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Project with Korean Art Museum
로그인  |  회원등록  |  English    Contact us

아티스트

Home > 참여작가 > 상세보기

photo

손봉채, 무등현대미술관

출생

1967, 광주

장르

회화, 설치

홈페이지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Email

이주민, 2014

폴리카보네이트에 유채, LED, 1200 x 800cm

이전
다음

이주(移住), 현대인의 자화상

Ⅰ.
약관 삼십의 나이에 제2회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로 발탁돼 <보이지 않는 구역>이라는 설치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사람이 바로 손봉채다. 비엔날레 전시장의 높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207대의 자전거는 예의 그 ‘끼익끽’대는 음향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장엄한 모습으로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국내의 매스컴을 비롯하여 CNN, BBC, NHK 등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 손봉채의 키네틱 아트를 앞 다퉈 보도했다. 그의 이 작품은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과 비평계의 찬사를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이런 방대한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전력을 투구,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작품을 소장하겠다는 소장자도 후원자도 없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를 관람한 LA현대미술관의 한 큐레이터가 이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며 작품을 미술관으로 보내기만 하면 세계 순회전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그는 작품을 보낼 수 없었다. 손봉채에게 이 쓰라린 기억은 아직도 가슴에 깊은 한으로 남아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가에게 기회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만일 그때 어떤 후원자가 있어서 그를 지원하였더라면 그는 지금쯤 세계적인 작가가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무렵 광주 신세계갤러리에서 돼지를 전시장에 몰아넣은 사건이다. 전시장에 갇혀 퍼포먼스를 벌인 돼지가 똥을 싸 불쾌한 냄새가 퍼지는 통에 사치스런 상품들로 가득 찬 백화점의 특성상 돼지를 철수해야 했다. 이 돼지 퍼포먼스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손봉채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일화 가운데 하나이다.

Ⅱ.
나는 그 이후 월간미술에 그를 추천하는 비평 글을 쓰기도 하는 등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한동안 그의 활동을 접하기 어려웠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광주 시내에서 포장마차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사연인가? 나는 궁금했지만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키네틱 아트는 생소했고 또 그런 대형작품은 -지금도 그렇지만-컬렉션의 가능성이 낮다. 그런데 나는 그런 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 걸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결국 수천만 원의 빚이 고스란히 남게 됐고 그 많은 빚을 갚기 위한 살벌한 시간들이 시작됐다. 공사장 막노동꾼은 기본이고 선착장 잡역부, 조선소, 포장마차에 이르기까지 빚을 갚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의 [권력] 섹션에 그로선 최대의 야심작인 <보이지 않는 구역>의 제작을 둘러싼 이러한 일화들은 결과적으로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잡초 근성을 지닌 그는 수년간에 걸친 정신적 방황과 모색 기를 거친 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입체회화를 시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보다 앞선 시기인 1990년대의 그의 작업은 사회비판적이며 권력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를 필두로 2004년, 2006년, 2010년 등 잇달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었는데, 이때 발표한 <보이지 않는 구역>, <더 이상 공룡은 없다>, <다음은 누구? >, <어디로 가느냐?> 등등의 작품들은 손봉채를 일약 스타급 작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에 그가 제작한 <경계-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란 작품은 입체회화의 효시가 되었다.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첫선을 보인 이 대형 설치작품은 광주 전남지역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자 산 증인인 전남도청의 사진 이미지를 몇 개의 구획으로 분할해서 관객들이 그 사이를 걸어가며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 후 그의 ‘경계’ 시리즈는 한동안 지속되기에 이른다.

