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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필, 사비나미술관 facebook

출생

1972, 서울

장르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hansungp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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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lapping, 201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1 x 2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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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유쾌한 마법

'파사드' 연작을 통해 실재와 재현, 진짜와 가짜의 혼동에서 오는 인식론적 즐거움과 환영의 효과에 천착해 온 한성필이 신작 'In Between Layers'를 선보인다. 전작에 등장했던 건물의 수많은 파사드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건물 보수공사 기간 동안 초라한 외관을 은폐하여 실제의 전면을 대신하는 임시적 파사드이고, 둘째는 처음부터 건물의 일부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지속형 파사드이다. 첫 번째 유형의 파사드는 공사가 끝나면 사라지게 될 운명이라는 점에서 덧없고 유한한 파사드이자, 배후에 실재를 감추고 있는 가면으로서의 파사드이기도 하다. 그들은 실재와 흡사할 뿐만 아니라 낡고 오래되어 훼손된 원형보다 더 실재다운 가짜들이다. 한편 두 번째 유형의 파사드는 단조롭고 공허한 건물 벽에 들어 선 그라피티로서의 가짜, 건물의 형태나 구조와 상관없이 자율성을 보장받은 실제 벽면으로서의 가짜들이다. 공공미술의 기능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 두 가지 유형의 파사드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한성필의 작업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즐거움은 진짜와 가짜의 은밀한 공모에 의지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잠시 활동했던 모리스 앙리(Maurice Henri)의 데생 '사전(私錢)꾼들'은 양자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메타포이다. 이 데생에서 위조주화를 만드는 모조의 명수들의 우두머리가 방금 생산된 주화를 살펴보더니 어떤 멍청이가 진짜 동전을 만들었지?”라고 호통을 친다. 이 에피소드는 진짜와 가짜의 관계에 대한 우스운 진실을 말해준다. 사전꾼들의 노동은 가짜 주화, 그것도 진짜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진짜에 가까운 가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전(私錢)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진짜 주화와 아무리 흡사하더라도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사전은 그 어떤 달인의 손을 거치더라도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 진짜와 구분이 되지 않는 완벽한 주화를 만든 이 달인은 그래서 멍청이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진짜 동전을 만들어 낸 이 사전꾼이 진정 멍청이인가? 오히려 위조의 이상은 진짜를 만들어 내는 데 있으며, 멍청이는 그 이상을 실현한 자가 아닌가?

이와 유사한 얘기는 우리 고전에도 있다. 신라 때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렸다는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져 죽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이 천재 화가의 노동 역시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요컨대 사전꾼들처럼 진짜와 흡사한 가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인데, 진짜 동전을 만들어버린 위조의 달인처럼 진짜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어 애꿎은 새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 혼동을 눈의 무능이나 착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위조의 정교함이나 화가의 천재성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평범한 눈으로는 도무지 분간해낼 수 없을 만큼 탁월한 모조품이 있는 것이다. 이 탁월한 가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원래 미메시스 예술의 원칙이다.

멍청이로 취급받은 위대한사전꾼은 사실 진짜의 권위에 희생당한 사람이기도 하다. 위조주화가 갖는 범죄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의 솜씨는 오히려 존경받을 만하다. 요컨대 진짜와 가짜의 구분에는 윤리적 잣대가 항상 개입하는 것이다. 진짜는 선, 가짜는 악의 축에 속한다. 그것이 진짜와 가짜, 참과 거짓, 현실과 재현, 원형과 복제와 같은 이분법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 구조를 지탱해 온 내밀한 원칙이다. 그러나 가짜 없이는 진짜의 권위도 없다. 참은 거짓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실성을 내세울 수 있으며, 복제가 없다면 원형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주장도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을 것이다. 우리는 모조품 덕분에 원본의 가치를 제대로 안다. 다른 한편으로 모조, 재현, 복제와 같은 모방의 친족들은 실재를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서 쾌감을 제공한다. 모방이 제공하는 쾌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공리가 한성필의 작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자.

