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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우, 자하미술관 facebook

출생

1978, 서울

장르

사진, 미디어, 퍼포먼스

홈페이지

www.kohsangw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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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꽃, 2014

아카이벌 디지털 프린트, 101 x 13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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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우와 21세기 시각적 논리

미술에서 형상 만들기는 그리는 행위 자체만큼이나 오랜 기원을 갖고 있다. 닮게 만든다는 것은 한 실제 사물과 관찰된 사물 사이에서 하나의 관계가 시작됨을 뜻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차이' 라고 부르는 두 사물 사이의 공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닮은 꼴을 만든다는 것에는 특별한 뉘앙스가 있다. 그 '차이'의 지각이 관찰된 사물, 즉 묘사되는 자아와 밖에서의 지각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차이'로서 지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자신 밖에 있다는 것 또는 잠시라도 자신과 거리를 둔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존재하거나 보거나 보여지지만, 그러나 신기하게도 우리의 정체성을 주성하는 보통의 몸과 페르소나는 서로 잘 일치되지도 조화를 이루지도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은 여기에도 있으며 또 저기에도 있고 모든것에 있으면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경험은 주체이지 동시에 객체가 되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카메라 발명과 그 초기의 기능은 변형된 정체성을 향해 순간적으로 도약하고픈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부채질 했음에 틀림없다. 이를 계기로 대상을 생포하려는 환상에 대한 우리의 광적 성향이 즉각 드러났다. 항상 열려있고 언제나 예리한 기계적 눈인 렌즈를 통해서 말이다.
다양한 캐릭터를 손쉽게 연기할 수 있었던 의상놀이를 비롯, 외관으로 진실을 대체했던 모든 방식과 수단은 사진의 출현 이후 초상사진으로 흔한 것이 되었다. 포즈 취하기, 역할 수행하기, 가장하기, 연기하기, 투영하기 등 이중화 작업에 내재되어 있는 연극성은 자기 초상이라는 표현 영역에서 놀랄 만큼 효과적인 대응물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주체성과 객체성을 요술부리듯 뒤범벅 시키고, 카메라의 앞과 뒤 모두에서 마치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양 작업을 한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70년대 중반 처음으로 주체-객체의 이원론적 구조를 붕괴시키는 기호학적 잠재력을 자신들의 정체성 및 경험의 조건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작가들 중 많은 사람이 여성 이였다.  누구보다 신디 셔먼이 그렇고 안나 멘디에타, 애드리안 파이퍼, 그리고 마리 베스 에델슨이 그렇다. 그들 모두는 카메라를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거울, 화장, 가면, 보철 장치 들의 다양한 소품을 이용하여 실험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의 자아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 또 몇몇 경우는 자아 이미지를 급진적으로 변형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 돌이켜 보건데 그것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여성이라는 '차이의 공간'을 비집어 열려는 시도였다.
80년대 및 90년대의 포스트모던 실천에서도 작가들은 초상 사진의 변형 내지는 이중화 기능을 이용했다. 이는 미술사 전통에 대한 과도-인지(hyper-awareness) 를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풍경을 식민화하고 있는 동시대 대량생산 상업이미지라는 넓은 영역을 해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말의 자기 초상 장르에 관련해서도 안정적이며 진정한 자아의 부패를 선언하고 단정하는 많은 글들이 쓰여졌다. 오늘날 합성된 우리의 정체성들은 대중문화로 부터 우리에게로 매순간마다 배달되는 손쉬운 상투형들의 저장고로부터 노골적으로 그리고 대개는 아둔하게 샘플링한 것들도 이루어 진다.
전지구적 시장이라는 새로운 현상만이 아니라 그것이 흩뿌려대는 혼성적 시각언어들과 적당히 다가적인 정체성들 또한 오늘날 대중적 재현물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황을 탐구하려는 담론 및 전략의 주제가 되어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야사마샤 무리무라, 마리코 모리 그리고 백남준을 이런 국제적 작가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계 여러 곳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지구적 대중문화의 시각적 모티프들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아의 진실성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지구적인 커뮤니케이션 연속체의 상층 위성감청망 에셜론(echelon) 에 거주하는 한, 가장 시각 현실들을 향해하는데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자연과 비자연, 현실과 비현실, 진정한 문화와 진정하지 않은 문화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상상하기 시작한 것인가. 