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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민, 영은미술관

출생

1969,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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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네이도, 2011

Digital prints installation, 300 x 500 x 5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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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의 귀환

중국에서 생산된 대나무 젓가락으로 쌓아올려 만든 강영민의 <중국 트로이목마>는 미국에서 골드러시가 끝난 직후인 1860년대 대륙횡단 철도부설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노동자를 모티브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철도 부설공사를 맡은 철도회사인 유니온 퍼시픽 레일로드와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는 로키산맥과 시에라네바다산맥을 관통하는 고난도의 공사에 청말(淸末)의 굶주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 온 중국 노동자를 고용했다. 쿠리(koolie, 苦力)라 불리던 이민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환경 속에서 땀과 피를 흘렸고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건설된 대륙횡단 철도는 미국의 산업과 인구구조는 물론 역사 자체를 바꿔놓았다. 일회용 젓가락을 연결하여 만든 다리 위에 천리마나 적토마처럼 호탕하게 달리고 있는 이 말은 철도공사 도중 숨진 많은 쿠리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편 허약한 문명에 대해서도 고찰하게 만든다. 인종차별과 낮은 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하던 이민노동자들의 노력으로 완공된 철로는 미국의 현대화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몰렸던 서부 인디언들과 겹쳐지면서 문명의 야만에 대해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트로이목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존재한다.
트로이목마는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서 10년간 지루하게 계속되던 전쟁을 종식시킨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목마 속에 잠복해 있던 그리스 돌격대원의 용감하고 민첩한 전투력에 의해 트로이가 멸망했다기보다 목마를 경계하지 않은 트로이 인들이 스스로 자멸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헥토르와 같은 지도자가 전사함에 따라 전의를 잃어가던 트로이 인들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걸어놓은 최면에 걸리기라도 하듯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성문 위에 가로로 걸쳐진 돌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간파한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군인들에게 성문보다 높은 목마를 제작하도록 했다. 트로이 인들은 그것도 모른 채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스스로 이 돌을 제거함으로써 야간을 틈탄 그리스의 공격에 무방비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말 한 마리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트로이 목마에 얽힌 전설적인 이야기는 견고하게 축조된 성조차 약점 앞에 노출돼 있었음을 반증한다. 트로이전쟁 당시 그리스를 대표하던 용감한 전사 아킬레스에게도 약점이 있었듯이 말이다. 트로이 목마는 이 약점을 파고드는 무섭고 파괴적인 계략을 상징한다.
오늘날 도시는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기능적으로 편재된 공간임에 분명하다. 도시는 인간이 창조한 과학기술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문명의 금자탑이자 동시에 내외부의 요인에 따라 붕괴할 수 있는 바벨탑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공간적 팽창과 스펙타클로 이루어진 현대도시는 욕망의 제조공장이자 그것의 소비지이며,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혼재된 극현실의 전투장이기도 하다. 강영민의 <서울 토네이도>는 도시에서 발견되는 이 극현실의 한 단면을 자연재해에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솟구치는 토네이도 형상을 구성하는 것은 새롭게 건설된 빌딩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이 사진이미지들은 픽셀 단위로 해체, 재조립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로로 길게 자른 띠를 연결하여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형태를 만들어놓았으므로 사진의 원형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이 설치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하단부의 비정형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을 합성한 것이란 정도만 식별가능하다. 비계 사이에 걸쳐진 띠를 채우고 있는 잘려나간 도시의 모습은 서둘러 건설된 도시의 미래를 보는듯하다. 그러고 보니 강영민이 2007년에 스티로폼으로 제작한 <중력제로>는 도시의 붕괴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의 결과이자 그가 미술대학 재학 중에 목격한 붕괴된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로 그의 20대 초반 한국은 1993년의 구포역 열차전복사고,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등 상상을 초월하는 참사에서 볼 수 있듯이 ‘사고공화국’이었다.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동안 제동장치가 파열된 폭주기관차처럼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면서 서울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어 갔지만 1970년 4월에 붕괴한 와우아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토목공화국의 파국적 대단원은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모더니즘 건축 사이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가 잘려나가고 주저앉은 강영민의 도시풍경을 보면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성수대교이거나 삼풍백화점이었고, 그 위기감이 나 혼자만의 과장된 기우(杞憂)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제정 말기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은 ‘파괴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맥락은 다르지만 현대도시의 건설과정을 보면 바쿠닌의 말이 진실처럼 들리기조차 한다. 건설하기 위해 부서야 한다. 그래서 도시는 언제나 잠 못 이루는 거대한 공사판이 된다. 이렇게 파괴 위에 건설된 도시는 사람들에게 쾌적하고 편리하며 잘 조직된 공간이란 환상을 불어넣는다. 멀쩡하던 다리가 무너지고, 백년을 지탱할 것으로 믿었던 콘크리트 건물이 주저앉고, 수시로 발생하는 자동차사고를 보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가혹하고 도시에 대해 우리가 가졌던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은 또 얼마나 부실한 것이었는가를 문득 깨닫게 된다. 