 

우선 유한성을 갖는 임시적 파사드. 'Laputa'는 아치형 구조물과 첨탑으로 이루어진 고딕양식의 성당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벽면은 세월의 침식과 풍화에 노출되어 훼손된 모습이고, 건물의 왼쪽 벽면에 설치된 가림막은 우측 벽면과 대칭을 이룬 채 앞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다. 실제 벽면과 외관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 가림막 위쪽에는 공사 중임을 말해주는 철골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가림막은 아마도 공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실제 벽면을 촬영한 사진임에 틀림없다. 벽돌 표면 구석구석까지 묻어있는 두터운 먼지 층과 오른 쪽의 실제 벽면을 비교해 보기만 하더라도 이를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요컨대 복제된 사진이 실제와 대등한 자격으로 건물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왼쪽의 가짜가 유한한 설치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수십, 수백 장의 격자형 사진을 붙여 만든 남대문의 모습을 담은 'Plastic Surgery'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가짜 남대문은 불에 타버려 복원 공사에 들어간 남대문의 흉측한 몰골을 가린 채 실재를 대신하고 있다. 웅장한 자태의 남대문 사진 뒤쪽 어디엔가는 공사 중인 실제 남대문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본래 재현의 역할은 같은 시공간에 동시에 출현할 수 없는 실재의 한계를 보완하는 데 있었다. 통치권자의 초상이 공공기관에 걸림으로써 그 공간을 통치의 영역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유적의 신성함은 자기 위치에서 나온다. 'Laputa'에서의 성당처럼 남대문 또한 장소를 옮겨갈 수 없다. 그래서 수백 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가짜 남대문의 신성함은 수백 년간 자기 위치를 지켜온 실제 남대문의 완강한 장소성에 빚지고 있다. 짙은 코발트빛의 하늘이 매우 낯설고 격자 형태의 사진이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대문 사진은 실제의 남대문이 갖는 신성함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Melting' 역시 임시형 파사드에 속한다. 건물 전면에 드리워진 커튼에는 입구와 창문, 발코니가 왜곡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건물로서 기능할 수 없는 모습이다.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형상과도 같이 심하게 뒤틀린 창문은 열 수도, 닫을 수도 없고, 물결처럼 춤추는 발코니로는 나갈 수조차 없다.

현실과 허구, 실재와 재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양자에 위계를 부여해 온 인식 전통에 비추어 보자면 후자는 본질이 결여된 결핍으로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또한 온전한 세계인 것이다. 'Light of Magritte'에서 보듯이 재현은 현실에 종속된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열리는 또 다른 세계, 즉 이미지로서의 세계이다. 이 작품 속에는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장면이 거대한 벽에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커튼이 추가되어 있다. 낯과 밤, 빛과 어둠이 하나의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는 이 기이한 장면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이 거대한 화폭이 위치해 있는 현실 또한 그렇다. 거리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과 바닥에 깔린 그림자는 어둠을 상징하지만 장시간 노출로 촬영한 하늘은 청명한 대낮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빛의 제국'Light of Magritte'에 와서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양쪽에서 가리고 있는 거대한 커튼에는 주름이 잡혀있어 은은한 어둠속에 잠긴 호수 위의 풍경을 열고(혹은 닫고) 있다. 그렇게 빛의 제국이 속해 있는 세계가 커튼 사이로 열린다. 커튼 너머의 세계는 이 거대한 화폭이 놓인 세계와 유사관계로 맺어져 있다. 요컨대 건물 벽을 구겨가면서열어젖힌 세계는 커튼 바깥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환영의 효과를 활용한 눈속임 회화(Trompe-l'oeil)’가 건물의 일부로 자리 잡은 유형을 보자. 'Back to the Future'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매우 기이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거대한 두 건축물 사이에서 뛰쳐나오는 마차이다. 두 마리의 백마는 내리막길을 폭주하면서 내려오는 중인데, 흥미롭게도 이 마차의 뒤쪽에는 기관이 달려있어 수증기가 뿜어 나오고 있다. 왼쪽 건물의 중앙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가로등은 이 장면이 장시간 노출로 촬영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질주하는 마차는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이 아니라 벽면에 그려진 그림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현재와 과거, 순간과 지속을 절묘하게 결합해 놓은 이 장면에서 실재와 그림의 경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두 건물 사이에 수직으로 놓여있는 사다리는 그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사다리가 걸려있는 아치형 구조물은 무엇이며, 그 구조물 뒤편으로 펼쳐진 건물의 배후모습은 또 무엇인가. 혹은, 왼쪽 건물의 측면, 즉 마차의 배경이 되고 있는 건물 외벽은 어디까지가 실재인가. 이처럼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실재와 흡사한 가짜, 뒤집어 말하자면 가짜의 염치없는 주장을 묵살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실재의 관계로부터 시각적 쾌감이 발생한다.

