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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홍, 사비나미술관

출생

1953, 밀양

장르

회화

홈페이지

www.ahnchangh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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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사랑, 2010

캔버스에 아크릴릭, 194 x 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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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深淵)을 들여다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테니까......

- 프리드리히 니체, 선과 악을 넘어서  中에서 -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이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세계적인 IT망의 위력을 자랑하듯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각종 정보들을 실시간, 빠른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그러나 안창홍의 <49인의 명상> 속의 사람들은 마치 시간을 정지시킨 것 같다. 그리고 명상하듯이 눈을 감았지만, 오히려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영혼은 그렇게 부릅 뜬 눈으로 현재를 맴돌기에, 안창홍은 증명사진 속의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눈을 아크릴 물감과 붓으로 조용히 감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철구조로 된 액자에 1cm이상의 에폭시를 부어 사진 속 인물들이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그렇게 심연(深淵)속에 가라앉은 이들의 얼굴은 처음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방문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원래 증명사진은 주민등록증, 여권이나 이력서 같은 제출 서류에 붙이는 것으로 그 쓰임새가 명확하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한 개인으로써 입사나 각종 시험 서류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함으로 최대한 사회 규범에 맞는 모습을 담아야 한다. 또한 사회 속에 열망하는 개인의 욕망이 규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하기에 비록 작지만 그 안에 사회와 개인의 접점이 미묘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안창홍은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함으로써 균열을 일으킨다. 그는 사진을 크게 확대하고 그 위에 회화적 상상력과 표현 기법으로 다양한 해석의 ‘틈’을 벌여놓아 마치 영정(影幀)을 보는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특히 화면의 나비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를 열어 놓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나비는 젖은 날개 때문에 날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어딘가를 맴돌 뿐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의 심연은 이름 없는 개인들을 깊숙이 침잠(沈潛)시키고 아무 없었던 것처럼 잔잔한 수면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창홍은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가라앉히고 싶은 것들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며 우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되묻고 있다.

