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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 무등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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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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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morphosis VII, 2013

옷, 나무파레트, 씨앗, Variable 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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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과 결핍 없이 존재의 일체적 구조를 보여주다

I.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서로 ‘연관’과 ‘순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 이 ‘생태계’에서는 인간이든, 곤충이든, 돌이나 책이든, 풀이나 나무이든 모두가 ‘생태계 내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이 체계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체계의 원리에 따라 생태계를 한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 생태계 외부에 존재하면서 이 체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 조정,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인간중심주의 문명 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한계인식과 생태학적 패러다임의 수용은 김주연의 작업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김주연의 미적 작업에는 어떤 유형의 생태학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
 한계인식에 대한 작가의 미적 접근은 지구환경의 오염과 자원 고갈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는 실천적 요구나 윤리적 강제/보편주의적인 공동책임의 윤리학, 즉 생태학적 위기 시대의 위험인식(?공포의 발견술?요나스)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확장된 자아’의 실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작가 김주연의 관심은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성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는 근원적인 한계인식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표상이 아닌 상호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 연결망으로 기억해 내는 데(의식하는데) 있다.
그녀에게 세계는 단지 순수한 대상이라거나 자의식의 내면성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벗어나 있는 ‘바깥’일 수 없고, 또한 순전히 주관적인 표상일 뿐이거나 자의식을 통해 다시 내면성의 차원으로 되돌려진 ‘바깥’으로 축소될 수도 없다. 분리와 비물질화를 통해 참으로 단일하고 자기충족적이 되어버린 ‘바깥’이라는 세계에 대한 의식. 그녀의 작업 대부분은 이 외적인 것, 비본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 세계, 그리고 분리된 사물들의 집적으로 바라보았던 세계, 즉 자연을 생태학적 은유를 통해 ‘우리’에게 고유하고 본래적인 세계로 되돌리고자 한다.
 극단적으로 인공적이고 추상으로 말려들어간, 또는 자연 그 자체를 대신하게 된, 세계의 관념 대신에 그녀가 선택하는 언어는 상호연결과 물질화의 다양한 술어들로 구성된다. 이를 통해 투사되는 현실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이고 생태적이다. 공간적인 유동성과 시간적인 유연성을 지니고, 복합적인 그물망(소통과 협동)의 구체적 형태로 펼쳐지는 현실은 작가만의 잠재력이나 확장성 아래에 놓이지 않고, 관람자들의 실제 삶이 재생산되는 공통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그녀의 미술작업이 삶에 대해 던지는 존재철학적인 질문은 인간의 생산적인 삶에 친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것은 그녀의 작업이 새로운 지각과 정서를 도출하는 실존적 영토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 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일까? 그녀의 세계 서술성은 존재의 과잉이나 혹독한 고립없이도 자연을 ‘우리’의 ‘세계’로 받아들여진 현실-그것이 우주적 현실이건 일상적 현실이건-로 이야기하고, 존재의 일체적 구조를 재인식하게 한다. 

II. 
