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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미, 한미사진미술관

출생

1964,  서울

장르

회화,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hyunmiy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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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6, 2014

잉크젯 프린트, 146 x 21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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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리얼리즘 ? 중복재현과 이중부정

“이미지는 살아 있지만 또한 죽어 있다는 것을, 이미지는 강력하지만 또한 나약하다는 것을, 이미지는 유의미하지만 또한 무의미하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1]
실재와 그 재현물은 이항대립의 관계에 놓여있다. 대지미술의 등장으로 자연마저 예술의 주제에서 조형예술의 질료가 되면서 모더니즘 미술이 추구했던 순수의 시대를 지나 혼성, 혼합의 시대로의 이행은 이전의 미술보다 훨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리얼리즘을 해석하는 관점의 변화는 이처럼 시각적 환영주의에서 실재의 대상, 물질을 다루는 방향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레디메이드 역시 리얼리즘의 다른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대량생산품을 무생물로 치부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자연과 문명이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서 이제 이 둘은 서로의 공생을 인정하고 문명은 보다 더 자연을 닮으려 하고 자연은 더 급속하게 문명의 일부로 편입된다. 과학의 진보주의적 가치관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예술의 역사는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이미지를 발견하기 위한 발명의 역사였으며 반대로 초현실주의가 보여준 개인의 무의식과 내면으로의 성찰은 문명의 폭력성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함이었다. 실재와 창작, 외부와 내부, 안과 밖은 대립의 관계이자 동시에 연결된 대상인 역설의 장을 구성한다. 외부세계의 모방이 곧 재현이지만 동시에 재현은 실재를 비로소 바라보게 한다. 실재란 시각적 장이라기보다 현상에 가깝다. 조형예술을 대표하는 세 매체인 회화, 조각, 사진은 근본적으로 재현의 충동으로부터 탄생한다. 각 매체마다 저마다의 특성과 장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원형이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체의 유형에 따른 형식적 분류가 차이를 만들어내고 각 유형에 따른 영역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평면적 요소로 조각적 실험을 감행한 점, 시각적 환영주의 대신 선택한 물질적인 회화가 그 입체성을 주장하려는 시도 등은 혼성주의 미술의 태동이라기보다 다른 매체의 속성을 통해 매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무론 그 이전의 인상주의가 사진기술과의 경쟁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것 또한 고려할만한 해석임에 분명하다. 차별 없이 매체적 속성을 모두 통합하려는 시도는 쉼 없이 일어났지만, 이러한 새로운 조형방법론이 혼성장르 혹은 다원주의 미술이라는 또 다른 형식주의에 의해 그 본질이 변형되는 경우가 잦다. 유현미의 작업 역시 혼성주의로 해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는 리얼리즘을 통섭하는 하나의 조형원리를 좇아가고 있다고 보인다. 이 글의 표제로 사용한 메타리얼리즘은 실재를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아닌 실재란 무엇인지를 작업 안에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작업태도의 역설을 강조하고 있다.