'Bon Marché'에서도 이러한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작동한다. 서양의 어느 마을 광장에 펼쳐진 장터의 모습, 우측 하단에는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지만 정작 장터 사람들은 비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이 그려진 거대한 화폭의 경계를 찾아내기란 만만치 않다. 우선 장이 열린 공간, 즉 목조 건물 전체는 화폭 속에 있음이 분명하다. 오른쪽 구석의 어둠과 왼쪽 건물의 상단을 비추는 인공조명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장면은 한밤에 촬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장터는 대낮처럼 밝다. 따라서 장터를 비추는 조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 중앙의 하단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을 것이다. 목조건물의 뒤편에서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내는 석조건물들이 화폭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목조건물 지붕의 꼭대기에 “1888”이라 적힌 깃발이 뒤쪽 건물 벽과 중첩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요컨대 건물의 창과 펄럭이는 커튼, 벽을 타고 오르는 식물 모두가 그림인 것이다. 장이 열린 목조건물의 밖으로 나와 길가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 또한 뒤쪽의 건물 벽에 그려진 그림에 속한다. 아이의 머리 위 건물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이 거대한 화폭이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건물의 외벽임을 알려주고 있다. 중첩된 건물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The Wonderland Circus'의 화폭도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공간을 가장하기 위해 건물의 우 중앙은 원근법의 효과를 살려 창문이 소실점을 향해 수렴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마치 가짜 벽에 걸려 있는 것처럼 거대한 휘장이 아래로 펼쳐져 있고 그 속에 그려진 광대의 모습은 주름 때문에 구겨져 있다. 그림 속에 그려진 또 다른 그림, 화폭 속의 화폭이 도처에 놓여 있는 셈이다. 심지어는 왼쪽 건물의 창도 액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화폭은 하나뿐이며 모든 것은 이 신비한 가짜의 세계에 속한다.

 

환영의 효과를 유발하는 눈속임 회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대상과 주제에 따라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우선 평면을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데 몰두하는 유형이 있다. 마치 원근법의 놀라운 효과를 처음 발견했던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이 유형은 단지 원근법을 공간의 묘사에만 적용시킨다. 'Watermill'처럼 다양한 형태의 직사각형이 시선의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작아지게 그려내듯이 말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규격화되고, 평면 위에 배치된 사물들은 정확한 좌표를 지닌 채 마치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설계도면의 요소들처럼 보인다. 한편 'Paparazzi'처럼 화면 속에 이야기를 끌어들여 환영의 효과를 망각하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다. 건물의 전면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는 아치형 회랑이 있고, 계단 주위에는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벽에 걸린 붉은 색 휘장과 건물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 건물이 마치 유서 깊은 문화유적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건물 우측 상단의 거대한 창에는 반대편 벽에서 반사된 형태의 성당건물이 그럴 듯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 모습은 맞은편에 위치한 실제 성당건물의 반영처럼 보인다. 우측 하단의 배낭 맨 남자가 무언가를 촬영하는 모습은 건물에 그려진 그림 전체가 실제로 유명한 유적지임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환영의 효과는 진실에 가까워지면서 망각된다.

