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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애, 영은미술관 facebook

출생

1972, 서울

장르

회화, 설치, 미디어

홈페이지

www.songchang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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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WATERSCAPE, 그 새로운 통찰(洞察)_이지민 기획
참여작가
송창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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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애 작가는 영은미술관과 2013년 영은창작스튜디오(Youngeun Artist-in Residency) 8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활동했던 인연이 있으며, 현재 영은레지던시 역대 작가로서 영구히 기록되어 있다. 작품의 주된 소재와 기법, 그 속에 함축된 의미,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공동 주체는 바로 ‘물’ 이다. ‘물’은 작가가 은유적으로 혹은 직설적으로 표현하고픈 모든 것들을 총망라하며, 그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가 느끼고 바라보는 모든 매개체를 상징한다. 송창애식 ‘물’의 표현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무한히 반추되는데,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고, 그 밝음 속에 어둠이 있듯, 서로 상반된 존재들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을 보고 느낄 수가 있다. 이렇듯 불규칙, 불특정이 아닌 작가 고유의 주파수와 파동을 지닌 결정체를 무한히 보여주고자 함이며,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과 삶에 대한 통찰을 은유적으로 명상해볼 수 있다. 이번 2016년도 KAP 전시에서 새로이 보여지는 것은, 기존의 평면작이 확장되어 공동 프로젝트 일환으로 설치와 영상작을 선 보인다. 이 전의 평면작에서 작가의 주관적 내면세계를 중점으로 표출하였다면, 최근에는 우리 사회 속 이슈들 (세월호 침몰사건, 2014)이 투영된 사회관계학적 풍경을 통해 이 둘이 지니는 직,간접적 상관 관계성에 대해 혹은 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관계 속에서 예술 작품을 매개로, 더 많은 이들과 교감해 가고자 하는 작가의 강한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리라. 앞으로 그가 지속적으로 보여 줄 ‘물’의 상징성과 표현적 기조방식에 기대가 되는 바, 개인과 개인, 개인과 타자, 개인과 사회의 관계성에 대해 신선한 지평을 열어주길 바란다.

[송창애, 풍경의 스펙트럼] 하나의 풍경은 다른 풍경을 품고 있다

삶도 그렇지만 작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무언가를 향한 모색의 과정일 수 있다. 설익은 의미와 모호한 형태를 부여잡고 의미가 또렷해지기를 기다리고 형태가 분명해지기를 기다리는 과정이다. 동물은 순간을 살고 인간은 시간을 산다고 했다. 순간의 지속인 시간은 그 속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인과론과 함께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인문학적 발명품이다. 그 시간의 축에 순간을 위한 자리는 없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물고 물리는 반성과 인과의 과정이 있을 뿐. 그 희미하고 치열하고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다보면 아주 이따금씩 불현듯 의미가 또렷해지고 형태가 분명해질 때가 있다. 경향성이라고 부르는, 아님 유형으로 명명되는 형식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송창애의 그림은 이처럼 희미하고 치열하고 지난한 모색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매스 혹은 매스케이프로 명명할 만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그렇게 의미가 또렷해지고 형태가 분명해진다. 매스케이프? 유기적인 덩어리 풍경이라는 말이다. 유기적인 덩어리 풍경? 모든 덩어리는 유기적이다. 부분과 부분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야 비로소 덩어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유기적인 덩어리 풍경을 어떻게 가시화하고 실현하는가. 사실 작가의 그림은 또렷한 의미와 분명한 형태가 무색할 정도로 그 의미도 흐릿하고 형태도 모호하다. 적어도 첫인상은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흐릿한 의미와 모호한 형태 위로 뭉실한 구름 같기도 하고 아득한 숲 같기도 하고 얼기설기한 잡풀이나 잡목 같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알 수 없는 얼룩 같은 비정형의 풍경을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림에 가까이 다다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알 수 없는 얼룩처럼 보였던 비정형의 풍경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는데, 벌거벗은 사람들이 얼기설기 엉켜져 있는 살풍경이다. 자연 풍경인줄로만 알았는데, 아님 비정형의 얼룩으로 표상되는 심의적이고 관념적인 풍경인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살풍경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첫인상이 다르고 실제 그림에 직면했을 때의 인상이 다르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그림이 틀린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연풍경(구름이나 잡목 같은)과 관념적인 풍경(자동기술법의 흔적이며 무의식의 얼룩 같은) 그리고 여기에 살풍경(살덩어리 같은)까지 하나로 포개진 풍경의 레이어는 어떻게 왜 그려진 것이며 그 의미 또한 어떤 지점을 겨냥하고 지시하는가.

