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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철, 한국미술관

출생

1956,  

장르

조각, 설치

홈페이지

www.artists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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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몽타쥬 아트 콘서트, 2011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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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정원에서 세상을 보다

한국현대미술 현장에서 심영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매우 특이하다. 작가는 1983년 <빚>의 형상을 변용한 나무조각 시리즈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조각뿐만 아니라 설치미술, 뉴미디어, 홀로그램, 그리고 퍼포먼스와 환경미술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활동해 온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또한 여성성에 대한 개별적 탐색에서 시작해 종교적 메시지, 섹슈얼리티와 역사적 사건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들을 채택하고 작품으로 표상해 온 이력도 작가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요인들이다. 작가로서 30년의 여정이 빗어낸 장르와 주제의 다양성은 작가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창작의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심영철의 조각가로서 역량은 <빚의 단계적 표상> 시리즈의 석조작업을 통해 일찍이 나타난다. 신체를 단장하는 소품이자 여성성을 상징하는 빗의 조형미와 빗살의 반복율은 작가의 작업동기를 자극시켰고, 나아가 그 기본형을 극대화하거나 변형시킴으로서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과 소양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았다. 필자가 작가의 초기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 시기의 작업이 일구어낸 조형적 성과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나는 그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기법들이 조각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조형감각과 미의식에 기반을 둔 것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심영철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신예작가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정관모 교수는 서문을 통해 ‘그의 미의식과 감각도 매우 첨예적’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심영철의 작업에 트랜드라 할 수 있는 <전자정원> 시리즈는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른 결실이었다. 5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에서 발견한 새로운 테크놀러지 매체와 귀국 후 천착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종교적 주제가 한데 어우러지며 구축한 독자적인 조형어법이었다. 1990년대가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돌과 나무라는 전통적 재료와 기법의 범주를 벗어나 다양한 매체에 대한 탐구를 실천해 나간다. 모니터와 네온 그리고 홀로그램과 광섬유 따위의 매체를 통해 현란한 시각체험의 극대화를 시도했던 이 시기의 작업들은 축제 혹은 살풀이의 기운들로 충만해 있다. 특이한 점은 심영철의 <전자정원> 시리즈가 이중적 판타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작업은 신성한 종교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동시에 욕망의 기운들인 에로티즘과 성적 도상들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영철의 <전자정원> 시리즈는 국내외 평론가들에게 다양한 비평적 견해를 촉발시키면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초월적 성(聖)과 에로스적 성(性)이 결합된 이중적 판타지의 근원은 인간으로서 작가의 자기성찰에 근거한 산물이며 작품은 그에 따른 변신의 진솔한 결과물로 해석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모뉴멘탈 가든> 시리즈는 가변적인 설치작업이 지닌 조형적 한계와 작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기념비적 조형의식이 타협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환경조형물에 대한 수요의 증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리즈라 볼 수 있다. 밀폐된 전시장 공간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자연과 도시에 작업이 설치되면서 심영철의 조형세계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는데 기여한 경향이기도 하다. 고대 신전을 연상케 했던 거대한 석조기둥들은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버섯 모양으로 변주되며 확장된 공간속에 설치되었다. 심영철에 있어 이 새로운 탐구의 노정은 이전의 작업과 연속선상에 있었다. 가령, 매체나 소재의 다양성은 전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고 작가의 열정과 역량이 실내공간을 포함한 도시와 자연공간으로 확대되었을 뿐이다. 그의 <모뉴멘탈 가든>은 전통적인 재질의 조각형식 뿐만 아니라 유리와 조명 그리고 다양한 개체가 군집된 멀티미디어 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심영철의 환경조형 작업은 다국적 골프장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 Korea Golf & Art Village 의 컨설턴트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자연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을 조성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최근 심영철은 다양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구슬을 이용해 단일한 형태의 설치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 작가가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Shape of Sound 시리즈는 10cm 지름 안팎의 구슬을 이용해 꽃의 형상을 만들거나 사각의 공간을 조형하는 작업이다. 수직의 선에 매달린 구슬들은 바람과 같은 자연 에너지나 관객의 개입에 의해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도록 장치되어 있다. 심영철의 Shape of Sound 는 움직임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움직이는 조각’이며, 소리를 공간 지각의 요소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음향 조각’이다. 나아가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구슬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효과를 중시하는 ‘빛의 조각’이며, 구슬의 표면에 비추어진 주변 이미지들은 어안렌즈로 포착한 신비로운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 조각’이다. 이렇듯 Shape of Sound 는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빛과 이미지를 품은 다차원적 조형작업으로서, 그리고 나아가 관객 참여형 작업으로서 다양한 조형미와 더불어 조각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얼마전 심영철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광장의 에스컬레이터 상부 공간에 Shape of Sound 시리즈 하나를 설치했다. 이 작업은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구슬로 조합된 설치작업이면서도 하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완결된 효과를 보여준다. 천정에 매달린 거대한 꽃잎 형상의 작품이 에스컬레이터 주변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따금 외부로부터 들어와 흐르는 공기는 구슬을 움직여 부딪치게 하며 맑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작품 아래 일상 공간에 설치된 조명이 수백개의 구슬마다 반사되어 보석과 같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서있는 관객들의 이미지 역시 수백개 구슬의 표면으로 흩어지면서 신비로운 환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심영철의 설치작업은 그것이 놓인 장소와 연계를 가지며, 그때 그때 주어진 조건에 따라 각각 다른 감흥과 의미를 선사한다.