아예 허구성을 극대화시켜 그림 전체가 진정한 눈속임 회화임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환영은 어떤 점에서 사라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실제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도 분명하여 자신을 실재로 내세우는 그림의 리얼리티가 더 이상 신뢰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Swimming in the Sky'가 그 예로, 여기에서는 환영의 효과가 사라지고 시각적 즐거움만이 남는다. 거대한 벽면에는 각가지 형태의 푸른색 도형이 그려져 있고 사각형 속에서 물안경을 쓴 여자가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고 있다. 이 벽면은 전체가 거대한 풀장인 셈이다. 벽 위쪽의 푸른 바탕은 실제 하늘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아래쪽의 푸른 바탕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벽면에 매달린 거대한 물방울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어 이 장면 전체를 허구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늘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벽 속 푸른 공간의 현실성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공간은 하늘인가, 혹은 물인가. 수영하는 여인은 하늘을 날고 있는가, 아니면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가. 하늘과 물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러한 의구심이 뒤섞이면서 이 장면 전체는 터무니없는 허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작가는 스스로 막힌 건물 벽에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공간의 마법사가 된다. 'The Ivy Space'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로 이루어진 건축물 '空間 SPACE'의 벽에는 내부 공간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을 붙여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 붙어 있다. 이 구조물은 막힌 벽면의 답답함을 순화시키고, ‘공간이라는 건축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작가 본인이 구상해낸 것이다. 공간은 막힌 평면이 아님에도 '空間SPACE' 건물 벽은 막혀 있다. 자가당착적인 건물의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 작가는 건물 내부의 곳곳을 촬영한 사진을 붙여 평면으로서의 벽을 공간으로 변환시키려 한다. 그렇게 해서 이제 '空間SPACE' 건물은 내부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공간이 된다. 물론 이 또한 물리적으로는공간이라 할 수 없지만 유사의 마법 덕분에 우리의 시선은 평면 위에서 공간을 본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건물 반대편의 풍경이 보이고, 건물 내부의 사무실과 서가, 계단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성필은 유사와 모방, 재현과 실재, 환영과 허구 등 시각예술의 근본 문제와 맞닿아 있는 개념들의 관계를 집요하게 탐색해 왔다. 이 개념들을 지탱하는 것은 눈의 미신이나 재현의 마법, 이미지의 주술과 같은 비과학적인 요소들임에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지식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한성필의 사진은 지식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 있는 이 신비한영역들의 가치를 되묻는다. 우리의 눈은 시각적 환영에 속는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에서 이런 눈속임은 정교해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 주술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선의 착란은 치유되어야 하는가? 플라톤은 예술을 본질이 결여된 무엇으로 간주함으로써 이미지를 인식수단의 열등한 단계로 강등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서 이 결핍으로부터 감각의 떨림을 경험하고 인식의 쾌감을 끌어내는가? 그런 점에서 한성필의 사진은 시각예술이 끌어들이는 즐겁고 유쾌한 속임수착란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박평종 (미학,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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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필의 파사드

‘... 시각의 경계에 꽂힌

- 존 케일이 부른 <마그리트>의 가사 중에서

 

한성필의 파사드 작품들은 마치 신비로운 아리아처럼 느껴진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막이 오르기 전, 달래듯 가라앉은 음색의 마지막 음이 울려 퍼진다. 작가는 제한된 시간 동안 하나의 보편적인 주제를 연구하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The Sea I Dreamt'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모호한 요소들과 마주하게 한다. 2006년에 한성필은 건설 현장과 건축물 외벽을 싸고 있는 대형의 포토리얼리즘적 차단막들을 찾아 다녔고 유럽과 한국의 여러 도시들에서 그들과 조우하였다.

 

한성필의 파사드 작업은 그가 런던에 머물던 당시 보수 중이던 성 바울 대성당의 대형 차단막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대 장치 같은 조명 속에 드러난, 대성당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차단막은 너무나 인상적이었고 실재의 성당보다 오히려 더 아찔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350여 년 전쯤 이렇게 변장한 캔버스가 있었더라면, 성 바울 대성당의 건축을 담당했던 크리스토퍼 렌 경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면이 공식적으로 승인이 되기 훨씬 전에 이미 공사가 시작된 건물의 실재 모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인 설계라고 불렸던 그의 공식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설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었다. 만약 17세기에 지금과 같은 가상의 파사드의 설치가 가능했었다면, 렌 경의 보다 엄격한 고딕식인 공인 설계가 파사드의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고, 아마도 전면에 걸린 공표된 설계때문에 그는 곤란을 겪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포토에세이의 정의로 볼 때, 한성필의 파사드 사진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재고안 된 간판이나 현수막 같은 흔히 보는 시각 매체에 대한 이미지의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공공 간판들의 형태는 분명하고 간결한 단어와 이미지로 된 건물용 광고에서부터 자동차 사회에 발맞춰 고속도로를 따라 놓인 대형 빌보드와 초대형의 영화 광고 현수막(발리우드), 도시 경관 속에 전략적으로 설치된 LCD 화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한성필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흠잡을 데 없는 대상들은 그것들이 광고라는 형식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오히려 연극의 무대나 영화의 배경에 더 가깝다. 그가 다루는 사진 속 이미지들은 머지않아 곧 모습을 드러낼 건물들과 같은 크기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의 피사체는 느리고 지저분한 공사과정이나 도시 재개발에 따른 혼란이 아닌 보다 나은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20068월 뮌헨에서 작업한 사진에서 보여지듯이 종종 미래는 과거의 완벽한 회고로 구축된다.

