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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출생

1963,  

장르

회화, 조각

홈페이지

www.yeesoo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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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도자기, 2007

도자기 파편, 알루미늄, 에폭시, 24K 금박, 43 x 45 x 4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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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시각적 발현

인간은 현실에서 실존적 한계정세를 초월할 수 없음을 경험하며 삶을 살아간다. 영성은 궁극적인 것,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영성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느끼고 속세의 모든 사념에서 영원히 자유로운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런 초월적 경지에 이르기 위해 신이란 타력을 빌리거나 혹은 자신의 수행을 통한 내면의 영성 발현을 추구해왔다. 20세기 모더니즘시대에 과학에서는 논리적 수리 분석을 통해 절대적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이데아의 영역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대 예술 역시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 규정짓기와 감성의 영역조차 분석적 미학의 관점 안에서 바라보려했다. 근대 이후 양자역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절대적 진리의 실체에 대한 부정과 함께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난 규정지을 수 없는 궁극의 영역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 종교에 있어서도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구조화와 제도화에 머무르며 예술은 종교 안에서 모방이나 기복적 신앙의 상징체계에 머물렀다, 또한 인간과 신이라는 이원론적인 인식 아래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존재, 신은 영성의 존재라 사고하고 인간의 한계를 규정지었다. 그 한계정세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신의 힘을 필요로 하였고 구조화된 종교시대의 예술에서 영성을 통한 창작은 신이란 타자의 관계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수경의 작업은 이성과 감성을 넘어 영성의 영역에 있다. 그녀의 영성은 자신 이외의 신이란 절대자와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는다. 2005년부터 시작된 경면주사(鏡面朱砂)방식의 드로잉 작업들은 부적이나 불화를 그릴 때 쓰이는 화법이다. 이 작업에서 그녀는 조건화된 마음을 빠져나와 외부 세계와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아와 타자, 주관과 객관과의 관계를 초월한 인식의 단계로 자신을 이끌어간다. 그녀는 종교의 타력본원(他力本願)을 통한 마음의 정화가 아닌 본원자력(本願自力)을 추구한다, 끊임없는 명상을 통해 무의식의 경지에서 이뤄지는 장시간의 드로잉은 결과적 형상보다 과정적 행위의 수행을 더 중시하며 형상과 비형상적 이미지의 경계 뒤섞어 버린다.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는 부서진 도자기를 다시 재조립하여 아름다운 유기적 형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도공은 많은 인고의 과정을 거처 아름다움의 극치인 도자기를 탄생시킨다. 에도시대의 일본 철학자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은 제업즉수행(諸業卽修行) ‘모든 노동(일) 자체가 곧 정신수양이며 자기의 완성이므로 일하는 자체가 곧 도를 닦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청자의 비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인신공양(人身供犧)을 했다는 설화에서 보듯 도예공은 생산 활동을 하는 창작자를 넘어서 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삶에 다다른 존재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러한 정신 수양적인 잉태 과정을 거처 탄생되는 도자기중 일부는 탄생의 직전에 아주 작은 흠 하나 때문에  폐기된다. 이 도자기 파편들을 작가 이수경은 다시 모아 재구성하고 재창조시킨다. 어느 이름 모를 도예가의 수행의 끝을 황금색의 아교를 매개로 다시 연장시켜 그녀의 창작 수행과 연결시킨다. 재창조 된 그녀의 도자기 작업은 부서지기 전에 갖추었던 도자기의 형상을 다른 의미로 번역하는 작업을 너머 지난 창작 과정의 또한 자신의 수행으로 흡수시키며 타자와 자신의 구분을 해체시키고 있다. ‘너무 그리웠어! 애들아’라고 자신의 도자기작업을 의인화 시키며 애착을 갖는 작가 이수경에게 깨진 도자기 파편 하나하나는 버려진 조각이 아닌 인신공양으로 탄생된 소중한 창작물들인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세속적인 것들보다 좀 더 성스럽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것을 갈망하며 개체적인 자아를 넘어서 무언가 좀 더 가치 있는 커다란 것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또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심리적 강인함을 얻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한다. 비논리적, 비과학적인 영성의 영역을 이수경은 예술을 통해서 추구하고 있다. 샤머니즘과 구조화된 종교시대의 넘어 개인화된 영성의 시대에 이수경은 자신의 작업에서 심리적 안정, 영성적 치유와 더불어 일상적 삶을 넘어서 좀 더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