Ⅲ.
이 ‘경계’ 시리즈를 제작할 무렵, 광주를 비롯한 남도 일대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다니던 손봉채의 눈에 우연히 한 장면이 들어오게 된다. 대형 트럭에 실려 가는 조경수, 뿌리가 뽑힌 채 어디로 팔려가는 줄도 모르고 트럭의 화물칸에 몸을 맡긴 그 처량한 모습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순간, 마음 한 구석이 퀭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심을 장식하는 그 많은 조경수들이 사실은 이렇게 제 땅에서 뽑혀 나와 도시로 팔려가서는 도심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순간 나는 뉴욕을 떠올렸다. 뉴욕이야말로 전 세계의 인종시장이라 할 정도로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좇아 몰려든 곳이다. 그들이 정말 자기 땅에서 살기 좋았다면 그 낯선 이국땅으로 왔을까? 더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사회 밑바닥을 떠받들고 있었다.” 조경수에 대한 손봉채의 이처럼 강한 감정이입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그의 청년기 체험과 관련이 깊다. 일찍이 요리사가 될 것을 꿈꾸었던 그는 대학시절 은사인 신현중 교수의 강력한 권고로 마침내 유학길에 올랐는데, 뉴욕시절 국외자로서 그의 체험은 이러한 감정이입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4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와서 그가 겪었던 신선한 체험 역시 뿌리가 뽑힌 자의 방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손봉채의 <이주민(Migrants)> 시리즈는 이처럼 뿌리 뽑힌 자들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출발하였다. 산업화 사회의 희생자로서 개발에 밀려 이리저리 떠도는 부평초 같은 인생에 대한 강한 연민과 공감이 그것을 낳은 것이다. 그는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에 유성 물감과 가는 붓을 사용하여 직접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 처음에는 사진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였으나 약 4년 전부터 직접 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창안한 특유의 입체회화가 자리를 잡기에 이른 것이다. 이 입체회화의 기본은 밑그림이다. 그는 먼저 최종적으로 완성 될 작품의 밑그림을 그린 다음, 5장에 이르는 폴리카보네이트에 서로 중첩되지 않도록 그릴 나무의 일련번호를 매겨 가는 붓으로 그려나간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관객이 보는 그림은 이 다섯 장의 폴리카보네이트가 합쳐져 완성된 것이다. LED가 뿜어내는 백색의 투명한 빛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 풍경은 사전에 주어진 정보가 없다면 산수화의 현대적 변용으로 여길 만큼 실험적 측면이 강하다. 사실 나 또한 이 <이주민> 연작을 보면서 동양의 산수화가 나아갈 미학적 가능성을 본 것이 사실이다. 화선지에 붓으로 먹의 농담(濃淡)을 살려 그려낸 전통 산수화가 오로지 먹색만으로 공간감과 거리감을 표현한다면, 손봉채의 <이주민> 시리즈는 5장의 폴리카보네이트 위에 나무와 구름을 그려 관객의 시점이 이동함에 따라 미묘한 풍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입체회화의 장점을 보여준다.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가져온다. 손봉채의 입체회화는 비록 유성물감을 사용하여 세필로 그렸으되 전통 산수화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몽환적이며 입체적인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산수화가 지닌 동양적 전통의 미감이 손봉채의 손을 통해 현대적인 느낌의 새로운 회화로 거듭나기에 이른 것이다. ‘이주(移住)’라는 일관된 주제 하에 이루어진 손봉채의 <이주민> 시리즈는 초기작을 보면 그 발상의 근원을 알게 된다. 뿌리가 뽑힌 채 구름 위에 서 있거나 호반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를 그린 그림들에는 이주민들의 이름이 영어로 써 있다, 구름위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서있고 구름 사이로 백악관이 모습을 드러낸 장면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 물결 위에는 수많은 이주민들의 이름들이 써 있다. 이 그림만큼 이주와 관련된 <이주민> 시리즈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도 드물다. 그러니까 지금 보는 <이주민> 시리즈는 이러한 이주민의 이름이 소거된 상태인 것이다. 그는 이주민들의 이름이라는 구체적인 사실을 제거함으로써 주제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아가서는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오로지 관객들이 심미적 체험(aesthetic experience)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완곡하게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감상은 열려있다. 관객이 그것을 한 편의 현대적 산수화로 해석하든, 아니면 그 그림을 통해 뿌리 뽑힌 자의 영혼을 읽어내든 그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미적 향수 능력과 판단, 그리고 취미(aesthetic taste)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손봉채의 입체회화가 종래의 산수화와는 다른 새로운 미적 체험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산수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손봉채의 <이주민> 시리즈가 지닌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뿌리가 뽑혀 있다.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원래 있어야 할 대지를 떠나 구름 위에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의 그림 속의 나무들은 구름에 가려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 전통 산수화 속의 나무들과는 달리 정처 없는 이동을 상징하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주지하듯이 구름이나 안개는 존재의 지반이 없다. 그러니까 존재의 지반이 없이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인 구름 위에 나무가 뿌리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은 곧 그 나무 역시 존재의 지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주민(定住民) 의 모습이 아니라 방랑자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주민(移住民)의 모습을 상징한다. 손봉채의 나무가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 시대에 도시개발로 인해 정처 없이 떠도는 도시인들의 이주와 유목, 그리고 방랑을 상징한다고 할 때, 작품에 대한 해석의 외연을 확대하면 그 의미는 매우 크다. 그는 얼핏 보기에 깔끔한 산수화로 보이는 작품을 통해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특유의 입체회화 기법을 통해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보폭이 큰 작가의 다음 행보가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내겐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윤진섭 (미술평론가, 호남대 교수)