 

작가는 동트기 전의 신비로운 빛 속에 피사체를 담아냈다. 그의 작업과 관련된 뛰어난 건축 다큐멘터리의 전례들로 워커 에반스나 가브리엘 바질리코, 토마스 스트루스 같은 중요한 사진작가들의 작업을 꼽을 수 있겠으나, 기질적인 면에서는 르네 마그리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가 그린 '빛의 제국'이 완벽한 예가 될 것이다. 어둠이 깔린 숲에 둘러 싸인 집의 위쪽으로는 밝은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고 가로등이 켜 있는 아래쪽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한성필의 파사드 이미지들 역시 고요하며, 밝지 않고 때때로 처음엔 너무 어둡게 보이다가도 이내 부인할 수 없는 본질적인 힘을 드러낸다. 마치 뱀파이어처럼.

 

그의 사진을 통하여 시각적 환영의 요소들은 해부되고, 재구성 되어 나타나고 어떤 전형이 된다. 장시간의 노출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의 추이를 압축하여 우리에게 벽에 걸린 스틸 이미지로 전달된다. 이는 작가 자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필름을 통해 생각하고 필름 위에 흡입되는 환영이자 꿈이다. 즉 기다림, 호흡, 성찰, 모험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결정의 순간들을 기록한 결과이자 다음 목적지이다.

셀리나 런스포드 (아트디렉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포토그라피 포럼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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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가의 시적인 기교 - 한성필의 사진작품에 대하여

본격적인 글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개인적인 감회를 덧붙이자면, 한성필이 비디오와 설치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한성필을 사진작가로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다양한 주제를 여러가지 형식으로 다루기도 하고, 심지어 그가 카메라를 들고 작업하지 않을 때에도, 사진작가로서의 그의 위상은 아마 변치않을 것이다. 이후에 출품한 작품들에서도 사진예술의 논리, 전통과 담론을 엿볼수 있다. 한성필 작가는 사진을 창작하기위해 항상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4년 인도네시아 반둥에 있는 살라사수나리요 아트스페이스에 그를 레지던시 작가로 초대했을 때에도, 그는 막 사하라 사막에서 촬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동안, 그는 반둥이나 자바에 국한되지 않고 칼리만탄의 오지에 있는 섬을 방문하여 사진을 찍었다. 이때 촬영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앙 칼리만탄 지역의 팡칼란분에 있는 숲들의 현실 을다룬 'Blue Jungle (2004-2005)' 연작을 제작했다. 이사진 연작은 불법적인 벌목과 화전(火田)의 잔해로 남아 여기저기 널려있는 통나무와 나무 등걸들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이후, 작가는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미국 등지로 사진 여행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까지 그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장소에서 작업하였다.

10년여의 시간 동안, 작가는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충실히 쌓아가고 있다. 낯설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며 작업해 왔다. 소형카메라의 등장 이후, 사색가로서의 사진작가란 더이상 생소한 개념이라 할수 없다. 그러나, 한성필 작가의 경우처럼, 여행 경험을 쌓고 카메라의 기술적 조작능력을 충분히 익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와의 오랜 교류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건대, 그는 새로운 환경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한다. 장기간에 걸친 수많은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공간적 맥락들을 오가며 이질성친밀성사이를 쉽고 빠르게 오간다. 이러한 작품의 경향은 창작의 영감이 되었다. 작가가 사진 작품 속에 담는 물체들은 상징성을 띄거나 주어진 장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일때가 많다. 그러나, 그는 물건들의 이국적인 외양만을 담기보다는 해당 대상이 속한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고찰하고 섬세히 연구한 결과물을 제시한다. 새롭다거나 낯선 것이라고해서 무조건 흥미를 보인다기보다는, 카메라를 활용하여 의외의 인지적 설렘을 끌어내 보이는 것이다.

