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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범, 금호미술관

출생

1972, 서울

장르

회화, 설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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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ble Painting 09-Gravity TF, 2009

벽화 설치전경, 370×1500×7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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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관념적 실체와 의식의 관성 혹은 흐름

권기범의 작업은 대략 유리꽃 시리즈(2004), 충돌 시리즈(2006), 중력 시리즈(2007)를 거쳐 근작의 모호한 형상 시리즈(2008 이후)에 연이어지고 있다. 영어로는 각각 Glass Flower, Crash, Jumble Painting, Ambiguity에 해당한다. 이 일련의 주제들은 그동안 작가의 작업이 변화해온 주기별 특정성에 대해 말해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류하는 생리적이고 개념적인 현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작가는 유리꽃 시리즈에서 유리와 꽃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대비는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 인공과 자연, 도시와 자연, 문명과 자연의 대비로 확대 재생산된다. 서로 대비되는 극성의 개념을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재현하고 표현하는 도구로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항 대립적 대비개념은 연이은 충돌 시리즈에서 서로 충돌하며, 그리고 Jumble Painting 시리즈에서 마침내 하나로 섞인다. Jumble은 화해와 혼돈의 양가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대비되는 개념들이 알고 보니 같은 뿌리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의 인식일 수도 있고, 작가 개인적으론 일말의 개념상의 혼돈에 직면한 시기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Jumble Painting 시리즈에서 촉발된 상호간 이질적인 계기들의 섞임과 혼돈에 대한 인식이 근작의 모호한 형상 시리즈를 위한 사실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말하자면 대비와 비교와 분열에의 인식이 작업의 전반부를 지배했다면, 혼돈과 섞임과 유기적 통섭에의 인식이 근작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이항 대립적 개념을 도구로 세계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는 쉽지만, 대개 그 이해나 설명은 단편적이고 일면적이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통섭의 개념을 도구로 세계에 접근할 때 주체는 자칫 혼란에 빠질 수 있는데, 모든 차이 나는 계기의 지점들을 아우르는 혼돈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작가는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의 단계를 거쳐(엄밀하게 말해 세계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데, 설혹 있다고 해도 그것은 대개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제 좀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혼란스런 설명방식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유리꽃 시리즈
유리꽃 시리즈에서 권기범은 깨어진 유리파편의 이미지와 꽃의 형상을 하나의 화면에 중첩시킨다. 여기서 유리파편의 이미지는 기하학적인 색면으로(자를 대고 그린), 그리고 꽃의 형상은 유기적인 선으로(엄밀하게는 전통적인 사군자에서의 난을 백묘법으로 그린 것으로서, 여러 겹으로 중첩시킨 한지에 충분히 스며들 정도로 먹을 올린 연후에 그 위에 낱장의 한지를 대고 손톱으로 그려 그 이면의 먹이 선으로 배어나오게 한) 각각 표현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어떤 꽃을 재현하는 대신 꽃으로 총칭되는 관념의 실체를 그리는데,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2004년 논문 <꽃의 형상을 통한 심상표현 연구>와도 상통한다. 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관념을 투사하고 표상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덧없는 삶에 대한 자의식으로 표출된다. 이를테면 유리꽃의 개념(혹은 유리와 꽃의 초현실적 결합)은 전통적인 바니타스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유리소재의 용기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만큼 깨어지기 쉬운 허영심을 경고한다. 아마도 작가는 꽃이 아름다운 만큼이나 감각적인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경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충돌 시리즈
2005년 국제교환 입주 프로그램에 선정돼 중국에서 작업한 것을 계기로 작가는 향후 자신의 작업을 평면에서 더 나아가 영상과 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킨다. 현지의 도심과 그 변두리의 정경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편집한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서로 비교되는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상호간 이질적인 문화주체들 간의 소통문제(혹은 문화적 충격현상)를 다루는 한편, 차이 나는 개념의 지점들 간의 접점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와 함께 기왕의 작업에서의 대비개념을 바탕으로 상호간 이질적인 두 항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표출한다. 이를테면 자연과 인공을, 자연과 도시 혹은 문명을, 유기적인 형상과 기하학적인 형상을, 연속성(그 자체 유기적인 흐름에 바탕을 둔 자연의 생리를 표상하는)과 불연속성(그 자체 고도로 문명화된 도시의 생리를 표상하는)을, 그리고 정적인 화면과 동적인 화면을 대비시킨다. 이처럼 대비되는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 속에 병치하거나 중첩시키는 방식은 사실상 작가의 작업 전체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코드로 보이며, 충돌 시리즈에서 그 경향을 극대화하고 전형화한 것이다. 이와 함께 특히 흥미로운 사실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영상작업에서 일종의 움직이는 사군자가 시도되고 있는 점이다. 수면에 이는 파문과 그 위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가 어우러진 화면에서 자연의 유기적인 흐름이 암시되고 정중동의 정서적 관념이 감지된다.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느껴지는 격조와 아취, 그리고 서정적인 분위기 그대로를 영상문법으로 옮겨놓았다고나 할까.

