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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기, 헬로우뮤지움

출생

1966, 선산

장르

조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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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rit Dior(전시전경_DDP),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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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과 슬라이스의 흐트러짐 : 박선기

“숯은 변화한 나무다. 즉 나의 모든 작품을 꿰뚫고 있는 소재는 바로 나무이다”라고 정의한 박선기는 작업은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고 고민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머릿속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출시키는 방법적 문제가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작품은 또 다른 창작 발전의 에너지”라고 했다. 작가의 이 자전적인 발언은 우리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말해준다. 그 화두는 숯이다. 이 숯 작업을 위한 고통스런 작업의 순간들만큼 그의 작품에 쓰이는 오브제나 재료는 보편성을 거부 할 만큼 특별하다. 숯이 하나의 훌륭한 미술작품으로서 오브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작품은 어느 정도 파격적이다. 그렇다고 숯에 관한 일상적인 개념이나 의미에 큰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미술 오브제로서 숯에 관한 선택이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선산으로 몇 가구가 살지 않는 아주 작은 산골 마을 태생이다.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자연이 모두인 그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이 산과 바람, 나무로 그 가운데 그는 나무와 바람에 관심을 가졌다.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자연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자연 가운데서 고민하다 나무가 산이나 바람보다 더 친근하며 표현하기 쉬워 나무를 소재로 출발하여 숯이란 재료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나무의 본질을 버린 것은 아니다. 후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레비스토로스의 환경 지배론처럼 작가는 태어난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숯에 대한 철학을 점진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나무 즉 숯의 생성이 작품에 결정적 모티브가 된 이유와 의미들을 검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숯 작업을 시작한 시기는 1980년 대 후반. 그는 숯을 놓아두기 보다는 매다는 방법에 오히려 관심이 더 있었다. 그 이유는 비교적 단순했다. 줄에 물체를 매다는 것은 바닥이나 벽에 붙여두는 것 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인스털레이션적인 공간의 제약에서 쉽게 해방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무에서 출발하여 작품 제작과 설치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는 두 개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나는 작품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브제로 재료의 확장을 통하면서 동시에 나무가 숯에 이르는 과정에서 생성과 소멸의 자연적인 이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기에 박선기의 숯 작업은 국내외 전문가나 컬렉터들 사이에서 검정색의 숯을 투명한 낚싯줄에 매달아 놓은 한 폭의 동양화나 추상작업으로 평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빈번하게 작업의 방향을 하나로 일관되기 보다는 두세 가지 스타일로 나누면서 작업을 전개 시키는 다양성과 미술의 열린 시각을 지니고 있다. 물론 분위기와 성격도 모두 달랐다. 대표적인 숯 작품과 벽에 걸리는 부조식 조각 작품의 성향은 분명 본질적인 컨셉과는 다르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 폭의 벽걸이 조각 같은 시리즈 작품들은 숯 작업과는 이질적인 느낌이지만 그는 그것을 두 얼굴을 한 인간의 원초적 감성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는 분명히 사람의 감정은 하나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성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감성적이며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 두 가지 감성의 교차 속에서 박선기의 작품이 태어나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 할 수 있다. 