이는 그가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198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끌고 온 것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 사회는 한국 전쟁이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많이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또 개발 독재의 권력은 경제력의 발전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커다란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 통제를 통해 자기 성찰과 다양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제가 막 도약을 시작하던 1970년대에 젊은 작가들의 실험 미술이 압력으로 중단된 후, 미술은 동양 철학의 표피를 두르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사회와 미술의 역할을 주제로 한 민중미술이 전면에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곧 1990년대부터 올림픽과 정치 민주화로 인해 역동적이고 다원화된 문화 현상이 펼쳐지기 시작하였고 미술도 이와 행보를 같이 하며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 안창홍은 민중미술의 대표 그룹인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곧 복잡하고 다층적인 층위 속에 발전되어 온 현대 미술사에서 강렬한 자기 발언을 지켜가며, 그 누구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로서 위치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집단 개성’이나 ‘그룹’, ‘운동’ 등 공동 활동을 중시하던 그 당시에 힘들고 외로운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는 한국 사회의 현대화와 발전의 기치 아래 사라져간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가해진 폭력과 그 권력의 속성에 대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화면에 담아내는 모습은 건조한 현실 고발이나 감정 과잉의 폭로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자행된 피해자들의 영혼의 기록이다. 그래서 사진, 신체는 영혼을 담은 그릇이나 기록으로써, 훼손의 정도와 의미를 표식하는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상흔(傷痕)은 시각적으로 재현되어, 우리 눈앞에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이미지로 현실화 된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악몽이나 환상을 마주 보고 서 있거나, 그 현장의 제 3자로써 희생물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 현장은 폭력과 소통 부재가 만들어낸 현대 사회의 정신 분열증적인 끔찍한 환상과도 닮아 있고, 또 억눌린 욕망과 불안을 동반한 반(反) 사회적 특성을 지닌 잔혹함이 흩고 지나간 흔적 같기도 하다. 이는 어린 시절, 불가항력적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예민한 아이 - 안창홍이 느꼈던 부재의 공포와 고립의 분노가 만들어낸 환상과 서로 뿌리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작품 <가족 사진>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흑백으로 행복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가족 사진 속 사람들의 눈을 후벼 파고, 마치 유령처럼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실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가족은 비단 한국에서만 중시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가부장적 가족 공동체를 중시했던 한국에서는 가족은 그 가치를 건드릴 수 없는 어떤 부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창홍은 1980년대 일찌감치 가족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체 훼손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사회 속 심연의 한 부분을 수면으로 끌어 올려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현대사회의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비롯된 사회의 근원적인 불안과 정신의 피폐함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작가가 예리한 직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론이나 상황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을 말로 주장하여 주변을 현혹시키는 관념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세계는 마치 정신 분열증적인 환각의 파편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현실(現實)과 실재(實在)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작품을 볼 때는 몽환적인 감상보다는 불편함과 거부감이 먼저 앞서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가 보여주는 현실은 한국 사회에서 모두들 깊은 곳에 묻어 두거나, 묻어 두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시각화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질 때, 더구나 ‘틈’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 심리 속에 변주되어 각자의 심연을 건드리며 나타난다면, 우리는 정말 이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마주 대할 때 충격과 거부감, 기묘함과 동시에 금기시 된 것을 훔쳐보는 호기심과 죄책감을 같이 느끼면서도, 우리는 더욱 더 이를 환상이나 환각으로 치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우리의 바램 일 뿐이다. 지금도 어느 공간에서는 그의 화면보다 더 끔찍한 현실들이 일상에 섞여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울뿐만 아니라 뉴욕, 도쿄, 스톡홀름 등 정치 권력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결국 공간과 시대를 넘어서는 공감대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기념사진_노랑 나비 팔랑 팔랑>에서도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작품은 역사책에 실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1919. 10. 11)’ 사진을 대형 화면으로 확대하여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한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모든 갈등을 넘어 독립운동을 펼쳤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선생의 대표적인 기념사진이지만, 이 역시 당시 한반도를 지배했던 거대한 제국주의의 침략과 권력 앞에 쓰러진 한 시대의 슬픈 초상들 중 하나일 뿐이다. 화면 가득히 흐르는 핏자국과 훼손된 신체 그리고 덧없이 날아오르는 나비들은 결국 이들도 권력자들에게 희생된 개인이며 봄날의 나비처럼 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진 안타까운 존재들임을 알려준다. 안창홍은 이러한 작업을 시작할 때는 사진 속의 인물과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마음을 열어본다고 한다. <기념사진_봄날은 간다>은 아내의 초등학교 봄 소풍 때 찍은 사진을 재촬영하여 확대하고 그 위에 그의 손길을 덧입힌 작업이다. 이 사진을 아내의 화장대에서 꺼내 본 순간 그는 ‘커다란 왕릉이 상징하는 죽음과 권력의 허망한 종말, 찬란한 봄의 기운을 다 흡수해 버린 듯 빛바랜 흑백의 우울함, 덧없는 세월의 풍랑을 이미 예감을 한’ 것 같은 아직 어린 여자아이들의 무표정한 침묵과 굵직한 상징들의 대비와 마찰에 깊이 빠져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약 8, 9년간 작업실에서 때때로 이들을 바라보며 이들이 살아갈 - 그러나 이미 살아낸 삶을 예견하기도 하였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한국의 현대사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는 이름 없는 민(民)으로 결코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도 우리는 균열, 피 그리고 수많은 나비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부서진 얼굴>에서 좀더 상징적인 방식을 통해 다양한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다. 그는 우선 여성의 얼굴 사진을 자르고 해체 한 후, 이를 다시 대형 캔버스에 재배열 한 후 아크릴 물감으로 흑백의 장엄한 이미지를 탄생시켰다. 부서진 얼굴, 즉 신체 훼손 같은 행위를 통한 존재의 해체와 재배치의 방식은 그의 전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이를 통해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형되어야 하는 어떤 존재들의 폭력적인 상황을 은유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은유의 방식은 다양한 해석의 틈을 열어 줌으로써 더 많은 메시지로 확장되고 있다.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권력은 정치 일 수도 있고, 자본이나 언론일 수도 있다. 심지어 크고 작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중한 흑백 화면을 통한 신체의 재배치는 <베드 카우치> 시리즈에서 이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초상으로 대치되고 있다. 이들 역시 이웃하고 살고 있는 농부이거나 알고 지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화면 중앙에서 베드 카우치에 누운 신체의 당당히 주역으로 등장하며 자신들의 몸을 내 보이고 있다.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써 몸은 이제 온전한 형태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정직한 시선과 포즈로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의 작품 속에서 익명의 개인들이 한번도 주인공이 아닌 적은 없었다. 비록 화면에서는 비참한 영혼의 상흔을 기록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배경에는 피 대신 그들에 대한 안창홍의 따스한 인간애와 연민이 베여 나온다. 그러므로 심연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안창홍은 길을 잃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심연의 파편들을 계속 길어 올려 수면으로 띄운다. 그래서 이 밤도 우리의 잠은 편안하지 않다.

