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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진, 대산미술관 facebook

출생

1960, 광주

장르

조각,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sookjinj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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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11

나무, 오브제, 유화, 헝겊, 200 x 110 x 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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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진: 예술의 영역, 삶의 영역

 
한국의 가장 흥미로운 작가 중 한 명인 조숙진은 조각, 드로잉,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 등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며 그녀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왔다. 조각과 설치작품, 또는 드로잉, 퍼포먼스 등이 절묘하게 혼합된 카테고리의 사이를 작업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동시에 느낄수 있는 창의적인 틈새를 발견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조숙진의 가장 대표적인 매체인 조각은 주은 재료로 이루어진다. 보통 이른 아침 쓰레기가 수거되기 전, 길에서 주운 나무나 가구 등으로.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적절한 재료구성은 그녀의 작품에 마법 같은 분위기를 준다; 마치 그 나무와 같이 살았던 누군가의 삶이, 발견된 오브제안에 공명하며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와 부재가 함께 보여지는 작업을 하는 조숙진이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재료의 상처난 표면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지기전의 그들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너머의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존재와 부재를 결합시키면서 조숙진은 어떤 종교적 교리 보다, 그 세계를 이루는 영적 자각의 표현을 분명 추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숙진이 말하는 정신적 삶은 1999년 퀸즈의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서 가진 퍼포먼스 작품 <삶의 색채, Color of Life> 에서 참여자들이 층층이 쌓인 빈 드럼통속에 들어가 그들 자신의 죽음을 명상했던 것처럼, 죽음이라고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연구와 밀접하게 연계돼있다. 자신과 타인의 삶의 한계성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진 그녀는, 자신이 인식한 것들을 가장 신성하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표현해내고 있다. 죽음과의 결연한 만남이라고 부를만한 그녀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심각한 주제를 어둡지 않게 드러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라는 다루기 어려운 심오한 주제를 포용적이고 보편적으로 다룬, 달리 말해 엄격한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 그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큰 행복이다.
 
조숙진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 중 몇몇은 관람자를 자연의 품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숲 속의 명상공간에 관련된 것이다. 한 예로, 2000년에 뉴욕 주 북부에 설치된 명상공간에서, 나뭇가지를 배열해 만든 네 개의 뚫린 벽은 날씨의 변화로부터 관람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오히려 자연은 우리 스스로에게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하게 한다. 삶의 유한성을 바꿀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조숙진이 창조한 무대에서 그 같은 질문에 관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존재에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비영구성이란 복잡한 정신적 문제에 직면한 조숙진의 감성적 깊이는,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진지하게 나타난다. 그녀가 절망적으로 어둡고 유머없는 사람이란 것이 아니다. 그녀를 알게 되면서 느끼는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진지한 성격을 밝게 만들어 주는 유머러스한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조숙진은 무엇보다 조각가이다. 우리는 조각가의 본래의 기능은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 제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분야의 모든 주목할 만한 발전들은 그 조각의 본질적 목적, ‘모멘토 모리 (죽음을 연상시키는 상징물)’ 로부터 배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조숙진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특정 기억들을, 상실감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여기면서 심오하고 범세계적으로 그 공간을 해석하려고 추구한다. 삶의 경험에 있어 상실은 누구에게나 큰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삶에 있어 상실은 누구에게나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역으로 예술을 통해 긍정적인, 거의 신성한 경지의 마음의 변화들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전체를 바라보는 대국적 관점이 그녀의 역동적이고 잘 다듬어진 섬세한 상상력을 억압하게 놔두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숙진의 진정성의 한 부분은 재료를 탁월하게 사용하는 것과 함께, 이같은 재료들에 영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정신이 현존한다는 점이다.
 
