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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금호미술관 facebook

출생

1956, 인천

장르

조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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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_1, 1988

석고, 콜타르, 95 x 30.5 x 2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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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과 일탈의 미학 -정현의 작품에 대하여-

정현은 파리에서 돌아오면서부터 왕성한 작업을 펼쳐보였다. 이토록 치열한 작업의 진행을 주도해가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는 일이다. 92년 원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97년 원화랑, 98년 프랑스 문화원의 개인전이 이어지다가 2001년 금호미술관, 2004년 김종영 미술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잇따른 미술관 개인전은 어떤 정점을 장식해주고 있는 인상이다. 최근 8년 사이 세 개의 주요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정현의 작업이 갖는 분출하는 에너지와 주도한 창작의 집념이 어떤 공감을 이루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본다. 이는 결코 우연한 행운은 아니다.

파리에서의 귀국 후의 그의 작업은 석고로부터 시작된다. 흙으로 만든 덩어리를 각목이나 삽과 같은 기구로 내려쳐 볼륨과 날카로운 단면을 만들어 이를 주물로 떠내었다. 이들 작품은 비교적 조각 본래의 양괴에 충실한 것일 뿐 아니라 소재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문맥에 밀착된 것이었다. 흙덩어리를 주물고 각목이나 삽으로 일정 부분 강한 물리적 반응을 가하여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을 묘출해준 것들은 때로는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때로는 묵상하는 인간상으로 나타났다. 설명적인 부위와 날카롭게 깎아 내린 단면을 대비시킨 이들 인간상은 기념비적인 내연을 지닌 것으로 로댕의 발자크상이나 부르델의 배토벤 상을 연상케 하였다.

그가 에콜 데 보자르 시절 추구해보였던 형해화 된 인간상에 비하면 풍부한 볼륨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미이라에 가까운 깡마른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난 보자르 시절의 작품이 갖는 선적인 것에 비하면 양괴적인 요소가 되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일정한 시기를 두고 환원과 일탈이 주기 화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적인 작업에 이어 양괴적인 작업이 나타나다가 다시 선적인 작업이 등장하고 이어 양괴로 다시 환원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때로는 이들 선적인 요소와 양괴적인 요소가 하나의 작품 속으로 융화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침목에 의한 군상 계열이 이에 속한다.

그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전에 집중적으로 선보인 침목에 의한 작품은 그의 조각하는 태도 또는 조각에 대한 독자한 인식을 가장 극명히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긴 공간에 진열된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마치 진시황의 토용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땅 속에 파묻혀 오랜 세월 지하에 있던 흙으로 만든 병사들이 밖으로 들어났을 때의 그 장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땅의 열기가 능히 몇 천 년을 견디어온 역사의 도저한 무게를 감당한 것이었는데 정현의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그러한 역사적 유물과 비교되면서 인간과 산업사회, 인간과 근대문명의 치열한 대결과 화해의 기념비적 형상으로 인상된 것이었다.

정현이 침목에 관심을 기우린 것은 꽤 오래 되었다. 그의 말처럼 침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것을 재료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방치된 상태로 놓아두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를 재료와의 만남이 단순한 사용자와 대상으로서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순치되는 일정한 시간을 경과한 후(그는 약 10년 간 놓고 보았다고 한다)에 작업에 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발견이 곧 창작이 될 수 있는 내역을 말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은 발견하는 것도 창작이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침목을 발견한 순간 이미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인가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란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그의 말은 침목을 단순한 재료, 물질로서 본 것이 아니라 인고의 세월을 한 몸에 지닌 인간의 역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침목의 군상이 그토록 강열하게 어필해오는 것은 침목이 버려진 재료의 사용이란 점에서도, 조각으로 다루기에는 적절한 재질이 아님에도 이를 극복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고의 역사로 다가왔기 때문에 감동을 준 것이었다.

 

정현이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대부분 버려진 , 용도가 폐기된 질료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버려진 질료란 상당 부분 산업 쓰레기일 것이 분명하다. 침목이 그렇고 아스콘이 그렇고 막돌이 그렇고 철근이 그렇다. 그것들은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다가 용도가 다한 것이다. 버려졌다는 것은 용도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질료들이 정현에 의해 발견되고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작업장에는 이렇게 버려진 산업 쓰레기들이 새로운 삶의 탄생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정현만큼 재료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조각가도 많지 않다는 것은 그의 전체적인 작업의 맥락을 통해 볼 때 새로운 재료의 만남과 대결 또는 순치의 과정으로 엮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과의 부딛침은 물질과의 만남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함인데 때로 격렬한 대응의 형식을 띠는 경우는 물질의 내면에 잠자는 본성을 일깨우기 위한 조치이다. “침목 작업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침목 그 자체의 엄청난 에너지에 주목해 왔었다는 말은 침목 속에 잠겨있는 에너지란 본성을 어떻게 끄집어 낼 까의 접근이기도 하다. 침목은 길게 이어지는 레일을 받쳐주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침목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감지했다는 것은 침목이 지닌 역사성에서다. 단순히 레일을 떠받치고 있는 물질이란 사실 외에 오랜 시간을 두고 지탱해왔다는 시간의 두께가 겹쳐진 것이기도 하다. 용도가 폐기된 침목은 레일을 받쳐주는 기능이 폐기되었을 뿐 그것이 지닌 인고의 시간의 두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무게에 다름 아니다. 다른 폐기물에서도 이 역사의 무게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재료가 지닌 이 특별한 내재율이야말로 다른 조각가들에서 엿볼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조각 일반의 재료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대부분이다. 청동에 의한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재료가 생경한 것들이다. 과연 이런 재료로 작품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때도 있다. 창작에 앞서 발견이 그에겐 더욱 의미 있는 과정이 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살아 있음 그 자체, 날 것,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가 그의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요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생한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나타내려는 의도나 다듬지 않고 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대담한 제시는 지금까지 조각이 시도해온 변형시키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체의 방법적 논리에 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일탈의 조각이 갖는 의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종영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주로 아스콘에 의한 작품이 중심을 이루었다. 침목이 철로 밑에 깔려있었던 질료라면 아스콘은 길바닥에 누어있었던 것이다. 침목에 못지않게 아스콘 역시 엄청난 시간의 무게, 역사의 겨를 지닌 물질이 분명하다. 침목이 조각의 재료로 발견되는 것보다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욱 예상되지 않는 일이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로 선택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그는 날것에서 오는 생명력, 거칠고 팽팽한 표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했음이 분명하다. 아스콘이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막돌이나 석탄 덩어리를 그대로 조각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대담한 선택의 문맥에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래 위에 설치된 아스콘 덩어리는 공중에서 내려다 본 산맥의 한 단면 같기도 하고 땅에 누인 인간의 모습으로도 유추되었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무덤 속의 미이라처럼 응고된 형상을 띤 것이었다. 다른 어떤 질료보다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까.