중력 시리즈
진작부터 작가는 자연에 대해 재현적인 대상으로서보다는 관념적인 대상으로 이해해온 만큼, 자연성 곧 자연의 본질로 부를 만한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현상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중력이다. 말하자면 작가에게서 중력은 자연에서 발견한 자연의 고유한 성질인 것이며, 이로써 가급적 자연의 원리와 법칙에 작업의 초점을 맞추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렇듯 중력이 자연의 원리며 법칙인 만큼 그 계기를 작업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효과와 같은 우연성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한편으로 우연성이라고는 했지만 그 자체 전적으로 무의지적 현상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의식적인 우연성, 계획적인 우연성에 가깝다. 이를테면 작가는 화면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굳어진 물감자국으로써 중력을 표현하는데, 물감이 반복적으로 흘러내리고 번지면서 만들어낸 우연한 흔적이 여러 겹의 레이어를 형성하고 있는 중층화된 구조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통적인 수묵화의 기본형을 선이라고 보고 그 선을 다변화하는데, 그 과정에 우연성의 계기와 함께 중력을 도입한다. 고무줄 다발(그 자체 중첩된 선들의 다발에 해당하는)이 자연스레 엉킨 형태 그대로 확대해 벽면에 드로잉하기도 하고, 고무줄 다발을 위에서 아래로 늘어트려 설치하기도 하고,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겨 고정시키거나 한다. 이렇게 공간에 세팅된 고무줄은 시간이 지나면서 탄성이 약해져 점차 아래로 쳐지게 되는데, 바로 중력의 작용현상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자연현상(중력)을 도입해 전통적인 먹그림에서의 준(모필)을 재해석하는 한편, 그 형식을 벽면 드로잉과 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호한 형상 시리즈
권기범은 모호한 형상으로 명명된 일련의 작업에서 단편적인 이미지의 편린들을 모아 하나의 전체 형상을 일궈낸다. 이를테면 인체와 같은 유기적 형상을, 권총이나 하이힐 그리고 별과 같은 사물 형상을 재구성하는데, 그 이면에는 의외의 만남 내지는 예기치 못한 결합에의 인식(그 자체 초현실적 비전에 그 맥이 닿아있는)이 자리하고 있다. 이로써 하나의 전체 형상이 단순한 부분들의 총합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런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부분 이미지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 형상으로 재구축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만 상호간 이질적인 이미지의 편린들을 무분별하게 배열하고 배치해놓은 경우도 있다. 작가는 이 이미지와 형상들 그대로 시트지를 오려 붙여 벽면에 재구성하기도 하고(설치), 벽면에 직접 그리거나 한다(드로잉). 실루엣으로 드러난 부분 이미지들을 보면 여자의 가슴이나 손처럼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인 형태가 대부분이다. 보기에 따라서 그 형상들은 선사시대의 암각화 같고 상형문자 같다. 사실은 장기와 파편화된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인데, 그것이 추상적인 기호처럼 보이는 이유는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이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자체만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보통 사물에 대한 인식능력은 부분과 전체, 혹은 타자와의 유기적인 관계정보에 의존하는데, 그 관성에서 벗어날 때 사물은 구체적 대상성을 잃고 추상적인 기호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벽면 드로잉으로, 그리고 타블로 작업으로 변주한다. 특히 타블로 작업에서 이미지의 편린들이 모여 중첩되면서 이미지들은 점차 최소한의 암시적인 형상만을 남긴 채 그 이면으로 잠수한다. 실루엣과 실루엣이, 형상과 형상이 중첩되면서 그 세부가 지워지는 것인데, 그 자체 형상이 평면 속에 해체되고 환원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평면성이 강조된 단색조의 화면이 미니멀리즘과 팝아트의 경향성이 하나로 융합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 이면에선 일종의 종합적 인식 내지는 방법론이 엿보인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일부 그림에 안료와 함께 실제의 신체 추출물을 섞어 그리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혈액과 할머니의 유품을 화장한 재를 소량 섞는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다만 상징적 제스처로 지나쳐 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이를 통해서 이 작업이 인체에 대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유발되고 촉발된 것임을 강조하는 자의식의 표출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작업들에 작가는 수집 혹은 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아마도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상상의 조각들을 채집해 재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때의 조각들은 규정되지 않은 가변적인 가치체계(혹은 인식론적 틀)에 연유한 이미지들로서 현상한다. 이 작업을 계기로 작가의 관심의 축이 자연성(혹은 자연의 본질)으로부터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그리고 재차 무의식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점차 모호한 형상에 대한 인식이 그 심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강도는 이 타블로 작업들에 연이어 등장하는 일련의 연필 드로잉에서 본격적으로 개화하지 않을까 싶다. 흡사 의식의 흐름기법이나 자유연상기법을 떠올리게 할 만큼 사유의 흐름과 표출에 막힘이 없고, 자유자재로 만나지고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결합하는 이 친근하면서도 생경한, 유기적이면서도 섬세한 이미지들이 작가의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사뭇 다른 생리의 지점을 예감케 한다.