서진석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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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나에게로 그를 그에게로-이수경론

나는 나 그는 그
“나는 나 그는 그”("私は私、人は人"/ 니시다 기타로 西田幾多郞).
작가와 작품 사이에는 처음부터 인칭적인 거리가 존재한다. 작품은 분명 일인칭인 작가의 표현욕구에서 나왔지만, 작가에게 인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에게는 독립된 삼인칭의 물격(物格)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물격은 관람객이라는 삼인칭 복수들의 공간 속에서 서식하려는 운명을 애호한다.

작가의 공간이 나(私)의 세계라면 작품이 공간은 나를 떠난 타자(人)의 세계다. 작가가 작품을 제작한다는 일은 부단히 나를 버리고 ‘자신과 비슷한 타자’를 만든다는 뜻이 된다. 관객이 느끼는 작가의 개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오랜 시간 속에서 삼인칭으로 타자화된 것처럼 보이게 약속된 일인칭의 세계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끔은 타자화 되지 않는 일인칭의 세계만으로 된 작업도 있다. 이런 경우 작업의 예측가능성은 참으로 힘들어진다. 타자화 되지 않은 일인칭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하며 변덕스러운 것인가? 이수경이 그렇다. 그녀의 작업은 종잡기 힘들 정도로 매우 다양한 변모를 하여왔다. 오브제, 비디오, 페인팅, 드로잉 등 웬만한 장르는 다 보여준 듯하다. 이는 국내 작가들에 있어서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1992년 ‘나와의 결혼’전(인데코 갤러리, 서울)에서부터 최근의 ‘파라다이스 호르몬’전(몽인아트센터, 서울, 2008년 5월)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인전들과 숱한 단체전에서 보여주었던 이수경의 실험들은 그 변화가 너무 다양해서 통상적인 관점으로는 작품의 일관성, 즉 통일된 개성을 발견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이는 우선 그녀의 개인적인 일인칭의 세계가 삼인칭의 공간 속에 타자화되려는 숙성의 시간을 앞질러 그녀의 숨겨진 또다른 일인칭의 세계가 드러나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그녀에게 있어 일인칭인 ‘나’의 작품과 삼인칭인 ‘그’의 작품 사이에 복잡하면서도 단호한 여러 층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듯하다.
 
“나는 나 그는 그”(私は私、人は人, 인<人>이란 일본어는 우리말의 ‘그냥 사람’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주로 절대적 타자인 ‘그 사람’을 가리킴). 이 말은 일본의 근대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가 한 말이다. 니시다에 의하면 ‘나’는 결코 ‘그’가 될 수 없다. 즉 나의 세계라는 공간과 그의 세계의 공간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 된다. 전자의 공간이 조각으로 절개된 개별적인 토포스(topos) 공간으로 응축된다면 후자의 공간은 균질공간을 넘어 우주라는 무한공간으로 확산하려 할 것이다. 토포스를 아무리 많이 겹쳐도 결코 균질공간은 되지 못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임에도 일상 속에서는 편의적으로 별 갈등 없이 소통을 하고 있다.