한편 심영철의 Shape of Sound 시리즈 중 또 다른 유형의 작업은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구슬을 꿰어 사각형의 철제 구조물 사방에 커튼처럼 드리워 놓은 것이다. 사각 구조물의 바닥에는 거울이 설치되어 있어 하부로 커튼 이미지가 연장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정한 조형이미지를 담은 작업과는 달리 이 작품은 퍼포먼스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된 것이다. 작가는 관객들을 내부 공간으로 초대해 자신이 체험한 소리의 기억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 벽을 쓸어내리듯 손으로 구슬의 커튼을 터치하면서 그 구슬에 비추어진 수백의 이미지에 나르시즘의 욕망을 분사시키기를 바란다. 구슬 커튼은 이렇듯 체험적 공간이자 사유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심영철의 예술은 늘 경계에 서 있다.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경계 뿐만 아니라 내면에 흐르는 의식의 단면들이 서로 충돌하며 만나는 접점에서 그의 예술이 자리잡고 있다. 역순으로 살펴보면 경계의 모색은 심영철의 예술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 사이에 놓인 경계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지점에서 작가의 창조적 에너지가 작동되는 것이다. 때로는 치졸하게, 때로는 모순적으로, 때로는 미완의 행동으로 보이는 그의 예술적 노정은 미학적 완결성이나 비평적 규준에 의해 진단되기를 부인하려는 측면이 있다. 삶의 노정이 선과 악, 진과 위, 미와 추의 경계에 대한 사색의 과정이며 예술이 그것을 드러내는 활동이라면 그의 작업의 근간을 흐르는 힘의 원천으로서 경계에 대한 사유는 그의 예술에 진정성을 담보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김영호 (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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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시대의 메시아를 찾아서

프롤로그
전통적 조소예술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뉴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활동해온 심영철의 예술영역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빗의 형상을 석재와 목재로 다양하게 변주했던 <빗의 단계적 표상> 시리즈를 필두로 시작된 25년간의 발자취를 보면 그의 예술은 네온과 홀로그램을 포함한 설치작업과 비디오 영상 이미지에서 퍼포먼스에 이르는 매체와 기법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로 실내공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던 <전자정원> 시리즈에서 도심과 자연공간으로 확대된 <모뉴멘탈 가든> 시리즈, 그리고 지하철 공간에 이르기까지 설치장소도 정해진 한계가 없어 보인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상황을 현대미술의 시대로 규정하는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견지에서 보면 심영철의 의욕적인 작업 성향은 우리가 완전한 ‘예술적 다원주의’의 시대 속으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심영철의 작업에 나타나는 매체나 표현기법 그리고 설치장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점은 그의 예술세계에 접속하기 위한 키워드는 종교적 의미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란 이 글의 뒤에서 좀더 살펴보아야할 특성을 지닌 것으로서 심영철의 작품세계를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혼돈스럽기만 한 오늘의 예술적 환경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대안적 과제라는 측면에서 연구의 당위성을 지닌다. 미술사의 정론이 와해되고 역사적 이념의 줄기가 해체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예술에 대한 종교적 성찰은 열정과 순종 그리고 모순과 방황의 정체를 파악케 하는 하나의 지표(index)이자, 자유와 속박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짜인 현대적 삶 그 자체를 진단하는 원리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OTIS Parson‘s와 UCLA에서 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9년에 귀국하여 라는 제목으로 갤러리 동숭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심영철은 자신의 작품에 성령, 순례자, 존재, 섭리 등의 종교적 메시지를 일관되게 적용시켜왔다. 그 후 <인간,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가는가>(1990),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니…>(1992), <섭리-갈망, 역경, 체념, 생의 의미 그리고 조화>(1993), <섭리-아름다운 그 님>(1995), <섭리-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려 함이라>(1997), <순례자>(2000) 등의 제목을 내건 작품전과 퍼포먼스는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인사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 <환경을 위한 모뉴멘탈 가든>(2002)에서도 성전을 나타내는 돌기둥과 예수상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의 작품은 기독교의 ‘말씀’ 위에 구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이론가 