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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겸, 사비나미술관

출생

1961, 여주

장르

설치, 사진, 미디어

홈페이지

www.changky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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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 shadow four season 2, 2013-2014

Video installation, 14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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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또는 환상의 균열과 간극

온라인상에서 열리는 김창겸 전의 영상과 사진들은 다양한 소재와 장치들이 동원되지만 ‘진짜 같은 가짜, 사실 같은 거짓, 현실 같은 환영을 연출’하고자 하는 기조에 충실한 그의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의 작품은 2003년 [사루비아 다방] 전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기본적인 실험이 이루어진 것은 정물을 통해서이다. 정물은 오브제와 영상이 결합한 소박한 형식에서 최근에는 2D와 3D기법이 결합된 영상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조르조 데 기리코와 함께 형이상학파(Pittura Metafisica)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약한 조르조 모란디(1890-1960)의 정물화에 큰 영감을 받는다. 그는 정물이 의미하는 ‘죽은 자연’(Natura Morta)에서 과거의 기억이 남겨진 채 시간이 정지된 상황을 발견하고, ‘부재의 기억’을 의미하는 사진과 영상 등으로 표현하게 된다. 예술은 물론, 엄청나게 진보하고 있는 기술 역시, 그것들이 언어인 한 부재 기표라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사물은 언어의 몸통이 되지 못하고 그것의 알리바이로만 남고 괄호 쳐지는 상황에서, 고전주의시대의 고풍스러운 표현인 ‘죽은 자연’은 작가에게 현대미술이나 문화의 적절한 은유로 다가온 것이다.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전시에서 처음 일상의 정물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석고로 만들어 그 위에 연필로 이미지를 그렸다. 그것은 일종의 조작된 조각으로, 작품은 석고라는 물질성을 띄고 있지만 사진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사물들의 실재 크기도 모두 다르고, 정물이 놓인 테이블도 둥 떠 있는 상태이다. 실제 사물의 색이 빠짐으로서 무게감은 사라진다. 실재는 일련의 이미지화를 거치면서 무한대의 조작가능성이 열렸고, 이후 그의 작품은 현실과 허구사이의 게임에 몰입된다. 최근에 제작된 3분 분량의 [Still Life](2011)는 모란디 같은 스타일로 정물을 배치하고 정물의 색이 계속 바뀌게 만들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던 정물은 나중에 하얗게 변한다. 
눈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영상은 결국 실재의 부재를 암시하는 역설적인 어법이다. 그의 초기 작업인 [이미지를 위한 좌대](1998)는 돌의 단면에 또 다른 돌의 무늬를 비춤으로서 시뮬라크르로 변해버린 대상을 표현한다. 그럴듯한 표면이 가짜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상 사이에 끼어듬으로서 실재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관객의 몸이다. 그의 작품이 알려주는 것은, 표면이 화려할수록 실재(대상과 인간)는 더욱 유령같이 변한다는 것이다. 모종의 조작을 거쳐 자율성을 획득한 스펙터클에서 인간은 슬쩍 끼어드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재의 몸통은 불활성의 믿믿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역학이 사적, 공적 기억을 담은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이어진다. 김창겸의 작품은 정물과 사진의 미학에 깔려 있는 실재의 부재를 다루고 있지만, 실재는 여러 코드 중의 하나로 쉽게 포기 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미디어 아트가 보편화된 현재에 김창겸의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점은, 작품에 디지털 기기를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아나로그적인 감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실재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추동하는, 몸과 마음에 강하게 새겨진 응어리진 흔적과 분리불가능하다. 코드와 코드 사이에는 암전과도 같은 불연속성이 있고, 의미는 이 불연속성에서 발견 된다. 가령 비디오 설치작품 [편지](2000)는 첫사랑을 기억하며, 20년 전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설정인데, 편지를 쓰는 동안 오브제와 일치된 동영상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편지를 다 쓸 즈음 사물을 닮은 초라한 틀만 남는다. 편지는 나지막이 독백--‘...그럼에도 항상 묻고 싶은 것은...정말 당신은 내가 생각하듯이 그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습니까. 당신은 정말 존재했었습니까. 나는 존재했었습니까....’--된다. 실재는 첫사랑처럼 강렬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이나 공공의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서 불가능한 실재에 보다 근접하려 한다. 
