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실재 사이의 역동적 이미지: 김종학의 회화세계
1. 프롤로그
가상과 실재의 사이,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공간은 무한히 변화하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미지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나날이 진화하는 신기술이 우리의 지각체험을 바꾸고 있다. 욕망의 실현방식도 화폐의 교환 가치와 물신주의적 소유에 충족했던 방식에서 벗어났다. 사물 자체에서 그 이미지에 담보된 사회적 코드와 기호의 상징으로 대체되었다. “기호와 이미지가 우리의 삶을 컨트롤하는 시뮬라시옹시대”를 진단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문화연구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산업자본주의라는 근대체제 속에서 생활 감각이 형성되고 사유해온 세대에게는 대전환을 요구하는 학습 환경이요, 초월하기 어려운 분수령이다. 특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한 중견작가들에게 이러한 변환의 조건은 정체성을 뿌리 채 흔드는 지각변동이며, 갱신을 거듭해야할 사명을 안고 있는 작가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세계를 급속하게 현재로부터 과거로 밀어내고 있다. 그것은 공간의 근대적 배치에 따른 국가 간 경계 못지않게 세대 간 소통불능을 야기하며, 오늘의 미술계를 분단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환 속에서, ‘이미지-기호’의 결합구조로 이루어진 시뮬라크르(simulacres)의 세계를 통해 ‘역동하는 생명체의 에너지’를 발신해온 김종학의 회화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변화의 진폭이 크지 않고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김종학은 각 시기의 문화담론이나 미술사조에 유연하게 감응하며, 방법적 구조, 신소재와 신기술을 채용하여, 새로운 버전을 생산해왔다. 덕분에, 작가의 숙명인, 시대의 간극을 돌파하여 정체성의 견지와 자기갱신이라는 이중과제를 성취하고 현재진행형의 작가로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그 원동력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유행에 민감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과거의 유행에 안주하며 자신의 언어로 착각하는 것도 위험한 일”임을 경계해 온 의지에 있었다. 이렇게 전개해 온 그의 작품세계와 작가로서의 행보는, 디지털기술과 미술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양산된 2000년대 극사실적 이미지회화 청년작가들에게도 하나의 시금석이 되리라 점에서 의미 있다.
2. 도래할 시대의 미학을 관통한 ‘가상 이미지-생명력’
김종학의 데뷔작품은, 흰 천의 뒤에서 단말마적으로 절규하는 인간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가상적 이미지-생명력’ 연작이다. 이 연작은 작가가 대학을 졸업하고 2년째 되던 1982년, 중앙미술대전의 특선과 두 번에 걸친 동아미술제의 동아미술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주지하듯이, 두 미술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신문사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창립한 신인등용문이었다. 일제잔영이 드리워진 국전의 낡은 아카데미즘과 대중으로부터 소외된 채 전위적 모색의 엘리트 추상미술이 각기 양분되어 집단적인 획일화를 보이던 미술계의 모순을 타개할 대안으로 ‘새로운 형상성’이라는 구체적 창립취지를 내걸었던 것이다. 필자가 이 수상작에 주목하는 것은 두 미술제의 시의성에 있다. 그의 수상작은 대학가에 만연되었던 극사실적 재현방법을 기반으로 시대상황의식을 담보한 것이었다. 인간실존이라는 주제, 회화의 평면성과 동시에 공간표현 문제를 구조적으로 아우렀다. 그것은 동시대 청년작가들이 작가와 미술내부로부터 비로서 밖의 세계에 눈을 돌려 응시한 것이 도시의 단편이나 일상사물의 외관이었던 것과 다른 것이었다. 그는 생명의 이미지를 하나의 ‘사건’으로 ‘구조화’ 하였다. 그는 캔버스의 이중성, 즉 보이는 표면과 안 보이는 이면을 공유한 ‘미디어’라는 회화의 역동적 현실을 투시했다. 캔버스는 뒤쪽에서 장막을 잡아당기는 손아귀와 신체의 움직임을 격렬하게 시사했다. 그때까지 회화의 역사는 캔버스 표면위에서 환영을 만들어 내거나 그 자체의 2차원 평면성을 규명하며 회화의 본질을 탐문해왔다. 여기에 캔버스 천을 메스로 예리하게 찢어 공간의 이중성을 엿본 것은 이탈리아의 작가 루치오 폰타나였다. 그러나 김종학은 이 선구자의 공간탐구의 사물적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폰타나가 그러했듯, 화면의 표면 쪽에서 이면의 상황 속 인간에게 탈출구를 만들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예리한 칼로 화면의 천을 찢었다. 그러나 실제로 찢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묘사된 것으로 환영효과를 극대화한다. 눈속임에 능란한 그의 화면은 본래 실재하지 않는 연출된 세계로, 그 자체가 하이퍼리얼(hyperréel)의 그림이다. 말 그대로 원본 없는 실재, 사유를 요청하는 환영이며,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것이다. “원본도 사실성도 없이 실재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현실화 될 것”을 예고한 장 보드리야르의 문화연구가 프랑스어로 처음 출간된 해가 1981년이고, 김종학이 ‘가상적 이미지-생명력’이라는 시뮬라크르 연작 수상이 그 다음 해였다. 아직 한국에는 그 이론이 소개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한국간 사회문화조건의 편차를 고려할 때, 지구반대편의 사상가와 화가가 사유와 직관, 글과 그림으로 동시대 시각세계의 변환에 공명한 사실은 화가 김종학의 감응도를 가늠케 한다.