 

 

그 의미? 살풍경이라고 했다. 그림의 의미론적이고 형태적인 씨앗 아님 원형에 해당할 이 살풍경은 원래 미디어를 통해 접한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라크 전쟁 포로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피라미드처럼 벌거벗은 채 포개져 있는 인간군상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옮겨 그린 후 복사기를 이용해 드로잉을 무한 복제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이미지를 화면에다 콜라주하고 연필과 먹(흑연)을 이용해 가필한 그림이다. 먹의 농담과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맺힌 자국과 같은 회화적인 과정으로써 살덩어리로 나타난 적나라한 재현적인 화면을 덮어서 가린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렇게 가림으로써 재현적인 상황논리(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오히려 더 잘 드러나 보인다(효과적으로 아님 전략적으로 노출된다?). 그렇게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자연풍경 속에 숨은 살풍경이 보이고, 관념적인 풍경에 가린 사회학적 풍경이 보이고, 알만한 풍경의 이면에 예기치 못한 의외의 풍경이 보인다. 바로 중의적 의미이며 양가적 의미이다.

 

 

이처럼 모든 의미는 겉보기와는 다르고, 그 자체 결정적이지도 않다. 언제나 하나의 의미는 다른 의미와 연결돼 있고, 때로 표면적인 의미는 자기와는 대극적이고 대차적인 의미에 연동돼 있다. 그렇게 전혀 상관없는 줄로만 알았던 자연풍경과 살풍경이, 사회학적 풍경 아님 존재론적 풍경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삼투되고 있었다.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처럼 매스케이프 연작에서 작가는 자연풍경과 살풍경이, 관념적인 풍경과 사회학적 풍경이 하나로 연동된 경계 위의 풍경을 그린다. 그 경계는 또렷하기보다는 흐릿하고, 결정적이기보다는 가변적이다. 이런 경계의 풍경을 그리면서 비록 자신의 그림이 표면적으론 자연풍경을 그린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어떻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풍경에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어떻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의 한 형태일 수 있는지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근작에선 의미론적으로나 형태적으로 존재와 존재가 하나로 연결돼 있고 연동돼 있다는, 상대적으로 더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실의 인식에 이른다. 기왕의 그림에서 예시되어졌던 인식, 이를테면 자연풍경과 살풍경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을 강조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인식을 주제화한 작가의 그림은 의외로 미디어 친화적이다. 전작에서 복사기를 사용해 콜라주할 그림을 무한 복제한 것이나 미디어에서 최초의 발상을 취한 것, 근작에서 붓 대신 에어브러시를 사용해 그린 것이나 사진과 회화적인 과정 내지 화면을 합성한 것이 그렇다. 전통적인 먹그림의 생리를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인 형식실험이랄 수 있겠다. 특히 에어브러시를 사용해 그린 그림이 결정적이랄 수 있는데, 검게 칠한 바탕화면을 바람을 이용해 지우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태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따른다. 회화적으로 지우개 소묘나 백묘법 그리고 암화기법의 변주 정도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칠흑 같은 바탕 화면을 무의 메타포로 본다면, 무에서 유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며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자체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유래한 것으로 보는 우주의 기원신화와도 맞물리면서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되고 심화된다.

 

 

그렇게 주로 구름과 바다 이미지가 그 경계 너머로 몸을 섞는 산수풍경(아마도 태초의 풍경이 그랬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원초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을 보여주고 있는데, 흡사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수면에 이는 잔잔한 파도나 격랑을 떠올리게도 하고, 수면에 일렁이는 빛 여울을 보는 것도 같다. 보기에 따라선 산수풍경을 찍은 사진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의외의 정치한 묘사가 돋보이는데, 아마도 에어브러시를 사용한 부드럽고 유기적인 선묘 탓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라인 바깥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맺힌 미세한 얼룩이며 자국이 에어브러시가 만든 유기적인 선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질감을 연출해 보인다. 대개는 모노톤의 화면이 장식적이고 정적이고 관념적 내지는 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보이면서, 풍부한 중간계조를 함축하고 있는 화면이 단순한 시각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 부드럽고 촉각적인 성질을 암시한다.