김재권은 이러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복합채널을 통한 소통의 극대화’라는 제목으로 정리하면서 실험의 연속선상에서 자기성찰과 변신의 과정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았는데 결국 그의 다중채널의 향하는 곳은 ‘하나님의 세계’로 규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심영철의 예술에 관련한 논객들의 글들을 보면 그 요지는 작품의 목적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종교적인 메시지를 송출하는 과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작가가 이러한 종교적 주제를 차용하게 된 근간은 예술이란 ‘정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라는 작가 자신의 예술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외적인 요소로서 일가의 영향, 즉 목사로서 사목활동을 하는 친언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20년의 자취 : 경향별 분류 앞서 말했듯이 심영철의 작업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다원주의적 속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 적용되는 내용과 형식을 특정한 하나의 경향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하지만 1983년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2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그가 생산해낸 많은 수의 작품과 자료들은 남아 있고 그것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몇 개의 단위를 만들 필요가 있으며 그 방법은 작품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닌 경향별로 나누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주제별로는 빗의 조형, 메시지, 전자정원, 모뉴멘탈 가든, 환상공간 등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표현방식을 상호 연계해 다시 묶어 보면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1. 빗의 조형(From the Comb) - 조소(Sculpture)
2. 메시지(Message of God) -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3. 전자정원(Electronic Garden) - 테크놀로지 미술(Technology Art)
4. 모뉴멘탈 가든(Monumental Garden) - 공공미술(Public Art)
5. 환상공간(Cyber Space) - 릴리프(Relief)
6. 퍼포먼스 & 비디오(Performance & Video Art)
 우선 전통적인 조소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빗의 조형>은 신체를 단장하기 위한 일상적 소품이자 특히 여성들에 있어 필수품인 빗에 대한 조형적 성찰의 결과물로서 조각가로서 심영철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원시부족의 토템처럼 보이기도 하는 빗의 조형에 작가는 ‘빗의 단계적 표상’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다양한 변주에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였던 정관모는 첫 번째 개인전의 서문에서 “빗이 지닌 본질적인 특성의 형태감을 관념화한 후 그것을 조형의 기본형으로 삼았고 그 기본형을 극대화시키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으려 했다”고 적으며 한편으로는 민족유품을 소재화한 측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빗의 조형에서 드러나는 빗살의 반복율과 강렬한 구성미를 발생시키는 형상은 작가의 작업 동기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노트에 “특히 하루가 기우는 일몰쯤이면 빗살 하나하나에 드리워지는 음영과 그 속에 숨은 일체의 언어가 나를 정밀한 평온으로 데려가던 일을 잊지 못한다”이라고 적고 있다.
유학 후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종교적 내용의 작업은 그의 작품세계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메시지>라는 제목을 붙이는 한편 표현방식도 기존의 조각에서 설치적 경향으로 점차 이동되고 있다. 당시 심영철이 밝혀내려는 신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구원의 빛을 머금은 창으로 표상된다. 그 창문은 내면을 향해 열려있는 것처럼 처리되어 상처받은 영혼이나 수난과 고통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목재 패널로 제작된 창문의 표면에 채찍의 흔적처럼 각인된 조각도의 자국은 목재의 물성을 상처 이미지로 연결시키는 데 기여하고 창문의 두께를 관통해 공간을 점유하는 십자가의 내러티브를 강화시키고 있다. 점차 이러한 창문 이미지는 홀로그램을 이용한 3차원의 영상 이미지로 확대되면서 빛의 효과가 강조되고 삶과 구원의 상징적 메시지를 제시하게 된다. 한편 <메시지> 시리즈의 설치작업은 성경책 1500권을 피라미드 형상으로 쌓아놓거나 네온과 더불어 펼쳐 놓은 작업에서 절정을 이루며, 이와 더불어 탱자나무의 가시줄기나 철망으로 제작된 가시면류관 또는 군상을 나타내는 손의 존재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메시지의 시각적 표상 작업은 내러티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종교와 예술의 접목을 시도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작가의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였다.
