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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희, 사비나미술관 facebook

출생

1971, 서울

장르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홈페이지

www.soheech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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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기도 304_1, 2016

목공, 전기장치, 벽면 드로잉, 490 x 380 x 40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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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희의 <아홉 개의 사다리>

1. ‘오래된 집과의 화해

 

현대 미술가가 공간을 대할 때의 태도를 볼 때면,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멸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한 산티아고의 대사가 오버랩 되곤 한다.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의 몇몇 작품에서도 이러한 비장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만큼 작가들에게 있어 이 '장소(place)'가 중립적인 의미의 공간(space)’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소희 역시 이 곳이 탐이 났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결론을 얘기하자면 조소희는 결국 장소와의 싸움을 내려놓았다. ‘파멸패배를 애써 구분 지으려는 예술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오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곳을 장악하기보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작품화하는 것으로 화해를 시도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성북동 62-10, 11번지.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장소 특정성의 전형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스페이스 캔 역시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을 해석하고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과 흔적들을 작품으로 풀어냄으로써 또 다른 집을 생성해 가는 과정을 내보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김성희, 시간과 흔적의 축적에서 공간의 중첩으로 -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 2

정제된 화이트 큐브가 아닌, 80여 년의 성북동 역사와 주거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이 사연 많은 장소는 그 자체로 작품이다. 때문에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작가와 작품이 얼마나 이 장소에 녹아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것은 사실 오래된 집을 정복하는 것보다도 더 난해한 과제임에 틀림없었다. 거미줄, 곰팡이, 덜컹거리는 미닫이 문, 손바닥 만 한 마당과 그 한 켠에 서 있는 수돗가 등, 하나 하나 시간과 내러티브로 가득한 이 공간에 작품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녹아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 장소를 대하는 조소희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이 곳을 장악하려들거나, 애써 변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이 공간에 흡수되도록 작품을 최소화 했다. 왜냐하면 오래된 집이 가지고 있는 그 오래됨다시 말해 시간의 축적이나 그것에서 빚어진 기억들이 곧 조소희의 작품이었고, 또 실제로 그녀가 지금까지 지속해서 보여 준 주제였기 때문이다.

 

2. ‘된 것

 

나는 이 가벼움과 무게의 중간쯤에서 자유로이 부유하는 형태를 존재의 모습이라 여기고 있다. 이는 늘 의문형이며 완성되지 않은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쪽에도 저편에도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극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어쩌면 양편의 구분자체가 불가능한 포괄적인 중간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작가 노트 중에서)

 

2002년의 전시 지영의 장롱을 시작으로 연이은 전시들 두 개의 방, 여행voyage, 그리고 2012년의 ()적 인상2013년의 Salon de Hyaloplasm전에 이르기까지 조소희가 그동안 보여 준 작품들에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지속성과 동떨어진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매일 조금씩 실을 짜서 길이를 늘여가는 띠, 날마다 한 구절씩 타이핑하는 두루마리 휴지, 또는 한 장씩 한 장씩 겹쳐져 이제는 제법 두툼한 두께가 된 하얀 종이 십자가까지 이전부터 조소희 작품은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오래된 집을 살리는 이 재생 프로젝트에 조소희가 초대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작품 오브제로서 이 낡은 집을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지 모른다.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장소 특정성을 내세우면서도 결국 그렇게 선택한 장소를 배경화하는 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비교하여 조소희는 장소 자체를 또 하나의 오브제로 선택하였다는 시각에서부터 출발점을 달리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공간과 작품을 타자화하는 것이 아닌 작품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동일시 또는 자기화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했다. 오래된 집에 켜켜이 쌓인 시간처럼, 조소희가 선택한 장소와 그곳에 흡수된 작품은 작가의 삶, 곧 조소희의 나 된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도착하여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해야 하는 작업들, 심지어 전시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타이핑, 실 짜기 등의 일상을 지속적으로 작업해 왔으며, 오래된 집은 이러한 일상의 응축이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조소희의 작업은 특정 형태가 계획되어 있어서 완성의 단계로 종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반복 해왔던 일들을 축적한 나 된 것이 바로 작품이었다. 방식 뿐 아니라, 작품의 재료 또한 삶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루마리 휴지, 선물 포장용 습자지, , 초 등은 값 비싸거나 특별한 재료가 아닌, 연약하고 유한한 삶 자체를 보여준다.

