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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근, 한미사진미술관

출생

1964,  

장르

사진

홈페이지

www.kohm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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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근 개인전_김선영 기획
참여작가
고명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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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콜라주의 입체로 이루어진 고명근의 작업은 입체인 대상의 표면을 사진으로 찍어 평면으로 만들고 그 평면인 사진을 다시 입체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회화와 조각, 사진이 한 몸으로 겹치고 중첩된다. 실재가 재구성되고 여기에 이미지가 주는 환상이 어른거린다. 사진과 조각, 건축과 환영적 이미지가 한 몸에서 몇 겹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그는 조각을 전공해 이를 근간으로 사진을 이용, 조각적으로 번안하고 응용하는 작업들을 오랫동안 선보여 왔다. 평면인 사진을 입체로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은 기존 조각과도 다르고 또한 그만큼 사진을 이용한 기존의 작업들과도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을 보여준다. 기존 조각이 질량과 덩어리, 부피로 채워진다면 그의 조각은 표면으로 존재하고 가벼우며 환영적 이라 회화적 영역을 공유한다.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질량이나 덩어리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조각인 셈이다.

사진의 피부로 세운 건축

사진 콜라주의 입체로 이루어진 고명근의 작업은 입체인 대상의 표면을 사진으로 찍어 평면으로 만들고 그 평면인 사진을 다시 입체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회화와 조각, 사진이 한 몸으로 겹치고 중첩된다. 실재가 재구성되고 여기에 이미지가 주는 환상이 어른거린다. 사진과 조각, 건축과 환영적 이미지가 한 몸에서 몇 겹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그는 조각을 전공해 이를 근간으로 사진을 이용, 조각적으로 번안하고 응용하는 작업들을 오랫동안 선보여 왔다. 평면인 사진을 입체로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은 기존 조각과도 다르고 또한 그만큼 사진을 이용한 기존의 작업들과도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을 보여준다. 기존 조각이 질량과 덩어리, 부피로 채워진다면 그의 조각은 표면으로 존재하고 가벼우며 환영적 이라 회화적 영역을 공유한다.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질량이나 덩어리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조각인 셈이다.
그의 작업에는 사진기를 통한 대상의 촬영과 인화, 컬러의 조절이라는 기계적 메카니즘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필름을 현상하고 이를 반복적인 배열과 집적을 통해 입체물로 만드는 과정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미묘한 음영과 색채의 변화, 반복된 사진이미지가 집적되어 독특한 구조물로 환생한다. 실제 건축물의 표면을 모방하기 위해 건축물의 미니어처처럼 만들어지는가 하면 기이한 건축공간을 형성하는 그 조형물은 매혹적인 대상으로 현존하는데 특히나 사진 이미지에 의해 현실감과 비현실감이 교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표면에 다량의 사진을 콜라주하는데 이 방법을 통해 사진을 재구성하면서 사진의 기록성을 무화시키고 또 다른 현장성을 의도하고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도 그의 모든 작품은 일종의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초기에는 원통 혹은 사각형의 ‘건물/빌딩’을 만들어놓고 그 표면에 온갖 문과 벽 들을 찍은 컬러사진 혹은 흑백사진, OHP지에 복사한 이미지를 콜라주했다. 그가 즐겨 찍은 퇴락하고 박락된 폐허의 건물, 허물어지고 오랜 세월의 손때와 호흡에 의해 풍화된 건물의 외벽과 문짝들의 사진들이 자잘하게 붙어 있거나 연이어 반복되어 부착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현대 도시문명의 잔해이자 유적지와 같은 장소들에 다름 아니고 이는 향수와 몽환성을 동시에 풍겨 준다. 그 퇴락한 풍경들은 이 세상의 덧없음과 소멸을, 죽음의 흔적을 스산하게 부추겨 주고 있는 것이다. 하긴 사진이란 무엇보다도 죽음과의 접촉이며 살아 있는 이미지를 부동으로 화석화시킨 것이지 않은가?
그의 모든 작업은 투명하고 거벼운 플라스틱으로 마감되고 있다. 투명한 액체의 이 견고한 막은 사진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어떤 부패와 시간의 호흡을 차단하는 그런 방부제 같은 느낌을 주면서 둘러쳐져 있다. 사진 이미지를 차갑게 얼려놓은 것인데 그것이 플라스틱이라는 현대적 재료의 가변성 아래 굳어지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것은 또한 이상한 깊이를 부여하고 투명한 내부를 공개하고 열어젖힌다. 실재의 이미지를 모방하기위해 콜라주된 사진들은 그의 건물의 허구성을 또한 배가시키고 있다. 평면적인 구성, 입체적이고 설치적인 또는 오브제로서의 구성은 정교하고 새롭고 그래서 사진을 하나의 물적 매재로서 자유로이 다룰수록 그것은 현실과 사진조합의 일루전 사이에서 유동하고 있다. 사진이 가지는 리얼리티와 주제의식, 그리고 정형화된 시머트리(symmetry)와 색채감각에서 솜씨를 보이고 있는 이 작품들은 현실의 이미지를 순발력 있게 수용할 수 있는 사진을 이용해 자신이 직접 세상에 대해 보내는 시선을 물질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작가는 건물의 피부, 조각상의 피부 등을 각도에서 촬영했다. 사진은 대상을 부분적으로 절취하고 축소하고 확대한다. 자의적으로 편집한다. 얇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가벼운 플라스틱 판위로 건물, 조각상의 피부가 이동했다. 무겁고 단호한 건물이, 단단한 대리석이 무거운  무게를 죄다 지우고 얇은 판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 판들을 연결패서 입체로 만들었다. 사진이미지는 여전히 그것인 건물임을 증거해 준다. 그러나 낯설고 기이한 건물이다. 