더보기

태도가 역사가 될 때

 오늘날 현대미술의 형식과 언어는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과거 예술작품의 전 단계로 간주되던 개념은 물론이고 사고나 태도, 공간해석, 그리고 신체적 행위까지도 이제는 엄연히 작품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이제 개념과 형식의 차이를 따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해져버렸다. 말하자면 작품의 형식만을 통하여 미학적 언어를 판별하고 가늠하던 과거의 견고하던 형식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후퇴하거나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관객도 예술가들이 지어 놓은 기상천외의 예술적 생산물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무감각해졌으며, 이것이 과연 작품인가를 묻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언제든지 즐겁게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는 '예술의 방위각'이란 주제로 온갖 실험형식을 도입한 전위적 비엔날레였다. 새로운 경향의 젊은 예술가들을 위하여 아페르토(Aperto)라는 전시를 처음 도입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아페르토에 초대되었던 태국 계 미국작가인 리르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는 베니스의 명물인 곤돌라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제작한 곤돌라는 나무가 아닌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바다 위에 떠 있는 관광객을 위한 곤돌라가 아닌 전시장 내부로 유입되어 관객과 전혀 다른 용도로 만나게 창작된 예술적 곤돌라였다. 전시장에 설치된 곤돌라 안에는 물을 끓일 수 있는 가스통과 끓는 물을 부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국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즉석에서 우동을 만들어 먹는 재미를 누렸으며, 비엔날레에 구경 와서 국수까지 먹는 예기치 않은 재미와 행운을 누렸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음식은 공짜로 제공되었다.

 관객의 참여공간을 극대화해가는 오늘에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작업형태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16년 전에는 이것이 도대체 조각인가, 설치인가, 그냥 퍼포먼스인가, 아니면 사회 참여적 행동인가에 대한 논란이 대단하였다. 또 예술의 이름으로 마련된 베니스 식 접대인가라는 논의까지 있었다.

