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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자하미술관

출생

1976, 서울

장르

회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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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monument - 다들 잘하고 있습니까 (No.1), 2007

장지, 석회, 수간채색, 아크릴, 먹, 목탄, 110 x 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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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삶을 위한 비망록

돌처럼 굳어진 인물들이 즐비한 상황.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여러 인물이 분명 하나의 사건 안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나, 주변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와 다른 사건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공처럼 서로 뒤엉켜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고 있는데, 도무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사물들이 아슬아슬하게 인물을 떠받히고 있다. 분명한 건 화석처럼 굳어버린 인물들이 분명 어떤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만 해석은 온연히 관객의 몫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가 눈앞에 펼쳐진 이미지를 오로지 통해 할 수 있는 건 그림 속에 펼쳐져 있는 상황에 우리가 사회를 통해 배운 경험의 층위들을 전부 동원하여 하나씩 대입시켜보는 일이다. 인물이 취하고 있는 무언의 행동을 지극히 개인의 학습화된 사고아래 바라보면서 해석의 단서를 찾는 일.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 그 안에서 형성된 특정 관념이 드러나는 보편적인 방식 중 하나가 인간의 행동양식이라고 한다면, 이재훈은 역으로 무언의 행동양식을 제시하여 그 안에서 관념의 실마리를 찾게끔 유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A는 B이라는 식의 정답은 없고, 단지 관객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인식과 관념이 끊어질듯 말듯 보이지 않는 연약한 해석의 연결고리만을 유지한 채 화면 위에 맴돌 뿐이다. 정확한 관념에 도달하지 못하는 당황스러운 상황. 과거에는 서로 관련이 있는 여러 도상들을 기념비라는 형식으로 대변되는 하나의 완결된 화면구성 안에 종합적으로 보여주어 현대사회 속 의식의 단면을 형상화했다면, ‘Artificial'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사회 속에서 학습된 관념과 약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인위적이며, 우리의 사고를 제어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재훈은 그동안 현대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집단적 가치체계, 관습화된 인식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2008년에 라는 제목으로 열린 개인전에서 그는 사회를 대표하는 하나의 가치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작업들을 기념비라는 형식으로 보여줬다. 소위 기념비라는 것은 한 시대의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거나, 추모하여 그것의 의미를 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이러한 기념비의 기능을 빌려 사회의 구조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관념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행위를 일련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제시하는데 이르렀다. 의례 기념비라고 하면 특정한 문구나 단어가 새겨져 있고, 그에 걸맞은 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는 소위 '우울한 세대(Gloomy Generation)'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와 이념들을 전형적인 인물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기념비의 중심이나 주변, 인물의 얼굴에 씌워진 눈가림막에 단어를 제시하고 그에 관련된 인물과 사물의 모습을 기념비의 전형적인 구조아래 여백 없이 빼곡히 채워가는 방식이다. 작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러한 인물의 행위가 표방하는 가치와 그것이 형성되는 이면을 은근슬쩍 건들기 시작한다. 텍스트는 점점 사라지고, 배경이 모습을 드러내며, 인물의 행동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기념비의 형상은 사라지고 인물들이 군집한 상황이 전면에 제시된다. 이전과 달리 관객은 화면 속에 제시된 제스처를 통해 그것이 펼쳐진 상황을 대략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관념을 도출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것이 보이는 것 자체에 대한 일방적이고 피상적 판단의 결과인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시키고 있는 대작이다. 행동이 학습된 사고를 반영하는 일련의 현상이라고 할 때, 이재훈은 이러한 현상들에서 사회화된 관념이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사물들의 조합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사고가 서로 결합되어 다양한 의미의 내러티브를 형성할 수 있는지는 실험한 연작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단서 없이 화면 속에 던져진 사물들을 마주한 관객들은 각자의 경험의 층위를 통해 이것이 어떠한 인물을 표현한 것인지, 어떤 상황을 그린 것인지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관습화된 사고가 반영된 현대인의 행동을 시각적으로 연구한 결과는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은 사회 안에 의식화된 행위를 의복이라는 기표를 통해 연구한 작품으로서, 작가가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하는 영상작업이다. 여타의 설명적 요소를 배제하고 인위적인 인물군상의 배치와 사물의 조합을 제시한 회화작업처럼, 작가는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지침아래 전적으로 인간의 학습된 사고에서 비롯된 행위가 어떤 모습인지 퍼포머의 행동을 통해 관찰한다. 이와 같은 관찰은 작가가 퍼포머에게 의복을 입고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자유롭게 취하라는 주문에서 시작한다. 