대표작이라고 자부하는 비디오 설치 작품 [water shadow-four seasons](2006-2007)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사계절을 오롯이 담았다. 2003년 [사루비아 다방] 전은 다방의 문화사라 할 만 한 대중의 집단적 기억을 투사했다. 이 전시에서 인상 깊게 나온 거울의 틀은 2007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열린 [거울] 전에 다시 등장한다. 거울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인물들, 그리고 그럴듯하게 연출된 모든 배경을 무화시키는 검은 그림자를 보여주는 [memory in the mirror](2006-2008)는 조각난 몸을 가상으로 연결시켜주는 거울이라는 장치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를 원하는 개인의 환상과 관련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보여주듯, 환영은 실재만큼이나 취약하다. 환영과 실재는 가상과 원본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두 개의 중심을 가지는 짝패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에 대한 경의](1998-1999)나 [like a Mao](2004)같이 위대한 인물에 자신을 투사하는 작품들은 초상을 담는 황금색 액자와 거울의 유사성을 예시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국내전 [Natura Morta](브레인 팩토리, 2010)의 부제에 암시되듯, 그는 다시 정물로 회귀하는 듯하다. 사비나 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였던 비디오 설치 작품 [Still Life](2007)는 또 다른 버전으로 탄생했다. 미술관 벽에 설치된 작은 선반 하나는 비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여러 가지 병 모양의 틀이 있는데, 요정 같은 소녀가 나비처럼 병 안팎을 뛰어다니며 놀면서 병들이 다채롭게 변한다. 요정은 환타지의 요소가 강하지만, 거기에는 죽은 대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사람이라는 은유가 있다. 또 다른 버전에서 소녀는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며, 분신들로 변신하기도 한다. 작품 속 사물들은 스케일이 모두 다르며 그림자도 자율적이다. 싱글채널 비디오로 만들어진 새로운 버전의 [Still Life](2010)는 실사사진을 밑그림 삼아 인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붙인 영상과 사진이다. 
새로운 버전의 [Still Life]는 관조적이기 보다는 유희적이다. 실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보다는 허구적인 면이 더 강하다. 자연은 물론 모든 사물과 인간들을 빨아들이는 하이퍼 리얼의 세계에서도 가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역학관계는 여전하지만, 모니터 안의 세계는 보다 균질적이다. 그것은 현실을 보다 멀리 따돌리고 모든 것을 동질적인 코드로 재편하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새로운 현실(=언어)이다. 퍼트리셔 워는 [메타 픽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유발시켰던 외부의 질서체계에 대한 신념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위기의식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저자의 비교법에 의하면, 모더니즘에서 리얼리티는 주관적으로 구성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리얼리티는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모더니즘이 아직 의식에 기초해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허구에 매몰된다. 모더니스트 텍스트는 은연중에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목하지만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의 자의적 체계를 통해 세계의 윤곽을 제시한다. 이 체계에 의해서 최상의 리얼리티를 만들려한다. 언어적 인간에게 현실이란 그자체가 아니라 늘 상 어떤 언어로 구축된 것임을 생각할 때, 해체는 구축의 이면이다. 연속적으로 흐른다고 가정된 선적 질서에 불연속을 도입하는 것은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선택이다. 사실주의는 확고한 것에 매달리고 싶은 부르주아의 욕망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세계의 합리성과 묘사가능성을 확언하지만, 사실 자체가 관찰에 의해 해석에 의해 변모한다. 김창겸의 작품에서 현실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한정적인 구조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구성(가공)된 현실을 이루는 취약한 이음매는 그 헐거운 본성을 드러낸다. 수지 개블릭이 마그리트의 작품은 분석하며 말했듯이, 재현이란 오브제를 그대로 비추거나 모방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이며,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상징적 연관 관계를 가진다. 