 

 

아무래도 풍부한 중간계조를 함축하고 있는 모노톤의 화면 위로 부각되는 부드럽고 유기적인 라인이 특징이랄 수 있을 것인데, 그 선이 어우러져서 구름과 바다가 경계를 허무는 풍경을 화면 위로 밀어 올린다. 그러면서도 그 풍경은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재현적인 풍경으로서보다는 자기 내면의 관념을 투사한 내면적인 풍경이며 관념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풍경으로 하여금 내면이며 관념의 표상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 만큼 풍경은 분방한 기의 흐름이며 에너지의 표출을 연상시키고, 자연의 결이며 바람의 결, 시간의 결이며 숨결 같은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존재의 결을 상기시키고, 상호 이질적인 계기와 계기들이 하나의 층위로 겹치고 포개진 존재의 레이어를 떠올리게 한다. 변화무상하고 천변만화한 자연과 존재의 생명력을 암시하고, 생성과 소멸을 순환하고 반복하는 존재의 원리로서의 파동이며 파장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파동이며 파장을 매개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연속된다. 그 파동이며 파장을 전통적인 미학적 덕목으로 치자면 기운생동 중 운에 가깝다.

 

 

대비되는 문법도 확인되는데, 가로나 세로 화면 중 일부를 순수한 추상화면에 할애해 재현적인 아님 관념적인 형상을 표현한 화면과 상호작용하게 했다. 조형의 일부로서 차용된 기하학적 추상화면과 에어브러시로 그린 유기적인 화면이 서로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이런 모노톤의 화면과 함께, 더러 그 화면 위에 노랗고 빨갛고 파란 원색을 전면적으로 덧입히기도 하는데, 그 색채감정이 흥미롭다. 셀로판지와 같은 투명하고 맑고 깊은 색감이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의 빛의 질감을 연상시킨다. 내면의 빛(이를테면 카라바치오와 렘브란트 같은)과 외광파(인상파와 같은), 조명과 같은 인공의 빛(팝아트에 연유한) 이후에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의 질감을 감지하고 적용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이런 형식실험의 지점 지점들을 매개로 감각적 재현(이를테면 구름이며 바다 같은)에서부터 내면의 메타포(이를테면 생명력의 분출이나 기의 흐름 같은)에 이르는 풍경의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일종의 내면풍경이며 심의적인 풍경을, 존재론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고충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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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애의 회화-흐르는 물처럼, 물속에서 나를 만나다

강물 옆에 집을 지으면 사람이 우울해진다고 했다. 허구한 날 강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강물에 내가 동화되는 탓이리라. 강물에 내가 동화돼 우울해진다? 강물에 내가 모르는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를테면 사람을 빨아들여 우울하게 만드는 주술이라도 거는 것일까. 사람을 홀리는 것이며 사로잡는 것인데, 전통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물아일체의 경지가 되겠다. 물론 물아일체 자체는 사물과 내가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치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처럼 주와 객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체되는 차원으로 치자면 물보다 더 적절한 예를 생각하기 어렵다. 사물을 물로 대체해 읽을 때 물아일체의 경지가 더 실감나게 와 닿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물은 사람을 빨아들이고 홀리고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사로잡아 우울에 빠트린다. 여기서 우울은 우울 자체로서보다는 내면의 유비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물은 말하자면 우울에 빠트리면서 사실은 내면에 빠트린다. 물에 빠진다는 것은 곧 내면에 빠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물이 온통 내면이 된다는 말이며, 그 흐름에 의탁해 온갖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물이 곧 내가 된다는 말이며, 흐르는 강물이 곧 내면에 흐르는 강물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물이 되고 물은 내가 된다. 그러므로 강물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은 내면화한다는 것이며 자기와 만나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물을 그린다는 것은 나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며(나르시스의 신화를 되새김질하는 행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며, 존재의 원형 아님 원형적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다(여기서 알브레히드 뒤러가 그린 멜랑콜리아가 사실은 예술가를 그린 것이며, 이로써 우울한 기질이야말로 예술가의 타고난 자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우울한 기질은 사실은 내면화의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굳이 예시해야 할까).

 

 

 

 

송창애는 물을 그린다. 그런데 그냥 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그린다. 물과 내가 동화되는 것으로 치자면, 그 동화가 더 잘 일어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냥 물을 그리는 것이 물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두기가 유지되는 경우이며 주와 객이 분리된 경우라고 한다면, 물로써 물을 그리는 것은 그 거리가 삭제된 것이며 소거된 경우이기 쉽다. 아마도 작가가 굳이 물로써 물을 그리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을 그리면서 물 자체(아마도 칸트의 물 자체와 그 의미가 다르면서 통할)를 그리고 싶었고, 물에 동화되고 싶었고, 그렇게 물을 그리면서 사실은 나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곧 물이고 물이 곧 나라고 말하고 싶었고, 내가, 존재가, 세계가, 우주가 다름 아닌 물이라고(아님 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지며 차원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실제로 작가의 그림 중 사진을 합성해 그린 그림이 물과 작가가 하나로 동화되는 과정을 예시해준다).