특권적 시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든 시대에 영원히 젊고 제한없이 존재하기, 그리고 별다른 수고 없이 한 문화적 틀에서 다른 문화적 틀로 비약하기에 관한 다양한 판타지를 음미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이 오랜 동안 축적해온 수법들로부터 전략을 차용하여 구사하는 가장 젊은 세대의 한 작가가 있다.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고상우가 렌즈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때 그의 자기묘사 행위는 또한 왜곡 행위의 일종이다.
그의 사진 및 비디오 작품은 컬러 음화로 만들어 지는데, 그 결과 거기엔 전도가 일어난다. 즉 어두운 색조는 빛이 되고, 붉은 색은 푸른 색이 되는 등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뒤집에 보임으로써, 자신은 양화적이 아니라 음화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며, 그 결과 '고상우'는 사진 밖으로 떨어져 나오고 사진속에는 청색조의 관능적인 백변종(albino)으로 나타난다.
그는 말한다. "내 자신을 전도시키기 위해 음화 이미지를 사용한다. 내 이미지의 색을 전도시키고, 남성과 여성을 전도시키며,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를 전도시키다. 또한 나는 현시롹 환상을 전도시키다."
고상우는 의복, 머리 모양, 메이크 업, 제스처 같은 문화적 성별(gender)효과들을 변형시킨다. 마치 남성성을 비워서 여성적 형태로 전이하는, 자기 변형 과정을 상찬하려는 듯이 말이다. 미스 아메리카, 마리아, 이브, 동정녀 마리아 등 제목이 지시하는 것들은, 결정적으로 서양 여성적인 것을 향해 기울어져 있지만 고상우에 의한 성 전환적 변형은 남성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 모두를 반영한다. 하기는 한국같은 남성 지배 문화 속에서 자란 그에게 그러한 양성적 측면이 잠복해 또는 억압되어 있을수도 있다.
작가의 "비워내"려는 충동과 남성적인 것을 여성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작가가 사용하는 상징과 상투형 속에서 다시 작동한다. "자아 정체성의 순화고리" 를 연마하기 위해 고상우가 공적 영역의 광대한 저장고로 부터 낚아 올린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적용할 때 나는 소움의 반이다. 예를 들어 미국 문화에서 마돈나와 이브는 단순히 성서상의 여성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매우 대중적이며 패션을 선도하는 가수들이다.
그가 붙인 제목들 때문에 고상우의 여성 페르소나 들에는 특수하지만 애매한 위치가 부여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관람자들이 그것들에 전달하는 경험들, 물론 우리 대다수가 '가정(home)' 이라 부르는, 철저하게 매개되고 상품화된 환경의 핵심에 기원을 둔 경험들에 의해 보다 적절하게 채워질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해 주고 있는 '가정(home)' 이란 단어는 연속적으로 전달되는 이미지들도 가득 차 있는 만연한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의 연속체의 동의어로서, 수십 억의 관객에게 도달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 어느 곳에 있던 거기에는 MTV와 코카콜라와 나이키의 시각적 기업 문화가 있다.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어 버린 전세계를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곧 그 전모를 알게 되고 극도의 불만을 갖게 된다. 농업에 관한 이야기든 육상 선수가 신고 있는 신발의 종류에 관한 이야기든 대중문화의 쇄도는 실로 그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도 차이 및 다양성을 지지하고 확산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정반대라는 점을 감지하게 된다.
고상우의 변형된 자아 이미지는 전지구적 연속체를 지탱하는 디지털 기술과 상당한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우리 모두도 이 점에 관해서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는 핸드폰을 사용할 줄 알고, 팩스를 보낼 줄 알고, 케이블TV를 켤 줄 알고 인터넷에 접속할 줄 안다.
팽창 일로의 시장수요와 마찬가지로 그 연속체의 기하급수적 성장은 새로운, 낡은, 부가적인, 삭제된, 재발명된, 절충된, 오염된 등등의 다양한 의미를 획득하고 발산하고 고르고 폐기하면서, 결국은 전지구적인 작용력을 갖게 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세상의 많은 이미지들이 모든 이들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어디에 가든 간에 어떤 이미지들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갑자기 이 모든 것은 매우 광대한 것이 되어 버렸다.
공유된 시각 언어들과 전지구적인 형상들, 그것은 다국적 거대기업과 조직화 된 종교는 물론 잠재적으로는 더없이 행복에 젖어있는 고상우의 청색 백변종 작품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쟌 아비코스(미술비평가, 미술사가, 아트포럼 국제판 객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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