김창겸의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투명한 매개가 아니라, 재현이라는 관습적 방식을 반성하는 일종의 도구이다. 그의 작품은 객관적 세계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들추어낸다. 그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익숙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에서 환영을 투사하는 바탕은 거울, 어항, 깨진 접시, 찻잔, 병들처럼 매우 일상적이다. 최근의 [정물]에는 장난감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가 등장한다. 정확성과 불명확성의 역설적 결합이라는 비슷한 전략을 취한 마그리트는 자신의 작품의 구성요소를 ‘오브제, 의식의 그림자 속에서 그 오브제와 연결된 사물, 그리고 그 사물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빛’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러한 방식은 ‘물질세계의 모든 독단적인 광경을 붕괴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수지 개블릭)이다. 김창겸의 작품에서 재현의 장치가 정교하게 구동되는 것은 재현의 해체와 관련된다. 그것은 재현을 통해 재현을 부정하는 전략이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에 난입하는 검은 구멍은 현실 자체가 구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작품에 동원된 사물들은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을 남기는 방식 속에 존재’(로브그리예)한다. 빛이 사라지면 드러나는 창백한 모형들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투영이나 반영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체험을 구성한다. 그의 작품이 주는 주된 체험은 기분 좋은 몰입 후에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각성이다. 시간적 차이, 공간적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균열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만약 현실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지 개블릭은 말의 사용이 상투적일수록 재현되는 사물은 표현자체와 더욱 혼동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로 인한 혼란의 결과를 사실주의라고 본다. 이 혼란이 최고의 경지로 나타날 때 이 둘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김창겸의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하는 균열과 간극의 어법은 자연스러움에 내재된 혼란을 드러내는 또 다른 혼란이다. 이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관념적 이분법을 전제하지 않는 일종의 동종요법인 셈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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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다

‘언제인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이는 장자의 제물론 편에 나오는 장자몽 이야기이다. 여기서 장자는 ‘자신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자신이 된 것인지’를 묻는다. 그 물음은 물론 인위적인 차별을 경계한 것이지만, 미술에 있어서의 재현의 문제 곧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비록 장자몽이 인식적인 차원을 말한 것이고, 이에 반해 재현은 현상적인 차원에 연유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인식과 현상이 마치 순환적인 고리처럼 상호 포괄적 개념임을 고려할 때 그 둘의 차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김창겸의 작업은 재현의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한 물음과 탐색으로 나타난다. 동시대에 있어서의 이미지란 더 이상 미술이라는 특정 문맥 안에만 머물지 않으며,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사회적 지표(인덱스) 같은 것이다. 따라서 김창겸의 이미지에 대한 관심 역시 미술 내외적인 문제의 망과 광범위하게 맞물려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미지는 미술 내적으로는 재현적인 기호(이미지의 본질 또는 생산과 관련한)인 동시에 미술 외적으로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기호(이미지의 소비 또는 유통과 관련한)이기도 한 것이다.
‘실체에 대한 이해가 이미지에 의해 대체된 탓에 조각을 포기했다’는 작가의 말은 ‘원본 없는 이미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 그리고 마침내 ‘실재를 대체한 이미지’에 대한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상기시킨다. 그런가하면 사물의 실재를 하나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본 것에서는 한시적 존재를 영원한 존재의 일부가 투영된 한낱 그림자(이미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본 현자들의 관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실재에 대한 강한 회의는 작가의 작업의 이면에 면면히 흐르는 어떤 정서적 맥을 이루고 있으며, 그 맥은 작가의 작업에 개념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특유의 아우라를 부여한다.
