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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구성수, 자하미술관

출생

1970, 대구

장르

사진, 미디어

홈페이지

koosungs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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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찬, 2013

디지털 프린트, 200 x 1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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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기, 따로놓기, 다시놓기

카메라를 내려 놓는다. 땅바닥에. 그로부터 악의 꽃 같은 색채들이 피어오른다. 카메라는 그 색채들을 빨아들인다. 정확히 수평과 수직이 맞게 설치된 카메라는 자리를 잡자 마자 색채의 진동과 전율에 몸을 맡긴다. 사진가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사물이 생각하고 색채가 생각하고 카메라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는 것은 그 생각의 회로를 열어주는 것 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생각할 것이 참 많다. 색채는 6억8천만가지, 사물은 13조가지, 카메라는 단일한 가지다. 단일성과 복수성이 엽기적으로 서로를 밀치면서 난폭하게 서로의 속으로 침투하여 난교를 벌이는 곳, 그곳이 우리의 고향 대한민국이다. 사진가의 고향은 대구이나 지금 그의 고향은 8×10 카메라의 핀트 글래스다. 고향상실의 주체가 고향이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서 슬픈 눈으로 고향을 바라보듯이, 사진가는 핀트 글래스 위에 슬프게 맺혀 있는 착란의 고향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셔터를 누를 뿐이다. 그에게 고향이 찾아오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듯이, 셔터는 무려 30분간이나 열려 있다. 그 속으로 빛과 먼지와 이념이 속절없이 쳐들어 온다. 어쩌겠나. 대문을 활짝 열면 반가운 손님도 오지만 거지도 함께 들어오는 것을. 페레스트로이카 덕분에 소비에트에 자유와 시장경제와 창녀와 마피아가 함께 도래했듯이, 셔터를 열자 빛과 속도와 강렬함과 권태가 한꺼번에 닥쳐 들어온다. 이때 당황하면 사진가가 아니다. 그는 디자이너의 안목과 연출가의 용의주도함과 태권도 선수의 무데뽀로 그것들을 통제한다. 사실은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빛과 색채의 폭포수 앞에 그냥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시간당 50만톤의 빛을 쏟아내는 그 문명의 폭포를 견딜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코드도 가지고 있고 감각의 날줄과 씨줄을 가지고 있다.
핀트 글래스 위에도 날줄과 씨줄이 있다. 사진가에게는 그게 생명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이 맞지 않는 사진은 감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시각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사회를 문란하게 만드는 중죄인이다. 사진가는 이 모든 규칙들을 지키면서 그것을 벗어날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철저히 카메라의 메카니즘의 노예이면서 그 메카니즘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지평선 위를 날아가 볼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감각의 교란과 폭력은 그에게는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태풍이지만 그의 날개를 움직여주는 에너이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남한이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의 감각들은 사실은 매우 전략적인 나열과 병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관광버스의 의자 색깔이 짙푸르게 보이는 것은 그곳이 관광버스 안이기 때문이다. 버스와 색깔과 짓푸르름, 이 삼자는 서로 아무런 공모도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서로를 살피는 전략 속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공존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런 색깔과 패턴을 촌스럽다고 부르는 이유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양반은 뛰어 다니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고향상실의 카메라는 양반의 느릿한 걸음걸이 마냥 매사를 천천히 신중히 훑어본다. 물론 그런다고 고향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는 잃어버린 고향과 지금 있는 곳 사이의 거리를 재고 싶을 뿐이다. 참 멀다. 어떻게 돌아가나. 고향상실의 카메라에다 망향의 조리개를 들이대고 실향의 조명을 가하면 사진은 처연하게 슬퍼진다.
역설적으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색채들의 광란의 춤 때문이다. 드라큘라가 날이 밝으면 사라지듯이 저 색채들도 지금 그들을 빛나게 해주고 있는 그 빛 때문에 지금의 색채를 잃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춤 추고 있는 저 불쌍한 색채에 잠시의 생명을 주는 것이 고향상실의 카메라다.