그렇다면 김주연의 미술작업에서 사용되는 상호연결과 물질화의 술어들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작가가 자연에 대한 환원적 아이디어를 재가공하기 위한 지점으로 설치되는 공간, 혹은 풍경들, 즉 씨앗이 배양되는 20,000부 신문이 쌓인 구조물, 씨앗이 배양되는 책으로 가득 채워진 책장, 나무를 심은 흙, 신체와 접촉할 3톤에 달하는 소금더미, 씨앗이 배양될 규모 큰 의상들, 씨앗이 배양되는 솜을 걸친 소파 등은 원자화된(분리된) 공간이거나 비물질적 공간이 아니다. 공식적이고 단일하며 이상화된 익숙한 공간에 의해 가려지고 숨겨진 이 공간은 사적이고 다중적이고 고상하지 않으며, 낯설거나 불편하다. 소비로써 쉽게 도달하는 자기충족의 공간을 위하여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공간이고, 점차 지식과 책임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있는 공간들을 대신하여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지식과 책임을 떠맡고 있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설치작업은 몸, 자연, 노동, 물질의 영역, 즉 우리의 삶을 지원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과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을 ‘거주’의 형태로 전유하지 않고, 잠시 머무는 만남의 장으로 인지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공간 개념을 다른 구조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미술작업은 물질적으로 구현되는 삶에서 공간이 궁극적으로는 지구의 한 부분, 실제에 해당한다는 점을 늘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특별히 덧붙이고 싶은 것은 김주연의 생태주의 미술작업과 여성주의 미술작업과의 차이점이다. 여성주의 미술작업에서는 종종 공간 관계의 모델이 ‘거주’의 공간과 근원적으로 정착된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안정된 정착지가 없이 떠도는 자들을 비주류화한다. 흔들리는 집, 숭숭 구멍 난 집 등으로 표현되는 부정적 공간 의식이 특별한 ‘집’(흔들리지 않고, 불안정하지 않으며, 완전한)에 관한 그릇된 의식을 낳게 되고, 이 그릇된 의식이 ‘여성의 공간’이라는 것에 심리적으로 강화된 애착으로 귀결되는 식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는 보이는 공간, 멋진 공간뿐만 아니라 가려진 공간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하고, 또 어떤 경우에 가려진 공간이 멋진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지에 대한 숙고를 필요로 한다. 여성주의 관점에 따른 거주 공간의 비물질적 재전유 시도와 달리, 김주연의 미술작업에서는 공간들간의 실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거주의 생태학적 재개념화가 시도되고 있다.
 삶의 조건들을 소모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요구할수록 공간에 대한 이해는 물질적 조건들과 멀어지고, 삶을 지탱시켜주는 노동, 그리고 자연의 작용 흔적, 생태적 족적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문화의 비물질화 과정이 더욱 세차게 진행되고 있는 요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미술작업들에서 드물지 않게 유토피아와 테러리즘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 작업은 공통적으로 무중량감과 비물질성에 기대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나 자유가 자연과 삶의 공간을 배제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과잉감정이 만들어낸 변신술로 읽혀지기도 한다.
 김주연은 감정의 과잉 없이,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비약의 변환 기술을 구사하지 않으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술어들을 통해 세계를 서술한다. 다양한 술어들을 통해 표현된 세계는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지만, 이것은 술어들이 술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주어들을 필요로 하는 한에서이다. 그런 정도로 김주연의 미술작업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술어들은 자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특수한 경우에서도 공통된 세계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 공통된 세계 이해가 죽음과 함께 실제로는 종결되지 않는 생명에 대한 느낌과 예감일 것이다. 김주연의 미술작업에서 사용되는 술어들은 이 생명에 대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III. 
김주연의 생태적 미술작업은 그녀가 독일에서 귀국하여 2002년 ‘사루비아다방’에서 가진 첫 개인전 이래 10여 년간 일관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작업방식은 환경적 각성이나 개선, 또는 재생을 위하여 기능하면서, ‘자연과 하나 된 세계’를 여행자의 시선으로 반영하는 풍경의 미술이나 또는 ‘자연과 하나 된 세계’에 거주하면서 정신적으로 정향된 미술로서 주의를 끌었던 환경미술이 보여준 방법과는 다른 선택지이다. 그녀의 새로운 선택지는 ‘배양(cultivation)’,이다. 이는 생명의 탄생과 지속, 성장, 순환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면서 모든 존재의 일체적 구조를 재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다.