 

강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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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의 성공 - 안창홍의 대형 흑백 누드

안창홍이 최근 두 차례 개인전을 부산과 서울에서 연달아 열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시대의 초상]전은 안창홍이 최근에 그린 미발표 신작인 흑백의 대형 누드화 <베드 카우치> 연작 6점과 2000년대 중반 이후 발표했던 <49인의 명상> <사이보그의 눈물> <사이보그> <자연사박물관> <헤어스타일 콜렉션>  <부서진 얼굴> <가족 사진> <얼굴> 등 여러 연작들, 그리고 사진 콜라주 작업, 인물, 자화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모두 합쳐 170여점이 되는 큰 규모의 전시였다. 이것은 부산이 봉생문화상(2000)과 부일문화대상(2001)에 이어 이 지역 출신의 작가에게 바치는 세 번째 오마주이자 부산시립미술관이 당대의 비아카데미즘적 중견작가를 끌어올린 본격적 기획전으로 매우 의미가 큰 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사비나미술관의 [흑백거울-마치, 유령이나 허깨비들처럼]전은 위 <베드 카우치> 중 4점에다가 금년에 추가로 그린 신작 2점까지 합쳐 총 6점의 <베드 카우치>연작에 흑백 인체 그림(대부분이 누드) 4점과 드로잉 4점을 추가하여 총 14점의 흑백그림만을 전시한 것이다. 그것들이 (큰 작품이 들어올 수 있도록 최근에 개보수 공사를 끝낸) 사비나미술관의 공간 속에서 (마치 그림을 주인공으로 한 무대디자인처럼) 디스플레이 되면서, 감상의 극적 효과와 명상적 분위기까지 만들어준 전시였다.

<베드 카우치> 연작은 작가가 작년과 금년에 주변 인물들을 누드 모델로 섭외해서 그린 것이라 한다. 이 대형 연작은 강력하고 매혹적이며 그리고 여기서 언급될 가치가 있는 어떤 기이함과 긴장이 있는, 일종의 파열과 불편함이 있는 작업이다. 나는 그 파열과 불편함이 혹은 긴장과 기이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안창홍은 ‘세상을 향해 내뱉는 화가의 당당한 힘’, ‘화가로서 겪어온 홀로 서는 과정’, ‘왕성한 작업량’으로 이미 이미 많은 주목을 받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에선 흐름과 순발력, 본능과 집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애와 미적 쾌락, 데카당스와 도발도 그의 중요한 표지이다. 그는 인간의 상처와 고독에 민감한 작가이다.

그의 작업에 주변부적 인간들(부랑아, 창녀, 호색남, 동성애자, 여장 남자, 유한마담, 권력자, 양아치, 어른을 닮은 어린이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선 또한 공공의 윤리와 허위의식에 대한 도발, 정치와 권력에 대한, 천민적 욕망에 대한 냉소를 자주 볼 수 있다. 그 도발은 매우 강력하고 은근짜적이면서 파괴적인 경우가 많다. 