이수경에게서 통일된 개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은 대개의 작가들이 ‘그’의 세계 속에서 ‘나’의 세계가 혼재된 상태를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별다른 의문 없이 수용하려는 데에 반해 처음부터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임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이 둘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 나를 나에게로 그를 그에게로 보내는 태도가 그녀 작업의 요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나를 나에게로
이수경은 평면작업 ‘불꽃’시리즈는 드로잉의 궁극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드로잉은 철저하게 일인칭적인 작업이다. 제삼자가 개입할 수 없다는 데서도 그렇고 일인칭인 주체의 최소한의 질료적 틀인 ‘신체’를 가장 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신체는 ‘나’라는 일인칭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은 초월적이지가 못하다. 그 몸은 또한 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드로잉은 작가의 숨겨진 일인칭을 표현하는데 가장 유효한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드로잉은 캔버스 공간 전체를 순간적으로 지배한다. 작가의 신체가 재료의 저항감 없이 즉발적으로 화폭의 공간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체가 있는 그대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수경이 신체를 드로잉으로 실어낸다고 했다고 그 신체는 실처럼 길다랗게 풀어지고 늘어진 가늘어져서 ‘정보’에 가깝게 희박해진 신체다. 이러한 드로잉을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건 오히려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섬세하게 ‘버림’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우리 몸에는 수조개의 세포가 있고 그 세포 하나하나마다 전생과 이승의 업과 습이 담겨져 있다 한다. 업과 습이라는 정보들을 문서파쇄기에 넣어 처리하듯 잘게 부수어 일렬로 세워놓고 업장을 날려 보내듯 화면 위에다 하나하나 풀어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드로잉의 행위는 개체의식으로서의 나, 일인칭으로서의 내가 점점 소멸되어 가는 종교적인 참회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경면주사로 그린 최근의 200호짜리 대작들은 제작기간만 하여도 몇달씩 걸린다 한다. 드로잉치고는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덩어리로서의 몸을 극단적으로 가늘고 길게 찢어 정보, 알음알이, 업보로서의 몸과 그 몸에 담긴 마음의 기록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기 위해서도 한번에 쉽게 제압되는 자그만 캔버스가 아닌 대형캔버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몸과 마음이 결국 하나이고  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몸을 세포의 크기로 잘게 잘라 그걸 늘어놓는 방법 밖에 없다. 이건 몸이 덩어리로 화면에 부딪히는 기존의 드로잉과는 다른 방법인 것이다. 표현이 아닌 버림이고 버리기는 버리되 종교적인 수행으로서의 버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몸에서 나오는 기운을 받아 그때마다 한줄씩 그려나간다. 그 기운은 동양화에서 흔히 말하는 기운생동의 표현적인 ‘기’와는 다른 것이다. 일인칭이라는 토포스의 공간 즉, 신체 안에 가두어진 불가시(invisible), 불가해한 상태를 드러내려는 기운인 것이다.

이를 위해 고구려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영기문(靈氣紋)을 참조하고 있다. 영기(靈氣)란 오브제에서 파악되지 않는 불가해한, 그러나 분명히 존재감을 가진, 토포스 공간 속의 어떤 실체를 말한다. 일종의 노이즈라고 할 수가 있다.  

인체의 CPU가 주변의 대상을 인식할 때 로직을 갖추고 해독할 수 있는 것은 30%밖에 안 된다고 한다. 나머지는 알고리즘이 적용 불가능한 노이즈 상태로 본다. 기실 일인칭인 우리들 각자의 존재 자체가 이러한 노이즈 덩어리인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를 다 수용하려면 투명하게 로직을 갖춘 이성적인 세계뿐 아니라 더 많은 부분 어둡고 불가해한 요령부득의 노이즈의 세계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노이즈의 세계는 불가시(invisible)의 세계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더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녀의 화면에 등장하는 영기문(靈氣紋)은 이러한 불가시의 세계를 가시(可視)의 세계로 드러내려는 조형적인 노력이 아닐까?