 

3. 유한의 미학 그리고 자유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스펙터클하지도, 서사적이지도, 압도적이지도 않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illusion), 그것도 할 수만 있다면 근사해 보이는 환영을 추구하여 온 미술가들의 오랜 전통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실제적 삶앞에 부인할 수 없는 회의에 부딪히게 된다. 환영이 더 스펙터클하고, 웅장하면 할수록 유약한 실재 앞에 그 거대함은 더 초라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소희가 선택한 재료들, 예를 들어 천 조각, 종이, 실 등의 물질성은 대개 가늘고 약하고 부서지는 한계를 가진다. 또 아주 작은 자극에도 더럽혀지고 흩어지고 찢어진다. 연약하고 낡아지는 실제의 삶과 같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의 기저에 흐르는 감정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유한함이 가치를 더하여 준다.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

조소희의 작품이 비관론으로 치우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시적인 아름다움과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부피와 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어느 면에서 비물질적이다. 오를 수 없는 실 사다리, 신을 수 없는 거즈 신발과 드레스 또한 비물질적(dematerialization)이다. 하얗게 빛나는 사다리의 실들은 오래된 집 안까지 새어들어 온 가느다란 빛줄기처럼 보인다. 또한 조명에 의해 벽과 바닥에 생성된 실 그림자들은 우연적 드로잉이 된다. 견고하지 않으며 가변적이고 정형화되지 않은 조소희의 작품은 이처럼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자유롭게 유희하는 듯하다. 비물질적 요소가 보여주는 자유로움과 유희는 재료의 물질성이 나타내는 유한함과 약함을 신비와 시성(詩性)으로 바꾸어주었다. 작가는 이러한 즐거움을 본능적으로 체감하는 듯하다. 조소희가 특정한 형태와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 태도와 조급함이 없다는 것 또한 그가 재료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경계에서 이미 충분한 만족과 유희를 누리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무엇인가 규정하고 추구해야 하는 부담과 피로함에서 탈피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홉 개의 사다리

 

그런데 이번 전시 <아홉 개의 사다리>에서는 진행형의 삶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사다리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하늘이 보이는 한 뼘 크기의 마당 한쪽 구석에 새빨간 사다리가 6미터 높이로 솟아 있고, 여덟 개의 어두운 방마다 실 사다리가 늘어서 있다. 디딜 수 없는 이 사다리들은 낡은 집의 벽만큼이나 소박하게 세워져 있다. 사다리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고정된 해석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사다리의 원래의 기능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 특별히 수직 이동을 목적한다고 보았을 때, 욕망과 고양, 또는 높은 곳으로의 방향성이나 또는 어느 곳에도 속한다고 볼 수 없는 진행 과정, 혹은 차례로 겪게 되는 단계(step)에 대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의미들 중 어떠한 사다리인지 상관없이, 이것은 기능을 박탈당한 사다리이며, 목적이 좌절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이 사다리는 상승으로의 방향을 지시하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다. 이처럼 사다리 자체는 분명 목적과 이상이 될 수는 없지만, 아홉 개의 사다리들은 그러한 이상과 절대성이 존재함을 지시하고 있다. 때문에 거친 공간과 그 곳에 기대어진 사다리들은 단순히 고됨과 연약함이라는 이원적 대비가 아니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일상이자 동시에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이기도 하다. 좌절된 존재에도 불구하고 다다를 수 없는 방향으로나마 뻗어 가려는 이며, 이 필연적인 좌절은 또한 역설적으로 절대성을 가리키고 있는 를 마주하게 만든다. 오래된 집과 사다리, 그리고 는 이처럼 유한한 존재, 좌절된 존재로서의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진행 중에 있고 계속해서 갈망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규정하려 들지 않고, 목적과 결과를 고집스레 이루려 하지도 않는다. 스펙터클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으며, 서사적일 필요도 없다. 이렇게 존재의 유한함, 좌절, 연약함을 가장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면서, 과대 포장의 욕망도 스펙터클의 탐욕도 지성의 날카로움에서도 벗어나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고, 유희할 수 있게 한다.