 

조각가로서 정현은 조각에 못지않게 많은 드로잉을 남기고 있다. 드로잉은 그에게 있어 조각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드로잉의 연장선상에서 조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종이에 연필로 하는 것도 있고 골타르와 같은 끈적끈적한 질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드로잉은 대체로 인간상 또는 인간의 신체 부위에 집중되었다. 일회적이기 때문에 드로잉은 다분히 직설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최근의 드로잉은 질료자체가 형태를 대변하듯 날카로운 필선 자체가 존재감으로 현전하는 것들이다. “가을을 지나 누렇게 누워있는 풀들을 철판에 드로잉했다. 착색된 철판을 철근, 톱으로 긁어내거나 자동차 뒤에다 철판을 메어서 자갈밭을 끌고 다니면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럽고 우연한 흠집들이 산화되어 녹으로 바뀐 이미지 작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드로잉은 날카로운 필의 획, 형태보다 달리는 필의 획이 먼저 나타난다. 그린다는 행위에 앞서 그려지고 그린다는 행위보다 먼저 마무리된다. 물질에 강하게 부딛침으로 들어나는 필의 획이 갖는 날카로움이 날카로움 그 자체로 현전한다. 어쩌면 이는 그의 조각에서 들어나는 형태를 앞 질어 질료 자체가 들어나는 경우와 일치한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양괴적인 것과 선적인 것의 부단한 반복 현상처럼 수평적인 것과 대비적으로 수직적인 것의 반복현상도 지적할 수 있다. 아스콘에 의한 수평적인 형상에 비해 그가 최근 시도하고 있는 버려진 철근에 의한 수직적인 형태는 전반적으로 수직적 의지의 상승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미 수직적 형상은 현대미술관의 개인전 때 분명히 들어났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기둥들은 그의 미래의 작품이 지닌 의도를 흥미롭게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작품은 폐기된 철근에 의한 수직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이 솟아오르는 형상은 최소한의 형태로서의 조각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가까스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조각이기도 하고 조각이 아니기도 한 경계 선상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형태이기도 하고 형태가 아니기도 한 간극 속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 그것이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온통 전 공간을 거대한 탄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오광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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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것과 폐기물에 담긴 인체 혹은 생명성-정현론

몇 가지의 풍경 혹은 버려진 것들과의 만남

 

200610,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장 홀, 오랜 세월동안 숱한 기차들을 온몸으로 떠받들었던 침목(枕木)들이 서있다. 그들은 허허벌판에서 누워있다가 뭔가의 계시를 받았는지 미술관 안방으로 달려와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들의 함성은 과천의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일생을 마감한 이들 침목에게 다시 생명성을 부여한 이는 정현,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침목을 높이 3미터 정도로 다듬어 도열시켜 놓았다. 이들 40개의 구조물은 드넓은 공간을 압도하면서 미술관의 상식을 깨트렸다. 조소작품하면 으레 청동이나 화강석 같은 고상한 재료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통용되는 미술판에서 하나의 파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침목은 한마디로 선로의 토대로 질주하는 기차를 위해 헌신했던 것, 남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죽이면서 희생이라는 미담을 자아냈던 것, 사용될 때나 폐기될 때나 인간사회로부터 무심한 대우를 받는 하나의 나무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침목은 폐기물처럼 버려지는 존재로 추락하고 있다. 이 폐기물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 이가 있으니 바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정현이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켜 준 자리가 바로 미술관 회고전이었다.

침목의 작품 제목은 <무제>, 하지만 그들 침목은 인간의 하체를 연상시킨다. 작은 삽입물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영락없는 인간의 하체이다. 이들 하체는 중요한 부분인 몸통을 생략했고 특히 머리부분을 방기했다. 재료가 안고 있는 인고(忍苦)의 세월과 숱한 상처는 우아함과 거리가 먼 버려진 나무에 불과했다. 거칠고 볼품없는 나무토막, 그것은 어두운 색깔과 함께 상처투성이로 고단했던 세월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침목이, 평생을 누워만 있던 나무들이, 이제 떼를 이루어 같은 방향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체를 잃은, 아니 상체를 버린 체 무엇인가 상징성을 자아낸다. 이들 구조물은 물질화되는, 날로 육신화되는 인간사회를 반영한다. 영적(靈的) 세계는 방출당하고 육적(肉的) 세계만이 득세를 하는 세태를 연상한다. 그것도 너무 육중하여 때로 위압감을 자아낼 정도이다. 상체가 없는 이들 우람한 하체의 도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46, 장소 김종영미술관, 포장도로를 덮고 있다 용도가 끝나 폐기된 아스팔트 콘크리트(아스콘)가 미술관의 전시장 바닥을 차지하고 있다. 도로포장의 폐기물을 미술관으로 끌고 온 사람은 바로 정현이다. 그는 김종영미술관이 선정한 오늘의 작가로 주목을 받아 기념 개인전을 개최한 것. 이 전시에서도 작가는 고상한 작품 재료들을 외면하고 폐기물을 이끌고 온 것이다. 아스콘은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검은 찌꺼기를 일컫는다. 이는 도로포장용으로 즐겨 사용되어 도시를 온통 검은 색의 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공사 등의 이유로 포장도로가 파헤쳐질 때, 아스콘은 폐기물이 되어 처치곤란의 푸대접을 받는다. 이들 버려지는 폐기물을 작가는 수습하여 다시 생명성을 부여했다. 검은 덩어리를 적당히 자르고 손질하여 바닥에 늘어트려 놓았다. 이는 다도해의 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물론 누워있는 인체의 모습이다. 모래 위에 자리 잡은 폐기물, 재탄생의 현장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강인한 생명력을 환기한다. 인공미(人工美)의 전형으로 자랑하는 교토(京都)의 용안사(龍安寺) 석정(石庭), 그것은 모래밭을 갈퀴질하여 남은 선 위에 크고 작은 열 다섯 개의 돌들을 적당히 배치한 인위적 정원이다. 일본미의 상징 혹은 선심(禪心)의 조형적 발현으로 상찬의 목소리가 크다. 돌의 배치가 마음 심()자와 같다더니 근래의 한 연구에 의하면 돌의 배치가 카시오피아 별자리와 같아 아예 우주의 정원이라고 격상시키려 한다. 모래와 돌의 배치,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의미부여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 일본미를 그런 식으로 집약 표현할 수 있다니! 그런 미를 좋다고 해야 할까, 싫다고 해야 할까,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모래 위에 놓여있는 돌덩어리들, 한쪽은 너무 고상한 척 폼을 잡아 자꾸만 현학적으로 접근하여 인간의 땀 냄새를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모래 위에 놓여 있는 폐기물 아스콘으로 이루어진 모습은 인간의 존재 혹은 물질의 본성을 반추하게 한다. 그 같은 본질에 내포된 덕목은 바로 인간의 내음이다. 그 중에서도 용도 폐기되어 버려진 것들, 모양도 볼품없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 이렇듯 추하고 쓸모없는 것들에게 다시 생명성을 부여하다니! 정현의 작품은 바로 인간 형상 즉 생명성의 회귀에 연결된다.