<전자정원> 시리즈는 종교적 메시지를 테크놀로지와 연계시킴으로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작업으로 보인다.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동시대의 다양한 조형기법과 매체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제가 지니는 서술적 구조에 함몰되지 않고 도상적인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을 세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1990년의 제3회 개인전에 즈음하여 미술평론가 이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심영철의 작업에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종교적 메시지와 그것을 자신의 조형체계에 따라 형상화하는 방법론 사이의 갈등’이었다면 1993년부터 시작된 <전자정원>에서는 ‘단순한 성경풀이’에서 벗어나 메시지의 형상화를 통한 모든 방법과 형식 그리고 재료를 동원하여 자신의 조형어법을 현대미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대전 엑스포 <테크노 아트전>에 출품된 그의 <전자정원>은 “수십 개의 나무기둥을 공간에 설치하고 여기에 터치스크린에 의해 꽃이 피는 모니터, 움직이는 원통형 홀로그램, 꽃 모양으로 번득이는 네온, 현란한 빛이 파동치는 광섬유 등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연과 기술이 통합된 작업이었다.”(김재권)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자정원>은 인공적 파라다이스와 현대과학의 불안한 광기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모뉴멘탈 가든>은 가변적인 설치미술의 한계와 공공조형물의 제작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형성된 경향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전자기기와 설치미술이 지닌 시공간 경영의 한계는 조각가에게 환경조형물이 지닌 기념비적 속성에 시선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이 시리즈 초기의 작업에서는 <전자정원> 연작처럼 다양한 매체와 기법들이 망라되고 주제 역시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점차 자신의 삶과 주변적 욕망의 세계를 드러내는 형식의 작업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은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석조기둥과 그것의 변주로 나타나기 시작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버섯이 다. 특히 심영철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될 버섯 이미지는 특수한 지형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몰아가는 원리가 된다. 이제 그의 작업은 종교적 교리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거리를 확보하게 되며 욕망의 예술적 전이(轉移)를 통해 오히려 종교적 메시지를 삶과 연계한 보다 적극적인 신앙관을 갖게 된다.
릴리프 연작도 환경적 요인과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제작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저부조에서 고부조에 이르는 릴리프는 주로 실내외의 벽면에 장식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업은 작가가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향으로써 소형 패널작업을 조합시킨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릴리프 작업은 <빗의 조형>에서 언급된 작가의 조형적 능력과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퍼포먼스와 비디오 작업은 심영철의 다의적 표현방법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들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우선 퍼포먼스의 주제는 종교적 내용과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들인데, 가령 3?1절을 계기로 명성황후의 복장을 하고 오사카 거리를 배회하는 내용이나 2000년 죽산 인사동 거리에서 개최한 국제행위미술제에서 선보인 <순례자>를 들 수 있다. 주제의식이 강조가 되는 작업의 특성상 퍼포먼스의 특성은 앞서 언급한 내러티브 미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비디오 작업 역시 설치작업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메시지(Message of God)의 의미
이상과 같이 심영철의 작품세계를 경향별로 분류하면서 필자는 작가의 작업이 종교적 개념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비평에 대해서 좀더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느낀다. 우선 그의 작품이 기독교의 ‘말씀’을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교회가 규정하는 신학적 가치나 본질적 윤리관 또는 불변하는 아우라가 좀처럼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대면하는 세계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하여 사랑과 갈등 그리고 갈망과 역경, 나아가 에로티시즘과 욕망 등의 가변적 가치들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심영철의 예술을 교조적인 신앙의 원리로 진단하는 태도는 작품세계의 해석에 왜곡과 한계를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실천적 활동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의 종교성이란 본질적으로 규범과 윤리의 체계이며 완성된 텍스트(성서)의 범주에서 해석 혹은 해설의 자유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와 삶과 예술이라는 활동의 공통점뿐만 아니라 차별성에 대해 명백하게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시오니즘(Zionism)의 폐쇄적 굴레에서 벗어나 종교가 지닌 보편적 가치로서 삶의 다양성과 연계해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작품에 흐르는 사랑, 방황, 고난, 순종, 배신, 열정, 타락 등으로 엮어진 다양한 담론들이 종교적 규범과 절대성의 차원 아래 숨겨진 현세적 삶의 현상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는 심영철의 예술세계에서 기독교의 ‘말씀’과 현실적인 욕망 사이를 오가는 ‘분열된 주체’ 혹은 ‘이중자아’의 속성을 지닌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차라리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대상으로서 신에 대한 부정의 욕망이며 진선미(眞善美) 위에 구축된 진리가 위악추(僞惡醜)와 교차되는 접점에서 찾아오는 고독과 갈등의 모습이다. 