 

 

 

 

작가는 물 이전에 원래 풍경을 그렸었고 바다를 그렸었다. 그러나 그 풍경이며 바다는 반드시 풍경이며 바다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것이었고, 풍경 같은 풍경이며 바다 같은 바다를 그린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독특한 작화방식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데, 먼저 흑연 층과 안료 층을 화면에 도포한 연후에 에어브러시로 바람을 뿜어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흔적으로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 흔적은 엄밀하게는 바람이 그린 드로잉이랄 수 있겠고, 바람이 그린 그림답게 그 형태가 고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는 않다. 다만 인식의 그물망에 붙잡힌 선입견의 지평이 있어서 그 선입견에 견주어 볼 때 어슷비슷한 형태를 떠올려줄 뿐이고, 그 형태가 우연하게 풍경이며 바다처럼 보일 뿐이다. 여기에 작가의 바이오리듬도 이런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인 성질을 강화시켜준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바람이 그린 것이고 바이오리듬이 그린 것이다. 풍경이며 바다를 전제하고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바람이며 바이오리듬이 그린 그림이 우연하게 풍경이며 바다를 떠올려준다는 말이다.

 

작가의 그림은 안료 층이 채 마르기 전에, 그래서 바람과 안료가 여전히 상호작용하는 동안에 재빠르게 그려져야 하고, 그래서 일단 시작을 하면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유독 작가의 그림이 다작인 이유를 알겠고, 덩달아 고도의 집중력과 직관력이 요구되는 것임을 알겠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그래서 풍경 같고, 바다 같고, 기의 흐름 같고, 에너지의 파동 같고, 빛의 파장 같고, 네거티브 필름 같고, 응축된(아님 분출하는?) 생명력을 그린 그림 같다. 감각적 실재를 떠올리는가 하면, 관념적 실재를 암시하기도 하고, 여기에 물리적 현상과 같은 자연현상마저 상기시켜준다. 하나의 그림 속에 다른 그림들이 포개져 있는데, 아마도 풍부한 암시력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 속에 형태를 고정시키기보다는 암시한다. 주지하다시피 암시란 형태나 의미를 고정시키는 대신 어느 정도 열어놓는, 그래서 다른 형태나 의미를 불러들이는, 그리고 그렇게 불러들여진 다른 형태나 의미와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럼으로써 실제로 그려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그리고 그렇게 그림의 영역이며 범주를 확장시켜주는 감각적 스킬 같은 것이다. 어쩌면 예술이란 이런 암시의 기술일지도 모르고, 그 기술은 특히 작가의 그림에서 설득력을 얻고 당위성을 얻는다(이렇듯 형태나 의미가 열린 그림은 표면적으로 물을 그린 근작에서 적어도 물과는 다른 아님 물에는 없는 것들, 이를테면 성기나 얼굴을 떠올려주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작가의 근작은 물로써 물을 그린 그림이란 점에 그 특정성이 있다고 했다. 전작에서의 주요 과정이며 성과 중 상당부분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 물을 사용해 그린 것이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아마도 그동안 무()정형의 형태를 그리면서, 아님 바다를 그리면서 물을 떠올렸을 것이고 물 자체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아님 바이오리듬과 직관력이 그림을 그리게 해주는 결정적인 계기이며 동력으로 작동하는, 그런 종류의 그림인 만큼 생리며 생명의 순리가 자연스레 물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렇게 작가는 물을 그리는데, 이번에는 에어브러시에 바람과 함께 물을 탑재시켰다. 여전히 흑연 층과 그 위에 도포된 안료 층과의 상호작용에 연유한 그림이지만, 이번에는 바람이 아닌 물이 매개가 되는 것인 만큼 그 표면효과가 상대적으로 더 부드럽고 미묘하고 섬세하고 내면적이다. 마치 물 자체에 내가 동화되고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과정이며 경지며 차원을 그린 것 같다. 그렇게 그림은 수면에 일렁이는 잔잔한 파문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미세한 비정형의 얼룩들과 더불어 자잘한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정과 동을 그린 것인데, 정과 동은 자연현상을 넘어 내면풍경으로 확장된다. 말하자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부유하는 빛의 다발을 보는 것도 같고, 무의식의 심연을 떠도는 한줄기 가녀린 의식의 가닥을 보는 것도 같다. 격랑처럼 육박해와 온통 사로잡는가 하면, 그 끝이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저편으로 물러나 잔잔하고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불현듯, 나는 지금 어디에 서(속해져) 있는가. 물 밖에서 물을 쳐다보고 있는가, 아님 물속에서 물을 쳐다보고 있는가, 이도저도 아님 이미 물이 된 내가 물을 쳐다보고 있는가(여기서 불현듯 나비와 장자가 합치되고 주와 객이 합체되는 장자몽을 떠올리는 것은 뜬금없는 일인가). 이처럼 작가의 물 그림은 존재의 지정학적 위치며 존재의 위상학을 주지시킨다. 물 그림이 자연현상을 넘어 내면풍경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탓에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에 화면 전체를 수면(아님 수중?)으로 가득 채워 그리는 작화방식이 마치 물 자체와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물에 내가 동화되고 있는 것 같은 상황논리를 실감 있게 전해준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물속에 빠트리고, 내면에 빠트리고, 칠흑 같은 어둠속에 빠트리고, 무의식과 심연 속에 빠트리고, 우주 속에 빠트리고, 존재가 유래한 원형이며 원형질 속에 빠트린다. 여기는 자궁인가 양수인가. 연옥인가 무인가. 죽음인가 어둠 자체인가. 작가에게 물 자체는 물을 의미하지만, 칸트에게 물 자체는 선험적으로 소여된 것이며 감각적 실재의 원인으로서 그 자체는 재현의 대상이 아니다. 여하한 경우에도 재현될 수 없다는 말이다. 작가는 혹 물을 그리면서 사실은 물 자체를 그리고 싶었고, 재현될 수 없는 것을 그리고 싶었고, 재현 불가능한 것과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고, 그렇게 존재의 궁극에 도달해 폭죽처럼 산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사로잡힘 혹은 빠트림, 아님 사라짐 혹은 산화에는 깊고 투명한 블루도 한 몫을 한다. 깊고 투명한 청색은 어둠 속을 부유하는 가녀린 빛의 다발과 함께 작가의 근작을 감싸는 아우라에 속한다. 낭만주의에서 청색은 죽음의 색깔로 알려져 있고, 알다시피 낭만주의는 현세가 아닌 내세에 필이 꽂혀 있었던 시대였었고, 청색은 바로 그 내세로 인도해주는 상징 색이었다. 다만 흑연과 안료와 물의 상호작용이며 여기에 종이의 흡수하는 성질이 어우러져 만들어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인, 아마도 감각만이 알고 있을 이 오묘한 색깔을 빌려 작가는 우울한 존재, 그러므로 내면적인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고 싶었고 그 자신 이 심연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고충환(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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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애의 시리즈에 부쳐

