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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호, 신미술관

출생

1959, 대전

장르

조각, 설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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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lower 119140, 2011

구리선, 140 x 1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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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지 않는 차원들의 창조 - 정광호의 조각세계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그렇듯이 사물들과의 만남, 작품들과의 만남에서도 최초의 마주침(first encounter)은 중요하다. 그 최초의 마주침에는 이후에 펼쳐지고 변형될 모든 것들이 잠재적으로 주름 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잠재성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많은 변형과 창발이 동반된다. 그럼에도 그 변형들과 창발들이 최초의 마주침과 완전히 단절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예술작품에서도 최초의 마주침은 중요하다. 정광호의 작품들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 강렬한 인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떤 작품에서 받는 인상은 대개 그 작품의 속성들(characteristics)에서 온다. 모양이든, 색깔이든, 질감이든, ... 작품의 속성들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각인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작품이 “~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정광호의 작품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이런 속성들에서 받는 인상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작품들의 속성들에서 받는 인상들 외에도 그것들을 감싸고 있으면서 뛰어넘는 그 어떤 메타적 속성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정광호의 조각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 경험으로 이끌어간다. 그는 1차원, 2차원, 3차원, ...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차원, 무리수의 차원을 보여준다. 무리수에는 단절(limit)이 없고, 그래서 무리수 차원의 창조에는 끝이 없다. 1. 3849540438... 차원, 2. 20495473... 차원, ...과 같이.
이 작품들에서 1차원과 2차원 사이의 다양한 차원들,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다양한 차원들은 우리에게 사물의 경험이 아니라 사물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경험에서의 새로움을 선사한다. 예술의 핵심적인 역할이 새로운 체험의 선사라면, 정광호의 작품들이야말로 이런 예술의 정의에 충실한 걸작들이라 할 것이다.
정광호의 단지들은 단지의 형태를 보여주면서도 단지가 아닌 사물, 단지와 비-단지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사이’는 곧 무리수 차원에서 성립하는 반(半)사물의 특이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 단지에 물을 담을 수 없으며, 그것을 두들겨 단지 특유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이 단지는 마치 길들여지지 않는 어떤 차원을 증험하기 위해서 거기에 존재하는 듯하다. 또 그것은 구조와 기능이 단적으로 엇갈리는 어떤 반(反)사물을 예시해 주는 듯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에는 ‘Pot’이라든가 ‘Water Bottle’ 같은 역설적인 제목들이 붙어 있어 작품의 특이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 “물고기”나 “가방” 같은 작품들 역시 유사한 미학을 보여준다.
정광호의 “잎사귀들”은 단지의 2.x 차원과는 달리 1.x 차원의 반(半)/반(反)사물을 보여준다. 벽에 붙은 “잎사귀들”이나 “꽃” ― 이 작품들 역시 이런 역설적인 제목들을 달고 있다 ― 은 마치 벽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벽에서 피어나는 이 잎사귀들, 꽃들은 그러나 선들로 구성됨으로써 면과 선의 중간차원을 메우고 있다. 우리는 단지들과 잎사귀들/꽃들을 함께 감상함으로써 무리수 차원들의 흥미진진한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정광호의 “편지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그의 공간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의 작품은 사물들에서 언어로 옮겨감으로써 의미심장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왜냐하면 언어란 본래부터 선형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광호는 여기에서도 언어들을 하나의 면으로 구성함으로써 선과 면의 사이공간을 파고든다.(그의 “편지들”을 벽이 아닌 공간에 떠 있게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그로써 언어는 면을 구성하고 면은 언어의 선들을 통해서 휘발된다. 우리는 그의 “편지들”에서 ‘말’과 ‘사물’ 사이에서, 형상(figure)과 의미 사이에서 펼쳐지는 존재론적 드라마를 만끽할 수 있다.
정광호의 “풍경” 또는 “숲” 같은 작품들은 그의 작업이 가지는 의의와 노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은 갖가지 사물들과 생명체들의 총체인 숲, 그러나 새로운 차원에 놓인 독특한 숲을 그 자신의 미학적 관점을 고수하면서 집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간단한 ‘아이디어’의 표출이 아니라 얼마나 고통스러운 노동의 산물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정광호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새롭게 체험하는 미학은 사물과 공간 그리고 차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다. 그것은 독특한 존재론적 사유의 산물이자 혼신의 힘을 다한 노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조각의 역사에 남을 독특한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정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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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경계(피부)의 미학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의 정광호의 작품에는 회화와 조각, 미술과 일상사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다. 주전자, 조롱박, 가위, 병따개, 삽, 호미 등과 같은 일상사물을 바닥에 펼쳐놓거나 모더니스트 작가의 포스터 위에 부착시키든, 도널드 저드의 입방체를 평면적인 선물상자로, 칼 안드레의 금속판을 크래커로 바꿔놓든, 2차원과 3차원, 일상적 오브제와 아트 오브제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그의 작업의 주요 테마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모더니스트 회화,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네오다다 등 20세기 후반에 전개된 일련의 서구미술의 경향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고 그것을 ‘레디메이드적인 순리’라 칭하였다. 그가 말하는 ‘레디메이드적인 순리’란  “미술이 기존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소기의 목적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그의 ‘비-조각적 조각’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가 1994년 녹색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서문에서 “조각이 자기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은 조각 이외의 어떤 외딴 곳이 아니라 바로 비-조각인 듯하다”고 주장하며 비-조각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일상세계’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광호의 작업에서 주전자, 삽, 게, 바가지와 같은 일상적 사물로 제시된 그 ‘일상세계’가 그 구체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된 탁자 위에 오브제를 놓거나 투명한 비닐로 된 국기를 걸어놓은 작품에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재료의 투명함이 조각의 물리적 조건인 매스와 중량감을 감소시켜 ‘비-조각적 조각’을 사물만이 아니라 그 사물의 존재조건인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한 것이다. 1997년 『공간』과의 대담에서 설명한 ‘비-조각적 조각’개념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조각이 그 자신 이외의 모든 상황과 관련을 맺는다고 했을 때, 그 상황들,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주변의 것들을 모두 일컬어 비-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비-조각적 조각은 조각이 조각 아닌 세계와 가까이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자기부정과 자기 긍정의 동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조각이 조각 아닌 세계와 가까이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동시적 표현”은 표면(피부)만으로 이루어진 조각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구리선을 하나하나 땜질한 나뭇잎이나 항아리 작품은 “평면과 입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그러한 피부. 또는 평면과 입체성이 서로 교반하는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의 피부”로 이루어진 것이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아직 어떤 기관도 고착되지 않은 순수한 잠재성의 상태, 잠재적 에너지의 순수한 흐름 그 자체로 파악 할 때, 결국 그의 구리선 작품은 조각과 회화, 이차원과 삼차원, 실제와 이미지의 경계선상에서 잠재적 에너지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인 그의 구리선 작품은 구리선의 망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각의 조건인 매스를 결여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전시공간의 조명을 반사하는 구리선은 곳곳에서 물질성을 상실하고 대신 벽면이나 바닥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평면과 입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이러한 양상은 관람자의 공간적 위치에 따라 조밀함과 성김, 확장과 수축, 질서와 혼란, 무거움과 가벼움 등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그 결과 그의 ‘비-조각적 조각’ 은 하나의 고정된 구조나 전체적 형태를 갖지 못하고 회화와 조각,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위치하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내가 만들고자 한 것은 사물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물과 이미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사물과 이미지 사이로 좁혀 들어가는 것이라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다행인 것은 정광호에겐 이 경계의 공간이 허무나 무의미의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성과 활력을 내포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정무정 (덕성여대 교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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