트)을, 소리(사운드아트)를, 그리고 빛(라이트아트)을 아우른다. 특히 작업 속에 빛을 끌어들인 경우로는 사슴과 산양을 재현한 조형물 작업을 들 수 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자잘한 유리구슬을 일일이 연결시켜 만든 조형물 속에 조명을 장착한 것인데, 빛을 투과하는 유리구슬 고유의 성질로 인해 은근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사슴 자체로서보다는 사슴의 정령을, 혼을, 꿈을, 존재 자체를 보는 것 같은 이 감동 그대로 보는 이를 유사 이전의 세계로 데려가고, 태곳적 풍경 속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이 조형물은 꽃 소의 몸체를 장식하고 있는 조화와 함께 작가의 작업이 일정하게 변화(진화?)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말하자면 하나의 단위구조가 반복 열거되면서 마침내는 단일의 조형물을 일궈내는 식의,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집합과 해체를 넘나드는 조형 가능성의 또 다른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 이를테면 나무와 곤충과 동물들(작가의 작업에는 사슴과 산양 외에도 거북이와 코끼리 같은 많은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동물들이 그때그때 주어진 서사구조에 따라서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우화적이고 풍자적인,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한다)로 나타난 자연소재에 대한 발상이나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인공정원에 대한 발상은 이를 지지해주는 실질적인 계기가 있어 보이는데, 그 계기는 아마도 사막 프로젝트를 전후한 시기와 일치하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소재가 확장되고 의식이 변화되는 과정에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이 바뀌는 계기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2006년 처음으로 시작된 국제사막프로젝트는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를 거점으로 주요 사막 몇 군데를 돌며 작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바 있으며, 향후 인도사막과 중국 고비사막으로 연이어 진행될 예정에 있다.
이런 자연 소재들에 대한 관심이나 생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한 과정으로서의 사막프로젝트에서 일종의 유목주의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작가에게서 유목은 다양한 외국 프로젝트들로 실질적인 이동을 의미하기도 하고,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실천논리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유의 유목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형식으로든 의식으로든 고정된 틀에 안주하지 않고, 온갖 형식과 의식의 층위들을 종횡하는 것이다. 그 일면을 일종의 호박 조형물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 처음엔 호박이 약간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작가의 작업실 겸 집에서 경작한 것인 만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논리와 그 과정에서 나와진 것이다. 이는 그대로 돈키호테가 약간은 황당한 캐릭터를 대변하지만, 오히려 그 황당함이 정작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돌파하게 해주는 강력한 기제(무기?)가 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여하튼 호박과 그 호박을 떠받치고 있는 무슨 제기의 발 같은 받침대, 그리고 호박 넝쿨 끝자락마다에 주렁주렁 열린 사람의 두상과의 결합이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 이상한 혼합체는 기우뚱거리며 회전하기조차 한다.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나, 예기치 못한 것들의 만남이 예시되고 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결코 낯 설은 것은 아니다. 부조화 없이 조화가 있을 수 없고, 낯설음 없이 친근함이 있을 수 없다. 부조화는 조화의 선행원리이며, 친근한 것은 낯 설은 것으로부터 유래했다. 형식의 유목, 의식의 유목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실천논리로서 작동되고 있는 만큼, 향후 작가의 작업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지점을 향할 것이다.

고충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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