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경계(피부)의 미학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의 정광호의 작품에는 회화와 조각, 미술과 일상사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다. 주전자, 조롱박, 가위, 병따개, 삽, 호미 등과 같은 일상사물을 바닥에 펼쳐놓거나 모더니스트 작가의 포스터 위에 부착시키든, 도널드 저드의 입방체를 평면적인 선물상자로, 칼 안드레의 금속판을 크래커로 바꿔놓든, 2차원과 3차원, 일상적 오브제와 아트 오브제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그의 작업의 주요 테마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모더니스트 회화,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네오다다 등 20세기 후반에 전개된 일련의 서구미술의 경향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고 그것을 ‘레디메이드적인 순리’라 칭하였다. 그가 말하는 ‘레디메이드적인 순리’란 “미술이 기존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소기의 목적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그의 ‘비-조각적 조각’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가 1994년 녹색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서문에서 “조각이 자기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은 조각 이외의 어떤 외딴 곳이 아니라 바로 비-조각인 듯하다”고 주장하며 비-조각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일상세계’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광호의 작업에서 주전자, 삽, 게, 바가지와 같은 일상적 사물로 제시된 그 ‘일상세계’가 그 구체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된 탁자 위에 오브제를 놓거나 투명한 비닐로 된 국기를 걸어놓은 작품에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재료의 투명함이 조각의 물리적 조건인 매스와 중량감을 감소시켜 ‘비-조각적 조각’을 사물만이 아니라 그 사물의 존재조건인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한 것이다. 1997년 『공간』과의 대담에서 설명한 ‘비-조각적 조각’개념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조각이 그 자신 이외의 모든 상황과 관련을 맺는다고 했을 때, 그 상황들,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주변의 것들을 모두 일컬어 비-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비-조각적 조각은 조각이 조각 아닌 세계와 가까이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자기부정과 자기 긍정의 동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조각이 조각 아닌 세계와 가까이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동시적 표현”은 표면(피부)만으로 이루어진 조각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구리선을 하나하나 땜질한 나뭇잎이나 항아리 작품은 “평면과 입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그러한 피부. 또는 평면과 입체성이 서로 교반하는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의 피부”로 이루어진 것이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아직 어떤 기관도 고착되지 않은 순수한 잠재성의 상태, 잠재적 에너지의 순수한 흐름 그 자체로 파악 할 때, 결국 그의 구리선 작품은 조각과 회화, 이차원과 삼차원, 실제와 이미지의 경계선상에서 잠재적 에너지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인 그의 구리선 작품은 구리선의 망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각의 조건인 매스를 결여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전시공간의 조명을 반사하는 구리선은 곳곳에서 물질성을 상실하고 대신 벽면이나 바닥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평면과 입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이러한 양상은 관람자의 공간적 위치에 따라 조밀함과 성김, 확장과 수축, 질서와 혼란, 무거움과 가벼움 등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그 결과 그의 ‘비-조각적 조각’ 은 하나의 고정된 구조나 전체적 형태를 갖지 못하고 회화와 조각,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위치하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내가 만들고자 한 것은 사물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물과 이미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사물과 이미지 사이로 좁혀 들어가는 것이라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다행인 것은 정광호에겐 이 경계의 공간이 허무나 무의미의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성과 활력을 내포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정무정 (덕성여대 교수,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