내가 짜는 그물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멍들을 따라 그 들을 음미하는 것이 존재를 인식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마치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에서 발가락 사이를 스치고 흐르는 물의 시원함, 간지러움, 그 물의 결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이는 머리를 짓누르는 강에 대한 사유가 아니고 물과 그 흐름에 관한 촉각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작가 노트 중에서)

이상윤(미술사/미술이론, 서울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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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너머, 나무 한 그루_ 리스트비얀카(Листвянка), 외로운 나무 한 그루

여기 한 시인의 시가 있어요. 시인 채호기의 시집 『수련』에 실린 시편들이죠. 시집의 표제어이자 이 시집 전체에 깔려 있는 주제어로서 수련은 쌍떡잎식물 수련목 수련과 수련속 식물이겠으나, 채호기의 수련은 시인이 시의 언어로 밀고 가는 미적 대상일 따름입니다. 문학평론가 고종석은 채호기의 ‘수련’을 두고 관능의 물너울이 넘실거리는 여름의 열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자, 보세요!


그 여름날,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어야 했다, 너를 사랑하기 전에.
나는 흙을 딛고 서 있고
수련, 너는 물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을
- 채호기의 「수련」 중에서


너의 몸은 보이지 않아. 그러나 너의 몸의 미세한 부분을 확대하면 거기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 너울거리지
- 채호기의 「공기1」 중에서

 「수련」에서 ‘나’는 흙을 딛고 서 있고, ‘너’는 물을 딛고 서 있어서 둘은, 둘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흙을 딛고 선 ‘내’가 보는 ‘너’의 몸은 보이지 않고 그저 물 위에서 너울거릴 뿐이지 않습니까? 그 너울거림의 그리움을 표현한 시적 표현이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시의 상상력으로 밀고 들어가 그 둘의 사랑을 가능케 하는 세계를 열고 있어요. 시인이 “수련 꽃잎의 테두리가 너를 끌어당기고/ 수련을 둘러싸고 있는 네가 흰 꽃잎을 끌어당기고/ 아, 이 탱탱한 탄력!”이라 표현했을 때, ‘나’와 ‘너’는 이미 발가벗은 육체로 뛰어들어 꽃잎실로 짠 꽃천들과 너울거리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조소희의 작품 <리스트비얀카>를 봅니다. 그의 영상작품 <리스트비얀카>는 11분 16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영상이지만, 실제로는 그가 5시간 아니 6시간 가까이를 걸어가 작업했던 작품이지요. 그가 차창 밖으로 본 그 나무를 만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시간들과, 그 나무와 더불어 실뜨기 했던 순간들은 그저 한 나무와 작가의 이야기로 간단히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그 나무는 바이칼 호수의 초원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침엽수였으나 ‘위 하늘의 무당나무’였소. 조소희는 그 무당나무와 채호기식 “관능의 물너울이 넘실거리는 여름의 열기”를 나눴던 것이오. ‘나’는 초원에 발 딛고 섰으나 ‘너’는 대지에 뿌리박고 서서 ‘나’를 맞았던 것이외다. 조소희는 거기에 갔고 다시 돌아 왔으나 나무는 그저 바이칼 호숫가에 박혀서 너울거릴 뿐 아니겠소? 그 너울거림의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조소희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인양 붉은 실의 그물코를 짰던 것이오.