이러한 감정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정이나 상실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종교라는 현실 속에 던져진 자기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저항이자 그것은 작가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의 반역처럼 작가는 신의 영역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이중적 자아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갈등적 심리는 그의 경우 예술작품의 창조행위를 통해 견제되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삶은 건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체의 해체를 통해 중심주의에 반발하고 본능과 에로티시즘을 부활시키려 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비추어 보면 그의 예술에서 발견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타자화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자유의지를 확보하고 생의 영역을 넓히려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에 동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 생산자와 대중간의 소통의 코드는 마련된 셈이다.
심영철이 전개해온 그간의 작업 중 새 밀레니엄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종교성과 예술성 사이에 설정된 공통분모와 차별성을 함께 진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에서 현재까지 6년간은 작가에게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전환기의 분위기 속에서 지난 20년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자신의 작업에 대한 종합적 성찰을 시도한 6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작업들에는 이전에 설정한 화두가 여전히 흐르는 가운데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정착하려는 시도가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모뉴멘탈 가든>이라는 이름으로 종합되는 개념들로서 단편적으로는 이중적 판타지아의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 테크놀로지, 토탈환경 등과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화두의 중심에는 전자시대를 살아가며 개인으로서 겪게 되는 환경적 요인과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다양한 경험들 그리고 가치관들이 녹아 흐르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사용하는 장르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매체로서 돌과 나무, 흙, 모래, 자갈, 소금, 물, 불에서 유리, 철, 합성수지, 네온, 광섬유, 홀로그램, 인조피부 등이 사용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장르와 매체의 통합을 통해 궁극적으로 작가가 찾고자 하는 것은 토탈환경 혹은 전자시대의 메시아이며 이 구원자는 다름 아닌 예술적 표현과 해석의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이중적 판타지아 : 성(性)과 성(聖)
심영철의 종교적 화두를 담은 예술은 종합적으로 이중적 판타지아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교조주의적 종교원리와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이며 현세적 삶과 예술 사이를 넘나들며 형성된 어떤 세계라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성(性)과 성(聖)이 이중환상이라는 개념의 심영철의 예술을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키워드로 제시될 수 있다. 사실 이중환상의 개념은 다원주의 혹은 포스트모던의 비평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1980년대 이후 국내의 의욕적 예술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루며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으며 웬만한 삶의 형태와 특수한 캐릭터의 소유자가 아니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예술은 치열한 삶의 반영’이듯이 작가가 내세우는 화두와 그것들 사이에 충돌하는 개념들 그리고 그 충돌현상을 가시적 형상물로 표상하는 일은 방황과 도전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삶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의지와 능력이 뒤따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바로 심영철은 개성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다. 대학시절 그를 아끼던 지인들로부터 의욕과 열정으로 채워진 여성이라는 평가받았으며 열정적인 성품은 예술의 영역에 있어 곧 끼로 나타나 다양한 매체와 양식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변혁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탈규범을 먹고사는 예술과는 달리 그와 가족들이 속해있던 기독교의 윤리관과 규범은 예술에 대한 그의 입장을 역설적으로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내세의 삶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현실적 삶을 완성시키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듯 두 개의 다른 영역의 대면은 결국 두 개의 다른 개념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영철의 작품세계에 나타나는 이중적 판타지아를 구성하는 성과 성의 의미는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심영철의 예술적 화두로서 제시되는 종교적 성(聖)의 세계는 과학적 기술의 산물인 네온, 광섬유, 홀로그램, 비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전자정원> 시리즈에서 보듯 이성과 합리의 세계가 낳은 뉴미디어에 의존하여 드러나는 종교성은 그래서 전래적 신앙의 범주를 넘어선 과학적 분위기로 축성되어 있다. 