송창애가 사용하는 작품의 제목은 덩어리, 대중 혹은 군중을 지칭하는 mass와 어수선함 혹은 혼란을 지칭하는 mess의 합성어이자 신조어로서 홀로코스트(Holocaust), 아부 그라이브(Abu Ghaib) 사태, 중국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고통의 상징이 되었던 인간 마루타가 나뒹굴었던 땅을 지칭하며, 이러한 시신들이 거대하게 펼쳐진 대지 혹은 상징적으로 비극이 만연한 시대를 함의한다. 그래서 는 시대성과 장소를 동시에 지칭하는 저주받은 시대 혹은 저주받은 장소를 은유하는 키워드로 풀이된다. 이러한 키워드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방향이 범상하지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는 매우 시사적인 담론이 숨겨져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우선 작가는 현시대의 글로벌시대에 걸맞게 국내 혹은 인접국가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각에서 보여진 미묘하고도 섬세한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며, 지구의 저편에서 생겨난 비극들에 대해서도 마치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힘을 가졌다. 그래서 온 인류가 함께 고통하고 있는 인류애적인 시각에서 하나의 사건 혹은 그와 밀접한 의미들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유는 세계의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그 지역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파장을 미치며 경우에 따라서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비극적인 사건들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리즈의 작품들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건, 혹은 우리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 등으로 비약해서 읽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한국 사람들은, 한때 거대하면서도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으나 쉽게 잊는 습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가령, 상수대교의 붕괴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등에 대하여 불과 수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쉽게 잊고 사회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의 비극이 단순히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그에 준한 필연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비극의 저편에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하게 한 커다란 오류 혹은 범법과 같은 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상황에 대하여 무심한 사람들에게 즉, 단순히 어느 우연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음성과도 같은 역할을 하려는 것이 의 제작의도라 하겠다.

