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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구, 영은미술관

출생

1955, 경기도

장르

회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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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2010

캔버스에 유채, 259 x 19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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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구의 초상화: 살아서 말을 거는 유명인들

강형구는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다이애나, 링컨, 아인슈타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앤디워홀 등 역사 속에서 나오는 스타들의 얼굴을 극 사실 기법으로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대형 캔버스 화면에 인물의 얼굴만을 크게 그린 것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의 삶을 대변하는 듯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생생한 눈빛이다. 그들의 얼굴 안에서 살아있는 눈동자는 단지 작가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그리는 화룡점정으로서의 추상적 눈빛 아니라 코, 입, 머리카락을 비롯한 주변의 근육과 연결되어 있는 삶의 총체적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유명인들의 실제모습보다는 변조되어 과장되고 포장된 객관적 이미지로서만 인식하고 있다.
강형구는 명화나 사진에서 이미 익숙하게 많이 보아왔고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진 아이콘들을 소재로 삼아 작가의 에너지가 담긴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인물들을 탄생시킨다. 그는 인물의 머리카락, 눈썹, 주름하나하나를 진짜 살아있는 사람의 세포처럼 피가 통하고 숨 쉬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이런 각각의 개체들의 생생하면서도 세밀한 표현은 마치 그가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친숙한 인물을 그린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강형구는 최근의 코리아 팝 또는 포토리얼리즘경향의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그림이 한정 지어 바라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인물의 사상과 시대상, 허구적인 시간의 개념을 담으려 했기 때문에 포토 리얼리즘 작품들과는 다르며 단지 그 기법만을 차용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18세기 초상화가 료타르가 회화는 가장 명백한 거짓을 통하여 자신이 순수하게 참되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맥락과도 같이 강형구는 허구의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 스타의 모습을 가장 쉽게 이해되는 사실적인 표현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주관적인 순수한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화가다.
그의 회화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대형작업으로 한 달에 두 세 작품씩 일 년에 30여개 정도 제작한다고 하니 그의 엄청난 작업량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런 기량 덕분에 그는 일상 이미지는 물론이고 영화나 만화 속 인물처럼 과장되거나 초현실적 상상의 모습까지도 실제처럼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인물을 소재로 선택하는 까닭은 작가의 일치된 인생관과 예술관에서 비롯되었다. 강형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이 많아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도맡아 타왔고, 특히 만화를 잘 그려 친구들에게 인기가 누리는 중고등학교 재학시절을 보냈다. 이후 70년대의 화단에서 사실주의 경향이 강했던 중앙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역시 여기서 극사실 기법을 연마하게 된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린 탓에 졸업 후 10 여 년 동안 회사원, 화랑경영 등의 다른 직업을 가졌고, 38세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늦게 화단으로 나오게 되는 부담감 때문에 가장 자신이 잘 표현할 수 있는 극 사실 기법을 사용하면서 그가 존경하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과 파장을 갖고 온 인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가 공유하는 정치나 문화적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에게서 그 시대의 통용되는 방식을 읽어내며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내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손기정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그의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그는 일생의 사업으로 여기며 작품 일부를 팔고, 그 동안 모은 수집품들을 기증하여 손기정 기념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국가적 사업으로까지 확대시켜 2012년에 기념관의 완공까지 앞두고 있다. 강형구는 시대 안에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의 대표적 인물의 이미지로부터 사회현상의 유지와 대항해 투쟁하는 힘의 형태, 그리고 그 인물자체의 아우라까지 반영해 내기를 원한다. 90년대 말까지도 인물을 그리는 것이 선호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미술계에서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박정희, 케네디, 전두환, 김영삼 등 동시대의 정치지도자들의 특징을 담은 초상화들을 배틀로 비교까지 하면서 제작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한창 권력을 내 보일 때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일찍 사망한 자들은 나이를 먹은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강형구는 극단적으로 가장 간단한 외관만으로 내면을 담은 형상의 캐리커처 작업을 통해 인물화의 탐구를 계속한다. 2007년도 그는 화가로서는 모험인 캐리커처만을 위한 전시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최하였다. 