그러니 조소희의 세계는 나무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수련을 그리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군요. 그런데 그의 미술세계에 등장하는 실, 실타래, 종이, 종이타래, 촛불, 촛불 받이, 테이블, 의자, 실뜨기, 실그물을 비롯해 걷기와 걷기 수행, 실뜨기와 실뜨기 수행, 타자와 타자치기 수행 등의 일련의 수행성 행위조차도 그것들로부터 이어지는 다른 세계의 언어를 찾지 못하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 생각합니다. 조소희는 그의 미술세계를 오랫동안 엮어오면서 스스로 정의한 일종의 ‘조소희 미학사전’의 언어들을 구축한 것 같아요. 그것은 마치 시어와 시행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시편을 닮았다고 볼 수 있죠. 달리 말하면 그 시편은 읽기 쉬운 문자언어가 아니어서 종종 이미지 언어로 바뀌거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무언극의 형식을 띄는 듯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쩌면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사용해 온 문자언어의 체계를 가만히 내려놓아야만 할지 모르겠어요. 나무는 나무라고 부르는 어떤 나무이면서 동시에 나무의 한 상징이고, 그가 자주 보여주는 실뜨기의 그물 또한 그물이라 부르는 어떤 그물이면서 그물의 한 상징일 뿐이니까요. 우리가 조소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가 비추는 한 세계를 보아야만 할 터이고, 그물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그 그물이 투영하는 세계의 창(窓)을 보아야만 하겠지요.

그렇소. 그래서 이 글은 “너의 몸은 보이지 않아. 그러나 너의 몸의 미세한 부분을 확대하면 거기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 너울거리지”라고 황홀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조소희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소. 또한 이 글은 조소희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대화록’에 다름 아니오. 즉 이 대화록은 하나의 물음과 대답이면서 동시에 그 전체가 물음일수도 있고 대답이기도 한 수미쌍관(首尾雙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음을 지우는 대답은 있을 수 없고 대답으로 완성되는 물음도 존재하지 않을 터. 조소희의 사유가 파고드는 미학적 수행은 그 물음과 대답 사이일 것이오. 그는 마치 시계추처럼 있을 수 없는 대답과 완성될 수 없는 물음 사이를 오갔으니까. 수 만 번의 그물코를 통해 ‘그물-짓기’하는 그의 작품들은 그러므로 아직,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오.        

걷기의 사유

순전히, 한 사람이 걷기만을 위해 걸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걷기에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철학적 깊이가 있다고도 생각해 봅시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의 걷기와 걷기의 무게에 담긴 철학적 깊이는 무엇일까요? 걷기와 걸음의 무게와 철학적 깊이, 과연 그것들은 서로 의미구조를 나누면서 행복한 삼각형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래 걷는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 걷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의 부동(不動)이 아니라 평정심이지요. 걷는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거처를 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걷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의 의무를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걷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길은 구체적인 걷기의 체험을 통해서 아니 그 혹독한 고통을 통해서 근원적인 것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에서 비켜나 멀리 떨어진 내면의 길을 열도록 돕는 것이지요. 다만,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철학은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걷기는 집의 반대라고 하더군요.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라는 것이죠. 우연히 어딘가를 향해 내딛는 걸음걸음이 한 인간을 떠돌이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집도 절도 없는 인간으로, 구두 밑창이 닳도록 어느새 저만큼 떠나버린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구요. 이 세계는 어쩌면 바로 그가 저녁마다 잠자는 한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처럼 뻗어간 길, 오솔길처럼 꾸불거리는 선(線)의 한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르구요. 당신에게 걷기는 무엇입니까?
생각의 풍요는 걷기에서 출발하지요. 걷다보면,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답니다. 때때로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지 않아요.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차지하죠. 들판을 가로질러서 종이 위를 걸어서 말이에요. 언덕을 올라가 봐요. 길에도 근육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바쇼의 시를 보시오.