  이러한 거대비극을 제공하는 원인을 분석해보면, 홀로코스트의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650만 명의 유대인이 잔혹하게 학살된 인류 최대의 비극을 말하는 것으로, 나라가 없는 유대인들이 한시적으로 독일에 정주하면서 히틀러에게 당했던 사건을 말하는 데, 그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구약시대의 야곱의 아들들이 막내였던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아버린 뒤에 닥친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식량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이집트에서 살았던 이후 노예가 되어버린 뒤, 모세에 의해서 극적으로 구출되었으나, 그러한 이집트의 속박 이후에 나라가 없이 되어버린 것과 다른 하나는 로마의 식민지 시절에, 죄 없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였던 것 등을 들 수 있다. 아부 그라이브 사건의 경우는 인간의 덩어리, 혹은 무덤을 보여준 것으로 이라크 전쟁 당시에 발생하였던 희대의 사건을 지칭하는 바, 그 원인이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과 같은 이라크 정치지도자들이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더불어 9.11 테러와 같은 심각한 범죄의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마루타와 같은 비극은, 식민지 시절에 731부대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게 하였던 것으로서, 후기 조선시대의 심각한 부패와 노론소론 등의 당정싸움으로 나라의 안위를 돌보지 못했던 원인들이 36년간의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거대 사건을 촉발하는 잠재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극에 대하여 작가는 인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작가는 인류에게 이러한 원인제공을 한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서, 직간접적으로 역사적인 비극을 야기시킨 사람들의 이기적인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오면서 결정한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상징적인 시각언어를 통해서 제시하려는 것이다.

    

<추상과 구상의 사이에서 등장한 구름기표>

  시리즈는 구상과 추상 혹은 설치의 사이에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표현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 있어서 표현체로서의 기호적인 표현의 범주에서 자유롭게 왕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기표들은 어떤 경우에는 구상성이 강한 이미지가 바탕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색채의 이중기호가 대조적으로 충돌하거나 병치되어 있어서, 미적 기호로서의 호소력을 강하게 하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작품 시리즈의 경우는 블랙에서 버밀리안으로 이어지면서, 여백의 백색기호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실재적으로 전체가 불게 물든 상황과는 다른 강렬함을 바탕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기호를 너무 잔인하게 혹은 너무 심각하게 비쳐지는 것에 대하여 작가는 조금 망설인다.

   그래서 작가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구름기호 혹은 구름기표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연막과도 같아서 비극적인 상황을 감싸 안는 매트릭스 혹은 포용체가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러한 구름효과를 통해서 조금 안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비극적인 상황을 담은 예술이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순화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프란시스 고야(Francis Goya)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혹은 키키 스미스(Kiki Smith)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뒤틀린 이미지나 찢어진 얼굴들에 비쳐진 잔인성이 작가의 미묘한 순화과정을 통해서 잔인한 기표가 미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출중한 작가들이 자신의 내면의 힘을 동원하여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힘으로 순화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보통으로 거대한 전쟁이 지나간 뒤에는 비극의 순화과정으로서 예술의 힘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세계제1차대전의 다다이즘의 이면에 있었던 아모리쇼(Armory Show)가 그러하고, 세계 제2차대전의 앵포르멜의 회화들이나, 액션페인팅과 같은 작품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 바로 그러한 이유라 할 수 있는데, 송창애의 도 이러한 현대의 잔인했던 홀로코스트나 이라크 전쟁 일제의 식민지시절의 만행과 같은 순간을 순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카타르시스적 표현을 넘는 흘림체> 

그것은 단순히 비극을 순화하려는 카타르시스적인 표현의 범주를 넘어서, 인류가 안고 있는 거대한 숙제들을 풀어보려는 작가의 의지에서 발현하는 것으로서, 시각적인 경고의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의 경우, 한 독재자 혹은 결정권을 지닌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야기시켰던 문제들이 다수인데 반하여, 송창애가 주도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미는 에서 시사하는 바처럼, 군중들의 오류 혹은 잘못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도 있는 거대한 비극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군중 혹은 민중 혹은 범인들의 잘못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것은 모더니즘 이후 혹은 산업혁명 이후에 시작된 시민계급의 상승을 계기로 하여 어느 특정인이 하나의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던 시대에서 집단이 이끌어가는 사회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의 구조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이기도 한데, 1960년대 이후 팝 문화가가 기승을 부리면서, 소비가 촉진되고, 상업주의가 만연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물신숭배적인 사상이 인류를 엄습하면서, 지구의 온난화 혹은 온실효과가 상승하고, 환경파괴 유전자 조작 등으로 인하여 앞으로 불어 닥칠 인류의 대 재앙에 대한 비극적인 내용들이 은연중에 함축적으로 예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가치관에 대한 작가의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서 단순히 비극을 비극으로 보지 않고, 비극을 전제로 한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작가로서 경고하려는 의무감을 말하는 것인데, 에서 보여준 발가벗겨진 시신들의 쌓임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미묘한 흘리기의 기법은 단순한 흘리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회화성을 촉진하고 물감이 지니고 있는 물성과 중력을 활용한 기법으로서, 작품에서 하나의 상황을 순화시켜 표현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나,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그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기표 혹은 비극을 상징하는 눈물 등으로 해석가능하며, 때로는 이러한 대지를 적시는 비로 풀이되는데, 이 세 가지의 기의(signified)들을 함의하는 표현방식에서 작가가 비극들을 대하는 마음자세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어 엎드러진 시신들의 복합덩어리>

