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장 흥미로운 작가 중 한 명인 조숙진은 조각, 드로잉,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 등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며 그녀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왔다. 조각과 설치작품, 또는 드로잉, 퍼포먼스 등이 절묘하게 혼합된 카테고리의 사이를 작업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동시에 느낄수 있는 창의적인 틈새를 발견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조숙진의 가장 대표적인 매체인 조각은 주은 재료로 이루어진다. 보통 이른 아침 쓰레기가 수거되기 전, 길에서 주운 나무나 가구 등으로.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적절한 재료구성은 그녀의 작품에 마법 같은 분위기를 준다; 마치 그 나무와 같이 살았던 누군가의 삶이, 발견된 오브제안에 공명하며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와 부재가 함께 보여지는 작업을 하는 조숙진이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재료의 상처난 표면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지기전의 그들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너머의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존재와 부재를 결합시키면서 조숙진은 어떤 종교적 교리 보다, 그 세계를 이루는 영적 자각의 표현을 분명 추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숙진이 말하는 정신적 삶은 1999년 퀸즈의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서 가진 퍼포먼스 작품 <삶의 색채, Color of Life> 에서 참여자들이 층층이 쌓인 빈 드럼통속에 들어가 그들 자신의 죽음을 명상했던 것처럼, 죽음이라고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연구와 밀접하게 연계돼있다. 자신과 타인의 삶의 한계성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진 그녀는, 자신이 인식한 것들을 가장 신성하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표현해내고 있다. 죽음과의 결연한 만남이라고 부를만한 그녀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심각한 주제를 어둡지 않게 드러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라는 다루기 어려운 심오한 주제를 포용적이고 보편적으로 다룬, 달리 말해 엄격한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 그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큰 행복이다.
조숙진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 중 몇몇은 관람자를 자연의 품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숲 속의 명상공간에 관련된 것이다. 한 예로, 2000년에 뉴욕 주 북부에 설치된 명상공간에서, 나뭇가지를 배열해 만든 네 개의 뚫린 벽은 날씨의 변화로부터 관람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오히려 자연은 우리 스스로에게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하게 한다. 삶의 유한성을 바꿀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조숙진이 창조한 무대에서 그 같은 질문에 관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존재에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비영구성이란 복잡한 정신적 문제에 직면한 조숙진의 감성적 깊이는,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진지하게 나타난다. 그녀가 절망적으로 어둡고 유머없는 사람이란 것이 아니다. 그녀를 알게 되면서 느끼는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진지한 성격을 밝게 만들어 주는 유머러스한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조숙진은 무엇보다 조각가이다. 우리는 조각가의 본래의 기능은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 제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분야의 모든 주목할 만한 발전들은 그 조각의 본질적 목적, ‘모멘토 모리 (죽음을 연상시키는 상징물)’ 로부터 배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조숙진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특정 기억들을, 상실감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여기면서 심오하고 범세계적으로 그 공간을 해석하려고 추구한다. 삶의 경험에 있어 상실은 누구에게나 큰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삶에 있어 상실은 누구에게나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역으로 예술을 통해 긍정적인, 거의 신성한 경지의 마음의 변화들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전체를 바라보는 대국적 관점이 그녀의 역동적이고 잘 다듬어진 섬세한 상상력을 억압하게 놔두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숙진의 진정성의 한 부분은 재료를 탁월하게 사용하는 것과 함께, 이같은 재료들에 영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정신이 현존한다는 점이다.
조숙진의 작품에서는 정신성이 어떻게 또 다르게 표출되는가? 그녀는 작업을 위해, 브라질의 바히아 레지던시 작가로 가있던 스튜디오 근처에서 가난한 어린 학생들과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예술작업이기도 하고, 퍼포먼스 작품이기도 한 작업의 일환으로,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학교 외벽을 장식하였다. 이 작은 프로젝트는 자부심의 표상이 되었으며 아이들에게는 미술에 흥미를 유발하였다. 이러한 공동작업은, 때론 너무 협소하고 또 가식과 허영에 싸여 좋은 작품 나오기 힘든 예술계 현상 밖의 세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를 보여준다. 진정으로, 깊은 차원에서 이 프로젝트는 공동작업으로 실현화된 작품 밑바탕에 깔린 에너지와 노력의 미학이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작가의 초점은 작품 제작뿐 아니라 젊은 세대가 지닌 잠재적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이 갖는 공허감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데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해서 아직 어디로 흘러갈지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우리의 한정된 삶이 고귀해질 수 있는 방법을 세운 것이다. 예술은 아무리 궁핍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존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공예술작품에 대한 조숙진의 확고한 생각은 LA 시 야외 공간, 새로 지어진 LA 경찰청 산하 구치소 옆에 2009년 완성된 <기원의 종: 보호와 봉사, Wishing Bells: To Protect and To Serve> 에서 나타난다. 조숙진은 한국인이라는 배경을 너머, 비동양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을 대하여 왔는데 여기서는 불교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야외 설치작품에는 108개의 구리종이 걸린 철조물의 지지대로 삼나무 기둥을 사용했고, 종의 개수는 불교에서 말하는 108 번뇌를 의미한다. 각각의 종에 매달린 추에는 '친절' 과 같은 긍정적 의미의 단어들을 새겨넣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하였다. 조숙진에게 있어서 이 프로젝트의 초점은, 지금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작가의 타고난 품격 있는 감수성은 그녀가 가진 창의성의 한 부분으로, 신념이 독창적인 의도로 드러난다. 사실 조숙진은 작가의 의도가 표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작가이다. 이 역시도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향한 단정함과 명쾌함에서 비롯된다.
조숙진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라 생각되는 <알 수 없는 신에게, To The Unknown God> (2007) 는 기둥, 나뭇가지, 통나무 등을 재료로, 넓은 공간을 무대 삼아 무작위 하듯 구성한 작품이다. 관객이 지나가기에는 매우 빽빽히 설치되었고, 마치 저 위의 미지의 신이 존재하는 듯 빼곡한 덤불에서 나무조각들이 솟아올라 있다. 이 뛰어난 작품은 희망과 절망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절묘한 균형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적 방식으로 그 정신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 설치작품의 적막함은 그 자체로 돌아가, 우리를 좌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생각이 깊은 관객에게는 미지에 대한 경외심마저 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숙진은 미술계의 과다한 상업성에 대한 반응에서 오는 이론, 정치, 기술의 부재를 주장하는?현대미술의 범위 바깥에 서있다. 오히려 작가는 정신적인 예술가들이 언제나 해왔던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의 시야 밖에 있는 무언가의 잔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지적이고, 감성적이며, 촛점이 분명하며, 그녀 자신의 가능성은 물론 우리의 가능성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