 

* 하찮게 보이는 것과 생명성 부여

 

대학시절 정현은 사회 현실과 무관한 모더니즘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학생시절의 회의감은 방황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는 학생운동의 현장을 지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급미술의 메카라는 프랑스 유학의 길을 선택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귀국전은 의외의 작품으로 채워 관심을 이끌었다. 인간을 주제로 설정했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인체의 아름다움이 무시되어 있었다. 팔등신의 미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수의 이탈리아 출신 작가들처럼 고급 석재를 이용한 우아한 인체도 아니었다. 형상을 무시한 것 이외 그가 택한 재료는 마닐라 삼과 석고를 이용한 이른바 상품 가치가 없는 초라한 인간들(?)이었다. 기왕의 프랑스 출신과 다른 이같은 출발은 정현의 작가활동에 무엇인가 파격을 기대하게 했다. 그의 주제는 인간, 이는 청년세대부터 장년세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탐구 사항이다. 더불어 선택되는 재료는 고급 재료가 아닌 한물간 싸구려 혹은 폐기물같은 볼품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이루는 재료는 침목, 아스콘, 석탄, 막돌 같이 하찮은 것들이다.

정현은 같은 돌이라 해도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은 고급석재보다 아무데서나 쉽게 주을 수 있는 막돌을 즐겨 선택한다.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는 이른바 쓸모없는 돌덩어리다. 이들 막돌은 모양도 없지만 결조차 일정하지 않아 다루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불규칙한 성질의 돌을 통하여 작가는 우연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 작업과정에서 조형성을 구축하게 된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지를 고집하기보다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상호 조화의 접점을 찾는다. 이는 탄광에서 직접 구입한 석탄덩어리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제멋대로 생긴 석탄덩어리와 시간을 지내다 보면 언제가 나름대로의 형상을 도출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들 볼품 없는, 다른 조소작가는 결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하찮은 재료와 교감하면서 새로운 생명 탄생의 길을 모색한다. 작가는 말한다.

 

청동이나 대리석만이 완성된 조각작품의 재료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조각가들이 석고를 쓰지만 이를 습작 재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석고가 주는 풋풋함도 좋았다. 돈이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침목, 아스콘, 막돌 모두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이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들 시련이 있는 것들이고, 폐기처분되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같은 생생한 속성이 마음에 들었다.”(국립현대미술관 발행의 도록에서)

 

정현은 별 볼일 없는 것들, 특히 시련이 있으면서도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속성에 애정의 눈길을 주었다. 시련과 날 것, 이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자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폐품이지만 거대한 에너지가 녹아있는 듯 보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폐기물이었던 침목이 이제 하나의 인간으로 승화되는가 하면, 하나의 역사로까지 부상되어 에너지의 원천처럼 부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침목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그는 다시 말한다. “98년부터 침목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작업을 해보니 침목의 속성은 안 보이고 나만 보였다. 이것은 내가 재료와 맞붙거나 재료를 이기려고 한 것이다.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내 의욕만 강했던 것이다. 침목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으려면 침목의 좋은 속성을 잘 이해하며 놀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상성과 물질성, 정신과 몸 그 어느 쪽으로의 극단적 환원이 아니라 조화로 보면 좋겠다.” 정현은 확실하게 자신의 진로를 깨닫고 있었다. 거기에는 재료와 더불어 놀며 친화하는 자세, 작위적 형상의 부여 즉 만들어지는 의미보다 자연스럽게 함유되는 상징의 세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상처받은 인체 혹은 인간 본성의 모습

 

별 볼일 없는 재료를 다루는 작가는 작업과정도 우아할 수 없다. 거친 재료는 과도한 노동력과 때로 과감한 접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체작업은 유미주의의 관점에서건 리얼리즘의 관점에서건 나름대로의 형상을 존중해왔다. 구태의연한 아카데미 분위기의 작업은 본질과 무관하게 나약함을 안기기도 한다.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속성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같은 번민은 무엇보다 형태를 부시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추상미술의 교지를 받드는 것도 아니면서 형태를 삭제하고 생략하는 작업은 무엇인가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점차 작가는 재료를 거칠게 다루면서 혹은 난폭하게 처리하면서 나름대로의 형상을 만들었다. 일견 그들 작품은 가공되지 않은 원광석처럼 보인다. 하나의 돌덩어리나 석탄덩어리처럼 특별한 가공의 흔적을 남발하지 않는다. 재료의 속성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가공만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육성처럼 날 것의 상태를 동경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날 것이 주는 신선함,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출발지점이다. 거기서 야성(野性)의 싱싱한 메시지를 습득한다. 이는 장식적으로 예쁘게만 꾸미려는 보통의 조소작품과 차별상을 갖는 하나의 변별점이기도 하다.

사실 미술판에서 인체는 한 물 간 구닥다리 취급을 당해왔다. 이는 표현방식의 문제와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에 기인한다. 인간이라는 주제는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소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있어 인간보다 더 소중한 예술적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해석의 방법과 예술적 반응이 문제일 것이다. 정현은 시종일관 인체를 작품세계의 원천으로 삼으며 인간의 본질문제에 천착하려 한다. 재현적 수준에서 인체를 바라보려는 고답적인 미술동네에서 벗어나 그는 인체를 통하여 정신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한 결과로 형상성이 약화되고 하나의 덩어리로서 본질의 실체만 남게된다. 그의 인체작품에서 언뜻 인체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의 결과이리라.

정현은 콜탈을 사용하여 상당수의 드로잉 작업을 해왔다. 신문지나 골판지 같은 폐지를 사용하여 인체를 형상화하기도 했다. 콜탈은 희석제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여 드로잉의 효과를 뒷받침해준다. 드로잉 속의 인체는 강인하고 생명으로 약동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표현하는 재료와 소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화면효과를 낸다. 두상을 그린 그의 드로잉, 머리위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일종의 기()이다. 어떤 것은 푸른 색의 풀이기도 하다. 생명성을 의미한다.

