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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앙, 토탈미술관

출생

1975, 서울

장르

조각, 설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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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ddings, 2014

혼합채료, 유리케이스, 철, 조명기구, 161 x 76 x 1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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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샤먼 최수앙

최수앙은 구상적인 인체를 조각하는 작가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딘가 식상한 듯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이러한 선입관은 세상을 병리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놀라움으로 대체된다.

최수앙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그의 첫 개인전에 출품된 10~20cm 내외의 미니어쳐 인물상들로부터 출발한다. “과대망상이라는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이 미니어쳐들은 자신들이 놓여있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상대적인 왜소함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능력과 처지를 터무니없이 과장하여 생각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 인물상들은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도록 이제라도 막 터져버릴 듯 부풀어 오른 근육질의 몸매에 마초적인 몸짓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거대해진 신체 기관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허풍스럽고 과장된 몸짓을 통해 자신들을 부각시키고자 한껏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때로는 혐오스럽기까지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세상과 맞서기에는 너무도 작고 왜소하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병리학적으로 사회를 진단해 나가는 최수앙의 관심은 이후 최선을 다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식물적 상태(Vegetative State)”로 옮겨진다. 식물적 상태, 즉 식물인간은 스스로 숨쉴 수 있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고와 성격을 지배하는 두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주변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주체적인 행위도 할 수 없다.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처한 정신적 상태를 식물인간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위협받으며 힘없이 허우적대고 있는 상태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이 처한 정신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인식은 두 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Vegetative State’로 명명된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힘없이 쓰러져 있는 남자의 머리에서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자라나고 있는데, 월계수로 변화해 가는 다프네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식물인간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 상태를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한 끝마무리, 제목이 주는 의미와 형상화된 이미지로 인해 놀라움과 함께 씁쓸함을 동반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통제된 사회 속에서 자유의지로는 한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현대인의 상황을 식물인간의 상태로 진단하였다면, 이제 최수앙의 예리한 작가적 감수성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행위와 의식이 사회와 개인에 미치는 양가적 의미를 조명하기에 이른다. 그의 세 번째 개인전 제목이기도 한 가려움증은 순간적인 쾌감을 위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속적으로 피부를 긁거나 문지름으로써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 버리는 증상을 뜻하는데, 최수앙은 가려움증이라는 병리적 증상에 대처하는 인간의 심리상태에 빗대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진단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상황이 오롯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가려움증에 대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보다는 순간적인 시원함을 위해 긁는 행위를 반복하여 상황을 악화시켜버리는 것처럼 사회적 불편함과 불합리를 대하는 방식 역시 같아서 그 불편함과 불합리를 고치고 나아가기 보다는 미봉책에 그침으로써 더욱 상황의 악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세 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수많은 거친 손들을 통해 하나의 날개를 형상화 한 'The Win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이상이 달성되듯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의 입장에서 개인의 희생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희생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실현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그 속에서 희생하는 개인에 대한 논의는 간과된 채 유사한 희생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개인전 이후 최수앙은 현대 사회가 담지하는 체제로써의 문제보다는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식에 의해 내재화된 신념을 바탕으로 자유의지로 행동한 듯이 보인 개인의 행위가 갖는 양가적 의미 -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이상실현이라는 -를 조명했던 최수앙은 아스퍼거의 섬에 이르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질들을 통해 사회의 성격이 형성되어 나가는 지점에 주목한다. 어떤 한 부분의 능력이 특별히 발달하여 사회와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을 지칭하는 아스퍼거라는 병리학적 용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속성을 형상화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과 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커다란 입과 귀로 이리저리 루머를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 머리가 크고 무거워 일어날 수 없는 사람, 커다란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사람, 남다른 후각으로 냄새를 쫒는 사람, 발이 너무 커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 등을 통해 인간 저마다가 지닌 특성을 형상화 하고 있다. 특히 2007년을 전후하여 미니어쳐식 사이즈를 벗어나 정밀한 사실적 경향을 보이던 그의 인물상들은 아스퍼거의 섬시리즈에 이르면 조각이 가지고 있는 조형어휘를 거친 표면 질감을 통해 드러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극사실적인 처리방식과 변형, 과장, 생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갖는 모순과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최수앙의 인물상들은 너무도 실물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이러한 인물상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삶과 시대가 병리학적 용어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물상들은 때론 비관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작가는 샤먼이라 했던가? 최수앙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과 함께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작가가 직접 우리를 그리고 이 시대가 앓고 있는 병들을 치유할 방도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치유를 향한 노력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최수앙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혜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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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dition for Ordinary 전시서문

2007년 그의 개인전 제목은 식물적 상태(The Vegetative State)’였다. 최수앙은 이전부터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주목해 왔다. 사회가 거대해지고 고도화될수록, 사회는 사람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통제하기 위해 모든 것을 표준화하거나 체계화시키고자 한다. 그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론 원인도 모른 채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작가는 그것을 식물적 상태라고 지칭하였다. 거대한 힘에 억눌린 것처럼 당시 조각들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거나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09년 최수앙은 'The Wings', 'The Hero' 등을 발표하면서 소위 미시파시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자본주의와 미시파시즘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내면화시키기를 바란다. 즉 사회가 원하는 대로 대중이 스스로 행동하게끔 자발적 흐름을 유도한다. 보통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주입된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뜻밖에 그 에너지는 그들 각자의 욕망의 핵에서 나올 수도 있다.

