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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민,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출생

1970,  

장르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hyungminm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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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민 개인전_배명지 기획
참여작가
문형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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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민은 이렇듯 이미지를 수집하고 모으고 붙이고 변형하고 합성해 무언가를 만드는데 큰 재미를 갖고 있다. 변형이나 합성을 통해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면서, 새롭게 덧대거나 그려 새로운 창작에 응용하는 콜라주 미학에 뛰어나다. 그는 도시, 일상의 기호, 상품의 시각 이미지들을 ‘공동화’하여 새롭게 재구성한다. , , 에서는 전세계 어디서든 비슷한 기호를 생산하는 세상에 대해 얘기를 담아낸다. 해독이 불가능한 언어 차이들이 장벽처럼 작용하는 듯 보여도 한꺼풀 벗겨내면 어딜 가나 비슷한 기호들, 전경들, 스펙터클들이 존재한다. 그는 어디서든 존재하는 건물, 사람, 광고, 하늘, 자동차, 진열대, 사건 등의 기호 질서를 미니멀리즘에 기초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단순화시켜 이미지를 재구성해낸다. 물론 그는 과연 이의 배면을 가로지르는 지배의 논리가 무엇인지 이를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의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문형민 : 엄숙주의에 대한 도발과 삶에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들

문형민 작가를 잘 모르는 이는 그가 대단히 사회성 넘치거나 현실 소비문화에 비판 작업들에 천착한다고 착각한다. 필자가 그를 만나기 전에도 비슷했다. 그의 연작 Love me two times 에서 보여준 키치식으로 박제화된 듯한 모습의 맥아더 장군 조각, 그리고 밀랍으로 만들어져 녹아내리는 미키마우스 형상에서, 필자는 각각 친미로 똘똘 뭉쳐있는 한국의 우익들에 대한 조롱섞인 냉소, 그리고 미국내 만연한 소비문화와 함께하는 미 제국주의의 야욕을 추측했다. 혹자는 그의 Unknown city, Unknown stories, Lost in supermarket 등의 작품들을 ‘지움’의 미학에 서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잊혀진 도시’에서는 도시의 기억을 지우고, ‘잊혀진 이야기들’에서는 신문 기사를 지워 재배치하거나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성의 흔적을 지우고, ‘슈퍼마켓의 실종’에서는 진열장에 가득히 찬 기호들의 이름을 지우는 행위를 통해 단일화된 표상과 교환가치로 매개되는 자본주의의 괴물과 같은 모습을 보려한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작가는 필자와 같은 진지한 해석들에 고개를 젓는다.  관객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들   그렇다. 문형민에게는 애초 현실 비판이나 참여 예술이 그의 주된 작업 목표도 아니요 관심이 아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옳고 그름을 얘기하거나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계도적으로 설득해 보여주고 감성을 자극하려는 예술 행위를 불편해한다. 틀 속에 규정짓는 것에 대한 거부, 긍·부정의 논리나 비판 의식과의 거리두기, 심각하고 진부한 예술에 대한 ‘반예술’적 정서 등이 문형민의 작가적 태도를 구성한다. 그저 그는 일상에서 드러나는 코미디와 패러디적 상황을 툭툭 건들면서, ‘어, 이거 이상한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하며 관객에게 늘 되묻는다.
예를 들어, Love me two times 에 등장하는 밀랍 미키마우스 인형이나 아이싱슈거로 만든 맥아더는 나의 예상과 달리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 심슨가족에 등장하는 핵폭탄을 끼고 밀랍으로 만든 미키마우스 장난감 조각은 미 제국주의 상징이 아니다. 미국인들의 일상 속 전쟁을 보는 이중적 잣대에 대한 허망함이 녹아 사라지는 밀랍 디즈니로 표현되고 있다. 맥아더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괴한 우상화의 맹목성에 대한 농담으로 그는 아이싱 슈거를 이용해 조각을 개미밥이 되어 뜯겨 나가도록 구성한다. 이렇게 그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을 궁금해하면서 그저 그 일면을 드러낸다. 
일단 문형민은 뚜렷한 작가의식이나 작가주의에 대해서 비관적이다. 예술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회의감은 작품들에 직접적으로 투사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행동의 순수성: 45kg The Virtue of Behavior: 45kg 란 동일 제목의 그림은 문작가 스스로 써놓았으나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메모 내용에 해당한다. 작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메모 단서를 작품화해, 관객들에게 또한 어떤 단서나 답도 줄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해석 불능의 상황을 만든다. 한술 더 떠 채색된 면에 빛을 비추면 눈을 부시게 만들어 관객들이 그림을 쳐다보기 불편하게 만들었다. 작품에 뭔가를 담으려는 행위나 그 속에서 뭔가 의미를 찾으려는 진지함에 대한 조소와 풍자가 담겨 있다.
연작 시리즈 9 Objects 도 비슷하게 작가 창작의 작위성과 개성의 색깔을 철저하게 탈색해 표현하다. 혹자는 그의 ‘아홉 개의 오브제’ 연작을 보고 현대인의 수집가적이고 오타쿠적인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이라고 어설프게 오독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작품 연작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아끼는 물건들을 똑같은 앵글에서 똑같은 크기로 찍어 군더더기없이 기계적으로 디지털 프린트로 찍는 행위를 반복한다. 문작가는 오브제들에서 최대한 자신이 지닌 스타일이나 개성을 다 제거하려 한다. 앵글과 크기의 동일성은 물론이고, 오브제의 그림자조차 철저히 배제되고 배경 색깔로 사물들은 철저히 닫혀있다. 이를 꾸미는 액자 등도 없다. 그저 감정 개입을 최소화하여 메마르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작가적 존재 방식에 해당한다. 