 작가는 배양을 통해 세계를 소비하지 않고도 세계의 앎에 도달하고자 하며, 작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제공하지 않고 작업의 생애주기를 반복하고자 한다. 배양은 작가 자신이 매개가 되어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일부가 되기, 작가-관람자, 작업-삶, 자연-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조건들을 키우기라고 할 수 있다. 김주연에게는 ‘자연과 하나 된 세계’가 자연처럼 되기나 자연을 통해 성찰하기가 아니라, 외적인 모습은 다르더라도 자연으로서의 세계와 세계로서의 자연을 동시에 보기라는 점에서 환경미술 작가들과 구별된다. 배양은 다른 것들을 동시에 보는 능력, 여기에서 저기와 거기를 보는 능력, 지금에서 이전과 이후를 보는 능력,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보는 능력, 즉 상상력을 키우는 일이다.
 배양, 또는 경작이 문화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듯이, 배양의 방법은 문화적이다. 배양이 지니는 상징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을 통해 죽음을 맞는 개별 생명체들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생명 전체가 연결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명의 지속은 문화적으로 전달되고 획득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화는 저마다 고유했던 하나의 단순 사물이나 사용자 그리고 사용의 순간을, 다른 사물이나 다른 사용자 그리고 다른 시간들과 결합시켜, 단순 사물이나 주어진 순간에서의 사물의 단순 사용의 차원을 넘어서게 한다. 문화의 상징적 차원과 기술적 차원이 소통의 조류를 타고 전달되고 변화하기(김주연에게는 이것이 배양이다)때문에, 단순 사물이나 사용자 그리고 사용의 순간은 더 길고 넓게, 더 풍부하고, 긴밀해 질 수 있다. 자연으로서의 세계와 세계로서의 자연을 동시에 알아보는 것은 문화적이고 미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이 삶의 공리성과  유용성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거나, 삶 자체에 부차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을 통한 인간의  진화 가능성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의미의 불교적 용어인 <이숙(異熟)>을 주제로 다룬 <이숙Ⅰ(2002)>, <이숙Ⅲ(2004)>, <이숙Ⅳ(2005)>, <이숙Ⅴ(2007)> 향상 또는 등급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 <생명성에 대한 소고(小考)Ⅰ,Ⅱ,Ⅲ(2005)>, <식물들의 사생활(2007-08)>사진 시리즈, -수집, 배양 못지않게 작가의 주요한 작업방법이다-로 이루어진 <유물(2002)>, 왜곡된 기억의 감각을 치유하려는 <기억지우기(2004)> 등 김주연의 생태적 미술작업들은 세계 내의 존재인 우리가 매일 겪는 존재의 경험들을 풍부한 자양분과 깊이로 다시 기억하게 하고, 공통의 서사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임정희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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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미학, 살림의 미술

김주연의 근작들은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으며,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생태미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전작들에서 자연 친화적인 요소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 친화적인 성질에 바탕을 둔 생명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야말로 작가의 전체 작업을 지배하는 공통된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근작이 전작과 단절되기보다는 전작을 심화시키고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대상으로 삼은 자연은 단순히 자연을 소재로서 차용하는 소재주의와는 다르며, 그리고 자연을 자신의 관념 속에 불러들여 이를 재구성하는 식의 자연관의 표출과도 다르다. 대신,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자체를 그대로 대상으로 하는 '살아있는 미술'을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작업한다는 것은 실제로 일정한 기간동안 문명과는 단절된 채 자연 속에 체류하면서 자연으로부터 취한 소재와 더불어 작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순환원리에 공감하는 형태로 표출된다. 소재 자체를 자연으로부터 취한 만큼 작업의 프로세스가 자연의 생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살아있는 미술'은 그 자체 생명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개념과, 특히 에코 페미니즘 곧 생태 여성주의 개념에 그 맥락이 닿아있다. 