그러나 이수경은 이러한 노이즈를 고구려의 벽화처럼 쉽게 페인팅의 세계로 끌어내지 않는다. 페인팅은 아무래도 물성이 강하다. 물성은 작가를 벗어난 타자를 지향한다. 그래서 물성이 희박한 대신 일인칭인 몸의 토포스가 더 강하게 드러나는 드로잉을 택할 수밖에.

이들 노이즈는 대개는 마치 파동을 연상시키는 선의 형태로 나오지만 때로는 이 파동의 에너지가 군데군데 뭉쳐져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이미지는 용, 괴물, 소녀 등 일종의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 형상화된 패턴의 형식을 보이기도 한다. 모두 작가의 토포스 공간에 압축파일로 잠복되어 있는 불가시의 편린들인 것이다. 작가는 이를 고백하고 펼쳐냄으로써 ‘나’라는 개체의 노이즈를 지워나가고 있다. ‘그’의 세계란 결국 ‘나’가 사라진 화엄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를 그에게로
일본 에치고 츠마리와 한국의 안양신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려 이를 토대로 만든 ‘가장 멋진 조각상’은 그의 세계에서 출발한 작업을 그에게로 돌리는 일종이 ‘퍼블릭 아트’ 작업이다.  공자, 노자, 성모마리아, 예수, 부처, 마호메트, 가네쉬 등 유교, 도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을 대표하는 성인들의 신체부위를 각각 분리하여 해당부위에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고르라는 설문내용이었다. 그리고 통계의 결과에 따라 선택된 부위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성인상(聖人像))을 만들었다.

‘그의 세계’란 달리 말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퍼블릭(공 公)의 세계인 것. 궁극의 퍼블릭 아트란 이런 상태인 것. 여기서 작가의 일인칭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매우 분명하고 노이즈가 별로 없는 투명한 세계다. 타자인 그들이 더욱 많이 참가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희박해지고 노이즈는 완전히 사라진다.

주제를 성인(聖人)으로 한 것도 여기서는 그 의미가 심장하다. 성인이라는 분들은 일찍이 나의 세계를 버리고 ‘그’가 된 분들을 이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도 자신들처럼 일인칭인 나의 세계를 버리고 삼인칭인 그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막상 예수상이나 석가상 자신들은 각각 다른 성인들과 차별화된 고유의 이콘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아상(我相)이 없어야할 성인들이 본의 아니게 일인칭인 사(私)의 형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수경은 이를 설문지 조사와 부위별 조합이라는, ‘나’가 철저히 배제된 채‘그’들만이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사(私)의 이콘을 해체하고 개념적이나마 보다 공(公)에 가까운 새로운 형태의 이콘을 만들고자 한다. 그를 그의 세계로 보내는 데에 이들 성인들도 동참하는 기분으로.
 
‘번역된 도자기’ 작업은 나의 세계를 그의 세계로 단계적으로 끌어가는 과정의 치밀하고 복잡한 알고리즘을 보여준다. 도자기 가마 근처에는 버려진 도자기 파편이 흔하기 마련. 도예가의 허락을 얻어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작품을 만들었다.

그 파편들이란 무엇인가. 한때는 흙이었다가 물을 만나 점성을 얻고 도공의 손을 빌어 물레 위에서 회전하며 그릇의 형태가 건조되었다가 강력한 불꽃을 만나 단단한 자기로 변했다가 실패작으로 확인되어 그만 깨어져 버려졌던 것. 그건 애초에 어떤 도예가가 만든 ‘자신을 닮은 타자’이었던 것. 순수미술과는 달리 표현력뿐 아니라 사용자의 기능도 배려한 공예이기에 애초부터 타자에 더 가까운 예술품이었던 것. 또한 그것이 실패작이어서 망치로 깨어져 파편이 되었을 때는 이제는 더 이상 도예가 자신의 의지마저도 전혀 닮지 않는 완벽한 타자가 되어버린 셈.