사진을 투명한 플라스틱 재료위에 프린트를 한 후 이를 잇대어서 입체로 만들어 공간에 설치했는데 그로인해 벽에 걸려야 할 납작한 사진이 입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건물의 피부들이 몸을 이루어 실제 건물의 축소판이 되었다. 물론 본래의 건물과는 무척 판이한 상태이지만 말이다. 건물을 이렇게 내 육체 안으로 수렴해서 본다는 체험은 무척 흥미롭다. 자의적으로 보는 방향과 위상에 따라 높게, 낮게 위치한 ‘건물’이 재미있다. 그런 기이한 시점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평면인 사진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지만 사물화하지 못한다. 반면 이 작가는 평면의 사진을 구조물로 만들고 입체로 전화해서 사진이 피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건물의 피부, 신체의 피부만을 재현할 수밖에 없는 사진을 다시 실제 건물이나 인체처럼 만들어 보이는 것은 사진이미지를 조각조각 모아 붙여, 즉 콜라주해서 조각화한 것이다. 이 조각은 단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지, 피부로 이루어진 조각이다. 생각해보면 기존 대부분의 조각은 표면의 이미지가 없이 어떤 물질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이 본질적으로 평면위에 밀착된 즉물적인 이미지라면 조각은 실재의 공간을 구체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물질이다. 반면 고명근은 환영에 기반을 둔 사진과 물질성에 연유한 조각의 행복한 조우를 통해 독특한 사진조각 혹은 사진인스톨레이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명근의 이 작업은 투명하고 가벼운 조각이자 온통 피부위에 자리한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보여지는 새로운 조각, 사진조각이다. 이미지 자체가 구조를 이루는 투명한 사진조각인 것이다. 조각이란 물리적 실체와 사진이란 가상적 이미지가 그렇게 만났다. 그 만남은 약간 겹치고 어긋나고 착시성 속에서 어른거린다. 여러 층으로 압축된 피부, 플라스틱판으로 인해서이다. 아울러 그는 건물의 피부와 조각상의 피부를 촬영하는데 있어 부분 부분을 찍는 시간과 진행방향에 따라 조금씩의 편차가 자리한다. 그 낱낱의 사진들을 가지런히 연결해서 하나의 벽을 총체적으로 재현한다 해도 그 안에서 색상이나 빛의 다름이 감지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사진의 재현이고 그로인해 사진은 ‘회화’에 가까워진다.
작가가 사진을 입체물로 만드는 과정은 매우 정교하고 다채롭다. 미묘한 음영과 색채의 변화, 반복된 사진으로 보여도 실상 모두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 건축물의 표면을 모방하기 위해 건축물의 미니어처처럼 만들어진 그 조형물은 매혹적인 대상으로 현존하는데 특히나 사진 이미지에 의해 현실감과 비현실감이 교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환영적 피부를 가진 이 ‘건물작업’은 새삼 우리에게 시간과 역사에 대해 상상하게 한다. 주어진 건물이라는 존재와 그 공간이 감싸고 있는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진이 인화지라는 평면, 표면에 이미지가 기생해나가면서 감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세계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하면서 기록과 반영, 모방의 가장 정확한 수단과 방법으로 구사되면서부터 미술은 이전의 그 환영에 기반을 두면서 이루어진 모든 방법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영혼과 정신의 세계, 추상의 세계라는 비가시적인 측면으로 몰려가게 된 것이다.
고명근은 조각을 사진으로 찍는다. 특정한 시점에 의해 저당 잡힌 입체물은 평면위에 안착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다시 입체적인 공간으로 재연되거나 새로운 시선에 의해 분리되어 평면에 안착된다. 사진으로 촬영한 원래의 대상이 지닌 3차원, 입체를 다시 대상이 존재하는 공간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복제하는 동시에 본래의 상황에서 부분적인 절취를 감행하여 주름과 굴곡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진과 조각을 합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한편 세부적인 시선의 ‘따냄’에 의해 낯설게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본질적으로 평면일 수밖에 없는 사진이 입체를 평면으로 만들고 그 평면을 다시 입체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부분적인 시선에 의해 본래의 문맥으로부터 절취된 낯선 풍경을 선사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그는 사진이 평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물체를 여러 각도에서 찍어서 이를 입체로 재구성한다. 혹은 데칼코마니를 통해 기이한 형상의 왜곡과 변주를 실험한다. 놀이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진이 평면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우리가 보는 대상과 공간, 그리고 시간 등의 여러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대상에 대한 새로운 지각 체험과 감각의 유희를 제공해주는 동시에 자신의 의도 아래 이미지를 변형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만들어주는데 사진이 흥미롭게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에는 입체를 평면으로 전화해내면서 그 사진 안에서 왜곡과 착시, 기이한 감각이 전이가 일어나는 것을 극화하거나 충돌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사람은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는데 있어 시간과 공간, 그리고 경험에 의한 학습과정 등을 거친다. 인간이 시각적으로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질문은 그에게 매우 중요해 보인다. 작가에게 사진이라는 매체가 특히 중요한 것은 사진이 평면이라는 점과 재현이라는 점 때문이고 사진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미지를 전환하거나 변형하는데 매력적이기 때문인 듯하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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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ox: 형상의 시간을 저장하는 몸