갈 곳 없는 귀신이 구천을 떠돌 듯 세계의 하늘을 떠도는 캐루셀(메리 고라운드)은 베니스, 로마를 머리 꼭대기에 이고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글로벌했었나. 아마도 지난 10년간의 변화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꿈과 무의식 마저도 글로벌 해진 시대에, 사진가는 글로벌의 꿈의 겉층에 생긴 막을 살짝 들어내서 사진의 표면 위에다 살포시 얹는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글로벌의 무의식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럽의 품위와 기품, 세련됨의 무게를 가정하고 미리 머리가 짓눌린다. 그러므로 사진가의 사진의 존재론은 무거운 듯이 보이나 경망스럽고, 가벼운 듯이 보이나 끈질기다(tenacious). 아마도 그런 역설의 변증법이 대한민국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물론 사진가가 대한민국의 실체를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혹은 생각보다 아주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국가의 실체가 남긴 그림자 정도는 읽을 수 있다. 다른 눈이나 시각장치를 가진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그 실체 말이다. 피부로는 느끼는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실체를 말하는 거다. 아주 글로벌하면서 아주 로컬한, 그래서 외국인들이 보면 허허하고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웃을 수 밖에 없는, 대한민국 국민은 약간 서글프게 느껴지는 그 차원 말이다.
그러니 자유의 여신이 자유롭게 스테튼 아일랜드 앞바다를 훌쩍 떠나서 대한민국의 어느 모텔 옥상 위에 안착했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정도의 자유도 없대서야 감히 스스로를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칭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자신의 무게를 자유로 조절하는 그 자유로움 말이다. 물론 여기서는 사진가가 제일 자유로운 존재다. 여신의 무게를 조절하여 모텔 옥상에서 떼어내어 사진 속에 담아 장아찌를 담근 것은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여신이 무슨 죄가 있나. 그냥 자유롭고 싶을 뿐인데. 사진가가 민족문화에 대해 한 공헌은 그런 죄 없는 기표들을 짓누르고 있는 후기식민주의, 후기구조주의, 정치경제학, 시뮬라크라 등 엄청난 무게의 담론들을 가볍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분명히 그런 담론들의 그물 속에서 봐야 하는 것이나, 사진은 그냥 사진으로 보면 된다. 찍은 이나 보는 이나 그저 사진적 디테일의 당혹감 속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그 체험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 당혹감과 어안이 벙벙해짐이 모든 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계기이다. 사진 속의 디테일들은 사고나 이론이나 담론을 통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부여되어 있는 쓸데 없는 무게를 벗어버릴 때 구원된다. 쓸데 없는 평론가의 말 한 마디 쯤 슬쩍 끼어 있어도 괜찮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소잔등에 파리 한 마리쯤 앉아 있다고 해서 소가 특별히 더 피로하게 느끼지 않듯이 말이다. 이 경우 소는 대형카메라이고, 파리는 비평가가 되겠다. 그는 사진을 보는데 큰 도움은 안 되지만, 약간의 참견을 통해 사진의 색채를 살짝 바꿀 수는 있다. 말하자면 어안이 벙벙해지는 경험의 매개자, 혹은 메신저로서 말이다.
사진가가 만들어내고 있는 무겁고도 가벼운 디테일들의 역사는 그렇게 쓰여진다. 카메라와 눈과 쓸데 없는 비평가의 공모를 통해서 말이다. 비평가가 정해야 하는 것은, 구성수의 사진 속에 나타난 우리를 둘러싼 생활세계의 상이 그렇게 난잡하고 요란한 감각의 충돌의 현장이라면, 그것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진은 과연 제정신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과잉속도 때문에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속도를 정지시킨 사진은(사진가를 말 하는 것이 아님) 분명히 제정신임에 틀림없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고 했지만 쓸데없는 비평가는 퀵서비스의 출현 이후에 더 이상은 시를 쓸 수 없다고 선언한다. 모세혈관이 팽창할 정도로 서비스가 빠른 시대에 누가 느릿느릿 시를 읽고 앉았느냔 말이다. 시를 쓸 수 없는 그 시대에 사진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압축적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분명히 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진과 시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사진은 속도에 관한 것이며, 속도에 대한 표상이며, 속도를 구현하고 있는 기술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속도는 삼각대를 펴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셔터를 누르고 필름 홀더를 갈아끼는 속도에서부터 성찰과 분석의 속도를 포함하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 만의 어휘와 수사를 가지고 있듯이, 사진가에게는 자신 만의 속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는 퀵서비스의 템포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구원이냐 희생이냐의 차이는 기억이냐 망각이냐의 차인데, 오늘날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사진가가 자신 만의 독자적인 속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찍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속도로 찍어야 한다. 