세계 각계각층의 유명인 400여명의 얼굴을 조각, 일러스트, 드로잉, 콜라주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그 특유의 날카로운 직감인 본능적 감각을 잘 드러내 보여준 전시였다. 사회적 해석을 뛰어넘은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풍자된 작품들은 이 시대의 새로운 풍속화로 대중들의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 내었다. 강형구는 이런 실험적 작업을 통해 인물들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또 새로운 다른 세계를 끌어내는 시대적 표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자 한다.
그의 초상화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회화성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자체의 자기 모순적 양면성까지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지극히 허구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살 냄새도 풍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 속 인물이 응시하는 눈빛으로부터 먼저 유혹을 당한다. 선험된 객관적인 선망과 욕망의 대상인 이미지가 아니라 보는 자들에게 뭔가 다른 감정을 교감하며 말을 건네는, 친절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서 재 탄생된 것이다. 포토리얼리즘의 표현과는 다르게 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윤곽선과 정밀하게 그린 몇 개의 머리카락, 수염가닥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만들며 회화자체의 깊이를 담아 예술의 폭 넓은 이해까지도 끌어내고 있다. 인물의 윤곽은 그렇게 배경으로부터 변화무쌍한 깊이를 연출해 내며 아득한 시공간의 추상성을 갖고 얼굴부위를 지나 눈동자로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로 인해 인물의 눈은 마치 영혼이 깃든 것처럼 강렬하고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를 향해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멀리서는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 때문에 환영처럼 보이지만 화면 가까이에 가서 보면 피부 결을 그린 굴곡과 물기를 머금은 투명한 눈동자의 터치는 선명하게 드러나는 회화의 선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브러시, 철솔, 면봉, 그라인더, 사포, 지우개 등 붓이 아닌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배경색으로부터 한 터치 한 터치 살아나게 선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빛, 바람, 연기와 함께 아득한 배경과 연결되어 초현실과 허구적 세계로 인도한다.
그는 영화의 수많은 장면 중에서 인물을 선택하고, 색을 결정하며, 표정을 짓게 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개념보다는 예술적 감각에 더 의존하며 작업하는 것 같다. 먼저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해 원하는 장면을 캡처하고, 컴퓨터에서 수정을 한 후 인쇄한 사진을 대상으로 캔버스에 눈금을 그으며 그대로 옮겨 그린다. 그의 작업은 인간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거나 혹은 인간의 눈을 따라갈 수 없는 카메라의 눈에 대한 예찬이나 비판이 아니다. 그는 시각 확장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 기계적 방식을 사용하지만 그리는 과정에서의 다양한 회화적 방식을 시도하여 가시성과 비가시성에 한정을 두지 않은 모든 지각과 소통하기를 원한다. 그가 사용하는 모노톤의 색채는 인식된 허구적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초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아이러니하게 더 진짜처럼 보이게 한다. 한 가지 특정 색깔 톤의 인물은 희거나 검은 배경으로부터 감정체로서 집중과 몰입이 되게 한다.
강형구는 인물을 때때로 상상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2009년의 제작된 시리즈에서 마릴린 먼로는 뉴욕이나 런던의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현대 여성들과 오버랩 된 살아있는 스타로서 등장한다. 금발의 머리는 한 눈을 가리고 약간 벌어진 입으로 담배연기를 품어 내거나, 선글라스를 쓰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우리를 향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마릴린 먼로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지금도 여전히 세련된 패션과 미모로 섹시하고 사랑스럽게 우리 옆에 있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그는 인물뿐만 아니라 호랑이, 달, 만화 속 인물, 예수 같은 일상의 초월적 존재를 그리기도 한다. 최근작으로 2010년도의 달 표면그림은 분화구가 있는 달의 표면을 카메라가 보는 시각보다 더 우월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업이다.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신화적 존재로서나 우주 광학렌즈로 들여다본 것 같은 달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그가 다녀와 광활한 우주 안에서 인체의 두개골 같은 삶과 죽음의 생명체처럼 보이게 그린 것이다.
강형구는 일러스트, 만화, 회화, 조각, 사진, 판화 같은 대중적 장르에서부터 순수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혼합하고 개념과 표현 모두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21세기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 방식으로 재현한 가상의 영웅이나 신화적 존재가 아닌 철저한 작가의 주관적 감성과 예술표현 안에서 총체적으로 살아있는 판타지를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개방된 수많은 정보망으로 연결되어 다층적, 다중 적이란 시대적 삶을 살아가는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는 행운의 작가라 여겨진다.

