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Project with Korean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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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김인숙, 토탈미술관

출생

1978, 일본

장르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kimins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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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이여, 안녕_ 정효섭 기획
참여작가
김인숙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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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상’의 특별함이라고 일컬을 만큼 그녀의 사진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자신의1년 동안을 기록했던 “님에게 드리는 편지”, 가족 단위의 포트레이트 작업 “사이에서”, ’우리학교’를 지속적으로 촬영한”sweet hours”에까지.그녀가 촬영하는 타인의 일상은 가감 없는 그대로의 ‘일상’이다. 김인숙 작가는 자이니치 3세대다. 자이니치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이나 북한인을 뜻하는 말로,그들은 당대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수 많은 차별과 아이러니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그녀는 본인의 삶에까지 이어진 사회적 잣대,즉 자신이 한국인인지북한인인지,일본인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주위의 물음들에 의문을 갖게 된다.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명확히 답할 수 없었고,강압적인 쌍방의 잣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교집합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느낀다.그녀는 모호하면서 경계에 걸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자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김인숙 작가는 여타 다큐멘터리가 주목하는 보편과의 차이와 특이성에 주목하지 않고, 그 곳에 속한 채로 자연스레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렇기에 그녀가 담아내는 특별함이 보편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님에게 드리는 편지”를 썼다면, 이후로 “사이에서” 작업에서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는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는다. 이미지 속에 드러나는 대상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모호한 경계의 요소를 찾아볼 수도 있으나, 그 이전에 그들은 그저 사람이었고, 가족이었다. 그들의 보편적인 삶을 김인숙 작가가 끄집어냄에 따라 사이라는 무형의 경계는 흐려지고, 이제는 교집합이 아닌 합집합이 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또한 일본의 조선학교인 ‘우리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삶과 웃음,농밀한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sweet hours”을 보고 있자면, 그들을 향한 불필요한 편견과 잣대를 내려놓게 된다. 최근에 와서 작가는 사이인간으로 규정된 자신을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시도를 한다.”소년들이 소년들에게”에서 그녀가 주목한 건 한국인의 삶과 재일교포의 삶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고,‘학교’라는 키워드 안에서 자신의 달콤했던 시간을 타인에게 녹여내는 것이었다.이 작업은 서울의 한 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진행되었고 어른에게는 한 때 잘나갔던 학창시절의 추억을,아이들에게는 매일이 생소한 배움터로써의 ‘학교’를 함께 공유하는 자리를 갖는다.사진과 영상,설치와 퍼포먼스에 까지, 학교책상에 묻어난 손때와 그에 대한 달콤했던 시간을 쌓으며 작가는 작품 “사이에서”처럼 한국과 일본인,나아가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간다.결국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건 너와 나의 차이가 아닌 우리들이 가진 편견과 잣대뿐이었다. 김인숙 작가의 작품이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건 비단 그녀가 그들과 같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 따스함과 고즈넉함이 배어 있고, 남과 남으로 구분 짓지 않는 그녀의 교집합적 기질이 있어서일 것이다.본 전시는 그녀의 시선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자리이자,사이의 경계 지점에 있는 김인숙이 아닌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또렷한 김인숙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을 일상으로서

한국인에게 ‘재일교포’란…
 ‘재일교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그 것은 ‘무관심’과 ‘극단적인 관심’이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재일교포를 사회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시키며 강한 관심을 나타내곤 한다. 물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편향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에서 봐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와 더불어, 일반적인 한국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재일교포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와 오해, 편견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같은 나라에서 돈벌이를 해가며 살아가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재일교포 스스로도 그들 역시 보통 사람이며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때이지 않을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재일교포에게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그 다양성이란, 재일교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가 그 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들을 한 데 묶을 수는 없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개인에게 집중했을 때 ‘하나의 인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것은 김인숙 전시회의 타이틀이 이야기하듯 ‘between”, ‘사이’ 즉 ‘경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경계에서 살지 않으며, 경계를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재일교포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계에서 태어나, 경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선택되었다는 두려움과 가슴 벅참과
경계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표현을 하는 사람들은, 경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에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 미술에서 문학에 이르기 까지, ‘재일교포’라는 소재에 대한 표현 역시 대체로 그러하였고, 그로부터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재일교포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들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이지만, 한편에서는 이미 많은 재일교포 4세들이 태어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재일교포 3세인 김인숙은 경계에 살면서 오히려 ‘평온’과 ‘기쁨’까지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만끽해 왔다. 지금까지의 ‘재일교포’가 ‘비일상(非日常)’이었다면, 김인숙에게 ‘재일교포’는 ‘일상’인 것이다. 그녀의 시선과 그녀의 감성은 이러한 ‘일상’을 양식 삼아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楽)이 있고, 그것은 한 데 어우러져 평온한 일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일상예찬(日常礼賛)
작품 <사이에서: between two Koreas and Japan>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재일교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평온함은 모델이 되어 준 사람들의 표정에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인생의 황혼에 서있는 재일교포 1세 여성에서 4세를 뱃속에 품은 3세 여성에 이르기 까지. 증조할머니와 증손자에서 부부와 그들의 아들 딸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함께 한 가족사진에서 홀로 찍은 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그들이 생활하는 거실에서 필름에 담아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평온하고 풍요로운 일상이며, 그 일상을 소중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재일교포들의 일상’과 그 ‘평온함’을 현장에서 포착했다는 점에서 김인숙의 사진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스스로 재일교포이면서도 그들을 둘러싼 오해와 선입견,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그녀가 예술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바라본 세상에 대하여 솔직한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사이(경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세대와 세대의 ‘사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사이’. 입고 있는 옷부터, 방이라는 공간, 가구 및 세간, 방 안에 놓인 자질구레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사이’는 이 모든 곳에서 그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김인숙의 주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에 의하여 포착된 이 시대 재일교포들의 있는 그대로의 생활 모습은 역시 ‘사이’를 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비일상’ 이 아닌 ‘일상’으로서 재일교포들의 생활에 녹아 들어 그 의미가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아니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김인숙의 주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김인숙이 대변하는 세대의 등장으로 인하여, 비로소 ‘재일교포’가 ‘일상’이 되었다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도 말해야 할 것이다 — 그것은 재일교포 2세 즈음까지의 ‘비일상’이라는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상’이라고.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역시 ‘사이’를 통하여 연결되어있다고.



변하는 것
한국인, 일본인, 재일교포의 생김새를 구분하는 것은 3세대, 4세대로 넘어가면서 나름 한국전문가라고 자부하는 필자조차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재일교포와 일본인의 생김새는 이제 거의 다를 바 없다. 김인숙의 작품을 보며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땅과 더욱 더 동화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령 브라질로 이주한 일본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왕래가 빈번했던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적어도 생김새만으로 재일교포와 일본인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먼 옛날 한반도 각지에서 일본열도로 넘어가 오사카, 야마토, 야마시로, 단고, 오우미 지역 등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일본인이 되어갔다. 그들과 지금의 재일교포가 같다고 하기에는 그들에게 있어서 ‘사이(경계)’의 의미가 서로 다르지만, 이 의미 역시 100년, 5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변해 갈 것이다.
 ‘재일교포의 일상화’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재일교포의 일본인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식의 ‘변모’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러한 변화가 김인숙의 작품으로 인해 처음으로 포착되었다고 생각한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작품이 나를 잡아 끄는 이유는, 이 ‘변모’가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거대한 변모는 일상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그것이 변모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된다. 

글/치바 시게오(일본 미술평론), 번역/김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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