 

거친 작업 그러나 섬세한 성품

 

정현은 섬세함과 거칠음이라는 이중적 요소를 구비한 작가이다. 침목, 아스콘, 석탄, 막돌과 같은 거친 재료를 다룬다하여 거친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아니 그는 의아할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성품을 지닌 작가이다. 그의 특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생선요리의 전문가라는 점이다. 생선 요리의 섬세함은 마치 프랑스 와인의 맛처럼 미세한 미각의 발달을 요구한다. 생선요리의 달인인 정현은 그렇다고 고급생선만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잡어를 좋아한다. 새벽의 노량진 수산시장이 그의 주요 산책처로 부상되어 있는 것처럼 정현은 미감(美感)을 위해 미감(味感)을 훈련하고 실천한다. 그는 잡어회를 좋아하듯 생활 속의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하찮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식당에서 결코 메인 디쉬로 오를 수 없는 잡어 이른바 쯔기다시를 선호한다. 정현의 예술은 우아하고 화려한 고급요리접시가 아니라 허드레로 내놓는 쯔기다시 미학과 연결된다. 그래서 그는 폐기물인 침목이나 아스콘으로 인간을, 그렇다, 거대한 주제인 인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형상을 삭제하고 본질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생명성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 탄생에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리라.

 

200711, 장소 안산의 경기도미술관. 최근 신축건물을 마련하여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은 건물 입구에 거대한 작품 <목전주>를 구입했다. 17미터가 넘는 6개의 전봇대를 세운 경이적인 대작이다. 작가는 정현, 원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당시 미술관의 입구를 지킨 바 있다. 그후 경기도미술관의 한 기획전에 초대되었다가, 썰렁한 미술관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하여 장기 설치중이다가 근래 구입결정을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하여 쭉쭉 뻗은 이 전봇대는 사찰의 당간지주와 같고 아니면 예전의 성역을 지키던 솟대와도 같다. 분명한 것은 미술관의 랜드 마크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봇대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이제 용도가 폐기된 물건이다. 하지만 이렇듯 거대한 나무기둥도 함께 모여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니 하나의 상징성을 일구어 낸다. 이는 달라스의 현대미술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리차드 세라의 거대한 철판 설치작품과도 다른 분위기를 유도한다. 철판은 계획된 의도에 의한 산업사회의 찬가와 같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동안 굴하지 않고 버팅겨 온 이 땅의 민초들처럼 전신주는 옹골차다. 전봇대 역시 하늘을 향하여 굴하지 않고 계속 일어서는 민초들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서있을 때 아름답다. 누워있던 침목도 우뚝 설 때 아름다음을 선사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또 다른 면모를 환기시키며, 인간 본성의 탐구를 위한 척도노릇을 하기도 한다. 폐기물이나 하찮은 것들을 활용하여 새롭게 인체를 해석하고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정현의 작업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도 주목을 끈다.

윤범모(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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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에서 自刻으로 - 정현조각의 자연주의적 서사성(敍事性)을 위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조각가는 무엇을 만나고 싶을까?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조각가는 어떤 때 ‘나는 살고 있다’고 느낄까? 조각가‘로서’ 만나고자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은 있기나 한 것인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이 물음들에 접하여 조각가 정현이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은 두 가지 사항과 관련된다. 아무 것도 아닌 재료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자기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만난다. 작업의 도구는 이 무지랭이들의 회합에 매개자로 끼어든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서 시작하기’는 작업 이전에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작업의 방법적이고 인식적인 특성과 연관된다. 무전제(無前提)의 작업은 ‘어떻게’ ‘참된 것’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조각 행위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최근 몇 년간 주목하는 재료들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다. 용도를 다한 침목, 아스콘(아스팔트콘크리트), 철판 그리고 용도를 기다리는 석탄 등이다. 이들은 한결 같이 땅에 낮게 놓여 있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주목할까? 이들은 이미 쓰였거나 아직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련되지 않고 질박(質朴)하다. 무릇 참된 것은 질박하다. 조선조의 막사발처럼. 막 생겨 먹은 것은 중심에 들어 설 수 없다. 작가가 취하는 재료들은 그래서 중심에서 밀려난 것이거나 아직 중심에 들어가지 못한 것들이다. 주변적인 것이다.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경우 ‘중심’은 실용적 가치이다. 실용성이 거부된 상태의 재료들에게서 그는 미학적 가치를 창출하고자 한다. 실용적 가치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 그들은 존재로서 부여된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어떤 것’과 ‘아직 아닌 것’에게 자기 존재를 주장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실용성과 구별되는 미학적 생명력을 확보해 주고자 한다. 창작 행위의 본령이다. 특히 침목과 아스콘의 경우 인간의 생활세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그 자체가 이미 작품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작품의 작품성을 완결시키는 일만 떠맡는다. 작가의 손이 닿기 훨씬 전부터 세계는 이미 항상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고 그 제작과정에 작가는 지금 동승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가는 왜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지금 관건은 ‘참된 것’과 만나기이다. 그런데 무엇이 참된 것과 만나기를 방해하는가? 재료인가? 재료도 부분적으로는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재료는 말이 없으므로. 문제는 작가의 생각이다. 작가는 무슨 생각에 길들여져 있는가? 어떤 생각이 작가에게 자연스러운가?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생각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독인지 약인지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생각의 지속과 단절의 문제다. 참된 것, 살아 있는 것, 진짜, 알맹이를 만나기 위해 어떤 생각이 도움이 될까? 그런데 생각이란 기본적으로 형식이다. 생각에는 항상 형식이 전제되어 있으며, 따라서 ‘생각한다’는 ‘형식을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형식에 예속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을 괄호 치는 일이다. 이는 생각의 ‘방법적인’ 보류이다. 사태 자체로(zur Sache selbst) 향하기 위하여. 이 경우 작가의 로고스적인 판단은 잠시 숨을 죽인다. 감각적 직관만이 숨 쉬게 한다. 생각이 ‘자기’를 주장하면 사태 자체와 만나지 못한다. 작가는 이제 생각(cogito)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감성적 직관과 신체적 행위만이 재료와 만난다. 그리하여 사태 자체를 살려낸다. 살아 있는 작품과 만나는 길이다.