김미진 (홍익대 교수, 전시기획 및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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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리얼리즘의 푼크툼

화면 속에서 관객을 쏘아보는 저 사내는 빈센트 반 고흐. 이 네덜란드인 자화상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진을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작가는 고흐의 자화상을 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흐는 저런 사진을 남긴 적은 없다. 따라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고흐의 이미지는 물론 화가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일 게다. 그런데 손으로 그린 그림이 마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처럼 생생하다. 그 세상의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그의 사진을 작가 혼자 몰래 갖고 있는 것일까?


강형구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포토리얼리즘을 본다. 하지만 강형구는 포토리얼리스트가 아니다. 비록 작가 자신이 척 클로스에게 입은 영향을 인정하지만, 그의 작업은 사진을 캔버스에 옮겨놓는 포토리얼리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강형구의 작품에는 전사(轉寫)의 대상이 되는 사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토리얼리즘의 작품은 사진을 전사한 것이기에 피사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진처럼 보인다 해도 강형구가 그린 이미지들에는 피사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또한 작업의 방식의 차이를 낳는다. 앤디 워홀이 작품의 제작에 실크 스크린이라는 기술복제를 사용할 때, 그로써 그는 회화라는 장인적 제작의 마지막 영역에까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팝 아트의 후예로서 포토리얼리스트들 역시 작품의 제작에 그리드나 슬라이드 프로젝션과 같은 기계적 절차를 사용한다. 하지만 강형구의 이미지에는 지표성(indexicality)가 없다. 거기에는 증언해야 할 피사체도, 전사해야 할 사진도, 투사할 필름도 없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은 수공에 따르게 된다.


그의 리얼리즘은 철저히 장인적 방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물론 그림에 극사실의 효과를 주는 데에는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베끼는 것이 유용하거나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강형구는 자신이 이미지 제작에 기술복제의 방식을 사용할 경우 “작업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진의 효과를 내는 데에는 물론 핀젤[1]이라는 거친 회화적 도구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는 에어브러시, 못, 드릴, 면봉, 이쑤시개, 지우개 등 온갖 비정규적인 수단들이 동원된다.


포토리얼리스트들은 원작과 복제의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사진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강형구의 극사실주의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화시키려면 극사실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의 눈은 이처럼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 개연성, 가능성의 지대를 향한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도, 사진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아니다. 레프 마노비치가 CG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것은 그저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알려진 인물의 모습을 사진으로 인식하는데, 나는 그렇게 알려진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선들을 조립해 원형을 복원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순간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영원히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형구는 사진을 파괴함으로써 피사체에 생명을 되돌려준다. 강형구가 창조한 ‘다른 현실’ 속에서는 이미 죽은 워홀과 먼로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간다.