유현미는 실재/외부세계가 이미지로 탄생하는 과정을 중복적으로 재현한다. 이를 통해 탄생된 이미지는 익숙해 보이는 세계를 언캐니한 정경(mise en scene)으로 시각화된다. 낯선 정경은 대개 사진과 영상에 의해 제시되지만, 사실 그가 묻는 것은 이미지 자체보다 시각예술에서의 재현성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리얼리즘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방식을 통해 강조되는데, 예를 들어 실제 사물을 석고붕대를 이용해 기성품에 조각적 개념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이어서 조각 위에 색을 칠해 회화적으로 실재의 외연을 재현한다. 리얼리티는 예술적 조작에 의해 조각이 되고 다시 회화로 그리고 이후 사진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이와 같은 반복적 행위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점점 더 실재로부터 멀어져 하나의 매체로 지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조각적인 회화, 회화적인 조각, 회화적 사진, 사진 같은 회화는 시각적 환영주의를 역설적으로 비틀어 하나의 매체에 또 다른 매체의 속성을 섞는다. 자칫하면 유현미의 작업 역시 혼성예술이란 범주로 제한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혼성의 방법론을 실천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전형적 재현의 매체인 오브제-조각-회화-사진/영상의 단계를 연속적으로 통과하면서 중복 재현을 시도한다. 혼성적이란 개념은 다양한 매체와 언어의 공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다. 그러나 유현미의 작업은 다양한 매체의 속성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도리어 각 매체들의 속성은 서로 견제하거나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한다.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제 역시 전형적인 매체의 속성을 강조한 이미지의 제작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는다. 서구미술의 이데아를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재현의 법칙이 실재를 뛰어 넘는 환영의 생산에 놓여 있다면 유현미는 실재 위에 환영의 표면을 덧붙여 재현의 법칙을 전복한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매체적 속성의 통섭하여 시각적 모순과 이중 눈속임을 보여준다. 작업의 대상 역시 서구 고전미술의 범주를 재해석하는데, 주로 정물, 조각, 인물로 압축된다. 특히 영상작업은 실재가 이미지로 축소되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서 실재는 생물?무생물 전체를 포함한다. “그림이 된 남자(Bleeding Man)”에서는 침입자가 된 이웃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편한 이웃과 그의 친구들은 남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그를 포함해 그의 집을 ‘그림’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그림 속에 갇힌 남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충혈된 눈과 불안한 동공의 움직임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림이 된 실재는 연속적인 시간의 방향성을 정지시킨다. 이미지의 가장 강력한 속성인 반-시간성은 미술을 대하는 대중의 보편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영상작업에서 지시하듯, 그림이 되어버린 남자는 그림이미지라는 폭력에 무기력하게 화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영상의 에필로그에서 재등장한 남자는 화석 그림이 된 자신을 바라본다. 이율배반적인 이 장면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많은 극적 반전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실재와 가상, 실존적 주체와 이미지가 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은 유현미의 예술적 세계의 바탕이 현실세계와 재현 사이의 관계에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준다.

뒤샹은 “내 뺨 속에 있는 내 혀로 With My Tongue in My Cheek, 1959”에서 석고로 자신의 뺨을 뜬 후 자신의 측면 얼굴 드로잉 위에 올려 놓았다. 이 작업은 조각과 회화 두 매체가 공존하고 있다. 초기 레디메이드가 기성품을 대하는 관습의 변용이었다면 이 작업은 이후 새 작업의 참조가 된다. 즉 기성품이 예술품의 자격을 획득한 후, 이 예술품은 다시 새로운 작품을 위한 레디메이드가 된다. 실재는 이미지의 원형으로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재현된 이미지가 이어지는 재현을 위한 참조, 즉 원형이 된다. 유현미가 하나의 원본을 재현한 뒤 다시 반복적으로 매체를 달리하여 재현하는 일련의 과정은 뒤샹적(duchampian)인 세계와 일정 부분 맞닿아 있는 듯하다. 포스터(H. Foster)는 <실재의 귀환>에서 뒤샹을 비롯한 일련의 진보적 작가들의 움직임을 기호가 아닌 지표(index)로 해석한 크라우스(R. Krauss)의 관점을 분석하는데,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견주어 볼 때 기호의 부재는 마치 역류현상처럼 비추어지기도 했다. 크라우스는 문화적 메시지가 사라진 미술을 사진기술의 지배로 분석하는데, 다른 관점에서는 같은 현상을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이 겪은 갈등의 현장을 스케치하고 있는데, 이는 동시대 한국의 미술계가 처한 상황과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아마도 유현미가 지향하는 세계는 문화적 메시지보다 시각적 지시성에 방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유현미가 창작과 사회 사이의 상호성이 부재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나는 유현미의 조형 화법이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누보 로망(nouveau roman)이 보여준 양식적 거부의 태도로 비교해 볼 까 한다.  클로드 뮈르시아(Claude Murcia)는 누보 로망의 등장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출현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누보 로망은 모든 문학적 창조 행위의 언어적 성격 ? 누보 로망이 제기한 문제의 특출한 대상이 된 ? 을 잊게 만드는 일체의 외부 조작들로부터 이 공간을 격리시킨다. (중략) 그리고 일체의 의미를 넘어 사물들의 ‘존재’, 그 집요한 현존을 증거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 양식을 제시한다.”[2] 오랫동안 문학(예술)이 생산하는 의미나 의미화로부터 벗어나 실존 그 자체를 드러내려는 누보 로망의 관점으로 유현미의 조형성을 바라본다면 고정된 매체적 분류와 정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작가 스스로는 회화, 조각, 사진,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는 욕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를 다시 풀어보면 그 어떤 매체와 형식에도 종속되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W. T. 미첼은 모든 매체는 본질적으로 혼합적이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의 유토피아 세계관이 매체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태도를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미술이 추구한 순수성은 본래 혼합적인 매체의 속성을 분석적으로 나눈 뒤 그 안에서 가장 순수한 상태만을 정제하려는 의도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예술은 혼성주의나 다원주의라는 개념보다 이처럼 분류되는 형식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태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미지와 매체 사이의 관계란, 일원적이 아닌 다원적인 상호성에 관한 이해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론 환영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살아있는 이미지’,  즉 “메타그림”[3]이 된다. 이미지의 삶은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의해 생성된다. 일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미지를 진짜처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이미지를 대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바로 이미지를 메타그림을 탄생시킨다. 실재 혹은 가상,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유현미는 우리에게 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     [1]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27-28 [1]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27-28 </STYLE="MSO-ELEMENT:>[3] W. T. 미첼, 같은 책, 29

