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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민, 가일미술관

출생

1969,  

장르

회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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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병과 기억 속의 풍경, 2012-2014

리넨 위 유채, 97 x 1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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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민의 회화-회화의 만찬에 초대 받은 거장들

작업실은 창작의 산실이다. 작업실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현실과는 다른 현실로 진입하기 위해,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열기 위해 작가는 감각적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작가는 꿈을 공 굴리는 몽상가가 되고, 사물을 변질시키는 연금술사가 되고, 세계를 수리하는 수선공이 된다. 이를 위해선 종잡을 수 없는 현상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고 격리시키는 것이 요구되는데, 일종의 결핍의식이며 결여의식을 내재화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핍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가 있는가. 니체는 쥐가 궁지에 몰리면 자기 내면으로 숨는다고 했다. 스스로를 세상의 변방으로 내모는 것, 그리고 그 변방 끝에서 어쩌면 진정한 자신일지도 모를 또 다른 자아(진아?)와 조우하는 것이다. 때로 그렇게 만나지는 자기가 낯설고 생경할 수도 있다. 내면이란 세상의 논리가 미치지 못하는 유일한 세계이며, 때론 주체에게 마저 낯선 미지의 세계이며, 사물과 현상의 의미가 결정되고 고쳐질 수 있는 무한하고 무궁한 가능성으로 열린 세계이며, 비결정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결핍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고, 그 내면으로부터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 곧 감각적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격리시켜 자기 내면으로 숨어든 창작주체가 내면으로부터 또 다른 세계를 여는 계기를 얻는 것이다.
남경민은 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연 작가들이 궁금하고 작업실이 궁금하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 속에 작가들을 초대하고 작업실을 불러들인다. 먼저 작가들의 작업실과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자료들을 근거로 작업실을 재현하는데, 때론 사진과 같은 관련 아카이브가, 그리고 더러는 그림 속 이미지가 소스로서 주어진다. 이때 거장의 작업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지는 않는다. 대개는 부분적인 이미지와 전형적인 도상 내지 기호를 차용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거장의 작업실과 작가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상징 공간이 하나의 층위로서 포개진다. 그 포개짐은 너무나 긴밀한 것이어서 거장의 작업실과 작가의 관념공간이 구분되지가 않는다. 어쩌면 작업실과 작업실의 관계로서보다는 관념과 관념이 만나지는 경우, 이를테면 거장의 관념공간이 작가의 관념공간과 하나의 직물로 직조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직조된 공간은 엄밀하게 작가에게도 거장에게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어떤 장소와 공간으로 열린다. 그리고 그 제3의 장소며 공간이야말로, 그림이라는 지도 위에 그 지정학적 좌표를 표기하는 일이야말로 다름 아닌 남경민의 그림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다. 이런 일련의 프로세스가 가다머의 지평융합을 떠올리게 한다. 즉 거장(타자)의 지평과 나(주체)의 지평이 하나로 융합되어져서 제3의 어떤 지평을 여는 것이며, 그렇게 열린 지평을 매개로 거장과 내가 서로 교류하는 상호영향사가 실행되는 것이며, 그렇게 거장이 내 인격의 일부로서 흡수되는 것이다.
이 긴밀한 교류와 교환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거장들이 초대되는데, 세계의 기하학적 환원을 꿈꾼 세잔과 몬드리안, 벨벳 같은 부드러운 빛의 질감과 광학적인 빛으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베르메르와 모네, 주정주의와 파토스의 표상인 고흐, 긴 목과 슬픈 눈으로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모딜리아니, 신비주의와 상징주의의 거장 모로, 언어와 기호의 연금술을 매개로 개념미술을 예비한 마그리트, 팝과 동성애 코드가 결합된 호크니, 사사로운 트라우마를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혁명의 대척점에 등재시킨 프리다 칼로,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 낙천주의자 마티스(그럼에도 그에게 붙여진 야수파라는 레테르는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허문 리히터가 각각 호출된다.
그런데, 정작 그림 속에 그렇게 초대받은 거장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그림 속엔 거장들도 없고 거장들을 초대한 주인(작가 자신)도 없다. 다만 테이블 주변으로 빈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거장들은 자신이 그린 벽에 걸린 그림과 함께 저마다의 전형적인 도상과 기호의 형태로 그림 속에 들어와 있고, 작가 자신은 N(남경민)이라는 영어 대문자의 경우로 그림에 출현한다. 엄밀하게는 그 마저도 그림 속이 아닌 제목에서 확인된다. 도상과 기호와 빈 의자를 거장과 동격으로 놓는 일종의 대위법과 생략화법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다. 생략하면 암시적인 공간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할 여력이 생기고, 오리무중인 의미들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할 참여를 위한 구실이 생긴다. 거장들은 그렇다 치고 작가의 경우는 어떤가. 화면 속에 날라 다니는 나비들이 작가다. 나비가 된 작가는 시공간을 넘어 거장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거장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한다. 나비로 변신한 작가를 인정한다 해도 나비 자체는 왠지 비현실적이다. 나비의 날갯짓은 꿈꾸듯 나풀거리고, 흡사 현실 저편으로부터 현실 안쪽으로 건너온 비현실의 전령들 같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창문과 거울에 비친 반영상이 이런 비현실감을 더한다. 반영상은 회화의 기원과 관련이 깊고, 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에 이런 반영상을 끌어들여 일종의 회화적인 미로를 만든다. 거울이 창문에 비치고 창문이 바닥에 비치고 바닥이 거울에 비치는, 반영상이 다른 반영상을 재차 반영하는, 반영이 반영을 불러오는, 그렇게 반영의 반영이 끝도 없이 연이어질 것 같은 회화적인 미궁을 만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도대체 작가의 그림 속에서 반영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그려진 모티브가 있는가 싶다. 있다 해도 그 의미는 반영상의 의미 속에 묻힌다. 아예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공간이며 모티브 전체가 반영상인 것도 같다. 당연하게도 반영상은 현실을 되비친 상이며 이미지일 뿐, 현실 자체도 현실의 재현도 아니다. 일부러 트릭을 쓴 것도 왜곡시킨 것도 아닌데, 그림 속 현실은 졸지에 현실감을 잃고 겉돈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 속을 나비들이 꿈꾸듯 나풀거린다. 어쩌면 그 비현실적인 공간은 작가의 관념공간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진즉에 실재하는 공간이 아닌 관념적인 공간을 그린 것이며, 관념적인 정황을 그린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향후 작가의 그림은 거장(타자)과 작가(주체)가 만나고,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고,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종의 가상놀이며 환영놀이를 향해 열린다.