화해, 혹은 질료의 핵심적인 극복


어둠에 버려진 것들이 이제 빛을 받는다. 빛을 주는 자는 작가와 도구다. 침목과 아스콘과 석탄과 철판은 어떻게 빛을 볼 수 있을까? 작가는 이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어떻게 드러내 보이도록 할 것인가?

제작 또는 창작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를 하이데거는 ‘그 자리에 없던 상태에 있는 것(das Nicht-Anwesende)을 그 자리에 있는 상태(das Anwesende)로 이행시키는 모든 자극’으로서 ‘밖으로 끌어내 앞으로 내어 오는 행위(Her-vor-bringen)’로 풀이한다. 그러면서 포이에시스가 수공업적인 제작이나 예술적이고 시적인 표현과 묘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퓌지스(φύσις)’, 즉 ‘자기로부터 떠오름(das von-sich-her-Aufgehen)’에도 해당된다고 설명한다. 자기 스스로 피어나는 자연과 달리 예술 작품은 ‘밖으로 끌어내 앞에 놓는 것’이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즉 예술가와 도구이다. 예술가와 도구는 하지만 재료를 움직이는 기술자나 테크닉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테크네(τέχνη)가 기술만을 의미하지만 예전에는 ‘진리를 빛나는 광채 안으로 끌어내는 것’ 혹은 ‘참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녔다. 그래서 미술의 포이에시스도 테크네에 속한다. 여기서 테크네는 바로 예술 활동의 본령으로서 脫은폐(Unverborgenheit), 즉 감추진 것을 벗겨내는, 탈 벗기기의 행위와 만난다. 정현의 작업도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테크네’의 일종으로서의 조각행위에 대한 정현의 고민은 해법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비록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지만 그것(재료)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 이야기를 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재료의 속마음을 밖으로 끌어내어 빛나게 할 것인가? 조각 행위가 어떻게 ‘포이에시스’와 ‘퓌지스’를 넘어 ‘테크네’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조각행위가 참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끌어내는 활동일 수 있을까?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a-letheia’는 ‘망각한 것을 되살림’이라는 뜻이다. 脫은폐의 최고의 활동으로서 예술은 침목과 아스콘과 석탄과 철판이 자기 안에 감춘 속내(진리)를 밖으로 드러내도록 말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코드가 문제다. 대화의 코드 또는 궁합이 맞아야 한다. 작가와 도구와 재료가 소통할 수 있는 공동의 채널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료의 문을 두드리고 또 기다린다. 재료에게 대답을 재촉할 수는 없다. 닦달(Gestell)은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헤매고 뜸 들인다. 재료와 작가의 서로 다른 존재적 위상과 역사적 경험은 서로에게 낯설기에 충분하다. 이 서먹서먹함을 어떻게 극복하고 소통할 것인가?

어떻게 그리운 님을 만날 수 있을까? 결국 질료(hyle)로서의 재료를 얼마나 핵심적으로 극복하느냐가 작업의 관건이다. ‘극복’은 말이 그럴 뿐 실제에서 그것은 재료와의 화해 또는 타협이다. 화해는 재료와 도구와 직감과 행위 간의 상호 이해와 긍정에서 성립한다. 화해는 재료가 재료다워질 때, 도구가 도구로서 책임을 다 할 때 그리고 작가의 미적인 직관과 실천이 작품에 녹아들 때 성취된다. 그래서 정현은 말한다. “침목 자체의 에너지를 얼마나 살리느냐, 내 이야기를 거기에 얼마나 넣어서 할 수 있느냐의 문제 그리고 이것이 적절한 선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 “내가 슬그머니 빠지고 재료인 침목을 살려주었을 때 표현하고 싶은 것이 더 잘 나타난 것을 본다.” “재료와 함께 놀고 풀어나가는 것이지 대결의 원리에서 해결되는 것 아니다.” 작가는 재료와 대결하지 않는다. 찍고 자르고 뚫고 하는 격렬한 행위는 밖에서 보기에는 작가가 재료와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재료를 달래는 행위이다. 어린 아이처럼 달래지 않으면 재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엉뚱한 자기를 드러낼 소지가 있다. 작가의 격렬한 동작은 침목과 아스콘이 그간 견뎌 냈던 인고(忍苦)의 기억에 버금가야 한다. 침목과 아스콘은 관념이 아니다. 물질이다. 온갖 희로애락의 역사를 담은 물질이다. 이들의 기억은 구체적인 물질성을 띠고 있어서 이들의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들이 겪은 물리적인 시간과 무게에 상응하는 작가의 물리적인 노고가 이들에게 가해져야 한다. 작가의 관념이 이들을 자신들의 기억에서 해방시킬 수 없으며 가벼운 칼질과 톱질이 이들을 이들답게 만들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강간해선 안 된다. 강간은 사랑이 아니다. 거칠게 찍고 거세게 파내지만 그것은 그들을 가장 부드럽고 지혜롭게 다루는 방식이다. 가혹과 잔인은 침목에 대한 최대의 예우와 애정의 표현이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그들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다.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살아 있는 그들을 만나기 위하여.