사진은 시간을 박제한다. 그것도 가장 신뢰할 만한 상태로 보존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은 타 장르에 비하여 다큐멘트의 기능이 강조된다. 사진은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억의 박물관이자 인간의 보조기억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고명근의 사진조각은 박제된 이미지의 시간을 물리적 조형 위에 재구성한다. 다르게 말하면, 작가 자신이 설정하고 구축한 조각적 구조 속에서, 사진 위에 정착되었던 이미지의 시간을 현재화한다. 핍진성에 가까운 사진의 사시주의는 시간의 박제가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대변한다. 하지만 시간은 공간과 물질에 결합되었던 물리적 현존을 증명할 뿐, 그것의 실체까지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작가가 투영한 시간의 이미지는 실체와는 무관한 순수한 이미지가 된다. 나아가 이 이미지는 조각의 구조 속에서 환각적인 상(illusion)으로 변모하면서, 시각적 차원을 확장한다. 그의 조각은 촉지성이나 체적을 지녔다기보다는 가시적이고 더 나아가 몽환적이다. 고명근의 작품들은 OHP 필름 위에 전사된 사진의 이미지를 가진 개별적인 조각 작품으로서 존재한다. 재료의 투명한 재질이 이전 조각의 물리적 속성이라는 폐쇄성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의 감각구조를 형성한다. 이것은 회화나 현대의 영상예술이 실험할 법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의 작품을 어떤 장르형식에 분류할 수 있을 경계가 불투명하다. 작가는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조각과의 교수였다. 하지만 그는 뉴욕의 Pratt Institute에서 사진을 전공하였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 두 장르의 결합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을 단순한 초 장르적 결합이나, 현대미술이론이 즐겨 사용하는 개념인 하이브리드(혼성주의, Hybrid) 따위로 정의한다는 것이 너무나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품은 조각이라는 몸과 사진의 이미지라는 피부를 지닌 혼합물이다. 하지만 이 두 요소의 결합이 파생시킨 결과에 대해 주목한다면, 단순한 이종결합을 통한 존재와 의미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각을 찍은 사진을 다시 자기의 조각으로 환원하는 (혹은 소환하는) 행위는 매우 흥미로운 인식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원래 사진은 무감각하거나 절대 객관적인 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는 분명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첨가되기 마련인데, 그에게도 그런 의도가 읽혀진다. 그의 사진은 양감이나 입체물의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 피부를 본다. 특히 인체조각을 찍은 사진을 보면, 그의 관심과 포커스가 거기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피부는 몸과 공간이 만나는 정말로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으며, 그곳에서 몸의 이야기를 모두 펼쳐놓는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은 기록적인 의미보다는 대상을 핧는 것과 같은 혹은 만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촉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더욱 시각적이고 그러므로 평면적이고, 무엇보다 사진적이다. 사진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일깨우는, 아니 작가는 사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아버린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80년대부터 작가는 이 두 장르를 결합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면, 초기에 물질적인 현존성이 강한 작업을 그리고 점차 비물질적인 환각성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 작품에도 이 두 요소는 적절한 비율로 평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사진이 조각을 위한 부수적인 장식물도 아니고 또한 조각이 사진을 위한 액자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조각의 물질적 현존과 사진의 시각적 현상이 형식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이루며,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의 이미지가 작가가 설정한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면, 조각의 몸은 축약된 키워드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조형요소는 한 작품 속에서 단순히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긴밀한 의미의 맥락(context)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합양태는 그의 주제 선별에서도 재확인된다. 