물론 생명 자체가 여성주의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하지만 본질주의 페미니즘이 생명에 대한 광범위한 상징과 기호 그리고 신화적 원천에서 자기정체성을 찾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에코 페미니즘은 자연의 생리와 여성(인간)의 생리가 일치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생리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본질로 한다는 논리로 함축된다. 이렇듯 작가의 '살아있는 미술'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됨을 인식하는 범(汎)자연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생명을 본질로 하는 인간의 보편조건을 묻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찾는 한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동물적 상상력과는 비교되는 식물적 상상력과, 수직적인 계보학의 논리와는 비교되는 수평적인 계열학의 논리, 그리고 투쟁의 논리와는 비교되는 탈 헤게모니의 실천에 그 맥이 닿아있다. 이상의 논리를 김주연의 실제 작업 속에서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우선 2000년 독일 바이마르에 체류하면서 제작한 일련의 작업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바우하우스 대학교의 예술가의 정원(Kunstlergarten)에 <겨울 벌을 위한 식물심기 - 슈니글랙션 Schneeglock chen>이란 작업에서 숲으로 이어진 길가에 총 2500개에 이르는 슈니글랙션 구근을 심었다. 슈니글랙션은 2월에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서, 인근에 있는 벌 박물관의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벌들을 위한 작업이다. 이는 구근이 자라서 꽃을 피우기까지 일정 기간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적인 일면이 있으며, 또한 구근을 심고 이를 가꿔 벌을 먹이는 일련의 행위에서는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을 일깨운다는 일종의 환경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깃들어져 있다. 또한 작가는 독일 게렌의 사색의 정원(Garten der Sinne)에 작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정원은 사실상 숲으로 보아야 하며, 인공적인 접근을 가능한 배제한 자연 그대로의 야생을 유지하는 식의 영국식 정원에 가깝다. 그 일련의 작업들 가운데 <춤추는 나무들>이란 작업에서 작가는 일정한 크기의 원형으로 바닥을 다진 후, 그 위에 붉은 흙을 깔고 여기에 숲에서 발견한 죽은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그 형국이 그대로 유사 이래의 성소 곧 성스러운 땅을 닮아 있다. 이 자연미술에서 원형의 붉은 흙바닥은 지모(地母)의 자궁을 상징하며, 죽은 나무들을 그 자궁에 심는다는 것은 자연의 재생능력 혹은 치유력을 암시한다. 특히 작가의 전작에도 곧잘 등장하는 붉은 흙은 자연이 내재한 생명을 강하게 환기시키는데, 이는 아마도 대지에 스며든 피의 메타포 탓일 것이다. 메타포도 그렇지만 흙 그 자체가 체질론과 관련이 깊으며, 또한 체질론은 생명의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 원형바닥의 수평적인 형태와 죽은 나무의 수직적인 형태와의 결합은 그대로 음과 양의 합일로 나타나며, 여기서 작가는 땅과 하늘을 중개하는 무당이 된다. 그리고 <시간의 응축>에서는 바닥에 뉘어진 이끼 낀 나무 위로 드문드문 붉은 흙을 덮어 이끼의 변화하는 생리과정과, 그리고 흙에 섞여 있던 이름 모를 씨앗이 움트는 생리과정을 관찰하기도 한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런 일련의 자연미술에서 시간은 단순한 메타포 이상의, 보다 실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연의 습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 역시 이런 시간(문명과는 배치되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 그리고 죽음마저 포용하는 순환하는 시간)에 순응하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런가하면 이외의 여타 작가의 작업들 역시 여전히 자연과 자연이 내재한 생명에의 암시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를테면 물이 담긴 세수 대야에 각종 약초가 든 주머니를 풀어놓은 <크알라야 Quillaja 의식>에서 작가는 약초에서 추출한 물(즙액)로 몸을 씻어 질병을 치유하는 유럽의 오랜 의식을 재현한다(크알라야는 남미의 장미과에 속하는 비누나무의 이름). 이 작업 자체는 전래하는 민간요법이 내재한 자연의 치유력을 되살려낸다는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빈 병에 성수를 담은 <성수 聖水 1249>에서는 이런 자연의 복원력에 일말의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경지를 부여한다(제목에서의 연대표기는 성스러운 샘으로 알려진 베네딕트 계열의 시스마 수도원에 소재한 성 요한의 샘이 기원한 해에 따른 것이다). 크알라야 의식이나 성수가 하나같이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현실적인 욕망에 연유한 것이며, 그 욕망의 이면에는 거의 종교적인 경지로까지 승화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꼭 질병을 치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몸을 씻는 행위 자체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나 통과의례를 통한 거듭난 삶을 상징한다. 