대형의 흑백 누드 그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이 <베드 카우치> 연작을 처음 보았을 때 매혹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 불편함을 소화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이 불편함이 그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무방법의 방법과 그리고 그 속에 내장된(극도로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일종의 ‘시대정신’이 지극히 안창홍적이고 불안하며 날카롭고 진지한 것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다.

<베드 카우치> 연작은 소재와 형식은 분명 누드화라는 장르의 것인데 그 장르의 기본 코드(포즈, 인테리어와 소도구, 분위기 등)를 철저히 뒤 엎거나 위반하고 있다. 인테리어는 화가의 작업장 상황인데 거의 폐공장 수준이다. 더럽고 어지렵혀진 바닥 그 한가운데 베드 카우치가 놓여 있고 인체가 그 위에 얹혀 있다.

베드 카우치라는 이 소품과 인체의 관계는 그 자체가 포르노이리만큼 불편하고 ‘부적절’하고 생뚱맞다. 한마디로 불편하다. 게다가 전체적 미장센을 보면 극도로 장식이 배제된 대단히 즉물적 상황이다. 단지 화가의 작업장이라는 그 ‘여기, 지금’의 극도의 썰렁한 상황이 있을 뿐이다. 모델은 그가 교섭하고 설득하여 그 자리에 모시게 된 말하자면 그의 ‘꾐’에 빠진 지인 등 아는 사람들이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대부분은 벗은 몸이다. 그들의 몸은 물체처럼 (마네의 올랭피아의 노란 고무질 뱃가죽보다 더 뻔뻔스럽고 물질적인 느낌이 들만큼) 즉자적, 즉물적으로, 그리고 또한 건축물처럼 무겁고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과 정면 응시의 시선에서는 포르노적이라든가 관능적이라는 것을 뛰어넘는, 애초에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어떤 몰두와 집중, 자발적인 헌신과 노출의 당당함이 있다. 돌연한, 돌발상황적인, 거의 우스꽝스러운 그런 상황인데 평온함이 있고 장엄함이 있다. 기존의 누드화와 너무 이질적인 그 극도의 상황, 불편함과 이질성의 상황인데 그런데 숭엄함이 느껴진다.  

안창홍은 평소에 다소 꼬부라진, 삐딱하고 냉소적인 시선과 정치적 시선을 내장한 작가였다. 그런 시선으로 80년대, 혹은 90년대의 시대분위기를 우울하게 그리고 화려한 데카당스로 그려온 작가였다. 일탈적 화려함에 내재된 현실 비틀기, 꼬부라진 시비걸기의 눈이 있었다. 안창홍의 이 흑백 누드화는 누드화라는 장르적 속성, 그리고 스케일과 즉물적 사실주의 등으로 과거의 그의 이런 속성들과 매우 다른 성향의 작업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주목거리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같았던 자존과 냉소에 바탕한 그 비릿한 냄새의 센티멘탈리즘과 로망을 넘어선 것일까? 그런데 그의 많은 작품에서 18번인, 살짝 꼬리를 보여주는 에로티즘적, 데카당스적 정서는 아직 여전하기도 하다. 앞서 글머리에 나는 그의 이 전시가 불편한 전시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불편함이야말로 바로 이 흑백 누드화들의 최대의 성취이고 그의 작업의 진일경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질적, 정치의식적 연속성도 여전하다. 아니 더 심화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이 기이하고 생뚱하고 장대한 흑백누드들이 최근의 한국의 사회정치 상황의 그것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이해했다.

안창홍식 도발의 미학과 정치의식은 계속되고 있고 달라지고 있는 것은 그 차원과 스케일인 것 같다. 그의 이 새로운 작업들이 로칼 모더니즘 혹은 로칼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유형의 출현을 알리는 사건이 될지 계속 주시해볼 일이다.

성완경(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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