작가는 자연(nature), 삶(building) 그리고 인간(body)이라는 세 가지 기초적인 영역을 주제로 취하고 있으며, 각 영역들의 현상학적 본질을 캐내어 그것들의 정합을 보여주려고 한다. 또한 작가는 공간, 기운, 그리고 질량적 상태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원리이자 요소를 주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형상요소는 무엇보다 그의 미학적 취향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다. 태도로 판단할 때, 작가는 미식주의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 선택이나, 그것을 가지고 작품으로서 재구성하는 과정이나 의미론적 결과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것이 거의 진언에 가까움을 느끼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인간의 신체는 장구한 조각의 역사에 있어서 90%이상을 차지했던 주 대상이었다. 다른 예술장르와는 달리 조각이 갖는 인체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작가도 인간의 신체가 지닌 아직까지도 해갈되지 않은 미적 욕구를 추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실재 인간의 몸이 아니라 그 몸을 대상으로 삼아 정련되어진 조각품들이며, 고대에서 근세조각에 이르는 다양하고 미적가치가 뛰어난 작품들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작가는 먼저 사진가로서 이 작품들의 이미지를 찾아내고 기록하였다. 조각된 신체는 인체미의 에센스를 발굴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차용은 마치 object trouve처럼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초재료로서 의의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진 미적 감동은 실제 조각이 지닌 것보다 한 단계 상승한 효과를 불러온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보는 것이 원 조각의 실체라기보다는 그것의 파편화된 (혹은 단편화된) 이미지이며, 작가의 미감과 감각이 발굴해낸 중요한 원 재료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 속에서 재편됨으로서 원본이 지녔던 에센스를 작가 특유의 조형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조각 작품을 이용한 조각 작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엄격하게 보면, 작가는 단지 이미지를 빌려왔을 뿐이며, 또한 그 이미지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원 이미지들을 작가는 자신의 조형의도에 조응하여 재구성하고 있는데, 부분인용이나 중첩 그리고 데칼코마니와 같은 병치는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형상문법이다. 이 매 과정의 선택이 또한 예술상의 중요한 작업원리로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제유적인 형상논리가 포함되면서 보다 섬세한 조형언어로서 다듬어지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치밀한 형상사유를 보여준다고 하겠다.유구했던 하지만 이제는 폐허에 가까운 건물의 파편들이 모여 새로운 조형물로 재탄생된다는 것이 작가 고명근의 고고학적 작품론이라 하겠다. 이전 작가는 브루클린 거리의 낡은 집들의 창과 문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콜로세움을 만든 적이 있다. 낡은 것은 시간의 유물이다. 작가는 이 유물을 모아 새로운 건축을 시도한다. 마치 바벨탑과 비슷한 혹은 일종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키는 그의 조각건축은 시간을 초극한 또 다른 기념비가 되고 있으며, 인간의 익명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역사를 이루는 것을 건축이라는 대상을 통해 반영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이 작품들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유적지'라고 지칭했지만, 삶의 궁극적인 흔적으로서 형상은 오히려 고고학적 유적지라고 하는 편이 낳을 것 같다. 건축가로서 작가는 역사와 삶의 시간을 남긴 집들의 피부인 벽을 평면에 전사하고, 이것을 완벽한 대칭의 구조로서 배치한다. 대칭은 작가의 작업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형상문법이다. 이 구성은 인위적이긴 하지만, 원래 대상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미적 개념을 생성시킨다. 절대적 평형과 더불어 대칭은 신성(신성)에 이르는 즉 감각적 경계를 초극하는 수단으로서 작품에 사용되며, 시뮬라크르와 함께 현대미학의 또 다른 화두인 숭고미(sublime)를 지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그의 자연은 숭고한 자연이다. 