테크놀로지를 조형적 원리로 삼은 동영상 설치작업은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세계와 합리적인 영역을 결합하는 차원으로 연결되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의 종교는 역설적으로 현대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공해 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 안에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까? 예술과 과학과 종교라는 세 요소의 결합은 심영철의 예술에 개성을 담보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일까? 심영철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찾는 메시아는 결국 전자시대의 이상 혹은 미학적 사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심영철의 작품에 나타나는 생리학적 개념으로서 성(性)이 발생되는 지점은 바로 종교적 성스러움과 과학기술이 현실적 욕망과 마주치는 접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심리학자 자크 라캉의 주장처럼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이 증폭되고 있는 현세의 언덕에서 에덴을 꿈꾸는 인간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전자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성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영광인 가시 면류관이나 십자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성적 도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령 <아름다운 그 님>에서 엿보이는 버섯의 형상은 암시적인 에로티시즘을 나타내고 있으며 <노아의 방주>로 표현된 집단적 군상으로서 표현된 남근의 이미지는 과히 충격적이다.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개인전 서문에서 버섯의 비틀린 자태가 상징하는 것은 “생의 환희와 열락과 욕망”이자 나아가 “생명과 창조 그리고 풍요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심영철이 작품에 나타내는 성적 도상과 관련한 개인적 관심과 열망은 단순한 성교의 차원을 넘어 인류학적, 신화적, 심리적, 정신분석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실 화려하고 다양한 유기적 형상을 지녔으며 관능과 욕망의 상징물로서 제시되는 버섯이 홀로그램과 네온이 발하는 화려한 빛과 어우러질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세계는 성과 성이 결합된 상징의 영역이다. 이러한 에로스적 성의 담론은 작가가 즐겨 다루는 <아담과 이브>의 영상작업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성과 에로스적 성의 이중적 표현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통합되며 그 시각적 표현의 구조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들은 신화와 종교에서 시작되어 전자시대의 현란한 빛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조형언어로 결정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필로그 : 전자시대의 메시아를 찾아서
우리가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을 대할 때 느껴지는 신비로움을 ‘숭고’라 부르듯이 테크놀로지가 발견해 내는 자연의 신비는 종교적인 차원의 숭고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전자 천체경이 발견해내는 우주 공간의 무한적 세계는 현대인들에게 자연현상에 대한 신비와 숭고를 둘러싼 베일을 벗겨내는 감각의 날을 치켜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넷 미디어의 위력을 보더라도 우리는 과학적 발견이 ‘두려움을 동반한 쾌’로서 무한한 숭고의 감각과 항상 공존한다는 점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며 궁극적으로 세계의 질서는 종교적 신비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결국 첨단과학은 신비의 껍질을 벗겨내는 도구이지만 그 껍질은 벗겨낼수록 그 안에 숨겨진 자연의 신비는 증폭되고 결국은 탄생과 소멸을 주관하는 존재로서 ‘제일 원인자(第一 原因者)’의 세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심영철의 <전자정원> 시리즈나, 최근 새로 선보인 <모뉴멘탈 가든> 작업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느낌을 ‘숭고’의 감정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터치스크린에 의해 꽃이 피는 모니터, 움직이는 원통형 홀로그램, 꽃 모양의 번득이는 네온, 현란한 빛이 파동치는 광섬유”로 제작된 그의 작업은 두려움을 동반한 쾌의 차원이 아니라 유희적이고 장식적인 즐거움을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표상해 내는 자연과 기술의 통합적 시도가 점차 종교적 개념에 의해 축성될 때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미학적 의미는 우리를 숭고의 영역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모뉴멘탈 가든>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하나의 정원이다. 그 정원에 머무는 메시아는 전자시대를 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주체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갈구가 증폭될수록 현세적 욕망은 고개를 들고, 욕망이 증폭될수록 메시아에 대한 갈구는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분열적 경향의 작품들의 생산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었던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같은 현대미술사의 주역들처럼 심영철의 예술은 첨예한 두개의 상극을 조율하는 메시아의 정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전자시대의 에덴동산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곳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환희와 고통 그리고 숭고와 욕망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하고 있다.

김영호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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