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Project with Korean Art Museum
로그인  |  회원등록  |  English    Contact us

아티스트

Home > 참여작가 > 상세보기

photo

배형경, 모란미술관

출생

1955, 서울

장르

조각, 설치

홈페이지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Email

인물군상, 1999

석고, 철, 60x40x160(h)

이전
다음

사람의 숲에서 나를 찾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람, 가부좌를 튼 무릎 위에 큼직한 두 손을 나란히 얹고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사람, 우리와도 같은 좁고 작은 공간에 갖힌 사람들, 등에 멍에처럼 길쭉하고 무거운 철판을 얹은 채 엉거주춤 서있는 사람들, 사람들. 그들은 실존의 무게에 억눌린 존재들인가, 그것의 초월을 위해 자신과의 고독하고 힘든 투쟁을 벌이고 있는 영웅의 모습인가.
배형경이 만든 인간군상에는 특정인을 지시하거나 연상시키는 어떤 표지(標識)도 없다. 모두 삭발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뚝뚝하다 못해 거의 감정의 상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이 인물들은 대체로 동세를 결여하고 있다. 세부묘사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형상을 한 덩어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작가의 손의 압력과 그 흔적이 묻어나는 표면의 거친 질감과 견고한 형태는 동세의 결여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덩어리 속에 응축시켜놓은 결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소조에서 양괴(量塊)가 전면으로 돌출하는 대신 재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 덩어리로서의 형상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배형경의 소조는 로댕(Auguste Rodin)의 <발자크>를 떠올리게 만든다.
석고상태로 제작된 이 초상조각이 의뢰자인 프랑스문인협회에 제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문인들은 이 ‘누에고치’와도 같은 덩어리에 대해 “이름도 없고 조잡한 덩어리, 거대한 태아”라는 야유와 조소를 퍼부었다. 그러나 로댕의 창조성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조수 릴케(Rainer Maria Rilke)였다. 릴케는 이 작품에서 ‘창조의 자유, 창조의 오만, 창조의 황홀과 도취가 난만함’을 읽어냈다. <발자크>가 지닌 특징은,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말했던 것처럼 “의미가 경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과정 자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작품의 표면”에 있다. 그럼으로써 발자크의 신체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면의 배열로서 드러난다. 묘사를 배제함으로써 덩어리와 거친 표면이 전면으로 부각하여 작품은 미완성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미완성에서 로댕의 근대성을 찾을 수 있다. 미완성이 지닌 근대성은 놀랍게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젊은 시절에 만든 성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와 후기에 제작한 피렌체의 피에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기 직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론다니니 피에타>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성베드로대성당의 피에타와 밀라노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 사이에는 형식과 형태에서든, 구조와 표면의 질감에서든 그 차이가 명백하여 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론다니니 피에타>에서 볼 수 있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업혀있는 듯한 성모 마리아, 가슴 위로 갑자기 돌출한 예수의 머리, 게다가 그 옆에 어깨부위가 잘려나간 채 불안정하게 매달려있는 팔, 긴 호(弧)를 그리고 있는 구조, 무엇보다 다듬지 않은 표면의 거칠고 난폭한 질감 등은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간트너(Joseph Gantner)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에서 형상화 이전의 단계가 지닌 창조적 의미, 즉 선형상(pra-figuration)의 동적 아름다움을 주목하여 유명한 ‘미완성(non-finito)의 미학’을 제창하기도 했다. 그것은 깎다만 것이 아니라 마치 인상주의 회화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양과 각도, 대기의 밀도를 화폭 속에 담아내기 위해 성긴 붓질로 화면을 채운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조각에서 물질의 속성을 드러내는 질감의 강조에 따라 재현에 의존한 서술성은 후퇴하는 대신 표면의 질감이 부상한다. 배형경의 덩어리로서의 형태는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배형경이 표현하고 있는 인간의 형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익명성이다. 미켈란젤로와 로댕의 작품이 특정한 인물을 재현한 것임에 비해 배형경에게는 모델이 없다. 배형경의 작품에서 익명성은 기본적으로 근육질의 남성의 인체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나 성의 구별이 필요 없는 기본적인 형태만 갖추고 있는 것에서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불완전한 형태는 그의 작품에서 ‘미완성의 미학’을 부각시키는 요소이다. 그것은 작품이 생성의 과정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물질로서의 덩어리만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양식적인 맥락에서 표현주의 조각에 가까운 그의 인물상들은 원시적인 에너지와 정신적인 아우라로 충만해 있다. 군집을 이루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단독자일 수밖에 없는 이 인간을 닮은 덩어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침묵의 육중함이다. 사람의 숲에 갇혀 있으나 관계보다 실존적 고독이 더 강조되고 있는 그의 작품이 지닌 종교적 특징은 불상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그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침묵의 지속에 있다. 즉 그의 작품에서 고통, 절망, , 분노, 갈등, 소외와 같은 인간적 감정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이 운동을 멈추고 응결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인간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의 결과임을 드러낸다.
나무궤짝으로 만든 작은 감실(龕室)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킨 은자,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히말라야 설산으로 들어가 존재도, 시간의 흐름도 초탈해버린 구루(Guru)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면벽구년에 마침내 절대공(??nyat?)의 경지에 도달한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상징한 것일까. 쌓아놓은 상자 속에 들앉아 있는 형상들은 석굴암 주실(主室)에 봉안된 보살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게다가 불교적 도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형상들에서 정면성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등신불까지 떠올리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면성은 심미적인 주제에 어울린다기보다 기념적인 것, 그것도 종교적인 주제를 구현한 형상과 더 조응한다. 대체로 종교적 주제를 추구한 작품들은 상징과 은유 등의 수사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일정한 서사구조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어떤 서술성을 발견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의 작품을 통해 종교적인 도상을 연상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러한 도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형상 속에서 다른 신체 부위보다 유달리 손이 큼직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상상, 즉 이 인물들은 고행하는 수도승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추측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도승도 노동자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자기증식에 의해 수없이 복제된 형상들이 만들어낸 군집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을 바탕으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훑어본 바대로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익명성, 미완성, 정면성을 들 수 있다. 또한 세부묘사보다 덩어리와 표면의 질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런 특징들은 그의 작품을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종교의 교리나 신앙을 형태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의 작품은 완결된 것이라기보다 생성,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미완성의 미학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동적인 미는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명상, 초월과 같은 정신의 승리를 위한 자기와의 힘겨운 투쟁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절대적인 깨달음의 성취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기 위해 싸우는 주체로서 우리 자신이다.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더라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최태만(미술평론가)