  일상 속 해학과 코미디   그는 어린 시절 운이 좋아 컴퓨터 역사의 전설로 기록될 ‘애플 II’나 ‘맥 클래식’을 써보면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면서도 전통적 미술 작업보다는 컴퓨터를 이용해 사진, 디자인, 애니메이션, 비디오 작업을 하는 것이 그의 적성에 더 어울렸다. By Numbers Series 는 그의 꼼꼼하고 정교하게 계산된 컴퓨터 문화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연작의 작품들에서 그는 잡지에 나왔던 기사들을 분석하여 높은 빈도의 단어 10개를 정해 그에 맞춰 색감을 주어 정밀한 격자들을 그려냈다. 마치 이는 뉴미디어 학자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가 대량의 이미지를 채도와 명도에 따라 시각 통계화하여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격자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는 원래 100개의 LCD 패널 디스플레이 삼아 입력되는 기사 데이터 종류에 따라 색감이 계속해서 바뀌는 비디오 작업을 하고자 했다 한다. 비용 문제로 인해 그림 연작의 형식을 취했다 하는데, 결국 그는 이를 통해 특정의 사회적 이야기 구조에 따라 변화하는 격자의 색깔들과 패턴 구조화하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문형민은 작품 자체는 물론이고 사전에 치밀한 작업 계산과 준비 기간을 갖는다.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책을 읽고 컬러 작업의 주요 색인표를 만들어 정리하고 작품을 위해 다양한 이미지와 아이디어들을 분류해 축적한다. 작품 자체의 형식 또한 절제되고 결벽증적으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포장된다. 반면 그 작품 내면에 흐르는 기조는 가벼운 생각과 흐트러진 헛웃음을 유발하는 다층의 코드가 숨어있다. 예를 들어, 미국 팝송의 제목을 패러디해 작품에 부치는 그의 의도가 흥미롭다. ‘블러드, 스위트 앤 티어즈’ 밴드의 음악 제목을 따서 만든 I love your more than you’ll know 작품은, 애정어린 제목과 달리 한국 국회의원들이 서로 뒤섞여 싸우는 장면을 끝도 없이 촘촘히 그려넣고 있다. 이도 원래는 국회의원들간 주먹질하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담으려 했다고 한다. 그의 ‘재활용 프로젝트’ <400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런던에서의 1회 전시 후 700만원의 운송비를 들여 정식 반입하였으나 보관과 판매의 문제로 파손된 작품으로 만든 개집>이란 긴 제목의 작품도, 관객의 헛웃음을 유발하기는 마찬가지다. 개집만 남은 예술의 헛짓에 실소를 짓다가 관객들은 현실 예술생산의 비합리성을 자연스레 목도한다.
<도불습유기념道不拾遺記念, 1989 Do-Bul-Seup-Yu>이란 작품도 문형민식 풍자의 맥락이 스며있다. 그는 작품 제작을 위해, 1951년 마오쩌둥의 혁명 중국이 북한을 도와 한국의 내전을 이끈 ‘항미원조(抗美援助)’ 기념 배지를 변형하여 태평성대를 뜻하는 ‘도불습유’라는 말로 치환한다. 배지에 원래 붉은 별 한가운데 새겨진 기념일과 마오의 초상은, 1989년 엄정화의 얼굴이 새겨진 한국으로 시·공간 이동한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 엄정화가 데뷔하고 마르크스의 [자본Das Capital]이 출간된 때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이념의 상실을 기억조차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여러분,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나요?’라며 작가는 우리에게 반문한다. 낯익은 전체주의적 선동 배지에 새겨진 엄정화의 모습에 헛웃음을 짓다가도 우리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작가의 물음에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문 작가는 이렇듯 이미지를 수집하고 모으고 붙이고 변형하고 합성해 무언가를 만드는데 큰 재미를 갖고 있다. 변형이나 합성을 통해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면서, 새롭게 덧대거나 그려 새로운 창작에 응용하는 콜라주 미학에 뛰어나다. 그는 도시, 일상의 기호, 상품의 시각 이미지들을 ‘공동화’(hollowing)하여 새롭게 재구성한다. Unknown city, Unknown stories, Lost in supermarket 에서는 전세계 어디서든 비슷한 기호를 생산하는 세상에 대해 얘기를 담아낸다. 해독이 불가능한 언어 차이들이 장벽처럼 작용하는 듯 보여도 한꺼풀 벗겨내면 어딜 가나 비슷한 기호들, 전경들, 스펙터클들이 존재한다. 그는 어디서든 존재하는 건물, 사람, 광고, 하늘, 자동차, 진열대, 사건 등의 기호 질서를 미니멀리즘에 기초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단순화시켜 이미지를 재구성해낸다. 물론 그는 과연 이의 배면을 가로지르는 지배의 논리가 무엇인지 이를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의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문형민에게 인간들이 영위하는 일상 삶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그는 이들에 대한 감정이입과 특정 의식에의 강요 대신에 다층적으로 얽혀있는 이 코미디같은 세상에 대한 의문을 작가 자신과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그는 작가주의의 힘을 뺀 채 가장 건조한 방식으로 주변에 만연하는 기호들의 의미를 어떻게 우리가 독해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 독해를 가로막는, 맹신, 오독, 곡해, 불통, 해석 불가의 다층적 상황들을 드러내길 즐긴다. 물론 이해를 구하기 위한 강요는 없다. 그저 아리송한 현실의 지점들을 심각하지않게 해학과 코미디를 담아 풀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니 아쉬움은 남는다. 과연 아리송한 현실에 대해 되묻기를 반복하는 수준에서 사태의 본질이 명료해질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의 작업에서 자족적 헛웃음으로 끝나지 않는, 보다 적극적인 소통, 연대, 비판, 해석 가능의 상황들을 기대하면 필자의 욕심일까?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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