이수경은 이를 모아 새로운 도자기를 만든다. 당연히 그 파편들이 맞을 리가 없다. 원래 도예가가 만들려고 한 도자기의 고유한 형태가 있다. 그리고 도자기가 도자기로 되기 위한 일정부분 제한된 형태가 있다. 그 형태는 우선 물레라는 원운동의 결과인 것. 따라서 대칭성과 부드러운 곡률은 가질 수밖에 없다. 파편을 모아 다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자기 파편이 필요하고 이들 사이의 짝맞추기를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일상적으로 보아오던 도자기 고유의 곡률 변화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급격하게 찌그러진 곡률의 파격적인 형태의 도자기가 태어난다.

여기서 묘한 상황이 발생한다. 어긋남을 맞추는 데서 생기는 기묘한 균형감이다. 어긋남끼리 모여서 구축한 새로운 타자의 질서라고나 할까. 기존의 도자기가 갖고 있던 안정된 공간감에서는 없었던 노이즈가 파편을 이어 붙이려는 금장 에폭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이즈는 전혀 불안하지가 않다. 이미 삼인칭의 상태를 겪은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그녀가 창안한 새로운 미의 생성에 기여하고 있다. 깨어져서 조각난 어긋난 타자들을 작가의 일인칭적 의지를 최대한 버리고, 그들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이어붙이는 데서 발생되는 안정된 노이즈는 그녀의 일인칭 작업인 드로잉에서 보여주었던 불투명한 토포스의 감각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제시한다.

작업과정만 놓고 본다면 노이즈가 없었던 균질공간을 노이즈가 있는 토포스의 상태로 역전시켰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완벽한 삼인칭 타자의 상태도 아닌 그렇다고 순전히 일인칭의 상태도 아닌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향한 작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수경의 작업에서 굳이 전체적인 일관성을 찾으라면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버림’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작업태도를 들 수가 있겠다. 이러한 자세는 ‘나’와 ‘그’의 작업을 가리지 않고 목격된다. 나를 버린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매우 종교적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이런 경향성은 최근 작업 ‘이동식 사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여진다.

이동식 사원은 작가 자신의 개인을 위한 사원이다. 이 작업에서는 부처님이 모두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든 종교는 나를 버리고 그가 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종교가 지향하는 공간은 ‘그의 균질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뒷면에 있는 공간에 일인칭인 나를 배치하게 함으로서 균질공간이 아닌 고의적인 토포스 공간을 만들어 노이즈를 발생시키고 있다. 일종의 역설이 되겠는데 공간의 흐름을 변형시키고 차원을 역전시킨다는 점에서 도자기 작업의 후반부와 많이 닮아 있다 할 것이다.

종교는 항상 투명한 삼인칭의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에 불투명한 일인칭의 세계에 의지해 온 대개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개성이 무기력해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기가 쉽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종교와 예술 사이에서 맞닥뜨린 이러한 갈등을 고민하고 있다. 이수경은 특이하게 ‘그’의 작업과 ‘나’의 작업을 동시에 하는 작가다. 이럴 경우 대개의 작가들은 ‘그’의 작업을 공식적인 작업으로 표방하고 ‘나’의 작업은 숨기려 한다. 팝아트는 ‘나’라는 일인칭이 극도로 희박하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종교적인 태도의 미술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많은 대중들이 팝아트에 열광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열중하려는 흐름과 어떤 지점에서 일맥상통하다고도 할 수가 있다. 자기고백적인 일인칭 작업은 이런 흐름에서 배제되기가 쉽거니와 ‘나’의 작업이라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작가의 뒷면으로 숨겨지기가 일쑤다.

이수경은 이 둘의 작업을 동시에 그리고 떳떳하게 공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수경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팝아트작가들과는 다른 계열의 작가다.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 사이에 놓인 다양한 층위를 새롭게 해석하는 그녀의 독특한 작업방식이 종교와 예술의 갈등에 처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일말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그녀의 작업이 우리에게 선물한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황인 (아트액티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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