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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홍순명, 사비나미술관

출생

1959, 서울

장르

회화,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hongso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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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니, 2016

혼합재료, 94 x 63 x 5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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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상투화된 풍경과 이미지의 치유

풍경의 회복, 사건의 치유


홍순명의 ‘사이드 스케이프(side scape)’로 명명되는 회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테레오타입 한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전통적인 풍경화도 결국 임의의 방식으로 잘려진 자연을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게 그것이다. 풍경화 역시 구도니 구성이니 하는 당대적 규범에 따라, 시야에 포착되는 전체에서 산과 나무, 길이나 집 같은 일부를 선택해 주어진 틀(frame) 안에 집어넣은, 부분적으로 선별된 것들의 조합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풍경화는 예외없이 단지 잘려나간 세계와 파편화된 자연을 자신 안에 포섭해 들인 결과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홍순명의 분할된, 또는 잘려나간 풍경인 Sidescape를 별도의 설명 없이 통상적인 풍경화의 범주에 소속시킬 수는 없다. Sidescape는 이미 잘려지고 파편화된 결과인 경치(scape)를 재 절단 해 내고 재 파편화 한 것으로, 여기서 경치는 훨씬 더 입자화 되고 노골적으로 부분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풍경화의 그것과는 현저하게 구분된다.(풍경화는 언제나 자신이 전체를 다룬 것처럼 연출한다) 무엇보다 이 입자화 된 경치를 일반적인 풍경화의 그것과 차별시키는 요인은 인식기제와의 상관성에 있다. 일반적인 풍경화가 자연을 인식 가능한 차원으로 유입시키기 위한 과정의 산물이었던 반면, 그것의 절단된 부분만을 취하는 Sidescape는 오히려 대상-풍경이건 사건이건-을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거나 인식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보내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Sidescape는 경치가 마침내 풍경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곳이자, 사건이 내용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장소인 것이다.
홍순명의 Sidescape 회화는 하나의 이미지에서 부분만 발췌해 그린 풍경이다. 잘리거나 파편화 된, 일테면 모자라거나 불구인 풍경이다. 하지만 이 이미지의 출처는 실제 자연이거나 사건이 아니라 또 다른 이미지다. 여기서 자연은 ‘변덕스런 날씨를 걱정하며 화구를 챙겨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며, 인터넷이나 매스컴에서 원할 때는 언제나 포획 가능한 자연이다. 사건도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Sidescape가 택한 사건들은 예컨대 날아다니는 총탄들 사이에서나 화재의 현장에서 죽음을 불사한 채 채집한 것들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의 출처는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들은 역사의 뜨거운 지평에서가 아니라 보도사진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그렇더라도, 홍순명에게 이미지들의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건 관심 밖이다. 때로 그것들은 역사적 전환점이 될 만한 심각한 내용이거나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건일 수도 있다. 이미지의 원본이 자주 전쟁이나 재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나 불행한 사고와 결부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무엇이건 모두 중립적인 풍경화의 모티브로서 동등하게 취급될 뿐이다.
작가는 오히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해체와 그 해체로부터 비로소 발생하는 미적 도약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용에 가려져 인식되기 어려운, 사건 안에 잠복해 있는 잠재태로서의 미(美) 말이다. 사건에서 풍경을 발견하는 이 과정, 끔찍한 전장과 재앙의 현장에서 저주와 불행이 제거된 찬연한 빛을 발췌해내는 과정이야말로 화가가 이미지의 차원에서 실행할 수 있는 최선의 상징적 치유조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가는 무겁고 어두운 사건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안식의 정서를 허용하는 회화를 추출해낸다. 이 과정은 악취가 나는 범죄에서 절망과 증오의 뇌관을 제거하고, 전쟁으로 치닫는 논쟁에서 정치적 민감성을 완화하는 치유와 화해의 상징적 과정이다. 이에는 인쇄매체나 인터넷 안에서 비인간적인 정치, 사회적 사건과 결부된 채 속박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그 속박의 올가미로부터 구제해내는 상징성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작가에 의해 선택된 몇몇 이미지들은 마치 쉰틀러 리스트에 그 이름을 올린 유태인들처럼 끔찍한 비극 속에 처박히는 신세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치유, 사건과 풍경의 화해, 그리고 보도사진의 이미지를 그것이 연루된 정치적, 사회적 진흙탕으로부터 구제해내기 위해, Sidescape의 시선은 사진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이동한다. 다음 과정은 사건의 일부를 선별해내는 것인데, 그 기준은 미량이라도 전체의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충분히 단절적일 수 있는 변증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선별되고 채집된 부분은 형태적 확대와 회화적인 묘사를 거쳐, 그 사건과 변증적으로 결부된 하나의 독립적인 풍경화로 거듭난다. 이렇듯Sidescape는 사건들을 그것들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탈구시키는 미적 전략으로서, 이미지의 분절 과정에 의해 보도적 성격이 해체되고 풍경으로 재구성된다. 이는 사건 내에 잠재해 있던 다른 풍경의 가능성을 발현시키는 것이고,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중립의 세계에 미(美)와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이야말로 예술 본연의 임무가 아니던가.
 