재료를 향한 작가의 신체적 노동의 강도와 내용은 재료에 대한 작가의 애정에 비례한다. 대상을 사랑하는 자는 대상의 결을 따르는 법이다. 작가 정현은 생각의 청사진에 따라 재료를 재단하기보다는 재료의 감추어진 결에 따라 생각을 정돈한다. <장자>에 나오는 푸줏간의 칼재비처럼 대상의 결에 따라 도구를 움직인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자연스러움을 따른다. 사유의 인위적인 지향성을 접고 재료의 자연스런 지향성을 존중한다. 재료에 작가의 자기를 투사하지만 그 힘의 방향과 결과는 작가의 것이 아니다. 재료의 몫이다. 본디 재료란 ‘아직 아닌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카오스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재료는 작가에게 타자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카오스는 아니다. 카오스는 결을 무시한 칼질에서 생긴다. 영화 에서 가장 섬뜩한 대목은 손으로 눈알을 뽑아 발로 짓밟는 장면이 아니라 단칼에 머리 이마 부분이 두부 잘리듯 잘려나가는 장면이다. 결이 없는 곳에 선과 골을 내었기 때문이다. 재료나 대상은 인간의 주관에 대해서는 타자이지만 그 자체로 고유한 논리를 지니고 있다. 만일 내부의 논리를 무시하고 재료를 단지 카오스로만 여긴다면 작업은 한층 쉬울 수 있다. 생각대로 파고 자르면 그 뿐이기 때문이다. 재료에 대한 정현의 애정과 고민과 노동은 잠자고 있는 재료의 성질과 결을 어떻게 참되게 깨울 것인가와 관련된다. 여기서 재료가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재료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재료가 입을 열도록 작가가 묻지 않았거나 재료가 답을 해도 작가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재료가 대답할 수 있게 질문해야 한다. 정현의 지독한 머뭇거림과 헤맴은 재료가 응답할 수 있는 문항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아르 누보에서는 내부에 대한 별다른 감각 없이 양감을 표현하고 그 표면에 관심을 집중한다. 로댕(Auguste Rodin)이나 로소(Medardo Rosso)의 조각에서는 표면에 작업의 외적인 과정을 드러내는 다양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특히 로댕의 조각에는 주조과정에서 우연히 생긴 구멍들을 땜질하지 않고 내버려 두거나 주조단계에서 생긴 접합선이나 기포들을 줄로 다듬지 않고 내버려 둔다. 정현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작업자의 흔적보다는 가능한 한 재료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작가의 손길은 뒤로 감추고 재료 자체가 지닌 질료적 특성을 살리려 한다. 특히 침목과 아스콘 연작에서는 침목과 아스콘에 담긴 세월의 흔적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패이고 찌그러지고 흐트러진 상흔들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들기를 바란다. 흔적은 그 자체로 잠정적인 작품이다. 시간의 자연적인 무게뿐만 아니라 인간사의 무게를 감당해 온 그들에게 합당한 몫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현의 최근 작품에서는 ‘표면’이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표면은 내면의 움직임에서 생겨난 결과이지 표면 그 자체가 독자적인 의미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표면 없음’이다. 그에게 표면이란 질감을 뜻할 뿐 형태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질료가 우러나와 자기를 주장하는 현장만이 있을 뿐 촉각으로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그런 류의 평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질료의 지독한 독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질료의 현상학이야말로 작가가 기도(企圖)하는 살아 있는 재료와 자아의 교차점이고 재료의 질료적인 우연이 작가의 심미적 감성을 통해 핵심적으로 극복되는 대목이다. 파리의 에꼴 드 보자르 유학 시절 “네 표현에는 물질로서 보여주는 것이 없다”라는 주위의 비난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입지가 이제 구축되고 있다.


여백의 윤곽과 생명의 부활


아무 것도 아닌 ‘낮게 버려진 자들’의 숨결을 들을 차례다. 밖에서 던지는 올바른 물음에 응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침목 연작’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1) 썩은 침목을 안으로 파 헤집고 들어 간 11 점의 시리즈물(무제 각각 165×22×16cm) 2) 굳건한 다리의 전사들을 연상시키는 6 점의 입상 조형들(무제 40×25×227cm 2001) 3) 빗살 문양 등 다양한 방식으로 파들어 간 5 점의 입상물(얼굴 350×20×187cm 2000-2001) 4) 홀로 서 있는 사람 모양의 가느다란 작품(무제 40×25×227cm 2001) 5) 거대한 두상 하나만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한 작품(얼굴 92×110×160cm 2001) 6) 침목 작업의 찌꺼기들을 긁어모아 붙인 것 같은 날카로운 질감과 위태로운 형태의 작품들(무제 250×43×273cm 2000, 거꾸로 서 있는 사람 166×56×415cm 2000, 7) 팔을 벌린 듯이 서서 몸 전체를 다리 하나로 지탱하고 있는 작품(무제 154×33×213cm 2001). 이상의 작품 나열은 작품의 제작순서가 아니라 의미의 연대기에 따른 것이다. 이제 작품은 텍스트로서 해석을 요한다. 모든 텍스트에는 작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숨겨진 의미구조가 있다. 그 숨겨진 의미구조를 밝히는 일이 지금 관건이다. 여기서 특히 ‘침목 연작’에 주목하는 이유는 정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를테면 ‘아스콘 연작’과 비교해서도 작품 자체의 발생론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고 작가의 심미적인 호흡을 비교적 명료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순서에 따른 나열에는 침목의 ‘이야기’가 있다. 물론 침목과 작가와 도구의 대화와 타협의 결과이다. 1) 우선 상처받은 침목의 속살을 도려내고 남은 흔적들이다. 번데기의 거푸집이다. ‘보이는 것’은 험하게 깎이고 패인 부분들이다. 그 공간은 비어 있다. 작가가 파내어 비워버린 공간이다. 파내고 난 여백이 윤곽을 드러낸다. 여백이 공백의 형태를 규정한다. 그리하여 침목이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2) 침목 속의 빈 공간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번데기는 껍질을 남기고 당당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11 마리의 유충 가운데 6 마리만 살아남았다. 은유적으로 볼 때 이들은 1)번 침목의 음각에서 탄생한 개체들이다. 다리 모양새는 비슷하지만 삐죽한 얼굴 모습들은 서로 다르다. 3) 그 사이 개체 하나는 사라지고 개체 다섯 의 ‘얼굴’이 확대되어 나타난다. 앞에 것들은 작품 명칭을 얻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제목을 가진, 그것도 전혀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이란 작품이 나타난다. 2)번 개체들의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2)의 개체들에서는 하반부의 건장한 다리가 초점이었다면 여기서는 상반부의 얼굴이 초점이다. 빠져나간 ‘침목의 속살’의 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4) 똑바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서 있는 개체도 있다. 3)에서 사라진 그 친구다. 홀로 있지만 삶의 의지는 누구보다 강력하다. 5) 이 개체의 모습이 확실하고 거대하게 클로즈업된다. 대장의 모습이다. 일당백(一當百)의 위용을 자랑한다. 무릇 산자는 나를 따르라! 6) 대장은 이제 춤추기 시작한다. 위태롭게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별처럼 빛난다. 7) 별은 십자가에 못 박혀 깔끔하고 엄숙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승천한다. 그리고 부활이다.