3. ‘이미지-기호’의 동사화(動詞化), 역동적 생명의 표현
1989년 김종학은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던 일상으로부터 탈출했다. 당시 우리 미술계는, 모노크롬회화 중심의 모더니즘진영과 현실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집단 운동사이의 극단적 대결이 소강상태에 빠지고, 미국 발 포스트모던문화현상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1991년까지 프랑스로 떠나 재료기법연구에 집중했다. “3년간 무감각하게 그리고 지우기만을 거듭했다”는 작가의 고백이 말해주듯, 그때까지 집단주의와 고속화의 한국 사회에서 학습하고 체득된 지각과 사유감각을 씻어낸 것이었다. 마침내 모더니즘회화의 중심이던 파리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어느 날 아내가 식탁위에 올려준 한 송이의 포도에 내재된 생명체의 거대한 에너지였다. 그 대상의 발견은 곧 주체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성과 추상성, 거대함과 미소함”이라는 다중적이고 복합적 요소로 형성된 자아와 세계를 발견한다.
관습화된 시각과 사유로부터의 일탈은 파리의 거리 광고 포스터판을 발견해 주었다. 이 소재는 작가적 직관이랄까, 화가로서의 본능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그것은 이후 그의 시뮬라크르의 이미지 세계를 실현하는데 있어 유력한 지지체가 된다. 일정기간 마다 덧붙여지는 포스터 광고판의 숙명은, 다양한 정보와 거리를 지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축적하고 있다. 그는 이 지지체가, 포스터로서 기능했던 이미지나 광고문구를 일부 남겨, 축적된 시간과 사람들의 자취를 노정하면서, 그 위에 한순간 마주쳤던 생물체의 이미지를 표현주의적 회화로 재생했다. 개인의 기억(souvenir)과 공동의 기억(mémoire)이 만나 현재의 언어로 되살아난 것이다. 지지체는 미니멀아트에서 볼 수 있는, 녹이 슨 코르텐강의 피부로 완벽하게 재현하여,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그림을 붙이기 위한 바탕의 지지체로 재생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소재의 선택과 테크닉은, 중세적 장인의 수준이다. 그것은 일찍이 앙리 포시옹이 적시했던, 예술가의 조건(본질파악의 예지력 못지않게 표현전달을 위한 테크네의 중요성)을 충족하고 있다.
그렇게 다듬어진 지지체위 화면 중앙에, 거대하게 확대된 한 마리의 새우나 한 송이의 포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풍부한 물질감과 힘찬 붓자국, 지우고 다시 그린 흔적이 생생하다. 작가가 불현듯 공명했던, 생명체의 에너지를 육화한 것이다. 화면에는 이미지와 함께 the Other나 desire와 같은 문자와 일련번호를 암시하는 숫자가 고딕체로 찍혀 있다. 문자와 이미지가 작가의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이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로 동원 된 것은 다다이즘이나 쉬르리얼리즘, 더 거슬러 올라가 미술사 상 오랜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문자와 숫자 기호는 이미지가 그러하듯 생물체를 지시하는 명사가 아니라 작가가 공감(sympathie)했던 생명체의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동사(動詞)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포스터광고판의 지지체위에 고정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실제의 볼트로 조여줌으로써 진짜의 징후를 만들어 준다. 이미지와 기호, 그리고 실제의 못의 결합구조는, 실재와 일루전사이의 경계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러 시뮬라크르하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 변용은 30센티 단위로 분절한 입체구조로 연출되어 미니멀아트의 사물의 즉자성에 도전하기도 하고, 팝아트에 호응하기도 하고, 감성의 누출이 심한 표현주의적 회화가 붙어있는 녹슨 철판으로도 변신하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4. 에필로그-전망
도시의 기억을 축적하고 있는 매재,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 녹이 슨 철판으로 변신한 나무판넬 위 질펀하게 표출된 오브제들의 이미지는 이제 무르익었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결여하기 쉬운 제작과정의 끔틀거림을 잃지 않고 세련화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가 다시 화실 밖의 가벼운 공기에 감응하며 오래된 기억이나 시간의 축적을 담보한 중후한 이미지로부터 가벼운 변신을 도모했다. 작업실은 작은 자동차 제조공장이 되었고 디지털인쇄소가 되었다. 분을 바른 듯 뽀얀 피부감을 드러내는 반투명 플랙시그라스 위에 자유롭게 휘그은 드로잉 흔적에는 해방감이 충일하다. 공업용자동차 도료로 구워내 화석화된 이미지의 원형은 존재의 가벼움, 신속함을 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감응하기 위한 위험한 도전의 결실이다. 터치는 가볍고, 반투명한 플랙시그래스 위의 자동차 도료는 그 발색과 마티에르에서, 가볍고 경쾌하다. 여기에 이전 작품과 다름없이 골법용필의 붓질로 생물체의 질펀한 육질을 드러내는 정물 이미지와 고딕체로 정확하게 자리 잡은 문자와 숫자 기호가 결합한다. 문자와 기호의 미디어 기능이나, 생명체의 에너지에 대한 기억과 의식의 흐름을 전하는 생물체의 이미지가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일관되게 견지된다. 그러나 이 들 이미지는 작가의 직접적인 터치와 호흡을 객관화하며 복제 이미지시대의 표면회화가 된다. 미지의 신소재가 갖는 물질의 저항을 꿰뚫고, 동시대의 감수성을 실어 “내 이성의 손바닥 사이로 삐져나와 버린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의 이미지”를 전하는 신작은 정보화 시대의 미디어를 매개로 쿨해진 인간관계를 반영하면서 생명의 비약을 전망하고 있다.