고충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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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범의 작품 세계

권기범은 이 시대를 특징짓는 코드로 모호함을 지적한다. 최근에 그가 제작하고 발표한 많은 작품에는 ‘모호함(ambiguity)’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모호한 형상의 구축(Construction of the Ambiguous Form)’이라는 같은 부제로 세 번의 개인전을 선보인 바 있다. ‘모호한 형상의 구축’은 초기 작업에서는 화선지에 그린 꽃으로 상징되는 동양화에서의 자연의 본질 탐색, 그 후 영상 작업에서는 자연과 문명의 충돌에 이어, 경계가 와해됨으로써 야기되는 새로운 문화적 국면이 작가의 관심사로 자리 잡게 됨을 알려준다. ‘구축’이란 작가가 당면한 시대의 혼란을 작품이라는 장에 그러모으기 위한 방편이다. 권기범은 어릴 때부터 작품을 시작한 동양화과 출신의 작가답게 본질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러나 모든 가치들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본질을 표현할 것인가. 본질주의가 자명하게 가정하는 바와 달리, 본질은 매 순간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의식이 전통적인 미술과 현대미술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모든 가치 기준이 불분명하게 되었을 때, 자신으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것은 현대 미술가들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권기범의 경우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싶은 충동에서 자연 발생적인 드로잉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드로잉은 모호함 및 모호함에 직면한 자신을 표현하는 적합한 방식이다. 연필과 붓으로 이루어지는 드로잉은 지우기와 그리기를 반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최근 작품에서 혼성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도상은 독일계 일본인 모델에서 왔다. 잡지에서 발견한 사진을 소재로 하여, 머리 부분에 여러 형상들을 얽혀 놓았다. 마치 한 개인의 머릿속을 투시한 것 같은 (무)의식적 파편들의 조합에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형상들이 들끓고 있다. 조합의 과정은 작가가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의 해석에도 적용된다. 지각과 기억이 뒤얽히는 머릿속 풍경은 어떤 선조적 인과 관계도 해체되어 있다.
 
드로잉과 함께 주력하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벽화이다. <Jumble Painting>이라 이름 붙인 벽화 작업은 2007년 영은 미술관에서의 작업 이후, 매 전시마다 병행해왔다. 그것은 동양화의 형식이 아니라 동양화의 원리를,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표현한다. 그것은 이전의 영상작업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나 대나무 잎을 통해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종이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모필을 움직이는 동양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원리를 내포한다. 바닥에 고무줄을 풀고 촬영하고 붙이고 떼어내는 등의 보정을 거친 후 벽면에 옮겨짐으로써, 중력과 장력 같은 자연의 힘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넓은 벽면에 펼쳐진다. 선적 요소가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확대됨으로써 강력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이렇게 강렬한 표현 형식을 갖추게 된 모호함은 단지 원초적 혼돈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선영 (미술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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