퍼포머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씩 입어가면서 의상이 인물에 부여하는 역할과 반대되는 동작을 순차적으로 수행해나간다. 여기서 의복은 사회화된 관습과 약속, 타자의 시선을 상징하는 매개물로 기능하고, 의상을 입고 행하는 여러 동작은 이러한 통념에 의해 주체가 불완전한 객체로 규정되는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종의 현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관객 역시 영상을 통해 어떤 포즈를 취할지 예상하다가도 퍼포머와 전혀 다른 행동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관의 의복을 입고,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사람의 행동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투우사의 옷을 입고 투수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퍼포머는 즉흥적인 연기를 의뢰받은 것이기 때문에 두 어휘가 지닌 음성의 유사점에서 비롯된 행동을 취한 것이라 판단된다. 퍼포머는 하나의 옷 위에 또 다른 옷을 껴입으면서 사회에서 강요된 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주체를 잃은 채, 무거운 짐을 짊어지듯이 강제적으로 역할을 부여받는다. 겹겹이 옷을 걸칠수록 관념의 껍데기는 더욱 두터워 진다. 영상의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퍼포머의 선택이다. 퍼포머는 헤드뱅잉을 하며 기타를 연주하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지금까지 겹쳐 입은 옷을 과감하게 모두 벗어던지고 퇴장한다. 작가도 예측할 수 없었던 퍼포머의 이러한 행위에서 우리는 사회의 한 구성원인 개인(퍼포머)이 어떻게 의복을 통해 관습화된 사고를 담은 그릇으로서의 신체적 행위를 보여주는지, 그러한 사고가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한편으로는 예상 밖의 행위와 마주했을 때 사회화된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임의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과거에는 현대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관습화된 가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그와 연결될 수 있는 행위의 전형을 찾아 하나의 기념비적인 도상으로 제시했다면, 근래에 와서 작가는 사회화된 행동양식을 통해 학습된 관념을 도출하고 관념과 행위 사이의 임의적인 연결이 낳은 불안정성, 사회적인 약속이나 관습, 규범이 지닌 취약성과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관념에서 파생되어 예측가능한 행동의 전형을 양식화해서 보여주었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역으로 사회 안에서 관찰되는 여러 행동-이 또한 분명 사회의 관습을 통해 체득된 행동-을 통해 그것이 수반하는 가치와 생각을 도출해내는 과정의 중심에 관객을 직접 위치시킨다. 이는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작품 속에 명시한 특정한 가치를 텍스트와 관련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고, 제목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되묻는 형식을 취했다. 이를테면, ‘참! 잘했어요’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에 ‘다들 잘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을 붙이거나, 미인상을 그린 작품에 ‘당신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얼핏 보면 작가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그림 속 내용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도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한 관념에 반대되는 작가의 주관적인 판단과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제목들이다. 하지만 근작에 와서는 그러한 의식조차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 ‘행동연구’라든지, ‘소품(Props)’이라는 제목이 곳곳에서 눈에 띄며, 이는 작가 역시 관습화된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거리두기로 비춰진다. 한편 이러한 가운데, 기념비를 형상화한 과거의 작업에서 오래된 비석처럼 보이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던 프레스코기법은 최근의 회화작업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복잡하고 다양한 구성을 보이는 인물군상과 정물을 일정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끔 만드는 조형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에서 프레스코기법은 현시대의 현상을 정지된 기록으로 만들어 대상의 실재성을 전달하데, 이는 기념비라는 형식에서 출발한 기능이 인물 군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작가의 작품에서 동시대적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재훈은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유지하면서도 그 세대만이 표현할 수 있는 발랄한 유머코드를 잃지 않고, 독자적인 조형어법을 구축하여 내용과 형식간의 관계를 심도있게 탐구해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개인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형식이 사회와의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합의가 이끌어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아울러 그의 작업은 사회적 통념에 의한 전형을 탐구하고 이를 개인의 비평적 시각으로 제기하던 방식에서 한걸음 나아가 관념의 도출되는 현상으로서의 인간의 행위와 역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의 구체적인 형태를 탐구하고 관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무엇이며, 그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가, 과연 무엇이 그러한 생각을 작동시키는가? 사회적 관계 유지를 위한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적당한 망각과 적당한 의식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어떠한 사고를 갖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5년 전 그의 작업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처럼, 이재훈의 작품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자문해본다.