에서는 풀 한 포기도 없이 덩그러니 사람들의 시신들로 가득하다. 그곳에는 광우병에 의해서 사살된 가축들마냥 사람들의 시신들이 끝없는 대지를 장식한다. 그리고 그것은 안개 속으로 펼쳐진 비극의 마당에서 처절하게 엎드러져 있다. 다만 작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흘리기 혹은 버밀리안과 블랙의 조합으로 추상화하기도 한다. 하나의 화면에는 피와 주검이 범벅이 된 거대한 산과 같은 덩어리 혹은 들판과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마치, 녹조나 적조 현상으로 인해서 산소공급이 멈추어진 상태에서 엄청나게 떼죽음을 당한 고기 떼들과도 같은 모습이 인류에게 불어 닥칠 대재앙의 모습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려진 작품들의 모습들에서, 작가는 세상의 네거티브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것은 니체의 니힐리즘과도 통하며, 아도르노의 디스토피아(dystopia)를 상징하는데, 물신숭배적인 가치관의 부정적인 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는 인류애와 비극을 동시에 표현하는 앰비발란트(ambivalent)적 이중기표이며, 포스트모던 사회의 이면에 깔린 드라이한 감성과 세속적인 속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엄숙함을 동시에 지닌다. 또한, 인류의 아픔을 재구성하여 단순히 비극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가의 예술적인 감성으로 치유해보려는 혹은 아픔을 순화시켜보려는 작가의 작은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기도 하다.

 

<통치자에서 대중들에 이르는 복합이기심에 대한 경고>

 의 해석에 있어서의 하이라이트는 작가가 사용하는 복합어의 시사성인데, 그것이 단순히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겨냥한 시사적인 발언이 아니라 다중적인 의미의 기표를 생각하는 의도로서 필수적인 것으로서 복합적인 의미를 담는 그릇이 되는데, 이러한 일면에서 작가는 를 통해서, 전술한 바 한쪽으로 치우친 통치자들의 이기심과 대중들의 이기적인 심리를 복합적으로 고발한다. 그것은 은근슬쩍 방류해버린 폐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버리는 산업쓰레기,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병충해에 강하게 버티고, 급성장하는 식물을 재배하여 속성으로 만들어진 콩으로 쓴 두부나 매주를 판매하는 업자들, 환경호르몬을 배출하는 기업이기심, 환경오염이 야기되는 공장을

 그것은 작품의 제목에서 보여주는 의 일면에서 어떤 경우는 강렬하게 어떤 경우는 상징적으로 부드럽게 부각되는데, 전쟁시절 게슈타포가 행했던 인간이 짓이기고 인간을 고문하는 행태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산과 강 바다들에서 언젠가는 불어 닥칠 비극에 대하여 그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표출하여, 자신들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대중들의 복합이기심에 대한 강한 경고의 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박기웅(미술학박사, 홍익대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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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눈물, 천개의 일상 - 물(水)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라.

이미지는 작가의 내면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스며들고 휘돌며 세계의 외면으로 솟아오르기를 반복한다. 세계의 부조리와 만난다. 견디지 못하는 그녀의 촉각은 매번 사회와 자신을 연결하는 이미지로 답하려고 노력한다. 창작자로서 지니는 미적 윤리이다. 나르시즘에 빠지고, 나르시즘에서 벗어나는 이중의 운동이 작가 내면에서 충돌하고 회전한다.

송창애 작가의 프로젝트 [천개의 일상]은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작가와 연결되어 있는 1,000명의 시민이 2015, 2016, 20173년 동안 매년 416, 단 하루 동안 나의 일상을 주제로 1장의 디지털 사진을 찍고 모으는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이렇게 모인 1,000명의 일상 이미지를 [천개의 눈물]이라는 물방울 이미지 1,000점과 디지털 이미지로 1:1 매치하여 작가가 느끼고 해석하는 사회적 풍경을 구성하는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하여 작가 자신은 물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각자의 상처(트라우마)를 연결하고 사유한다.