조숙진의 작품에서는 정신성이 어떻게 또 다르게 표출되는가? 그녀는 작업을 위해, 브라질의 바히아 레지던시 작가로 가있던 스튜디오 근처에서 가난한 어린 학생들과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예술작업이기도 하고, 퍼포먼스 작품이기도 한 작업의 일환으로,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학교 외벽을 장식하였다. 이 작은 프로젝트는 자부심의 표상이 되었으며 아이들에게는 미술에 흥미를 유발하였다. 이러한 공동작업은, 때론 너무 협소하고 또 가식과 허영에 싸여 좋은 작품 나오기 힘든 예술계 현상 밖의 세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를 보여준다. 진정으로, 깊은 차원에서 이 프로젝트는 공동작업으로 실현화된 작품 밑바탕에 깔린 에너지와 노력의 미학이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작가의 초점은 작품 제작뿐 아니라 젊은 세대가 지닌 잠재적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이 갖는 공허감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데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해서 아직 어디로 흘러갈지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우리의 한정된 삶이 고귀해질 수 있는 방법을 세운 것이다. 예술은 아무리 궁핍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존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공예술작품에 대한 조숙진의 확고한 생각은 LA 시 야외 공간, 새로 지어진 LA 경찰청 산하 구치소 옆에 2009년 완성된 <기원의 종: 보호와 봉사, Wishing Bells: To Protect and To Serve> 에서 나타난다. 조숙진은 한국인이라는 배경을 너머, 비동양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을 대하여 왔는데 여기서는 불교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야외 설치작품에는 108개의 구리종이 걸린 철조물의 지지대로 삼나무 기둥을 사용했고, 종의 개수는 불교에서 말하는 108 번뇌를 의미한다. 각각의 종에 매달린 추에는 '친절' 과 같은 긍정적 의미의 단어들을 새겨넣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하였다. 조숙진에게 있어서 이 프로젝트의 초점은, 지금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작가의 타고난 품격 있는 감수성은 그녀가 가진 창의성의 한 부분으로, 신념이 독창적인 의도로 드러난다. 사실 조숙진은 작가의 의도가 표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작가이다. 이 역시도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향한 단정함과 명쾌함에서 비롯된다.
 
조숙진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라 생각되는 <알 수 없는 신에게, To The Unknown God> (2007) 는 기둥, 나뭇가지, 통나무 등을 재료로, 넓은 공간을 무대 삼아 무작위 하듯 구성한 작품이다. 관객이 지나가기에는 매우 빽빽히 설치되었고, 마치 저 위의 미지의 신이 존재하는 듯 빼곡한 덤불에서 나무조각들이 솟아올라 있다. 이 뛰어난 작품은 희망과 절망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절묘한 균형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적 방식으로 그 정신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 설치작품의 적막함은 그 자체로 돌아가, 우리를 좌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경탄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생각이 깊은 관객에게는 미지에 대한 경외심마저 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숙진은 미술계의 과다한 상업성에 대한 반응에서 오는 이론, 정치, 기술의 부재를 주장하는?현대미술의 범위 바깥에 서있다. 오히려 작가는 정신적인 예술가들이 언제나 해왔던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의 시야 밖에 있는 무언가의 잔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지적이고, 감성적이며, 촛점이 분명하며, 그녀 자신의 가능성은 물론 우리의 가능성을 알려준다.
 
 

조나단 굿맨,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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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커스핏이 본 조숙진의 작품 세계

 
조숙진은 나무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낡고, 오래되고, 버려진 나무조각들, 때론 부서진 건물 등에서 나온 낡은 문짝, 창틀 그리고 합판 조각 등을 사용해서 고독한 평온함이 가득한 감명적인 구조물을 능숙하게 조립해낸다. 이러한 나무조각은 불가사의한 느낌을 주는데, 조숙진은 이 나무조각들을 가지고 커다란 감정적 효과를 이끌어낸다. 그녀는 나뭇결 또는 나무조각들의 별난 모양에서 보여지는 불규칙성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그녀의 손에 의해, 나무조각들은 기대치 않았던 우아함과 격렬함으로 가득 찬, 즉 적절히 발견된 오토마티즘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몸짓하는 듯한 의미가 된다. 동시에 그녀의 작품의 구성은 매우 자기포괄적이고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으로 명백하다. 즉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균형 잡힌 조화로움, 그 자체이다. 내적으로는 비대칭적이며, 외적으로는 대칭적인 그녀의 구조물은 생동하는 신비로움을 보여준다. 그녀는 불완전과 폐허의 상징인 재료들로부터, 완전하고 전체적이고 그리고 절대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이러한 원시적인 재료들을 대단한 세련됨을 가지고 이용한다.
 