궁극의 의미를 상징하는 자연은 기, 운동 그리고 에너지 등 비물질적인 것에 의해 생명을 획득한, 아니 그것이 곧 생명인 기호들로서 나타난다. 고명근은 이러한 자연의 전체를 제유하는 방식으로 가장 원리적인 조형의 틀을 준비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크리스탈이나 정육면체 혹은 매우 간단한 형태의 집의 모양을 갖춤으로서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을 담아두는 용기처럼 보인다. 이미지와 조각 구조의 만남은 자연이 지닌 유기체적인 혼돈성에 작가가 만든 조형적 질서 속에 재편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므로 조각의 몸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의미와 상징을 보유한 자율적인 매개체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형태가 풀, 나무, 물, 하늘 그리고 대기 등 근원적인 것과 조형적 의미론으로 긴밀한 의미소통을 수행함으로서 관객의 관조적 시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자아의 성찰을 요구하는, 마치 종교적 대상물처럼 변화한 모습으로 보여진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작가는 자연을 투명한 조각의 방 속에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공간을 형성시켜 놓고, 전체의 자연의 핵심적인 부분을 성유물(holy relic)처럼 전시한다. 또한 건축적인 형태의 몸을 상정함으로서 자연을 담은 용기가 하나의 성소나 제의적 장소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이러한 모습은 자연의 궁극적 섭리를 신화나 종교의 상징체계로 설명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더 나아가 이러한 체계로서 영원과 무한 그리고 심연과 같은 숭고미의 표본을 제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이라는 소우주 속에서 자연은 조형적 질서를 찾고, 또한 평정과 의미를 획득한다. 고명근의 조각은 다른 형태의 Camera Obscura(방)이 된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고명근의 것은 밝다는 점이다. 그 방의 표면은 바로 작품의 피부가 되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입방체로서 존재한다. 몸을 이루는 물리적 구조는 이미지를 지니기 위한 매체이자 동시에 이미지가 말하는 내용을 요약한 지극히 개념적인 존재이다. 이 형상성은 스스로의 굴곡이나 주름(들뢰즈 식으로 말하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평면을 제공하는 것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그 평면은 바로 불러온 이미지가 또 다른 활동력을 얻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평면으로 구성된 입체는 빈 공간을 제공하고, 이곳은 이미지가 투영되어 순수공간을 이룰 장소가 된다. 그의 작품은 형상의 피부가 몸을 대신하거나 그것을 가상적으로 채운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기관 없는 신체" (역시 들뢰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명근은 조각이란 물리적 실체와 사진이란 가상적 이미지가 만나는 지점을 정하고 그것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빗나가도록 혹은 슬쩍 겹쳐지도록 하면서 약간은 불명료하면서, 즉 촉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환상적 공간감을 형성해 낸다. 이를 위하여 작가는 여러 층으로 압축된 피부(플라스틱) 판을 만들어냈다. 그 판이 중첩되면서 파생되는 약간의 불명료함이나 이미지들의 충돌현상이 빚어내는 몽환성과 현기증을 유발시키는 시각작용은 일상적인 인간의 눈으로 얻기 힘든 체험을 가져다주며, 이 속에서 우리는 감각의 허무함과 더불어 이미지의 순간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작가는 "몸은 우리의 외피이며 우리는 그 안에 기억, 감정, 의지를 담는다. 몸은 인간의 일차적인 한계이며, 결국 인간은 그 한계 안에서 갇혀 소멸한다. 그리고 그 소멸이 있어서 몸은 진정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의 언급에는 이미지의 속성인 순간성, 그리고 그것이 지닌 허무주의(Vanitas)와 가상성(simulation)이 작품 속에서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이 두 관념의 영역이 교차되면서 그 지점이 작품을 이룬다. 다시 말해 물질적 순간이 작품이며, 이 순간은 공간성의 현존이 시간의 관념과 교차되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그 지점은 바로 가상이 숭고라는 관념적 차원으로 전이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명근 작품은 현대미술의 거대한 화두이자 이상인 시뮬라크르와 숭고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김정락 (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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