 

나는 내 트라우마를 타인들의 트라우마와 연결하고 사유하려 한다. 나는 1,000명의 다양한 삶의 단면을 의 운동으로 표현하여 유기적 삶을 말하려 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네트워크 속에서 연결되어 성장하고 진화하며 살아간다. 이번 [천개의 일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간의 관점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 오늘날 삶 속에서 관계의 의미를 성찰하는 프로젝트이다. - 작가노트


한국 사회를 뒤흔든 세월호의 비극’. 마치 프랑스 낭만주의화가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의 뗏목처럼 송창애 작가는 시대의 비극적 사건을 자신의 내면의 사건으로 수용한다. 또한 자기 존재의 근본적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고뇌하도록 부추긴다. 사회의 트라우마는 개인의 트라우마가 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송창애 작가는 천개의 드로잉을 제작하여 씻김굿을 하듯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예술과 이미지를 통한 제의적 퍼포먼스가 작동하는데, 이는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집합적 활동이 된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미덕이다. 특히 슬픔을 공감하고 나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삶과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였다. 인간이 공감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바로 그 공감과 소통의 힘을 통해 수많은 갈등과 불화, 테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인간이 스스로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선하고 숭고한 비전을 설정하고 나아갔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면 왜 일상이 중요한 것인가. 작가는 왜 일상을 화두로 삼는 것일까? 그것은 일상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습관적이고 별 의미 없는 시간과 행위와 관계가 조직되어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은 판단과 행위가 실상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한다. 가시적이며 큰 권력 이상으로 잘 살펴보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힘들이 무수히 작용하여 세상을 바꾼다. 익명의 노동자들의 노동이 인류 문명을 건설하는 동력이건처럼. 무수히 많은 익명의 시민들의 힘이 모이고 공감의 연대가 가시화 되며 마침내 구체적인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사회의 일반적 법칙이기도 하다. 사회철학자들이 말한 현실은 곧 일상이라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삶이 주조되는 일상이 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예술이 곧 진실은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예술에는 진실이 들어있다. 그러나 창작의 현장에서 예술가들이 느끼는 딜레마는 일반적인 일상과 현실을 생산하고 움직이는 활동과는 변별되는 소모적이며 헛짓으로 쉽게 치부되는 예술 활동이 삶의 진실과 동떨어져서는 환경과 사회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와 유리되어 무력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직접적이지도 않고 반응속도도 떨어지는 활동에서 어떤 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비록 진실을 담고 있다하더라도 이미지는 말이 없고, 그렇게 침묵하는 이미지의 메시지를 우리는 읽어내야 한다.

현대미술이 작가의 미학적 입장에 따라서 전통적이거나 보수적이거나 또는 전위적이며 실험적이거나 아니면 이상적이거나 속물적이거나 작가의 창작의 태도와 비전이 달라지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부닥치는 지점이 바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나 변화에 대한 직접적 반응(소위 반영이론에서 말하는)을 보인다는 것의 어려움이다. 어떤 배운 지식으로 또 선배 예술가들의 위대한 예술적 모색도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상과 현실의 비극적 사태 앞에서는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 무력감, 이 패배감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고 담대하고 마주하고 가슴으로 공감하며 극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송창애 작가는 이미 2004년 이라크 전쟁포로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미국의 아부 그라이브 포로학대 사건을 충격적으로 경험하였다. 또 그 경험을 하나의 예술적 보고서로서 기록하듯 드로잉 연작을 제작했다. 발가벗겨진 채 쌓아올려진 이라크 포로들의 이미지는 인륜성의 가장 비극적 패배였던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내팽겨 쳤을 때, 또 그것을 바라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떨어져버리는 경험은 작가에게는 치욕적인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예술의 비전은 여전히 유의미한가. 내가, 내 예술이, 내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어떤 분명한 비전과 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물방울, 물의 흐름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라. 천개의 이미지는 만물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은 만물의 진실이자 만인의 진실 된 감정을 은유하기도 한다. 타인의 얼굴이 곧 (, 진실)’의 얼굴이다. 타인의 일상과 현실은 나와 세상을 포함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세월호와 같은 사건들은 예술가들이 평소의 예술적 입장과 활동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사건들이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작가들의 강한 집중력과 예민한 감각과 함께 공동체와의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작가들은 각자 나름의 비상한 감각과 지혜를 발휘해 예술가로서 철저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 존속하는 정체성이 긴장상태에서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된다. 사건들은 예고 없이 다가오고 작업은 작가가 예측한 적 없던 곳으로 나아간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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