조숙진에게 있어 예술이란 재생과 갱신의 길이며, 심지어는 구속적인 변환(redemptive transformation)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죽어있는 사물에도 아직 미적 생명력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해체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해체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통합으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숙진의 작업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결코 ‘정크 조각’은 아니다. 모순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파편더미를 모으고, 쓰레기를 가지고 그것을 배출해낸 사회를 풍자하려는 시도들은 결코 그녀의 작업과는 무관하다. 사실상 그녀는 폐품을 이용하는 형식주의자로 하는 편이 옳다. 그녀의 작품들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차원과 삼차원 구조의 역동감은 여러 종류의 재료들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성, 그 이상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선과 회화적 표면 사이의 긴장감, 다시 말해 자명한 기하학적 양식과 즉흥적인 표현간의 긴장감은 그녀가 사용한 재료들을 길거리에서 주운 것이라는 사실 그 이상을 중요시하게 한다.
그녀는 일반적인 미적 차별성을 뛰어 넘어선 모더니스트이다. 요컨대, 그녀는 자신의 예술의 매체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에 아랑곳없이, 그 매체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모더니티이다. 그녀에게는 길거리에서 버려진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지혜(street smart)가 있다. 1993년도 작품들인 <거리의 콘체르토(Street Concerto)>는 거리보다는 친근한 실내악과 같은 음악과 더욱 관계가 깊은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커다란 모더니스트 전통에 속한다. 칸딘스키로부터 시작된 이 모더니스트 전통은 시각예술이 음악의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곧 시각예술이 논리적인 동시에 표현적이며, 추상적인 동시에 감성적이고, 무엇보다도 흉내내려는 의도의 흔적 따위는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전통은 존재 안에 내재하는 불가사의함을 예술이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예술을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견해는 나뭇결을 자연의 불가사의한 힘의 기호로, 또 나무조각들은 불가사의한 형식의 기호로 이해한다. 조숙진은 자연으로부터 온 재료들, 더 이상 이 사회에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 그래서 사실상 다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간 재료들인 결을 지닌 나무조각들을 가지고 신비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조숙진에게 있어서 거리란 합리적인 도시계획에 의해서 잘 정리된 곳이 아니라,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낸 삭막한 숲의 모습과 같이 불합리한 흔적이 곳곳에 산재한, 불가사의하게 버려진 자연의 한 공간을 의미한다.
조숙진의 추상작업에는 거리에서 주운 조잡한 재료들에서 흔히 보여질 수 있는 독단이나 천박함의 기미는 전혀 없다. 앙드레 브르통은 “거리와 미술관의 변증법이 모더니스트 예술을 사로잡고 있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것은 거리를 미술관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 즉 시한부적인 것들을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 같이, 그 안에 있는 잠재적인 영원성을 보는 것이다. 맨하탄의 현란한 환락가인 42가를 그 어떤 미술관보다도 생동감 있게 여겼던 알렌 카프로와 같은 작가들이 거리를 미술관의 가치만큼이나 강조한 것과는 달리, 조숙진은 미술관이 카프로가 생각하는 것같이 신원불명의 시신을 수습해놓은 음산한 방이 아니라 하나의 초월의 상징임을 인식함으로써, 거리와 미술관 사이에서 현명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초월성을 성취한다는 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녀는 부상당해 날지 못하는 새들과 같은, 거리에서 발견한 낡은 나무조각들에게,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의 날개를 달아준다. 조숙진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그저 사라져가는 삶의 반복이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다양한 울림이 재료들의 울림 그 자체인 것 같이, 예술은 그 안에 잠재되어 있으면서 그 너머의 의미를 가르치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모습보다도 그것을 더욱 의미있게 만드는, 삶의 미적 변이(esthetic transformation)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숙진의 작품은 거리의 메멘토 모리(죽음을 연상시키는 상징물) 인 동시에, 이것을 초월한 보다 높은 의식의 상징들이다.
 