침목 연작의 일련의 흐름은 침목이 어떻게 재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 무생명의 침목이 어떻게 생명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침목의 연대기는 침목의 고고학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침목 자체가 겪은 역사를 되짚는 작가의 고뇌 없이 침목이 되살아날 수는 없다. 이 과정은 재료인 침목의 입장에서는 깨어나 살게 되는 여정이지만 작가 정현의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것과 만나기’의 이상을 실현하는 험난한 노정이다. 연대기적인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을 취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골몰한다.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하는 조각 행위의 모순적인 양상에 직면한다. 하지만 무엇을 죽일 것인가? 어떻게 비울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작업의 ‘목적’은 빛을 바랜다. 작가의 의식과 목적은 재료에게 최종적인 승낙을 얻어야 한다. 남아서 형태와 질감을 유지하는 것은 ‘결과적인 것’이지 ‘목적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에 정현 조각의 핵심이 있다. 그의 침목 작품들을 보면서 감상자가 의아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재료로서의 침목에 그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 그래서 재료의 에너지가 그의 에너지를 능가하여 그가 재료에게 제압당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정당하나 또한 기우이다. 사태의 핵심으로 들어가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나보다 침목이 좋다”는 그가 침목을 얼마나 귀하고 조심스럽게 다룰지를 생각해 보라. 실제로 버릴 것이 별로 없는 것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버릴 것인가’ 또는 ‘어떻게 비울 것인가’가 관건이 될 것은 당연하다. 잘려나간 침목 찌꺼기들에게도 생명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태도에서 ‘긍정할 무엇’이라는 목적지향적인 제작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라는 ‘부정할 무엇’만이 여백의 윤곽을 통해 재료에게 부활의 생명을 부여할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自刻(스스로 파내기)


‘정현의 조각에서 결과는 목적에 선행한다’는 설명은 침목 연작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의 작품 전반에 적용된다고 본다. 그의 조각은 인물상이 대부분이다. 그는 얼굴과 인체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인물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특히 석탄 연작의 작품들이 그렇지만 그 이전의 점토나 드로잉의 인물상들에서도 이목구비를 발견하기 힘들다. 일직선의 날렵한 코를 가진 청동상을 빼고는 대부분의 얼굴 조각은 형태가 일그러져 있어 전후좌우를 분간하기 어렵다. 청동 얼굴상(42×42×60cm 1995)의 경우, 앞에서 보면 정면은 전체적으로 프랑스 영화배우 쟝가방을 연상시키지만 좌측면은 독일 철학자 니체를 생각나게 하며 우측면은 잠자는 애기 사자를 연상시키고 하단부에는 왕자가 될 두꺼비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인물 조각에서 부조의 경우 전면에서 동일 인물의 삼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데 반해 정현의 경우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조각에서 동시적으로 관찰된다. 입체파의 복수시선과 견줄 만하다. 이러한 복수적 관점은 작가가 질료의 호흡에 맞춰 자기의 손을 놀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 드로잉 인물상의 경우는 하나 같이 머리통에서 무언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가는 필치가 구사되고 있는데 콜타르의 시커먼 색채와 형태에서 얼굴은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묘사된 데 반해 거기에서 솟아나는 강력하고 신속한 힘의 기둥은 작품 전체를 압도한다. 드로잉 연작 가운데는 초록으로 물들인 펑크족의 머리털 같은 모양에는 싱싱한 파의 모습도 보이고 거기에서는 급기야 파란 싹이 돋기도 한다. ‘두뇌의 폭발’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들 드로잉 연작에서 프랑스 소설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일까? 주인공 로빈슨이 무인도의 동굴 속에 보관하던 화약이 원주민 방드르디의 부주의로 인해 일시에 폭발하여 로빈슨이 보존하려던 인공적인 문명이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새로운 인간 로빈슨이 탄생한다. 조작과 인위에 물든 인간 두뇌의 폭발을 통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정현도 무의식중에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나는 정현의 작업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보다는 ‘안에서 밖으로 나오게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정확히 말하면,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작가와 도구의 의미는 재료의 숨결이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일에 봉사하는 데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의 결과는 작가에게 작품의 ‘표면’이 아니라 재료가 뿜어내는 내부의 숨결이 중요하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작가의 인위적인 노력은 재료의 자연스러운 재료다움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재료가 살음으로써 작가도 살고 재료가 자유로워짐으로써 작가도 자유로워진다. 1995-6년의 청동과 석고 작품은 정현이 본격적으로 재료(진흙)의 에너지와 씨름하던 시기로 보인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작가의 외부적인 힘과 재료의 내부적인 힘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도기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반듯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조형도 있지만 형태를 분간할 수 없게 일그러진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재료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재료가 자신의 성질을 가능한 십분 발휘하도록 배려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눈 코 입은 작가가 만들지 않고 재료의 속성과 작가의 직감에 따라 우연적으로 재료 안에서 표출된다. 이런 경우 우연은 힘이다. 자의적인 필연성에 대비되는 위력이다. 신체 기관은 재료의 움직임이 고려된 가운데에서 자율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타의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정현에게 조각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이 아니라 발견이다. 재료와 작가의 호흡과 에너지의 해후다. 해후를 위해 그에게는 시간적인 경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숨 쉬고 있던 재료들의 내적인 호흡에 자신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품이,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포이에시스’로서, 참된 것을 아름답게 구현해 내는 ‘테크네’로서 자리 잡기를 원한다.

비교적 다루기 쉬운 진흙을 떠나 다루기 까다로운 침목, 아스콘, 석탄으로 재료를 옮긴 것은 정현의 작업에서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하게 한다. 이제는 인물이나 인체는 그 자체가 작업의 목적이 아니다. 재료는 그에게 더 이상 객체가 아니다. 재료에게 그는 주체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분명하게 형식적 사유에서 벗어나 질료적 사유로 이행한다. 또한 머리의 사유가 아니라 몸의 직관이 중시된다. 위의 재료들을 바탕으로 한 조형물에서 관람자는 습관적으로 인물상을 떠올리게 되고 작가 자신도 인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하지만, 그것들은 실은 인간의 몸과 얼굴이 아니라 침목과 아스콘과 석탄의 몸이고 얼굴이다. 그는 인간중심주의자가 아니다. 인간의 형상을 위해 재료가 강제로 동원되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료들은 이제야 비로소 자기들을 자기답게 실현시켜줄 적임자 정현을 만난 것이다. 그의 손을 거쳐 그들은 서서히 몸과 얼굴을 드러낸다. 팔 벌리고 서 있거나 물구나무 서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침목이고, 누워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아스팔트이며, 침묵에 휩싸여 있는 시커먼 물체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석탄의 얼굴이다.  자연예찬론자 소로우H.D.Thoreau는 소설 <월든>에서 이렇게 말한다. “철로 밑에 깔린 저 침목들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침목 하나하나가 사람인 것이다.” 침목은 영어로 ‘sleeper’라고 하는데 이는 ‘잠자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작업의 명목상의 주인은 작가 자신이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재료이다. 스스로(自) 파나갈(刻) 힘이 없는 재료에게 작가는 손과 힘을 빌려주어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재료 안에 없는 길은 밖에도 없다. 재료의 숨결이 스스로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작가의 이야기’만이 의미 있게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재료는 작가에게는 수단이지만 재료에게는 목적이다. 그 목적이 작가의 심미적 감수성을 빌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 조각가로서의 정체성: 자연주의적 서사성