그런가하면 실재에 대한 회의가 순수한 개념적 유희이기보다는 작가의 실제 경험에 연유한 것인 만큼 절실한 것이며, 그의 작업이 탄탄한 개념과 논리 그리고 호소력 있는 공감을 끌어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컨대 하나의 조각에서 작가는 그 조각이 제작되기까지의 노동과 여기에 투사된 작가의 보이지 않는 혼을 조각의 본질로 보는 것에 반해, 정작 주문자(콜렉터와 관객 등의 향수자는 물론이고, 때로는 석공과 다른 조각가에게 자신의 조각을 주문 제작하는 조각가를 포함하는)의 관심은 그 조각의 재질(합성소재의 이미테이션을 포함하는)과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과 그 형상이 주는 감각적 쾌감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즉, 작가는 조각의 실재를, 그리고 주문자는 조각의 이미지를 본다는 것이다.
입방체로 다듬어낸 석재조각을 찍은 사진(실재 석재 조각의 이미테이션)이 담긴 액자와 함께 그 제작과정에서 나온 버려진 폐석을 마치 조각인 양 전시한 <입방체를 꺼내다>(1998)는 다름 아닌 이런 조각의 실재와 이미지와 관련한 통념에 대한 작가의 소리 없는 항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를 위한 좌대>(1997-1999)에서는 실재와 이미지와의 간섭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그러니까 입방체를 이룬 좌대의 몸통은 실재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지만, 정작 좌대의 핵심에 해당하는 상단부의 표면은 석재의 표면을 영상으로 찍은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투사한 것이다. 이 작업에서 실재가 양감과 질감으로 축조된 뚜렷한 존재감을 갖고 있는 반면, 이미지란 현저하게 표면적 현상이며, 그마저도 존재감이 희박한 것으로 드러난다. 프로젝터의 불을 끄면 사라지는 한낱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작업에서 실재와 이미지를 구분하는 어떠한 차이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실재와 이미지와의 상호간 긴밀한 간섭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키워드이다.
또한 이미테이션에 대한 주문자의 관심은 하나의 모본으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조각 곧 메타조각을 발생시킨다. 말하자면 작가는 사진과 텍스트 그리고 비디오 설치로 구성된 <Meta-Sculpture와Meta-Sculpture>(1997-2000)에서 여러 출처로부터 차용한 이미지의 편린들을 조합해 만든 조각으로써 실재가 아닌 하나의 순수 이미지에 근거한 제 3의 조각의 한 가능성을 예시한다. 여기서 ‘메타’를 재현의 중위적 장치로 이해할 때, 메타조각이란 사실상 ‘조각에 대한 조각’, ‘조각으로부터 파생된 조각’, ‘조각의 조각’의 의미가 된다. 이는 작가가 돌 공장에서 석공으로 일한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이를 일종의 개념미술의 형식을 빌어 작업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자신이 주문 받아 제작한 조상(彫像)에 대해서 이미지의 원본성을, 원전성을, 사실상의 저작권을 묻는다.
또한 이 작업에서도 그렇지만, 작가의 작업에는 흔히 그 일부로 편지가 도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인(예컨대 주문자)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이는 일종의 메일아트 또는 편지 퍼포먼스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술이란 예술이기 이전에 삶의 한 형식인 것이며, 예술의 궁극적인 핵심은 예술 행위를 매개로 이뤄지는 각종 인간 관계와 소통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를 실천한 경우로 보여진다.
그런가하면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는 단순한 관계 이상의 상호 간섭 또는 상호 침투로 나타나며, 마침내 그 구분이 무의미하기에까지 이른다. 그 형식실험의 일단을 <예정된 실수>(1998), <방해-영상(Thwarting-Vision)>(1999), 그리고 <정-물>(1999)에서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약간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석고 캐스팅으로 재현된 각종 오브제에 겹쳐 동영상을 투사한 것이다. 석고 오브제는 예컨대 거실이나 술집 등의 동영상 화면 속의 한 배경으로 나타나며, 그 표면에 동영상이 투사됨으로써 비로소 실재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동영상 화면이 페이드아웃 되면 석고 오브제는 실재감을 상실하고 어둠 속에서 하얀 형해(形骸)로 드러난다.