성서와 부족신화는 이러한 정화의식 또는 통과의례와 관련된 풍부한 사례를 보고하고 있으며, 특히 성스러운 물과 관련한 모든 의식은 그 자체 생명을 내재한 양수와도 통한다. 작가의 작업 경향은 <이숙 異熟>(2002)이란 작업에 와서 일말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작업에 나타난 상징적인 형태들, 이를테면 자연의 원형(原形)으로서의 생명력, 물과 흙이 내재한 생명력, 그리고 원형(圓形)의 자궁에 결부된 형태로 암시되던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보다 표면화되는 계기를 열어 놓는다. 여기서 '이숙'이란 말 자체는 불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서, 다른 형태로 성숙함을 말한다. 이는 아마도 궁극적인 깨달음(성숙)이란 개별적인(다른)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불교의 교리가 요구하는 또렷한 개성을 가진 존재란 개별적인 삶을 저당 잡힌 채 익명의 삶을 사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숙 곧 다른 형태의 생장이란 말은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이념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다양한 존재 방식과, 동물적 생존원리와는 비교되는 식물적 생존원리, 그리고 현저하게 자연에 밀착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암시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식물의 생장을 통해 생태계의 성장과 소멸에 이어진 일련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한편, 이를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결부시킨다. 그러니까 그 자체 여성성의 상징인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하얀 의상의 표면에 수종(數種)에 이르는 각종 식물들(아팔파, 린제 등 십자화과 식물들과 콩과류에 속하는 식용식물)의 씨앗을 일정한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심어서 그 생장하는 과정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원래의 하얀 의상은 녹색으로, 그리고 점차 죽어 가는 식물들로 인해 갈색으로 변화해 간다. 세부적으로는 씨앗이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심어졌으므로 녹색의 표면과 갈색의 표면이 공존하며, 성장과 소멸이 공존하며,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따라서 이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그대로 예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최초의 씨앗들은 심지어 죽음마저 껴안는 다른 형태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 드레스 자체는 여성의 몸이 연장된 것이며,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기 위한 대지를 대신한 것이며, 이로써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생명원리에 연루된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드레스는 생명을 위한 숙주로써 자기희생을 통한 모성적인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또한 이 작업에서는 '살아있는 미술'의 특이한 존재원리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미술'은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어두운 공간과 일정한 습기, 그리고 식물이 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 등 갤러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물학적 환경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씨앗심기 프로젝트>(2002)에서는 화분과 함께 여러 가지 채소와 꽃(봉선화, 금잔화, 사루비아 등) 씨앗이 담겨 있는 봉투를 설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선택한 씨앗을 화분에 심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이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환경 퍼포먼스로서, 식물의 생장을 일상의 공간으로까지 확대한다는 의미를 실천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작품인 <이숙 Ⅱ>(2002)에서는 속에 솜을 넣어 부풀린 형태로 천을 박음질한 후, 그 표면에 무수한 브래지어 컵을 달고, 각각의 컵 속에는 양파를 담아 생장하게 했다. 이는 식물의 생장을 소재로 한 것이라든가 그 전체적인 형태가 거대한 식물의 씨앗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더 적극적으로 표출시킨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 형태가 긴 꼬리가 달린 정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의 형태가 동시에 씨앗(여성성)을, 그리고 정충(남성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양가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양가성은 그 형태의 표면에 달려있는 무수한 브래지어 컵이 동시에 여성의 가슴(여성성)을, 그리고 일종의 돌기 형태(남성성)를 상기시키는 것에서 더욱 증폭된다. 