1960-7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은 산업화와 경제화라는 미명하에 한 사람의 개별적 가치보다는 사회의 집단적 가치를 우선시하였다. 그 세대의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방향대로 행동하며 자신을 사회의 동력, 주인공, 영웅으로 간주하였다. 세월이 흘러 현재 그것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과연 그들이 사회의 영웅이었는지 희생양이었는지, 혹은 그들이 주체였는지 객체였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많다.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The Hero''The Wings'이다.

 

위 작업에서 최수앙이 세대, 이념, 역사를 바탕으로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고찰했다면, 이후 작가는 집단이 개개인을 분류하고 그 우열을 가리는 방식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한다. 집단은 한 개인의 특징과 개성을 무시하고 그를 하나의 커다란 흐름 안에 묶어두고자 하며, 그렇지 못한 것은 비정상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그것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이미 지적했듯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그는 사회적 소수자에 관심을 가졌다. 'The Islets of Asperger' 연작의 소재는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보통 지능과 언어발달 상태는 정상이지만, 사회생활이나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청각, 시각, 후각, 미각이 예민한 이들은 특정한 주제에 흥미가 생기면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며, 간혹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와 적절히 소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회가 정한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의학적 지식을 덧붙여, 사회적 다수자는 그들을 비정상적 존재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어떤 부분에 몰두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사회의 기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두 번째는 관점의 문제이다. 'Speaker''Listener'는 한 쌍으로 전시된다. 제목 그대로 'Speaker'의 남자는 손을 치켜들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며, 'Listener'의 여자는 앉아서 그 말을 듣고 있다. 작가는 남자의 손과 입 그리고 여자의 귀만 또렷하게 묘사하고, 나머지 부분은 흐릿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 조각들은 옷을 입은 채로 재현되었다. 그의 작업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이다.

높은 조각대에 놓인 'Speaker'가 낮은 조각대에 놓인 'Listener'를 압도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화자가 주도권을 가진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해석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Listener'의 여자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반면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은 'Speaker'의 남자는 불안정하게 서 있다. 한편 사람들은 또렷하게 묘사된 부분이 흐릿한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또렷하게 표현된 눈, , 귀만 보면 화자가 권력을 지닌 것 같지만, 흐릿하게 묘사된 다른 신체를 보면 오히려 청자가 화자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보는 관점에 따라 권력의 주도권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 그런 자의적인 관점과 통념에 의해 사회적 소수자는 생산된다.

 

최근 최수앙은 평범한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다. 물론 사회, 집단, 구조, 체계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곳에는 개별적인 사람이 있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인식과 내적 고뇌, 그들의 새로운 신체 개념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킨다. 특히 그는 2개의 형상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 지배와 복종, 드러냄과 감춤, 불변과 가변 등 사람들이 가진 미묘한 심리와 태도를 흥미롭게 시각화하고 있다.

여자 2명으로 구성된 'Reflection'자기 인식과 관련된 작업이다. 거울을 바라보는 한 여자와 거울에 비친 형상이 함께 놓였다. 그런데 한 쪽의 형상은 비교적 또렷하지만, 다른 쪽은 다소 뿌옇다. 또렷하게 묘사된 형상이 실제 모델이고 흐릿하게 표현된 형상이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고 간주하기 쉽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그것은 팔뚝, 발목, 허리에 새겨진 문신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델은 자신의 반전된 모습을 거울로 자주 접했겠지만, 평면이 아닌 입체로 반전된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거울이 우리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반전된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 모습과는 다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조차 어렵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더 익숙할 지도 모른다. 모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모습을 슬며시 보고 있다. 그 표정에서 조심스러움, 호기심, 놀라움 등이 배어있다.

'Isometric_Male'에는 2명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같은 사람이다. 'Isometric_Female'도 마찬가지이다. 'Isometric_Male'에서 2명의 남자는 각각 손을 상대방의 머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는 상대방의 입을 막고 있으며, 팬티만 입은 남자는 상대방의 성기를 가리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Isometric_Female'에서 2명의 여자는 각각 손을 상대방의 머리에 집어넣었다. 팬티만 입은 여자는 상대방의 눈을 가리고 있으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자는 상대방의 팬티에 손을 넣고 있다.

머리에 손을 넣었기 때문에 이는 인형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서로 손을 넣었기에 누가 사람인지 누가 인형인지 애매한 상태이다. 한 남자는 무언가 말하고자 하지만 입이 막혀 그럴 수 없고, 다른 남자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그의 성기는 손에 가려져 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드러내는 것과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는 한 사람이 겪는 이율배반적 내적 갈등을 나타낸다.

'Settlement''Colonization'신체의 가변성을 재고하게 한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의 몸은 불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의학과 성형이 발달하면서, 신체의 일부를 변형하거나 타인의 기관을 이식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은 신체를 마음먹으면 변형시킬 수 있는 가변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미래에는 인공기관과 기계가 신체와 접속될 것이며, 심지어 인공지능이 첨가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인체, 주체, 인식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Settlement'는 서로 다른 신체, 사물, 동물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다. 만약 사람이 해골을 가면처럼 쓰고 있다면 해골의 이빨이 아랫입술보다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 반대로 해골의 입장에서 보면 해골 위에 피부가 이식된 것 같다. 사람이 중심인지 해골이 중심인지 판단하기 모호한 상태이다. 'Colonization'에서 등은 끈으로 묶여서 옷처럼 보이는데, 그것과 연결된 배는 신체임에 틀림없다. 더불어 이 형상은 신발을 신고 있고 있지만, 신발의 끝부분은 발가락이다. 어떤 것이 인간의 몸이고 어떤 것이 사물인지 어떤 것이 주체이고 어떤 것이 객체인지 역시 분간하기 어렵다.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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