고충환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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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ing on the mindscape - 남경민의 회화

남경민은 2005년 개인전 이후 현재까지 화가의 작업실, 나비채집, 서재 시리즈 등 일련의 실내풍경을 이어오고 있다. 남경민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화면위에 표상된 것이 실재 풍경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창조되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실재 풍경위에 중첩되는 비현실적인 풍경은 작가의 언급을 빌리자면 '내면의 풍경mind scape'이며 또한 현상적인 세계에 대한 관념을 초월하는 '메타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선명한 색채의 화면에 식탁과 의자, 침대와 책장, 창문과 거울 등의 실내 오브제들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이 친숙하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기이한 낯섦으로 혹은 소외와 고독의 뉘앙스로 다가오는 것은, 여러 시공간이 중첩된 화면의 독특한 이중적 구조와 상징과 알레고리를 동반한 오브제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재와 침묵이 주는 긴장감에 기인한 것이다.
대가들에 대한 오마쥬, 부재로서의 풍경
부재로서의 의미는 '화가의 작업실'과 '화가의 방'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남경민 회화의 대표적인 시리즈인 '화가의 작업실'과 '화가의 방'은 고전과 미술사적 텍스트에 대한 경외심과 그에게 영감을 준 거장들에 대한 오마쥬homage에 기반 한 것이다.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 미술사의 원전은 남경민의 참조와 인용의 아카이브이자 저장소이다. 거장들의 작업실을 재구성하여 시리즈로 전개하는 것은 소재적 차원을 넘어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고통과 환희, 고독과 불안이 교차하는 거장들의 창조적 공간에 대한 관심과 동경에서 출발한다. 화가의 방과 작업실이 부재와 침묵, 쓸쓸함의 심리적 풍경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작가로서 느끼는 소외와 고독이 과거 거장들의 작업실로 전이된 결과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화가의 작업실이 그 자체로 부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유품이 오히려 그의 존재를 강력히 환기시키듯이, <렘브란트 붉은 침실>과 <고흐에 대한 기억> <프리다의 침실> 등에서 화가들이 머물렀던 빈 침대와 빈 의자 등은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부재로서 강화한다. 여기서 화가들의 공간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탈 육화된 화가들의 영혼이자 창조적 에너지로서, 현재는 부재한 그들의 존재에 대한 환영인 것이다. 남경민은 화가들의 작업실을 도상적으로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부재의 암시, 즉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고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가들의 작업실과 방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과 오브제, 전체적 분위기로서 암호화되어 있어 누구의 작업실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해석을 요구하기도 한다. <피카소>이나 <고흐에 대한 기억>에는 화가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이 공간이 그들의 작업실인지 알아차릴 확실한 알리바이는 없다. <피카소>에서는 화가의 뒷모습과 함께 위로 뻗어 올라간 나선형 계단이 진보로서의 유토피아를 의미화 하는 모더니즘의 아버지 피카소를 연상시키며, <고흐에 대한 기억>에서 반 고흐는 병속에 유폐된 날개와 꺼친 초로 완성되지 못한 예술가로서의 짧은 생을 소환한다. 최근 들어 남경민은 화가의 존재를 상징과 역설의 차원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남경민 회화에서 대가에 대한 오마쥬의 방식은 <화가의 서재-마네에서 워홀까지>, <바로크 서재를 거닐다>등의 일련의 서재 시리즈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재해석한 <화가들의 향연>에서 절정에 달한다. 서재 시리즈에서 작가는 마네, 드가, 세잔, 쇠라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베르메르, 벨라스케츠,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등의 바로크 거장들의 이름이 새겨진 책들을 작품과 상징적 오브제들과 병치하여 고전에 대한 경외를 극대화한다. <화가들의 향연>에서는 얀 반 아익,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베르메르, 마네, 세잔, 모네, 반 고흐, 마티스, 피카소, 마그리트, 호크니 등 작가가 경외해온 열 두명 대가들의 존재를 의자로 치환하고 만찬의 성체를 대가들의 상징 오브제들로 전치시켜 그들과 나란히 한 작가 자신과 대가들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상징과 알레고리의 공간