그러려면 성찰해야 한다. 키치를 환각의 세계에서 끄집어 내어 성찰적인 시각장으로 넣은 것이 구원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구성수의 사진 속의 디테일들은 사진가에게 감사해야 한다. 물론 디테일들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노력했다. 사진 속의 어떤 디테일들도 게으름을 피지 않고 열심히 기표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기표가 아닌데도 기표인 척 하는 놈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제스처를 포착해서 자신 만의 미장센 속에 밀어 넣었더니 디테일들이 말 하기 시작했다. 사진가의 목소리를 빌려서 말이다. 관광버스 의자의 맑고 푸른 색깔은 간드러지게 꺾어지는 뽕짝을 말 하고 있고, 거룩하게 가짜 횃불을 치켜 들고 있는 자유로운 여신상은 모텔방의 신음소리를 말 하고 있다. 물론 뜬금 없이 남의 집 옥상에 올라 앉은 캐루셀은 세계를 향한 이국적 동경의 환호성을 말 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말들이 따뜻한 애정의 톤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투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좀 아쉽기는 하다. 아무리 색채가 천박하고 형상이 기괴하고 앉음새가 뜬금 없어도 다 우리 이웃들인데. 누가 이웃을 사랑하라 했나. 이웃이 우리와 다른 언어를 말 할 때도 사랑할 수 있나? 이웃이 다른 언어를 말 할 때 정신병자로 취급하거나 외국인 취급하거나 그냥 쌩까지 않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려면 어떤 철학적인 태도를 요구하는가? 즉 어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가? 구성수의 사진은 그런 전환을 품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이웃에 대한 조롱이나 비아냥인가? 다른 색채의 말들을 대형카메라에 밀어 넣어 믹서기로 갈 듯이 갈아 동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의미의 폭력이 아닌가? 아무리 구원의 이념을 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미대를 가고 싶은데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의대를 가라고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구성수 사진의 모든 문제는 문화와 감각의 이질성과 차이는 어떻게 소통되는가 하는 쪽으로 귀결된다. 결국 구성수의 사진이 선언하는 것은 그런 소통불가능성이 아니던가. 사진 속 아름다운 관광버스의 의자가 그 소비자들에게도 아름답게 보이는가? 논두렁의 흙이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닌, 그냥 시골환경의 일부이듯이, 그 의자들은 관광버스 환경일 뿐이다.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보며 카페 아 롱제를 마시는 고상한 관광취미의 애호가에게는 곡성 관광버스 환경은 이국적으로, 유별나게 촌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문제를 한번 더 비틀면, 같은 대상을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나와 남 사이에 계급과 성과 인종과 취향과 이념의 차이라는 강들이 놓여 있을 때 그걸 어떻게 하나. 더더군다나 그 사이에 단단한 카메라가 놓여 있을 때는? 비천함과 거룩함의 차이, 조잡함과 세련됨의 차이, 꿈과 꿈 깨어 있음의 차이들을 메워야 하나, 그냥 놔둬야 하나. 모텔 옥상에 자유롭고 싶은 여신상을 거룩하게 올려놓는 태도와, 거기서 꿈을 홀랑 까발겨서 사진의 프레임 속에 넣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스펙타클을 즐길 것인가, 슬퍼할 것인가? 더군다나 거기에 ‘한국적’ 스펙타클이라는 국적의 문제까지 개입할 때는? 물질과 이념을 구분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국가는 좀 옆으로 비켜 있으라고 할까? 아니면 기왕 논란의 밥상에 온 김에 숟가락 한 개 더 놓는 심정으로 끼어들어서 사진을 더 복잡하게 만들라고 할까? 카메라가 국가의 문제까지 다루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그러나 나의 감각이 나의 것이 아니고 초자아의 형태를 띤 국가의 것이라는 황당무계함이 사진 속에 들어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결국 구성수 사진의 문제는 감각의 이질성과 ‘내 것 아님성’(alterity; 남에게 속함)으로 귀결되면서 이 세상에 온전히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는 허망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허망함에 질식하기 전에 빨리빨리 자기 것 챙기자.

이영준 (이미지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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