이내 한 해의 끝이 되었고 또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시라가와의 울타리 저 너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나는 찢어진 바지를 꿰매고 모자 끈을 손보는 즉시 쓰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 일본 하이쿠의 대가 바쇼의 시

그렇군요. 바쇼의 시에는 가벼움의 싱그러운 미학이 있군요. 조소희가 걸었던 바이칼 호수의 주변에는 여러 개 의 길이 있더군요. 처음엔 하나였다가 두 개 세 개가 되고 다시 하나가 되는 길들이 초원 저 너머로 이어졌고요. 그쪽 사람들은 그 길에 ‘상처받았다’는 뜻의 말을 붙여 사용합니다. 길의 이름이 ‘상처 받은 길’이라는 뜻이죠. 누군가 그 길 옆으로 새 길을 내기 시작하면 상처 받은 길은 곧장 ‘치유 되는 길’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걷기에는 상처와 치유의 의미가 동시에 있는 듯해요. 우리는 그가 걸었던 길에서 무엇을 사유할 수 있을까요?
발자크는 『걷기 이론』에서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인류가 첫발을 내디딘 이래 왜 걷는지, 어떻게 걷는지, 걸어본 적이 있는지, 더 잘 걸을 수 있는지, 걷기를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 자문해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정말 굉장하지 않느냐고 말예요. 그는 이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철학적, 심리적, 정치적 시스템과 걷기가 연결돼 있는 질문들이라고 본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한 작가의 걷기를 그런 질문들에 연결해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에요. 발자크의 말은 문학적이기 이전에 지나칠 정도로 열정에 가득 차 있어요. 오히려 나는 조소희 작가의 걷기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Walking’를 본답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하더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가장 어두운 숲, 가장 탁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도시인들이 가장 음산하게 느끼는 늪을 찾는다오. 나는 성스러운 장소, 지성소로서의 늪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힘이, 자연의 정수가 존재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소로의 말은 노자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가 쓴 도덕경에 이르기를 “온갖 것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거든.
그렇다면 조소희가 바이칼 호수의 한 나무를 향해 걸었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몽골 북부 원시림에 ‘무당나무’라고 불리는 나무가 있답니다.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뚜렷이 구별되지요. 하늘을 찌를 듯 곧고 높은 아름드리나무지만 가지가 많지 않아 키만 홀쭉해요. 그런데 그 중 유별나게 웃자란 어떤 가지 부위에 갑자기 무성히 자란 잎이 뭉쳐서 둥글게 얽혀 있는 게 있다오. 나무 꼭대기에 나타난 것도 있고, 중간에 있는 것도 있으며, 아래가 그리 된 것도 있지요. 위가 그런 것을 ‘위 하늘의 무당나무’라 하고, 중간이 그러면 ‘이승의 무당나무’, 아래는 ‘저승의 무당나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3세계(三世界)’라고도 하고요. 세상이 ‘상․중․하’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상계(上界)는 순수하고 순결하며 슬픔이 없는 세상으로 위대한 수호신과 같은 선신(善神)이 존재하는 천국[디와징 어롱]입니다. 상계는 중계에 살고 있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며 하계의 악신과 끊임없이 싸워요. 중계는 인간이 사는 곳이랍니다. 하계는 죽음과 암흑의 세계로, 전염병 같은 질병을 퍼뜨리는 역신(疫神)들이 온갖 음모를 꾸미는 곳이에요. 그런 하계를 일컬어 ‘지옥의 나라[타밍 어롱]’라고 합니다. 조소희의 나무는 위 하늘의 무당나무를 닮았어요. 그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
어떤 한 소년이 죽은 나무 한 그루를 그 호숫가에 심었다오. 소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 그 나무에 물을 주었지. 그렇게 3년이 지났을 거요. 어느 날 소년이 양동이 가득 물을 들고 낑낑 거리며 그 나무에게 가지 않았겠소?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아니 글쎄 그 죽은 나무가 꽃을 피운 것이오. 그 후로 나무는 그곳에 홀로 세월을 견디며 살아 온 것이오. 조소희는 새벽부터 그 나무을 향해 걸었다 하오. 5시간 아니 6시간이 다 되어 바이칼 호숫가의 나무에 도착했지요. 그리고 그 나무로부터 그는 중계, 하계로 이어지는 그물코를 짓기 시작했어요. 왜 그가 붉은 실로 그물코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다만 상계에서 중계로, 다시 하계로 나풀거리는 그물코의 세계를 통해 삼계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이어보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할 뿐이오. 그것은 마치 위 하늘의 무당나무가 두 번째로 꽃피운 것과 다르지 않아요.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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