황정인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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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망각, 인위적 선택

이재훈의 작업이 주는 이미지는 삭막하다. 그의 화면에서는 스산한 바람과 그 바람에 어울릴 만한 가을 들녘의 마른 풀이 등장하고, 간혹 그곳을 장식하는 꽃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꽃은 발랄함이나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장례식용의 꽃인 양 무겁고 육중하다. 이렇게 납덩이 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이재훈 작품에는 그에 비견될 만큼이나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등장한다.

“선생상”,“학생상”,“영웅상”,“미인상”과 같은 표식이 새겨진 띠로 눈을 가린채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의지로는 무엇을 볼 수도 없고, 하반신을 어딘가에 저당 잡힌 상태인지라 자력으로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단지 놓여진(혹은 버려진) 그 자리에서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깔끔한 외모의 “선생상”은 책을 읽고 있으며, 집지를 허리춤에 낀 외로이 바람을 맞고 서있는 “백수상”은 한껏 쓸쓸한 포즈를 취하고 있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상”과 뭇 남성들을 희롱하는 “미인상”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의 행동패턴을 표방하고 있는 이들 화면 속 인물들은 그러나 인간적 존엄성을 가춘 개별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부품화된 존재로써만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을 통해 우리는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나오는 찰리 채플린을 보며 느꼈던 바로 그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들 인간 군상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을 만연히 그리고 성실하게 수행하였지만 결국 버려지고 만(혹은 버려져야 할) 존재들이며, 버려진 후에도 타성과도 같이 자신들의 맡은바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한편, 이들이 담지하는 무겁고 육중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군상들은 어린시절 가지고 놀던 못난이 목각 인형들처럼 희화화되고 키치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과 작품이 담지하는 넙덩이같은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화면을 주도하는 이미지는 너무도 가볍고 통속적인 인물상들인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드러내는 이러한 통속적인 인간군상에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납덩이같은 무게감과 중압감을 뒤로한 채 키치적 인간군상이 주도하는 이 세상에 대한 이재훈은 한 가닥 의문을 제시한다. 사회라는 집단적 시스템 속에서 ‘나홀로’의 삶을 통해 자신을 찬아가고 충족시켜 나가는 “글루미 제너레이션”이라는 표식을 근대적인 행동패턴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들 군상과 나란히 혹은 멀찌감치 떨어트려 기념비의 형태로 혹은 팻말의 형태로 새겨 넣음으로써 말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 사회가 커다란 매트릭스 구조 속에 위치하는 의미소로서의 개개인에게 부여한 의미에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휘하기 못하게 된 글루미 제너레이션 세대의 주변을 망령처럼 떠돌고 있는 “하면된다”, “참 잘했어요” 같은 근대적 표제어를 통해 작가는 작품 속 인간군상의 역할 수행에 의문을 가하는가 하면 이들 인간군상들이 내건 가치기준에 조소을 가하기도 한다. 그 결과, 작가는 근대사회를 규율하던 화석화된 가치 기준들을 “비기념비”적인 기념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의 작품을 주도하는 이러한 이율배반성은 〈당신은 무엇입니까?〉와 같은 작품에서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글루미 제너레이션”이라는 기념비와 함께 등작하는 “영웅상”은 글루미 제너레이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이다. 더욱이 그 영웅상이 수퍼맨과 같은 울뚝 불뚝한 근육을 자랑하며 빨간 망토를 휘날리는 하반신 부재의 눈가린 영웅상이라고 할 때는 더욱 더... 이렇게 이재훈은 이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역할과 그 역할을 잉태하게 만든 가치의 비인간적인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화면 속에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조합해 넣고 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중의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이재훈의 작업은 근대적 이데올로기와 동시대를 주도하는 가치기준이 착종된 상태로 등장한다. 얽히고 설킨 작품의 층위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작품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향 지시등을 마련하여 놓음으로써 소통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소통을 의도한 이재훈의 작품에는 정작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 인간들은 눈을 가린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충실히 해내는 박제화된 존재들이며, 설령 눈을 가리지 않고 있다하더라도 주변의 인물과 눈길을 교환하거나 의사소통을 하기 보다는 정면을 향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주변과의 소통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한편 이들 인물상들이 보여주는 소통부재의 상황은 주변과 어울리며 소통하기 보다는 고독을 동반자로 삼고 살아가는 글루미 제너레이션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소통을 원했으되 소통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 이렇게 소통할 수 없게 된 상황은 다시금 이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가 원했던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역설의 역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역설과도 같이 전복을 거듭하게 되고 만다. 뭐가 이렇게 꼬이고 어려운 것인지?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우리들 모두가 근대와 현대가 교묘하게 착종하는 한국적 동시대에 살고 있고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우리네 인생 자체가 꼬이고 꼬인 매듭의 연속인 것을....

기혜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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