테어도 아도르노는 현대의 예술이 구성주의와 표현주의의 두 극점 사이를 진동하고 있으며, 이 둘 사이가 되도록 멀리 떨어져서 어떠한 연관 관계가 없을 때가 이 두 전통 모두에게 최선임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은 이러한 순수성이 의미없는 것임을 간파한다. 오직 전통적 모더니티가 갈라놓았던 이 양극의 융합, 즉 섬세한 상승적 혼합만이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말한 것과 같은 풍부한 감정과 상징의 잉태를 보여주는 미적 공명의 감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주의적 구성작품(expressionistic constructions), 이것이 조숙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선택한 나무 조각들을 표현주의적인 정물을 구성하는데 사용한다. 그녀의 종이작업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이 종이 작품의 각 부분은 자율적이다. 조각조각의 종이는 그 자체 안에 예리한 직감과 격렬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승작용은 진실로 표현주의적이다. 그것들은 그들의 경계선 너머로, 심지어는 전체적으로 안정된 작품 그 너머로 막 폭발해 버릴 것같이 보인다. <저 너머로(Over there)> 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작업들과 그 종이 작업들은 표면적으로는 정적이지만, 내적으로는 맹렬하게 붕괴되고 있다고 보여질 정도로 극도로 유동적이다. 그것은 마치도 조숙진이 그녀 작업 형식 안에 있는 나무조각들의 역동적인 잠재성을 그 안에 묶어 놓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녀의 작업들은 내재적으로 그 안에 품고 있는 웅장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질은 분명히 타블로 포맷으로 말미암아 강화된 것인데, 우리를 명상과 자기성찰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진실로, 기념비적이고 수평적인 작업인 <명상을 위한 작업, Work for Meditation> 은 그 자체가 이름만을 빼고는 제단의 배경 그 자체이다. 거대한 중앙의 나무 판과 접해서 있는 나무 기둥들은 성전의 지성소의 문 앞을 지키는 수호 성자의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1994년 작품인 <십자가(Cross)>, <부활(Resurrection)>, 그리고 특히 놀라움을 금치 못할 작품인 <천국의 창문은 열려있다(The Windows of Heaven are Open)>(1995)는 조숙진 작품의 종교적인 차원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있기 때문이야.” 그녀는 어린 왕자의 이 고백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창문은 사막인 동시에 생명의 우물이다. 그것은 거리란 사막에서 나온 부스러기인 동시에 천국의 경이로움을 향해 활짝 열린 창문이다. 그보다 작은 작품들은 우리가 언젠가 마주쳤을 듯한, 아주 오래된 성전 안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방과 같은, 사원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그것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영혼들의 기운이 움직이고 있는 내부의 공간을, 감추면서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같이 보인다. 그래서 조숙진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재료들을 가지고 성스러운 예술을 창조한다. 그녀의 작품은 루돌프 오토가 부른대로 “누멘적인것(the numinous)”의 느낌, 성스러움에 대한 경외감을 진실로 경험케 한다. 그녀는 참으로 우리를 ‘저 너머로’ 인도한다. 조숙진에게 있어서 그곳은 그녀의 삶의 내면의 깊이 속에 존재한다. 바로 그곳에서, 거리와 같은 우리의 겉보기 삶이 처한 모든 조건들, 그것들의 참다운 초월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날드 커스핏,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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