탈 상투화 된 풍경
 
홍순명의 Sidescape가 시행하는 잘라내기는 풍경을 파손하거나 해체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Sidescape의 궁극은 풍경화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회복에 있다. 그리고 풍경의 내부에 잠재된 풍경, 사건의 내부에 감춰진 탈사건의 미학을 드러내는, 잘려나간 이미지의 풍경화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에 있다.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입자화 된 작은 것들은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다른 풍경의 지표들 같다. ‘끊임없는 독백으로 이루어진’, 또는 침묵의 연속만이 화법이 되는 소설의 페이지들 같기도 하다. 그 하나하나에서 예컨대 ‘곤하게 잠들다’나 ‘지쳐 골아 떨어졌다’ 같은 상투어를 차용하는 대신, 잠들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무려 30페이지에 걸쳐 하나하나 복원해냈던 프르스트적 글쓰기를 목격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것들이 여백에 의해서만 이야기의 연결이 가능한 고립된 단어들 같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홍순명은 이 충족되지 못하는 잠재적 대화야말로 회화의 고유한 대화방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림은 아주 자주 논리에서 벗어난다. 애매함 투생이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 글의 논리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 그림은 빛이 약해진다. 그리고 세속적으로는 유명해 지기 시작한다.”(홍순명)
 
Sidescape들이 수평이나 수직으로 이웃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그것들은 아직 완전히 편집되거나 검열되지 않은, 하나의 상투적인 풍경화로 호출되기 이전의 열려 있고 꿈틀거리는 풍경화를 구성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상투적 풍경화법으로 인해 홍순명의 그림은 상투적인 소통의 규범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의도되고 계획된, 안락함이 결여된 불순한 소통으로 말이다. 작가 자신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그림이 불친절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불친절함은 사람들을 상투성의 덫에 빠트림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도록 인도하는, 친절을 가장한 상투성보다 훨씬 더 좋은 소통을 성취해낼 것이 분명하다.

심상용 /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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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 : 초상화시리즈

홍순명은 회화, 판화, 설치, 사진, 조각,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다시 그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형식을 가장 기본인 평면 안에 표현하며 미술사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0 여 년 간 해오고 있는 사이드스케이프 시리즈가 이미지의 부분으로 이 세상의 전체풍경을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꿈꿀 권리>는 초상화시리즈다. 체코의 집시, 산타페의 인디언, 한국의 다문화 가정 등 그가 전시하는 곳의 문화소외지역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꿈꾸는 인물은  아이들의 미래의 자화상부터 만화주인공이나 아바타, 추상적인 형태까지 지금 현실과는 다른 그들만의 상상적 대상이다. 예측할 수 없는 순수한 상상력의 아이들 초벌그림은 작가가 찍은 그들의 얼굴사진위에 오버랩되어 약간의 미적교정을 거친 후 사진으로 완성된다. 성당, 학교, 미술관 등 전시공간에 적합한 재료를 선택하고 설치되는 초상시리즈는 작가혼자만이 그려내는 천재적 개념의 회화성보다는 인물의 대상과 작가와 보는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공공의 장 즉 상호작용 안에서 완성되는 예술이다. 원초적이며 코드화되지 않은 순수한 영혼은 상호작용의 장소에서 관람자의 상상과 함께 발견되고 이입되어 예술적 소통으로 완성된다. 아이들의 사회적 정체성, 회화의 시선, 사진의 회화성 등 매체의 미묘한 잠재적 미적상태를 내뿜으며 다양한 예술의 꿈꿀 권리를 환기시킨다.

김미진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기획&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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