 이러한 관객참여방식의 퍼포먼스가 가미된 예술은 원래 플럭서스 해프닝에서 시작되었지만, 최근 20여 년 사이 보편화되었다. 즉 태도나 개념이 하나의 미학적 형식이 되어 그것이 시각예술인가, 신체예술인가 등의 논란을 거치면서 복합적 예술형식으로 진화하였다. 오늘날 현대미술이 단순히 벽면에 걸린 뻣뻣한 오브제가 아니라 움직이고 말하며, 관객에게 말을 걸고 참여를 유도하는 상호텍스트 적인 매체가 된 것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변화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작가 손봉채의 작업도 말하자면 조각이자 설치작품이며, 퍼포먼스가 가미된 매우 복잡하면서도 관객의 직간접적인 참여가 관건인 예술이다. 즉 관객의 참여가 작품을 완성하는 구성요소가 중시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관객의 참여가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관객의 참여적 관심을 작가가 매개체가 되어 실현 시키는, 이를테면 의식의 징검다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담론하려는 미학적 언어들이 대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삶의 주변부를 형성하는 크고 작은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는 소재가 매우 정직하면서도 직유법적 화술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손봉채 예술의 라벨은 작품소재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가 지금까지 미학적 도구로 사용해 온 소재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전거이고, 다른 하나는 폴리 카버넷에 이미지를 중첩시켜 그린 패널 페인팅이다. '작가 손봉채' 대신 지금까지 '자전거 작가' 등으로 호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의 라벨화가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질문은 차치하고라도 손봉채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물방울 작가' '보리밭 작가' '말 그림 작가' '유채꽃 작가' 등의 이름을 가진 소재와 예술가를 등식화하는 대열에 그도 소속된 것이다. 이는 미술사에 기록된 상당수의 작가들이 소재에서 차별화되고 특징화된 전례를 비교한다면 좋다 나쁘다의 의미로 단정할 성질의 것은 전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소재들을 활용한 손봉채의 예술언어는 작가 개인의 스토리텔링으로부터 한국사, 세계사의 굴곡에서 나타난 사회정치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 표현의 줄거리들은 지극히 문학적이거나 문학성을 감수성을 배양시켜 나타난 감성들이 넘쳐난다. 그것은 이를테면 미련이라거나 연민, 과장, 축소 등 시각적 형식이나 표현의 내부에 파고든 잔잔한 시각언어들에서 흥건하게 배어 있다.

 손봉채가 자전거를 소재로, 작업의 발언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자전거를 매체로 선택한 것은 그것이 누구나 아는 서민적이고 친숙한 소재라는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도구적이면서도 매우 익명적이라는 점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두발 달린 짐승들이 개발한 초보적 운송수단이면서도, 그보다 유용한 것도 사실상 드물다는 찬양론에 기초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자전거에 얽힌 크고 작은(대개는 별 의미 없이 지나쳐간) 추억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특별한 것으로 기억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동차라는 보다 복잡하고 적극적인 수단에 의하여 대체 된 도시에 사는 자들에게 자전거는 그저 아련한 추억의 일부가 된 소재인 것이다.

       손봉채가 예술작품으로 만든 자전거들은 기능이 제대로 살아있는 성한 자전거는 드물다. 페달을 거꾸로 돌리게 만들어지거나, 아니면 홀수의 페달을 만드는 등 모양새만 자전거이지 기능적으로는 대부분 불구가 된 탈기능적 자전거이다. 작가는 앞으로 가는 숙명을 가진 자전거를 뒤로 가도록 전복된 숙명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이른바 숙명의 전복을 야기 시킨다. 이러한 의미의 '뒤집혀짐'은 사회학적이고도 해학적인 해석을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관객은 이 엉뚱한 질문에 대하여 때로는 고통스러운 대답을, 때로는 유쾌한 답을 내리도록 요구 받는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거꾸로 시간을 돌릴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역주행의 절묘한 화법을 구사하는 예술가의 사고와 행위에 대하여 동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만든 자전거의 금형을 이용하여 그가 의도한 크기와 용도의 자전거를 따로 만든다. 1997년, 손봉채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전거설치작업을 선보였다. 207대의 크기가 다르고 기능이 다른 자전거를 전시장 내부에 가득 투입한 이 설치작업은 자전거가 작동하면서 내는 기계적 굉음이 흡사 권력에 옥죄어 사는 서민들의 신음처럼 전시장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 후 손봉채는 페달이 여러 개인 공동체적이고 협업이 요구되는 자전거를 만들어 다양한 전시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집단적 내러티브(collective narrative) 형식의 작품들은 천정과 벽면에서 비추는 조명에 의하여 다량의 그림자를 벽면에 연출하게 되는데, 이는 문명의 굉음, 특히 소음이 연출하는 스펙터클의 폭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단순히 사회적이라거나 소시민적 삶을 투여하는 유익한 매체라는 해석 이상의 것들을 내포한다. 인간에 비유된, 크고 작은 수 십대 자전거들의 합창은 때로는 처연하지만, 때로는 슬픈 것이 아름답게 보임으로써 웅변적이기도 하다.