두 가지의 작품을 병행하는 것은 한 가지에 얽매이며 고민하면 오히려 더디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유동적으로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주목 받고 인기를 얻는 작품은 벽에 걸려있는 입체조각이거나 작품을 불규칙하게 분할한 슬라이스 류의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그의 부조식 작품은 한 면에서 봤을 때만 정확한 사물을 관찰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의 작품들은 슬라이스해서 흩뜨려 놓고 있다. 즉 사물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각 작품을 볼 때에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자리에서만 관찰한다.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는 곳에서 작품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 관객들은 다시 작품이 제대로 보이는 자리로 돌아와 관람을 한다. 그래서 눈은 그냥 매개체일 뿐이고 자신의 관념으로 작품을 관찰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 틀을 깨고 싶어 한다. 익숙한 형태로 볼 수 있는 그 부분조차도 슬라이스를 통해 변형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가 아주 주목하는 <시 지각>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해 박선기는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미술은 시지 각이다. 눈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찾을 수 있을 때 그 작품이 항상 신선하고 영구불멸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자명한 사실이다.” 라는 15년 전의 메모에서 그의 모든 작품들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부조를 가졌는가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부조에 대해 가장 관심이 많았던 그의 이태리 유학시절은 부조 뒤의 벽면을 제거하는 틀을 깨는 작업에서 반 부조스타일의 입체가 탄생 된 것이다. 원래 조각에는 원근법의 공간이 없지만 부조에서 파생된 입체이다 보니 시점과 원근법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한 포인트에서 보아야만 우리의 관념 안에 있는 정확한 형태의 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의 입체작품의 본질은 기존 작업에 이른바 '슬라이스 기법'을 추가해 시점의 변화에서 더 나아가 대상의 시각적 분열을 의도하는 것에 근거한다. 작가가 시점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조각 작품에 다시 한 번 착시를 줄 수 있게 대상을 슬라이스(slice)한 것이다. 그 오브제들은 사과·컵·펜·제도용 컴퍼스, 가방 등 우리가 일상에서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소재들로 흰색으로 평면화 시켜 시점 변화를 강조한 입체 작품들이다. 이러한 수사학적 화법으로 여전히 그는 시각이 가지는 허구성과 계산된 착시가 주는 재미난 흐트러짐을 관객들이 즐겨 주길 기다린다. 박선기의 이 작업들은 압축된 조각처럼 보이면서 입체 주의적 시점 개념을 조각으로 옮겨 놓음으로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혹은 어지럽힌다는 점에서 그의 조각은 세잔 이후 많은 작가들이 추구 해 온 벽걸이 조각만큼이나 신선하다. 특히 회화적 기법으로 제작된 조각은 전통적 조각의 특징인 양감과 덩어리를 덜어내면서 질감을 배제 하고 이를 위해 보이는 시점에서 시작하여 한곳에서만 정상적으로 보이는 조각을 다시 한 번 착시를 줄 수 있게 분할하는 것이다. 
박선기는 여전히 조각그룹에서는 전통조각에 반기를 들고 생소한 ‘숯’이라는 소재를 17년 이상 부조 작품과 넘나들며 자연을 주제로 인간의 감정 속에서 찾아낸 주목 받는 작가이다. 그러기에 나무는 박선기에게 있어 표현의 대상이 아닌, 사유의 대상이고 생성이자 소멸의 종착역에서 만난 예술적 오브제이다. 부조작품 역시 어떤 형상이든 멀리서도 읽혀질 만큼 단순하게 물질성을 넘어 새로운 입체의 영역을 뒤흔드는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닌 작가이다. 특히 직접적인 표현이나 재현보다는 철학적이며 시각적인 입체의 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조각이 안고 있는 표현한계의 문제를 열어놓은 작품으로 평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처럼 나무의 경험적 순간을 포착하여 숯으로 전이시키는 박선기는 우리에게 보는 작품에 대한 기억의 한 층을 새롭게 시각화 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작가 스스로가  “작품이 가지는 우월한 값어치가 있다면 단연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깊이감이다” 라면서 “시각이 가지는 허구성과 계산된 착시가 주는 재미난 흐트러짐을 관객들이 즐겨 주었으면 한다”는 작가의 독백이 우리들을 그의 작품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홍익대 겸임교수, K-artist 프로젝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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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적 구조와 개념적 실재로 진입하는 통로