정현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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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미

Still Life Series, Composition Series, Bleeding Blue Series, Good Luck Series, Portrait Series 등 유현미가 현재 선보이고 있는 여러 시리즈의 작품은 조각, 회화, 문학, 연극, 사진, 비디오의 장르적 속성과 매체 특수성을 교차하고 융합한 과정의 산물이다. 최종적으로 감상자는 그녀의 작품을 대형 사진이나 영상물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활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각, 회화, 문학, 연극, 사진, 비디오 등의 장르 또는 매체의 내부에 고정된 혹은 습관화된 내러티브나 표현 기법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전치시켜 ‘다원화된 이미지’의 세계를 구현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The Self Within (2011)이다. 이 작품은 두 개의 독립된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모니터에서는 그림이 보이고, 다른 모니터에서는 영문과 국문으로 쓴 시가 나온다. 하지만 얼핏 정물화처럼 보이는 모니터 속 이미지, 즉 테이블 위에서 촛불이 타 들어가면서 촛농이 흐르고, 그 좌우로 뇌와 심장의 해부학 모형이 놓여 있는 그림은 사실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실제 공간과 사물의 표면을 석고붕대로 고정시키고, 그 표면에 17세기 플랑드르 정물화의 색채와 붓질, 그리고 분위기를 참조하여 외관을 다시 그린 것이다. 또한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자막이 아래서 위로 흐르는 다른 모니터의 영상은 유현미의 자작시로서 방황하는 자신의 분신을 자기 안에 집어넣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성공간과 사물이 조각이 되고, 그 조각이 다시 회화로 형상화되며, 이미지의 시간이 연극처럼 상연되는 동시에 카메라를 통해 영상화되는 독특한 미술의 체계와 메커니즘을 본다. 또한 시각예술가의 상상력이 시각 매체 및 문학 언어 속에서 상호 교차하며 외부로 표현되는 다원적 예술의 새로운 사례를 목도한다. 유현미는 Still Life Series 사진을 통해 처음 이 같은 실험을 작품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작들에서 ‘교차’와 ‘융합’이라는 자기만의 형식과 방법론으로 익숙한 공간의 차원을 다층화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의 기존 감각 질서와는 다르게 융합/재편성되는 이미지의 장을 창조해내고 있다. 물론 이때 교차와 융합은 주관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될 작품을 위해 필요한 참조 틀과 시각 원칙들을 정교하게 설정하고 그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강수미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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