       손봉채의 또 다른 소재인 패널 페인팅은 마치 홀로그램 효과처럼 그림이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평면작업들이다. 처음에는 유리에 그림을 그려 여러 장을 겹으로 중첩시킨 뒤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풍경 및 인물그림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운반에 어려움이 크고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어 후에 아크릴로 교체되었다가 지금은 폴리 카버넷으로 전체 소재를 바꾸었다.

       그의 패널회화는 소재가 매우 다양하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비롯한 풍경, 인물, 국내외의 특정한 역사적 장소,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 사회정치적 장소 등이 대표적인 소재들이다.

       그는 어느 날 부친으로부터 6.25 당시 경찰관 124명이 무장인민군 8명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당한 소나무 숲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을 방문하였다. 지금은 소나무들이 우거진 전라남도 곡성의 어느 평범한 마을이자 부친의 고향이지만 역사 속에서는 피로 물들었던 곳이었다. 손봉채는 그 소나무 숲을 각각의 패널에 하나씩 그려갔다. 그리고 역사의 두께를 표현이나 하듯 그림들을 입체적으로 중첩시켰다. 이것이 중첩회화의 시작이었다.

       그 후 그는 스페인의 아람브라 궁전을 비롯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의 코 2만2천1백84개를 베어가 무덤을 만든 코무덤, 오성홍기가 가장 많이 휘날리는 상하이의 금융가, 베니스의 홍등가, 난징 대학살 장소, 며느리가 할머니를 학대하여 할머니가 목을 맨 장소, 대구지하철 화재장소, 5.18현장 등 수많은 장소들을 역사쓰기 하듯 돌아다니며 작업을 하였다.

       이 가운데 조형적으로 매우 특징적인 작업은 을씨년스런 역사적 현장을 스케치하듯 표현한 나무들이다. 한국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를 주로 그린 그의 패널회화들은 일반적인 풍경 소재의 작업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나무라는 소재가 주는 극명한 현실감과 그것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중첩됨으로써 소재 이상의 준엄한 언어적 함의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나무들은 방금 그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들에게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그 소나무, 대나무 숲에서 간접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습한 언어들은 그 장소가 역사 속에서 아프고 쓰라렸던 추억을 휘감고 있다는 사실을 열거하듯이 묘사되었다.

       그가 그린 모든 풍경의 소재들은 실경이다. 따라서 작업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들은 어떤 것보다도 현실감이 강하다. 폴리 카버넷의 특성상 여러 장으로 중첩시켜 하나의 입체적 그림을 완성하기 때문에 패널에 등장하는 낱개 그림들은 하나의 단면도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업이 완성되면 패널 뒤편에 LED 판이나 기타 조명기구를 붙여놓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조명을 통하여 보는 작품과 조명 없이 보는 작업은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역사적 현실도 조명이나 기타 다른 소재에 의하여 연출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것이다.

       손봉채의 이러한 현실로서의 역사읽기는 때로는 도큐멘터리와 같은 느낌도 던져주지만 기법의 신선함이나 사실 외적 요소들, 이를테면 소리나 조명, 그림자 등의 부수적 효과들에 의하여 현실 이상의 무엇을 메시지로 던지게 된다. 나는 이러한 그의 섬세한 메타포들이 손봉채를 단순히 리얼리즘작가로 등식화 시키는 오류들을 불식시키는 풍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이용우(미술평론가,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더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