숯을 공간에 매달아 그 장소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박선기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 존재와 무, 실재와 환영, 가변성과 영속성, 동양과 서양 등의 경계를 뛰어넘는 매력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먼저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숯이란 물질에 대해 고찰해 보자. 숯은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정화(淨化)’란 상징적 의미를 지닌 물건으로 일상 속에 자리해 왔다. 단적인 예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섭취하는 염장식품인 간장은 삶은 콩을 으깨 벽돌형태로 만들고 그것을 그늘에서 잘 건조시킨 메주와 소금, 물을 섞어 발효시킨 것으로서 큰 오지항아리에 으레 붉은 고추와 짚으로 만든 새끼줄과 함께 숯을 넣었다. 이때 숯은 발효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넣었던 것이다. 나쁜 균의 침투로부터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과거 한국인들은 자손이 태어나면 어느 기간 동안 대문에 새끼줄을 매고 그 줄에 숯을 매달았다. 그러면 그 집을 방문하려던 사람도 출입을 자제하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으나, 최근 환경생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숯은 전자파의 차단, 정수(淨水), 공기정화, 무기질 섭취 등의 이유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숯이 지닌 효능에 대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할지라도 박선기의 작품에서 중요한 재료이자 매체인 숯이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고려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일단 그의 작품이 건축물의 특정 부위나 혹은 건축적 구조의 재구성이란 측면이 두드러지는 만큼 불에 탄 식물이 남긴 탄소덩어리에 과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일론 줄에 매달아 형태를 구성해가는 그의 작업방식은 그가 의식하였든 그렇지 않든 새끼줄에 매단 숯을 연상시킨다. 이때, 숯은 공간에 흑백의 드로잉을 하기 위한 도구의 차원을 넘어 이 공간 내부를 깨끗하게 만드는 심리적 위생처리의 역할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형태가 건축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주목할 때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도 필요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인 밀라노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방인인 필자가 보건대 밀라노는 전통과 현대가 혼성된 매력적인 도시로서 후기고딕 건축양식의 밀라노대성당과 함께 현대디자인, 패션의 흐름을 주도하는 창조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그는 일상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 속에 그가 몸담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실루엣처럼 또는 기억의 잔흔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에서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정화의 도구로서 숯에 대한 신뢰가 잠재해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밀라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통과 현대성의 혼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로서는 그가 왜 하필이면 숯과 같은 연약한 물질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는데 그의 작품을 보며 거의 순식간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현대미술운동의 하나인 아르테 포베라를 떠올렸다. 이것이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이론가의 습성 때문일까. 아무튼 숯을 매단 그의 작업은 석탄으로 꽃을 만든 야니스 쿠넬리스를 연상시킨다. 이 점에 대해 작가는 필자에게 분명하게 밝혔다. 아르테 포베라 계열의 작가를 알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있기 때문에 접촉할 기회도 거의 없고, 이미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진 작품을 젊은 자신이 뒤쫓을 이유는 없다는 점을. 필자는 그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박선기의 작품이 아르테 포베라 경향의 작가 누구의 작업을 추종한 것이거나 형태적 유사성이 높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쿠넬리스의 석탄이나 요셉 보이스의 비계덩어리처럼 지극히 일상적이고 어떤 맥락에서 비천한 물질이 미술의 영역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물질을 고상하고 숭고한 것으로 숭배해온 미술에 대한 이의제기를 했던 그들의 정신이 박선기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다만 개념적 특징이 강한 보이스나 쿠넬리스의 작품이 형태의 해체 -결국 실내온도의 변화에 따라 비계덩어리는 녹아내릴 것이고, 석탄덩어리는 재로 환원할 것이므로-를 추구한 것이라면 박선기의 작품은 오히려 그 반대지점에서 연약한 물질을 사용하여 견고한 형태를 구축하고자 했던 점에서 서로의 입장이나 방향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작품에서 숯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인 나일론 줄은 한 올인 경우 그 존재가 시각적으로 미미할 수 있으나 수많은 줄로, 그것도 서로 중첩된 것으로 나타나면 단지 숯을 매달고 지탱하는 지지대의 기능을 넘어선 것이 된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검은 숯덩어리와 조응하여 공간을 활성화시키는 요소가 된다. 어떤 경우 줄의 존재가 제시됨으로써 숯이 단지 허공에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한 구조 속에 고정된 것임을 지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숯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이나 기둥과 같은 형태가 투과성이 높은 것이긴 하지만 매스와 볼륨을 지닌 것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특히 형태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 건축이 추구했던 조화와 질서를 추구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다분히 풍부한 농담(濃淡)을 지닌 수묵산수화를 연상시킨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농담의 차이는 여러 겹으로 겹쳐지거나 펼쳐진 숯으로부터 파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일론실이 주는 시각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즉, 나일론실은 하나일 때 투명하지만 여러 개가 모일 경우 공간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만든 형태가 견고한 것이라기보다 부서지기 쉬운 것이란 점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그가 만든 기둥은 완전한 형태를 지녔다기보다 ‘구축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수묵산수화의 여백과도 상통하면서 한편으로 이러한 형태의 가변성이 견고한 형태로의 지향이나 회귀란 우리의 심리적, 지각적 기대를 자극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여기에서 그가 추구하는 주제가 존재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에 탄 잔흔인 숯은 그 자체로도 실재이면서 동시에 그 원형이었던 식물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가 공간에 설치해 놓은 사각이나 원의 기하학적 형태나 기둥과 같은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허상이다. 기둥이면서 기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둥이 마치 열주처럼 늘어서 있는 전시공간은 이 검은색 덩어리들의 실재가 드러나는 장소이며, 이 가상의 기둥들에 의해 장소특수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속을 드나들며 우리는 견고성 저 너머에 있는 부서지기 쉬움 즉,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의 나약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부서지기 쉬운 형태가 실재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실재의 본질에 대해 사색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인 형태와 그것이 설치된 장소를 이러한 생각하는 장소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물리적 실재 너머의 개념적 실재까지 넘나들게 만드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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