개념적 유희 또는 논리적 긴장감(실재와 이미지가 일치하는 것에서 오는)을 순간적으로 정서적인 경험으로 전이시키는 이 작업들은 무엇이 실재이고 또한 무엇이 이미지인가를 묻게 만든다. 동영상 화면이 표면적인 이미지일 뿐이라면(‘이미지를 위한 좌대’에서 그렇듯이), 석고 오브제 역시 한낱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 질량이 다른 두 이미지가 겹쳐 실재를 흉내낸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실재는 실재가 아니며, 사실은 이미지를 실재로 착각한 것임을 말해준다. 진정한 실재는 없으며, 대신 실재는 이미지를 그리고 이미지는 실재를 참조할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석고 오브제가 현저하게 사물의 주검을, 죽은 사물을 뜻하는 ‘정물’의 어원(natura morta)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뜬 밀랍 주조를, 귀신(psyche)과 환영(phasma)을, 그리고 그림자를 뜻하는 이미지(image)의 어원(이마고 imago)과도 통한다. 그런가하면 보드리야르가 사실상 이미지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시뮬라크룸(simulacrum)은 유령을 의미한다. 이렇듯 이미지는 진작부터 허구와 환영 그리고 귀신 등의 실재하지 않은 것들과 긴밀하게 교류해왔으며, 죽음과 관련한 영적 경험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예술(미술)의 역사는 이런 허구에 대한 추체험으로 점철된 가상의 역사(실재하기보다는 가능한 세계의 탐색에 바쳐진)인 것이며, 허구에 대한 사념을 전개해온 재현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김창겸의 작업의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는 기왕의 미술사에 적용돼 이를 비평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이된 명작>(2000, 각종 서양의 명화의 이미지를 채집해 보여주는)과 <전이된 교회>(2000, 반 고흐의 원작을 패러디 한)에서의 형용사 ‘전이된’은 원작을 차용하여 자기화한다는 작가의 프로세스를 공공연하게 표명한 것이다. 여기서 차용은 원작에 대한 작가의 부연과 첨언, 부가와 간섭, 그리고 개입(원작의 재맥락화 혹은 탈맥락화)의 흔적인 것이며, 이는 기왕의 어떤 것(예컨대 서양미술사와 같은)을 숙주로 해서 존재하는 기생의 논리를 대변해 준다.
이 일련의 연작 가운데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고 자화상을 각각 차용한 <반 고흐에 대한 경의에 대한 경의 1,2>(1998-1999)는 반 고흐 특유의 강렬한 붓질을 흉내낸 석고 부조의 흰색 모노크롬 화면의 표면에다 원작의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투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실재와 이미지와의 모호한 경계를 다룬 것이지만, 이외에도 이 작업에서는 특히 원작을 신비화 신화화하기 위해 동원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이 등장한다. 화려한 꽃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고전주의 풍의 금박액자라든가 접근을 차단하는 봉이라든가 그리고 각종 관련 텍스트(미술관 소개, 작품 소개, 그리고 편지 같은) 등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유리, 경비원의 감시, 그림에 가까이 접근하면 어김없이 울려대는 경보장치와 함께 천문학적 액수에 달하는 그림 값 역시 그 장치의 일부로 보고 있다.
동어 반복적으로 부가된 제목이 시사하듯 작가는 반 고흐에 대한 경의를, 그 경의의 정체를, 그 경의를 조장하기 위해 동원된 제도적 장치를 문제시한 것이다. 아우라는 정작 그림 자체보다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지어 원작을 대면할 때조차도 고흐라는 이미지를 재확인하거나 참조할 수 있을 뿐, 고흐라는 구체성에 결코 가 닿을 수 없게 된다. 그밖에도 원작의 이미지(반 고흐의 자화상)에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중첩시킨 것이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을 차용하여 자기 식으로 고쳐 쓴 것에서는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관심이 읽혀진다.