현대미술 중 특히 여성주의 미술에서 무수한 가슴의 형태는 종종 변형된 돌기의 형태와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로써 남성과 여성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일종의 중성적인 성 혹은 양가적인 성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발견된 오브제와 변형된 장소성   김주연은 마찬가지로 자연을 소재로 하면서도 자연이 아닌 도시에 공존하는 자연의 위상을 테마로 한 일련의 다른 작업들을 전개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들 작업들에서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과 함께 그 변형된 형태를, 그리고 발견된 오브제와 변형된 장소성 곧 장소특정성의 개념을 묻는다. 본래의 자연으로부터 도시민의 일상 속으로 이식된 자연의 변질된 형태와, 그 흔적을 추적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시의 특이한 환경이 갖는 장소특정성의 개념이 개입된 것이다. 예컨대 <도시정원>(2002)이란 작업에서 작가는 도시 속에서 변형된 자연의 한 형태에 주목한다. 도심 각처에서 수거한 스티로폼 상자, 플라스틱 용기, 떡시루, 철 깡통, 심지어 폐타이어 등의 각양각색의 임시화분(대리화분)에 심겨진 상추와 배추 그리고 고추 등의 채소와 화초를 보여준다. 각종 임시화분이 정상적인 화분을 대신한 것이다. 이 임시화분들은 도시에 기생하는 기형화된 자연환경의 한 형태를 말해주는 한편(엄밀하게는 인간이 자연을 불러들인 것이므로 기생보다는 공생에 가까운), 그대로 임시정원, 임시공원, 임시자연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이 작업은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이 변화된 도시환경에 적응해 가는 한 과정으로서,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장소성)과 자연적인 환경(장소성)이 하나로 만나 일종의 변형된 제 3의 환경을 낳는 한 과정으로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잠실주공아파트 재건축프로젝트를 위한 작업 <유물>(2002)에서 작가는 잠실주공아파트 재건축 단지 내에서 발견하고 수거한 각종 화분들, 이를테면 분재화분, 테라코타(흙)화분, 떡시루화분, 플라스틱 화분 등을 단지 내 한 초등학교의 실내공간(햇볕이 들지 않는 반 지하공간)에 설치했다. 이때 흙으로 바닥을 고르게 다진 후 그 위에 채집한 화분들을 재배열했는데, 이는 마치 옛 고분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현장을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흙으로 바닥을 다지는 행위 자체는 물론 전시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의식적 행위로서 마치 몸을 씻는 것과도 같은 일종의 정화의식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그 곳(작가의 개입으로 변형된 장소)은 일상 속에서 본래의 기능을 다한 버려진 화분들이 전혀 다른 미학적 차원(오브제)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곳이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교차하는 현장인 것이며, 존재와 부재가 엇갈리는 길목인 것이며(빈 화분들은 그 속에 원래 담겨 있던 화초를 그리고 그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 곧 잠실주공아파트 주민의 삶(삶의 흔적) 속에 작가의 존재가 개입되는 공감의 현장인 것이다. 이상으로 김주연의 작업은 생태미술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살아있는 미술'을 제시하고 실천한다. 이는 작가 중심적인 오브제미술과도, 그리고 세계의 물질적 지평을 일말의 개념적 지평으로 변질시키는 개념주의미술과도 다르다. 그런가하면 작가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와도 다르다. 대신,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생태미술에서는 오로지 자연이 중심이며,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최소한 자연과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된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같이 생명을 본질로 한 존재인 것이며, 그 생명을 매개로 하여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뿐인 순환구조의 한 원소(모나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작가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맞잡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며, 그리고 자연의 습성을 드러내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작가 개인의 존재(인격)를 드러내는 것임을 인식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의 실천 속에서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에 대한 작가의 경외감이 느껴진다.

고충환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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