일회성의 사고는 예방할 수 있고, 자연재해와도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하늘 탓을 할 수 있으나 인간이 욕망을 위해 구조적으로 누적시켜온 문제가 한꺼번에 폭발했을 때는 하소연할 틈도 없이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의 과학자의 단순한 실수로부터 비롯하였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이거니와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상속되고 있다. 대지진의 여파로 밀어닥친 쓰나미가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의 멜트다운을 야기한 것은 분명하지만 대지진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핵공포를 경험했고 비키니 환초에서 1954년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할 때 마침 인근에서 참치를 잡고 있던 제5 후쿠류마루(福龍丸)이 피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54년부터 원자력발전에 집중하여 1970년 오사카엑스포에 원자력발전소가 생산한 전시를 공급했다. 미국의 스리마일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고 체르노빌의 핵물질이 지구의 상공을 돌아다닐 때도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재앙은 수많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원자로 냉각을 위해 바닷가에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하다보니 대지진과 같은 재앙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봉쇄해버린 것은 아닌지, 수명이 다된 발전소를 계속 가동하여 수익을 창출하려고 했던 도쿄전력의 잘못은 없었는지, 당장 도시에 전기를 공급하여야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만 고려하고 핵폐기물의 처리문제는 다음 세대에게 슬쩍 미뤄버린 것은 아닌지, 경제성을 내세워 핵발전을 대체할 에너지개발 정책을 미뤄온 것은 아닌지 비전문가인 나와 같은 사람조차 의문이 꼬리를 문다. 좁은 국토에 원자력발전소를 밀집시켜 놓은 한국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어쨌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이후 일본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심각하다. 검소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에 비하면 분단상황과 맞물려 있고, 에너지소비가 심한 우리나라는 더욱 위기에 취약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대재앙이 닥치지 않더라도 도시는 기회의 공간임과 동시에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너지는 도시를 통해 강영민은 우리의 낙관주의 뒤에 감춰진 무관심을 들춰내고자 한다. 마치 조그만 상처만 입어도 피가 나고 곪는 우리의 나약한 피부처럼 그의 작품은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피막과 신경 역시 외부의 작은 자극이나 충격에 의해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트로이목마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그리스에게는 축복이었지만 트로이에게는 재앙이었다. 과연 그럴까. 십 년을 지속해온 전쟁이 단 한 마리의 목마 때문에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었을까. 호메로스의 상상력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다른 요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트로이성이 있던 터키 해안가는 지진에 취약한 지역이다. 오랜 전투를 치르며 두 진영 모두 지쳐가고 있을 때쯤 트로이에 지진이 일어나고 성벽이 무너지자 일시에 쳐들어가 성을 함락시킨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이 지진을 자신을 후원하는 포세이돈의 은혜로 받아들였고, 포세이돈이 바다에서 몰고 나온 말에 대해 상상하여 ‘트로이목마’란 그럴듯한 전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트로이의 입장에서 보면 목마는 신의 저주이자 재앙을 대비하지 못한 실책에 대한 징벌이다. 트로이 제사장 라오콘은 재앙을 예측했으나 그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만약 라오콘을 상상력과 예지력을 갖춘 인물로 파악한다면 어쩌면 강영민의 작업은 라오콘의 경고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강영민이 마냥 도시와 그것이 만들어낸 환상을 공격하는 네거티브 퍼스펙티브만 지닌 작가로 규정할 수는 없다. 도시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는 디스토피아적 풍경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공동작업을 통해 도시의 내부로 들어가 도시를 독해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그는 화이트규브(White Cube)에서의 발표를 도시공간으로 확장하고 도시 속에서의 일상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워크메이트란 공동작업팀 결성하여 <시티클리닝>이란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한때 한국의 월 스트리트인 여의도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했던 여성이 퇴직 후 주부이자 어머니가 된 실제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도심을 청소한다는 발상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전위예술가 그룹인 하이레드센터가 했던 행위예술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워크메이트의 의도는 오늘도 증권가의 교차로 앞을 걷고 있을 젊은 분석가를 위해 도시청소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소중한 물건을 닦고 보듬는 것처럼 도시를 닦는 행위를 통해 도시를 이해하고자 했다. 강영민에 따르면 청소는 두 가지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재개발처럼 아예 도시공간의 지형, 맥락 자체를 바꿔버리는 청소, 즉 특정 구역을 일소(一掃)하여 재구축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대규모 토목과 건축을 통해 도시는 더욱 비대해지고 세련되며 깨끗해질 수 있으나 그 지역이 지녔던 역사, 인간의 삶고 함께 처리될 수 있다. 그가 생각한 대안은 ‘사물과의 교감을 위한 청소’ 곧 재개발과 팽창에 대한 반대와 부정의 표현으로써 거리를 닦는 것이었다. 워크메이트는 도시를 청소하면서 우체통과 같은 도시가구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작업을 외연하는 등 결과보다 과정중심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또한 그가 제안한 ‘메타폴리스’ 개념은 그의 관심이 도시재생을 넘어 생태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자본중심적인 일차적 메타폴리스를 넘어서서 다원주의와 지역성의 부활에 바탕을 둔 이차 메타폴리스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그의 생각이 작업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생태, 환경, 지속가능한 도시공간의 재구성 등에 대한 고민이 지금까지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작업을 지양하고 낙관적이면서 포용적인 작품으로 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트로이목마는 애초에 없었으므로 귀환하지는 않겠지만 라오콘과 같은 사람은 필요하다. 예술가는 라오콘처럼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여야 한다. 목마 대신에 라오콘은 귀환하여야 한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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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문제의식, 유희적인 표현의 방법론