남경민의 실내풍경에는 일상의 오브제와 함께 도상학적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오브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남경민 회화의 시각적 아카이브로서 작품 전반에 출몰하는 해골, 모래시계, 꺼진 초, 날개, 나비, 백합, 투명한 병 등의 오브제들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할 뿐 아니라 다의미를 드러내면서 작품을 복잡하고 다층적인 상호 텍스트적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그의 오브제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연상 작용을 일으켜 관람자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유도한다. 남경민 회화의 오브제들은 이중성의 맥락으로 단일하고 확정적인 기의의 부재를 특징으로 하면서 평범한 실내풍경을 상징과 알레고리의 다성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에 또 다른 의미를 침투시키는 오브제의 알레고리적 수사는 화가의 작업실, 실내, 서재 등의 공간을 가로질러 부유하는 나비에서 드러난다. <렘브란트의 침실>에서 나비는 예술가 영혼의 은유이자 그림의 환영에 대한 메타포이고, ‘화가들의 작업실’ 시리즈에서 나비는 가냘프고 섬세한 예술가적 기질이자 예술가 자의식의 흐름이다. 화려한 비상이면서도 쓸쓸한 초라함이고, 희망이면서도 불안함과 상처이며, 때로는 텅 빈 실내 풍경에서 생경함과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키는 나비는 그 의미가 끊임없이 치환되는 수사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 
남경민 회화에서 나비가 마치 ‘장자의 나비’와도 같이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중적 중첩부분들을 예시한다면 해골은 삶과 죽음의 이중적 수사이다. 해골은 허무함에 대한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인 동시에 영성의 양가적 의미를 내포한다. 남경민 회화에서 촛불은 꺼짐과 켜짐에 의해 존재와 부재사이를 오가며, 날개는 이카루스의 그것과도 같이 비상에의 욕망과 끝없는 추락의 양면을 드러내준다. 모래시계는 시간의 흐름과 정지 및 생의 유한함을, 백합은 회화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상징한다. 투명한 병은 변하지 않은 진리의 본질이지만 깨지기 쉬운 속성으로 인해 연약함이라는 양면성을 공유한다. 또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상은 구도자로서의 ‘신’이면서 슬픔을 내면화한 ‘인간’이다.
남경민 회화의 오브제들은 해골과 촛불, 날개 등에서처럼 죽음과 상실의 코드를 지니며 삶과 죽음, 존재와 시간과 같은 철학적 인식론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회화가 ‘감각’적 색채로 충만하지만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비결정적이고 이중적인 의미들로 가득 찬 남경민 회화의 오브제들은 한 화면에서 중첩되거나 연쇄 고리처럼 연결되어 남경민 회화의 확실한 독해를 유보한다. 촛불과 해골, 날개와 백합이 수태고지와 낙원 추방의 풍경과 어우러진 작품 <수태고지1- 초대>가 관람자의 확실한 의미 해석을 지연시키듯이 남경민의 회화는 ‘거듭 고쳐 쓴 양피지의 사본’과 같이 근본적으로 해독 불가능한 서사, 알레고리를 창출해낸다. 은유와 환유를 오가는 그의 그림 앞에서 관람자들은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려는 지적 게임에 개념적으로 참여하고 시적인 연상 작용을 즐거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공간이 중첩된 남경민 회화의 이중 구조 - 언어로 의미화 할 수 없는 영역
남경민 회화는 창과 문으로 인해 안과 밖이 소통하고 한 화면에 여러 시공간이 중첩되는 독특한 이중 구조를 견지한다. 실재전경임에도 불구하고 커튼, 창문, 거울, 계단 등은 또 다른 공간을 상정케 하고 한정된 공간을 확장시킨다. 남경민 실내 풍경의 초입에 그려진 커튼과 문은 다른 시공간으로 진입케 하는 경계의 지점 즉 일종의 문지방threshold으로, 이는 화면 밖의 공간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관람자 주체의 존재를 가정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관람자가 서있는 커튼 앞의 공간, 커튼 너머의 내부 공간, 창문 밖의 공간, 거울 속 공간 등 여러 시공간의 레이어들을 화면에 중첩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로 <피카소>에서 커튼과 나선형 계단은 현재 관람자(작가)의 위치와 과거 피카소의 작업실 공간, 그리고 나선형 계단으로 암시되는 미래의 유토피아적 시공간을 뒤섞어 놓으며 시공간의 일관성을 무화시킨다.
