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헌
민병헌의 작품을 마주하면 ‘희미함’이란 단어가 맨 처음 떠오르고, 흐르는 시간, 지금은 사라져버린 잊혀졌던 감각들이 느껴진다. 그는 동양적이며 동시에 서구적 회화 전통에 기반을 둔 채 ‘자연’을 주제로 일련의 시리즈로 작업을 꾸려나간다. 눈 덮인 산야, 안개 낀 도시와 들녘의 하늘, 갈대 숲, 어둠, 나신(裸身)등 실재 현실의 풍경은 그의 ‘순간 포착’으로 담겨지며, 이어서 섬세하고 덧없는 감동의 추상화로 발현된 독특한 이미지로 창조된다.
민병헌의 관심사는 자연의 변형, 그 변신으로서, 예를 들어 식물, 비, 바람, 폭풍, 눈, 피어나고 사라지는 안개 등에 대한 작가만의 재해석을 통해 작업에 이르는 것이다. “자연이 거기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거기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거나, 모습을 바꾸면, 우리는 그제 서야 거기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오로지 결핍의 순간에만 다시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대단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 사소한 것,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들에 관심을 두고자하며, 그것들을 정말 몸소 느낀다”. 이렇게 민병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음미하고 느끼며, 자연과 일체가 되는 자신만의 열정적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병헌은 오직 흑백으로 작업한다. 비단처럼 윤택하고 은은한 회색조와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은 시적이고 세련된 그의 창작세계를 한층 더 강화시키며, 마치 한 폭의 수채화나 서예 작품을 보는 듯 거의 동일한 미감을 뿜어낸다. 작가는 본인의 작품을 “새벽녘 입안에 남은 전날 밤 꿈의 맛과 닮았다”고 표현한다. 모든 것이 그에겐 감각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카메라 셔터를 누른 그 순간을 프린트 과정에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관건이란 것이다. 그는 1998년 이래로 서울 집에서 양평군 서정면 문호리 작업실을 오가며 <안개> 시리즈를 구상했으며 마침내 완성했다. 일출과 일몰에 맞춰 강가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그의 길을 뒤덮고, 식물과 가옥, 자욱하고 빽빽한 하얀 운무 속에 파묻힌 산봉우리를 연기처럼 채운다.
민병헌의 <안개> 시리즈 작품을 형식적인 측면에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구성의 단순함, 형태의 순수함, 미니멀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색채와 관련해서, 흔히는 밝은 회색에서 순수한 백색, 그리고 드물게는 진한 단색조 회색을 추구하며 그 색조들의 단조로움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원근법과 콘트라스트의 부재로 특징지을 수 있다. 물론 그의 <안개>는 그 크기에 상관없이, 온통 세밀한 것들로 넘쳐나며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 버리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갖가지 감각들의 세계로 감상자의 시선을 인도한다.
공학을 전공한 뒤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민병헌은 그 무엇보다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처럼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사진의 기록적 역량에 작업의 가치를 두고자 한다.(1970년대 한국의 사진가들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일단 처음 기록된 이미지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실재를 훼손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다시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민병헌은 ‘순수 사진’의 신봉자로서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추상화를 지향하며,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한 시리즈에서 다른 시리즈로 나아가며 서로를 융합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눈 덮인 작은 골짜기는 여성의 나신을, 산 정상은 하늘을 향한 여인의 젖가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눈보라는 숲을 덮으며, 운무는 나무 꼭대기에서 하얀 장막을 드리운다. 반면 민병헌은 최초의 음화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지만, 현상 시에는 기꺼이 손을 대어 교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사진을 찍었을 때 자신이 보았던 것, 느꼈던 감각,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느낌을 생생히 재생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무한히 작은 것, 만질 수 없는 어떤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작가는 자신이 어떤 것을 느끼는 찰나를 기다리고, 자신의 무의식이 명령하는 그 순간 마침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다시 암실로 돌아와 현상과 인화작업을 거치며 그 찰나의 경험을 재차 반복하는 것이다. 민병헌은 프린트의 색조가 그의 첫 감동을 정확히 반영해줄 그 순간 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추상적 형태, 뒤엉켜 변형된 시각, 을씨년스런 풍경, 무의식의 역할 등은 우리에게, 우리 서구인들에게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민병헌은 유럽의 초현실주의(surrealisme)에 특별한 관심을 둔 적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그의 <안개>시리즈는 브라사이(Brassai)의 <파리의 밤> 모습을, 안개 속의 네이 장군(le Marechal Ney) 상을 떠오르게 하는데, 브라사이는 스스로가 초현실주의자로 비춰지는 것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작품에 있어서 초현실주의란 시각에 의해 환상적으로 표현된 현실일 따름이다. 나는 사실을 표현하려고만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그 이상 초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예술 사조나 예술 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민병헌 역시 이 문장을 공감할 것이다. 결국 민병헌의 작품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듯, 시간의 밖에 놓여 있는 듯, 사적 은밀함 속에 격리된 듯 오늘날 한국 동시대 미술의 일부가 된 대형 사이즈의 ‘조형적 칼라 프린트의 해일’ 주변에서 자신을 방어하며 키워나가고 있다. 극도의 섬세함으로 이뤄진 민병헌의 작품은 자연을 관찰하는 인간의 감성이 더해져 낭만적, 서정적 흔적을 간직한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메아리로 울리며, 살아있거나 잊혀진 감성들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평화의 안식처로서 명상과 내적 성찰의 순간을 제공한다.
엠마누엘 드 레코테 (파리시립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