이외에도 작가는 같은 크기의 빨간 색지 1000장중 일부를 붙여 만든 캔버스 작업<1000번의 질문>(1998)에서 단색조(모노크롬)의 평면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회화를 논평하는 한편, 그 색지의 일부를 공간에 설치한 것에서는 모더니즘의 형식 논리에다 장소의 특정성을 개입시키고 있다.
김창겸의 작업이 친숙하게 느껴지고 또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요소들 중에는 문학적이고 서사적(내레이션)이고 자전적인(개인사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이는 정서적 공감과 함께 서정적 울림이 큰 부분이기도 하다. 과거 속의 자기를 현재에 불러오는 식의 시간여행을 통한 자기반성적 성향의 작업들로서는 <전이된 자화상>(1984-1999, 10년보다 더 지난 자화상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프로젝터로 투사한), <cn-versare,-화 >(1999, 원래 대화를 뜻하는 conversare에서 함께 하다는 의미의 접두어 con이 떨어져 나가고, 대신 일방적으로 퍼붓는 식의 언어 폭력을 암시하는 versare만 남은), <편지>(2000), 그리고 <물-그림자>(2001)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편지>는 석고 모형과 영상을 겹쳐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여타의 다른 작업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에다가 서사와 내레이션을 결부시켜 자기반성적 성질을 강조한 점이 다르다. 이 작업에서 현재의 작가는 과거 속의 자기에게 편지를 쓴다. 그 가상의 설정이 하나의 현실 속에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또 다른 나를 가정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소설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작가는 당신(과거 속의 나)은 존재했었느냐고, 나(현재 속의 나)는 존재했었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물음이 과거형인 것은 나에 대한 인식이 필연적으로 과거에 편입된 형태로만 가능한 불완전한 인식 탓이다. 그런가하면 이런 자기반성적 회상에 의한 과거의 재구성은 투명하지 않다. 투명하기는커녕 현재의 나의 욕망이 투사된 불투명한 주석과 부언과 잉여에 가깝다. 서사는 실재를 암시하던 영상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하얀 석고 모형만 남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로써 과거의 나는 결코 맞잡을 수 없는 부재의 존재로 드러난다. 과거의 나가 없다면 그 부재의 존재에 기댄 현재의 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대신 나라는 관념과 빈 이름(虛名)이 있을 뿐. 나는 실재인가 아니면 이미지인가. 장자몽에서 장자와 나비가 그런 것처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하나로 겹친다.
<물-그림자>에서 작가는 물을 담을 수 있는 돌확에 물의 영상을 투사하고, 여기에다가 일정한 시차를 두며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자연음을 증폭시킨 소리를 중첩시킨다. 그리고 말해봐, 기억해? 가버려, 떠나지 마, 그러나,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등의 말들을 부가한다. 이 말들 자체는 상당한 구체성을 갖는 것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증폭음 속에 해체되어 흩어진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불구의 의미로 인해 진정한 소통이 단절된 인간 실존을 다룬다. 그리고 수면은 자기반성적 매개로서의 거울을 상징한다. 그 수면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파문은 생생한가 하면 흐릿하다. 이는 결코 온전한 형태로 재구성될 수 없는 불완전한 기억과, 그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의 폭력을 암시한다.
이렇듯 김창겸의 작업은 슬라이드 프로젝터와 비디오 설치를 근간으로 하며, 그리고 여기에다가 실물을 그대로 흉내낸 석고 모형(석고 모형은 실재보다는 허구적 이미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과 텍스트 등 최소한의 오브제를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선명한 개념과 그 개념의 형상화를 통해 재현의 두 축인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정적이고 정서적인 환기력을 잃지 않는다. (동)영상 매체를 오히려 금욕적일 만큼 절제되고 정적인 방식으로 역류시킴으로써 이미지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사고의 부피를 인간 실존에까지 증폭시킨다. 사고의 깊이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

고충환(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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