이렇듯 ‘이미지-기호’가 연출한 김종학의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1980년대에서 2010년 사이의 그의 예술적 삶을 가로지른 한국현대사와 학습된 세계미술사조, 그리고 신소재와 기법들 속에 깃들어 있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기억들을 담보하고 있다. 그의 능란한 시뮬라크르와 변신술이, 시대의 범주에서부터 미묘한 ‘미끄러짐’과 ‘차이’를 키워가며 “예술은 보존하며 또한 스스로 보존되는 세상에서 유일한 것”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전망한다.
김영순(미술평론가)
김종학 평론
나는 김종학의 작업에 나타나는 아이러니를 좋아하지만, 이와 아울러 감정적 확신과 절박함의 느낌 역시 좋아한다. 김종학은 매우 진지한 표현주의적 회화를 만들어내면서도 바로 그 행위 속에서 회화를 문제시한다. 전통적이거나 모더니스트한 회화개념을 정제해내는 회화를 지향하면서도 회화자체를 의문시한다는 것이다.
이와b같이 그의 주제는 ‘포도’ 나 성경에 나오는 ‘욕망의 사과’ 등 삶의 속담적 상징을 지닌 열매들과 같이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일단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언어와 서예적행위 그리고 격자의 사용을 통해 그것을 단편적이고 개념화된 방식으로 전환해 낸다.
그의 재료들은 이러한 변증법을 요약하고 있다. 작품 ‘생으로부터(1996)’에서처럼 그는 전통적 재료인 종이위에 그림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다음 종이를 나무판 위에 볼트로 고정하는 매우 모던한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나무 역시 전통적 재료이다) 이러한 상호간의 유희는 순전히 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즉 회화의 포스트모던한 유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사로잡힌 듯 도출되는 것과는 극적이고도 멜랑콜릭하며, 놀라울 정도로 유혹적인 이미지이다.
열매는 지나칠 정도로 무르익었고 금지된 열정으로 채워져 있다. 그 열매는 퇴폐적이고도 애타는듯한 느낌을 여지없이 발산하고 있는데 - 운명적 느낌의 흑색과 감미로운 적색을 보라 - 그것은 어떤 지속적 만족 없이 계속 소비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김종학의 회화에는 탐욕적 격정이 있다. 포만감의 깊은 와중에는 독점적 욕망이라는 절망적 감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평가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비틀어짐의 단면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감정적인 명확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종학은 상징주의자라고도 볼 수 있다.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도 그는 동양과 서양의 예술개념을 그 차이의 감각을 보존하면서 화해시킨다. 예술이란 것은 관조적이면서도 생동력있는(또는 미학적이면서 새로운 젊음을 산출하는) 어떤 경험을 매개하고 자극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동양적 감각이 표준화 되어버린 서구적 방식들에 대해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 준다고 나는 생각해 본다. 김종학이 감정적 삶에 내포된 몇몇 사실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존중심은 ‘형태를 위한 형태’ 라고 하는 서구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새로운 젊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커스핏(미술평론가)
김종학의 미술세계
말이라는 방편은 시각언어에 비교해 열등하다는 평소의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작가들을 드물게 본다. 표면적, 단층적인 말은 단번에 양면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이미지를 설명할 때 특히 그 제한성을 드러내고 만다. 김종학의 회화 앞에 선 관객이 갖는 강렬하면서도 표현하기 힘든 느낌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지극히 농축된 그의 작품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어휘가 필요한데 딱히 들어맞지 않고 겉도는 감이 있다.