강영민의 2009년작 Reconstruction-Seoul 은 그가 창작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던 인상적인 작품들 중 하나였다. 그 작품을 통해 강영민은 “사람들이 바빠지고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서울 같은 현대적 메트로폴리스에서 인간이 정작 하나의 픽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가는” 부조리한 소외라는 진실을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강영민의 작업 저변에는 늘 사회와 문명의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인 맥락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 문명화를 가장한 야만, 인간과 사물의 소외에 대한 진지한 인식과 해석이 이미지들의 행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성찰과 비판적 시각을 전하는 방법론은 엄숙하거나 비장하기보다는, 극적이고 감각적이며 유희적이기도 하다. 스팩터클 효과, 극적인 과장, 풍자적 뒤틀기, 역설의 활용, 이미지의 해체와 합성, 충돌 등의 다양한 형식이 메시지의 무게를 조율한다. 여기에는 언젠가 백남준이 말했던 바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예술에는 펀(fun)이 있어야 한다’게 그것이다. 곧 사회와 역사의 문제들을 성찰하는 경우에도, 즐거움과 유희의 정신을 않는 것의 의미에 대한 역설(力說)일 것이다. 예컨대 강영민 냉장고나 에어콘에 장치되는 쿨러의 작동에 내재하는 역설, 즉 열을 식히기 위해 열을 발생시켜야만 하는 역설을 들어 이 시대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가당착적 모순을 풍자해낸다. 그가 내부 장치들이 마치 내장처럼 외부로 노출된, 처참하게 부서지고 쥬유기를 다루었을 때도, 그 부서진 주유기는 작금의 사회, 경제시스템이 의존하는 질서의 위태로운 지평에 대한 자각과 성찰의 물화된 메시지라 할 수 있다. 플라스틱 포장용기건 기무사 터의 역사적 문맥이건, 강영민은 그것들을 슬쩍 뒤틀거나 전치시켜 우리 시대와 사회를 되짚어 바라보는 하나의 인식기제로 만든다. 
아마도 이는 강영민 자신도 고백하듯, “작가주의의 로맨틱한 믿음에서 작품중심의 영악함으로 바뀌어가는” 방향성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전시(show)가 진행되는 장소-미술관이건 갤러리건-가 사건이 터지고 인생의 상황들이 발생하는 리얼리티의 뜨거운 장소는 아니라는 인식, 따라서 연출적 접근이 오히려 그 공간에 더 부응하는 언어일 거라는 판단도 이러한 입장과 경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펀(fun)한 표현의 방법론, 또는 연극적인 상황설정과 자신이 세계에 던지고자 하는 문명과 시회에 대한 숙고 사이에서 일어나는, 예컨대 서로를 상쇄시키거나 하는 예민한 상황들을 미세조정해 나가는 과정은 언제나 더욱 필요한 일일 것이다.
강영민은 자신이 대학에서 전공한 회화에 굳이 얽매이는 대신, 조각, 다양한 미디어 설치, 인터렉티브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하나의 장르는 가능성이어야 할 뿐 규범이나 제한이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곳에 국한되기를 거부하고, 다양한 시각 기제들을 다루는 것은 작가로서 강영민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을 분해함으로써 그 세상의 진실의 핵심에 다가서려는’ 그의 노선에 더 부합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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