따라서 남경민의 회화에서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연결하는 소통 창구로서 창과 문 등은 지정학적 경계면이라기보다는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이 만나는 지점으로,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능케 하는 투명한 막screen인 것이다. 특히 밖으로 뚫린 창문은 현재의 은폐된 세계를 외부로 열어주는 통로로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열어주려는 회화가 가지는 이상과 맞닿아 있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그림에서 창문은 그림과 중첩되어 있는데, 창문이면서 회화이고 그림이면서 외부로 향한 창인 이곳은 르네상스 이래 회화가 지향 해온 실재를 향한 창이면서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동경하게 하는 일상의 저편으로서의 이상적 세계를 가시화한다.
창문과 함께 남경민 회화에서 지각적 공간을 재구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거울이다. 특히  거울과 창문의 반영 이미지는 기존의 익숙한 시각체계를 왜곡시키면서 지각 공간의 통일성과 시공간의 일관성을 해체한다. 예로 <세 개의 의자>에서 하나의 의자는 이중 삼중의 반영구조로 거울 속에 비치면서 이질적인 시공간을 함축하고 공간을 거울 깊숙이 밀어 넣는다. <몬드리안의 작업실2>에서 전면의 거울은 거울 앞 정경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신, 반영된 것이 거울 외부의 것인지 내부에 속해있는 것인지 거울표면에 그려진 것인지를 모호하게 한다. <수태고지2>의 거울에서는 반영되어야 할 대상에서 천사가 제거되어 있으며, <휴식-바로크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에서 거울은 거울 앞의 대상이 아닌 거울과 동일한 표면의 대상을 반영한다. 남경민 회화에서 거울의 반영 이미지는 대상과 맞물리면서도 묘하게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들이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낯섦을 동반하는 것은 바로 안정된 지각의 중심을 흔들어 놓는 이러한 독특한 화면구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전풍의 실내를 배경으로 한 <수태고지2>, <화가의 나비채집>, <슬픈 아름다움은 아름답다> 등에서 이러한 기이한 불안함은 감지된다. 작가는 과거를 보존하는 박물관, 아치형의 고전적 건축구조, 수태고지의 천사 및 고전 조각 등 오래된 것들을 현재 지점으로 불러온다.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이러한 것들은 아르카익적인 고요함과 이를 흔들어놓는 나비 떼들의 움직임, 빛과 어둠의 미묘한 교차로 인해 더 이상 친숙한 것이 아닌, 폭풍전야와 같은 내적 긴장감과 낯선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불안과 긴장의 강도를 증가시키는 원근법적 장치는 친근함과 낯설음이 근접하는 이러한 언캐니적 감성을 강화한다.
남경민의 회화는 익숙한 대가들의 이미지를 오마쥬의 형식으로 빌어오지만 일반적으로 획일화된 상징이 아니라 명료한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언어로 의미화 되지 않는 영역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여러 의미들이 중첩되는 오브제들의 알레고리적 효과와 안정된 지각을 교란하는 독특한 공간구조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회화는 불가사의하고 독해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평온한 의식을 찌르는 푼크툼의 세계이다. 맞물리면서 어긋나는 남경민의 회화는 그가 주목하는 ‘창문’의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안과 밖의 경계에,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사이에,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실재와 마음의 경계 말이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그것이 만나는 경계의 틈에서, 우리의 의식은 균열을 일으키고 인식의 영역은 확장된다. 그때 비로소 내면의 세계, 마음의 풍정을 제대로 거닐고 흡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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