김종학의 최근작은 가로 3-4m에 이르는 대규모 화판 위에 그의 독특한 격정적 검정 화체가 전과 달리 밝은 흰 바탕을 배경으로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검정의 무거운 중량을 밝은 흰색이 가볍게 한다. 그의 작품이 언제나 현대적 전시 공간에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점은 비단 작품의 규모보다 과감한 그의 표현언어가 대중적이고 현재성이 반영된 이미지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차면서도 표현성이 절박한 붓처리는 강철을 화판에 짓이겨 놓은듯한 강하고 견고한 힘으로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입체 덩어리가 회화로 전이된 양상으로 볼 때 김종학의 작업은 철과 안료가 갖는 물질성에 집중하여 새로운 방식의 회화를 만들어낸다. 철이 화판에 녹아져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놀라운 역동성이 그림 면에 아슬아슬하게 잡혀 있다.
김종학은 문자 그대로 긴장과 갈등을 그림 면에 ‘못박고’ 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기계적이고 저항할 수 없이 강한 볼트 못들이 화판에 여기저기 박혀있어 그 안에 묻혀있는 꿈틀거리는 덩어리, 가장 근사치로 ‘욕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에너지를 저항할 수 없는 항력으로 회화 표면에서 제압하며 누르고 있다. 격정의 표현을 색채에 의존하는 표현주의와 대조되는 김종학의 흑색 모노로그는 검정 안료의 ‘심줄’을 겉으로 내보이는 강인한 화력이 동양화의 묵이 갖는 압도적 성격과 잘 어우러져, 다채로운 원색이 내는 외향적 발산과 달리 그 역동성을 내면으로 지향한다. 표면장력의 힘으로 석화(石化)된 그림 면이 보이는 의식적인 통제는 그 내부의 알 수 없는, 어쩌면 무의식적 영역에 닿는 욕망의 강도에 대한 역설적으로 강조일 수 있다. 그것이 김종학 회화의 이중성을 어렴풋이나마 집약한 설명이라 할 때, 이 이중성은, 대립적 양상의 공존은 작품의 표현 방식에서도 찾아진다.
먼저 광고 이미지와 회화적 표현의 대립적 양상이 하나의 작품 표면에 함께 있다. 작가 자신이 설명하듯이, 화판위에 광고 포스터를 배접하고 그 위를 표현적으로 처리한 붓질은 사실 한 화면에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인데, 이를 조합하기 위해 그는 광고의 대중적 이미지를 표면 아래 묻고 주도적인 표현적 붓질로 표면에서 어울렀다. 흥미로운 것은, 89년에서 94년까지의 프랑스 체류 시 작가가 수집한 대중적이고 상업적 이미지의 거리 포스터는 분절적으로 이 구상과 추상의 중간쯤 되는 그림의 여기저기에 파편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때로는 거꾸로 된 여자 얼굴이, 누드의 부분들이, 또는 잘 익는 과일 다발의 이미지들이 작가의 강인한 색채의 붓질에 묻혀져 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김종학 작품에서 팝 아트나 상업미술을 연상하는 이러한 부분을 포착하지 못하고, 색채의 강한 필체에만 눈길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표현적 회화언어와 상당히 이질적인 전자가 사실상 작가의 숨겨진 자아이고 묻혀진 욕망이라고 볼 때, 이를 간과할 수 없다.
‘대립적이고 상반된 요소들이 내 안에 뒤섞여 있는데 이가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작가 자신의 말이 그의 작업의 이중성 - 현재성/전통성, 대중성/개별성, 인위성/자연성, 욕망/통제 - 에 대한 그래도 가장 적절한 언어표현이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러한 대립항들의 이질적 성질이 산만한 충돌이나 한 쪽의 우세로 기울지 않고 균형 있는 시각언어에서 공존한다는 점이다.
전영백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