회화와 사진 사이에는 엄청난 정보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회화적 묘사에 사진과 같은 해상도를 부여하려면, 발굴된 화석의 골격을 보고 주라기 공룡의 외관을 재구성하듯이, 부족한 정보를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다빈치의 초상에 주름을 그려 넣기 위해 강형구는 수많은 노인들의 얼굴을 시각적으로 종합해야 했다. 영화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엑스트라들의 얼굴은 링컨이나 고흐의 얼굴로 종합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을 우리는 ‘합성사실주의’(synthetic realism)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형구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컴퓨터 그래픽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컴퓨터 기술에 힘입어 주라기의 공룡은 화석이라는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면 한 인물의 유년기 모습이나 노년기 모습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제시할 수도 있다. 나아가 포토샵을 비롯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여러 장의 사진을 합성해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디지털 대중의 일상이 되었다. 강형구는 자신의 제작이 “잉크젯 프린트 방식”을 닮았다고 말한다.


19세기까지 시각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회화였다. 20세기 대중의 지각을 결정한 것은 사진술과 영화술이었다. 회화는 굳이 피사체를 요구하지 않으나 그 대신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반면 사진의 경우 사실성은 뛰어나나 반드시 피사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은 피사체가 없는 이미지에도 사진과 같은 생생함을 부여한다. 생성 이미지, 가령 스크린이나 모니터 위의 CGI 속에서 역사적으로 선행한 두 종류의 이미지는 하나가 된다. 이 합성리얼리즘이 21세기의 시각문화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워홀의 작업이 광고 이미지를 위해 실크 스크린을 뜨는 직공의 것을 닮았다면, 엄청난 노력으로 이미지의 해상도를 뜨겁게 끌어올리는 강형구의 작업은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 컴퓨터 그래픽 엔지니어의 그것에 가깝다. 워홀이 복제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예언했다면, 강형구는 이제 막 등장한 새로운 이미지 취향, 즉 디지털 합성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다. 워홀의 기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대중은 실크스크린으로 이미지를 복제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로 이미지를 합성하고 있다.


워홀이 성공을 했다면, 그의 작품에서는 분위기가 느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고 의도적으로 복제를 닮음으로써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는 것이 현대의 대중의 성향을 반영한다. 반면 강형구의 이미지에는 분명히 어떤 아우라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인물의 강렬한 시선에서 나온다. 보들레르에 관한 베냐민의 논문에는 아우라의 또 다른 정의가 등장한다. ‘시선의 마주침.’


사진처럼 뜨거운 이미지를 그리던 강형구가 캐리커처에 손을 댄 것은 언뜻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 만화처럼 차가운 이미지들은 물론 자기목적을 가진 게 아니다. 그것은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기 위한 습작이었다. 전혀 닮지 않게 그리면서도 닮게 그리는 것이 캐리커처의 특성. 그것은 현상의 복잡함 속에서 인물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을 잡아내는 데에 도움을 준다. 600여점의 습작을 통해 강형구가 알아낸 것은, 한 인물의 인상을 결정하는 부위는 눈이라는 사실이었다.


시선은 관객을 찌른다. 그 눈빛의 강렬함은 관객에게 따가운 느낌을 준다. 시선이 발휘하는 촉각적 효과, 그로 인해 맺어지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내밀한 인격적 관계.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의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의 푼크툼은 지표성에서, 다시 말하면 실제로 존재했던 것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강형구의 작품은 한갓 픽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없었던 것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제시하는 거짓말이다. 지표성이 없는 이미지가 어떻게 푼크툼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 현실의 달라진 정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워홀의 현실은 복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저 현실은 그저 복제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동시에 생성되거나 합성되고 있다. 현실은 더 이상 주어진 것(datum)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디지털 생성과 합성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factum) 있다. 디지털의 대중에게는 현실 자체가 생성되고 합성된 이미지의 형태로 주어진다. 강형구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인공적 현실도 자연화되면 푼크툼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  ‘푼크툼’이란 코드화 될 수 없는 작품의 어떤요소가 관객의 마음을 찌르는 것, 즉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을 칭한다.
[1] 붓이라는 뜻의 독일어


진중권 (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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