조각가 정현은 한국인이다. 조각에는 국적이 없지만 조각가에게는 국적이 있다. 프랑스 유학의 경험은 그의 조소관(觀)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한국으로 돌아 온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하지만 고향의 흙은 그를 잊지 않고 다시 찾는다. 버려진것/주변적인것/논두렁의망부석/탈/춤/날것/홍어/삭임/썩힘/느림/잡초/바보/돌쇠/아줌마/노가다/노다지/솔직담백/투박함/거칠음/둔탁함/몽둥이 그리고 억압/자유/해방/여백/애매성/물질과감각의합일 등을 그는 기억에서 풀어낸다. 하지만 이들과 만나는 방식은 달라진다. 이들은 더 이상 정현에게 일상적인 생활세계의 편안한 풍경들이 아니다. 이들은 서서히 그의 조각 행위와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작가의 배경이 아니라 작업의 내용으로 진입하면서 그의 작업 방식과 내용이 바뀐다. ‘노가다 정(鄭)’이 아줌마의 섬세함으로 홍어를 삭히듯 작업한다. 작업 재료에 대해서도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어떻게 생겼냐?’고 묻기보다는, ‘너희는 무얼 말하고 싶은가?’에 귀를 기울인다. 시각에서 청각으로의 이동이다. 그들의 속 이야기를 듣는 일은 작가로서 작품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행위와 통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는 ‘무엇’, 즉 본질로서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 즉 서사로서 그에게 다가온다. 침목, 아스콘, 석탄, 철판 등의 ‘연작’에서 보이는 외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 제작 과정에서 각각의 재료에 농축된 이야기를 살린다는 내적인 측면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세계는 그에게 더 이상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 주어진다. 사태는 사태대로, 재료는 재료대로 그들의 ‘동사’로서의 삶을 살리는 이야기에 작가는 열중한다. 이러한 작업 태도를 앞의 ‘스스로 깎아나감(自-刻)’과 연계하여 나는 ‘자연주의적 서사성naturalistic narration’로 부르고 싶다.

한국적인 것이 ‘자연주의적 서사성’으로서 작업 과정에 침투한다는 사실은 조각에 대한 정현의 관념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한다. 그는 우선 서구의 합리주의나 구성주의의 사유는 물론 미니멀리즘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사유와 결별한다. 작품이 합리주의나 구성주의에서처럼 작가 자신(Ego)의 확대재생산의 도구일 수는 없으며, 또한 미니멀리즘에서처럼 사물과 사태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찾는다는 명목 하에 라이프니츠적인 ‘최소 입자’로 환원되어서도 안 된다. 정현 작품의 자연주의적 서사성은 조각 행위에서 주체의 의지를 최소화함으로써 모더니즘의 추상세계가 빠지기 쉬운 자의적인 각색의 위험에서 탈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료가 지닌 객체로서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사태를 미니멀리즘적인 최소 단위로 환원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든 살아 숨 쉬는 재료의 호흡과 상봉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가 자신도 아니지만 또한 타자도 아니다. 작품은 본질적으로 ‘낯선 자기’이다. ‘낯설지’ 않으면 예술 행위를 할 필요가 없으며, ‘자기’가 아니면 작품과 만날 수 없다. 이 사실이 거부될 때 예술은 창작 활동이기를 그친다. 자연주의적 서사성은 작가가 낯선 자기를 만나기 위한 최선의 길로 선택된 것이다. 정현은 지금 ‘조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일종의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을 연상시키는 정현의 자연주의적 서사성에는 ‘조각’ 개념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정리할 사항이 있다. 우선, ‘각(刻)’의 주체의 문제이다. ‘조각’의 영문 ‘sculpture’는 라틴어 동사 ‘sculpere’에서 왔는데 이는 ‘밖으로 파내다’라는 뜻이다. 이 용어에는 한자의 ‘彫刻’에서 좀 더 적극적인 주체의 의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자연주의적 서사성에서는 주체의 의지보다 ‘스스로(自) 그러함(然)’이라는 자연적인 의지가 더 강하다. 재료의 주어진 성향이 중시되어 그에 맞추어 주체의 행위와 도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동사로서의 조각(彫刻)보다는 자동사로서의 자각(自刻)이 의미상으로는 더 적합하게 보인다. 다음으로, 서사(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따른 노동의 문제이다. 자연주의적 서사성에서는 작가의 의도와 목적이 우선시되지 않기 때문에 재료에 담긴 성질과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기 위한 시간과 노동이 요구된다. 시간의 무게 속에 축적된 질료의 중층(重層)구조의 사연을 듣기 위해 불가피하게 견뎌야할 시간, 그리고 질료 속의 저항하는 에너지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신체적 노동이 필요하다. 자아와 대상간의 관념적이고 낭만적인 통일은 거부된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공(公)적인 공간의 확보 문제이다. 자연주의적 서사성에서 중시되는 재료의 ‘물질성’은 정직하다. 객관적이다. 그래서 공유가 가능하다. 미니멀리즘이나 뒤샹 식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은 조각의 공간을 사(私)적인 자아의 정당화에서 탈피시키고자 했지만 조각의 공간을 은유적인 공간으로 간주하여 재료의 물질적 특성을 실질적으로 살리지 않는다. 이와 달리 자연주의적 서사성에서는 조각 공간의 객관성을 이미 오브제의 은유가 아니라 재료 자체가 지닌 실질적인 성질을 드러냄으로써 확보하고자 한다.

모든 작품은 작업의 무덤이다. 작업은 작품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작품은 작가의 최종적인 한계다. ‘한국인으로서 조각한다’는 것은 정현에게 자연주의적 서사성을 견지하는 태도지만 이 자체가 한계일 수 있다. 물론 정현의 최근 작품세계를 ‘자연주의적인 서사성’으로 특징짓는 데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명칭의 부여는 또한 나의 한계이다. 이 명칭이 비록 잠정적이긴 하지만 세계인이 그의 정신과 작품에 녹아 있는 한국의 자연주의적 서사성에 보편적인 공감을 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명칭의 적합성 못지않게 자연주의적 서사성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정현이 ‘한국의 조각가’로서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 내용에 ‘한국적인 명랑성’이 가미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풀어내는 작품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침울하고 어둡다. 한국은 슬프고 진지하기만 한 나라가 아니다. 민담과 설화에 담긴 해학과 풍자에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밝고 명랑한 생활세계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재료가 무겁다고 해서 반드시 내용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희망의 메시지가 작품의 한 구석에서 새어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유헌식(문명비평가,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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