더보기

배형경

첫 개인전을 가진 지 꼭 20년째인 올해도 배형경의 표현대상은 인체이다.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말 그대로 ‘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형태는 인간은 이렇다는 관념에 충실한 의술용 동인(銅人)처럼 사회성이나 존재성을 의미하기보다는 대표성과 익명성을 지닌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당당한 어깨나 근육 등이 남성의 신체를 기초로 하고 있어 이 인체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놓인 인체가 된다. 인간 존재에 대한 사회적 물음이 여성성과 역할에 대한 개인적 의문이 연계되는 지점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머리에 뿔이 나거나 한쪽 머리가 문드러지거나 심지어 한쪽 얼굴 앞에 얼기설기한 물체가 드리워진 형태에서 내부에서 솟아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형상화를 본다. 사춘기에 이르면서부터 자신의 내부로부터 가해지는 신체적 고통에 익숙한 여성들이 갖는 인체에 대한 생각은 남성의 경험에서 나온 인체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인체는 곧 작가 자신이 되는데 <바라본다>와 <생각한다>와 같은 동사형 명제를 작품에 부여함으로써 행위의 주체성을 강화시킴으로서 이러한 추측은 더욱 확고한 사실로 자리한다.
 
그가 표현하는 인체는 불분명한 눈동자와 유동적인 표면을 갖는다. 작가의 손자국으로 가득한 피부는 질질 흘러내리는 듯하고 얼굴은 우뚝 솟은 코 양옆으로 눈이 있는 자리가 약간 느껴질 뿐이다. 이러한 유동성은 시간성과 가변성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러한 규정되지 않음이 작가 바라보는 현재이다. 인체에 기다랗고 두꺼운 쇠판을 고정시킴으로써, 자신의 그림자처럼 평생 지니고 있으면서도 무게는 느끼지 못하나 인간의 형태를 한곳에 머무르게 하는 장치를 하여 ‘업’이라 하였다. 정방형 상자 안에 예의 거친 손자국과 코만 드러나는 얼굴의 인간상이 가득 찬 작품은 ‘생각하다’인데 나한상 혹은 석가고행상을 연상시킨다. 2001년도 개인전의 전시명을 <부처를 닮다>라고 하였고 2009년도 베이징에서의 개인전은 <업 Karma>이라 하여 불가(佛家)의 시각에서 관조하는 삶에 대한 성찰이 내용임을 암시하지만 종교적 성격을 벗어나서 2004년 개인전 명제였던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 죽는다>라는 것이 일관적 주제로 작용하고 있다. 초연히 생활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극히 자기반성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를 불교라는 전통의 방식을 빌어 표현한 것이다.
전통을 존중하고 자연주의적 조형어법을 추구하며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배형경은 일관성있게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여 답을 추구해가는 보기드문 작가이다.

조은정

더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