 

1998년에서 200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작가의 작품들은 'My Sea', 'Blue Jungle', 'Ground Cloud' 등 각각의 연작들에서 보듯 시적인 함의를 주로 조명했다. 그는 중형 혹은 대형카메라를 사용하여 장시간 노출하는 테크닉을 가미, 자연풍광을 담아내어 신비롭고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바다와 해변은 안개로 감싸여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띄고, 잎도 줄기도 하나없이 헐벗은 나무줄기와 등걸들은 슬픔에 짓눌린듯한 모습으로 황무지에 외로이 내버려져 있으며, 구름은 소용돌이라도 치듯 머리 위에서 춤춘다. 이사진들이 전달하는 것은 그 어떤 확고한 의미나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다.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관객들을 한층 더 고양된 시각적 감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이후 수년간, 그의 파사드프로젝트는 점점 더 명료하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진화했다. 이 연작은 사진과 시각예술 문화의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측면간의 연관성에 대한 인식을 내포한다. 작가는 건물의 외면을 감싼 가림막과 전통적인 트롱프뢰유 회화 간의 역사적 연계성을 탐구하는데, 이는 2차원 평면에 3차원적인 감각을 덧입히는 효과를 수행한다. 그가 해외 (프랑스, 2009; 독일, 2010; 미국, 2010) 각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해 개념의 발전과 작업창작을 지속한 것은 날로 커져 가는 그의 호기심 이었다.

 

한성필 작가의 예술적 탐구과정은 사진예술의 전문가가 특정한 관심분야로 이끌려 들어가는 단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롤랑바르트는 이렇듯 감상자의 이해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특정한 구현체를 '풍크툼(punctum)'이라 지칭했다. 도시적 외양과 트롱프뢰유에 대한 한작가의 관심은 시각적, 인지적 측면에서 출발하지만, 그의 프로젝트는 그 이후보다 철학적인 고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평론가 박평종은 파사드 프로젝트가 유사성과 모방,” “재현과 현실,” 그리고 환상과허구”1)등의 상관적 이원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박평종이 제시한 이원적 구도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자연과 한작가의 작품에 주로 사용되는 매체 즉 사진의 정체성간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진짜가짜의 대립을 들 수 있겠다. 사진이란 매체는 지난세기, 수십년에 걸쳐 사회에 안착했다. 한때 진실성과 사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을 활용하는 매스미디어와 지식산업의 힘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매체로 받아 들여지던 사진에 대한 인식은 최근 들어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론으로 진화했다. 디지털 기술의 진보와 카메라, 컴퓨터와 같은 개인용 전자기기의 폭넓은 보급과정을 거쳐, 오늘날 사진영상은 이것이 진정 현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아날로그 사진에서도 시각적 속임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디지털 기기로 촬영한 사진의 진정성은 역시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사진기술의 발달 과정과 늘 함께 해온 인지적 틀과 연계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날로그 사진이 현실 재현의 충실한 도구라는 관점은 과학과 실증적 연구를 통해 보편성과 진실, 그리고 확실성을 내세워 18세기 유럽을 지배한 계몽주의에서 발원한다. 한편, 20세기말에 등장한 디지털 사진술의 발전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모토인 상대성과 불확실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사진에 관한 포스트 모던 담론은 작가의 죽음,” “시뮬라르크,” “해체주의와 같은 프랑스 탈구조주의 이론과 기호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등장했으며, 이는 다시 현실원본의 신화에 대한 비평적 고찰로 이어진다. 디지털 사진에 대한 담론 측면에서 볼 때, “조작,” “편집엔지니어링과 같은 용어들은 사진의 목적과 맥락, 그리고 독해법에 따라 기만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한작가가 프로젝트에서 제시하는 사진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찍은 것인지, 혹은 디지털 기술로 변형을 가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 즉 관객들이 왜 원본과 진정성에 그토록 집착하는지에 대해서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사진의 진정성과 영상 자체의 궁극적 효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것일까? “현실과 재현이라는 양극적 대치 관계는 이성중심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재현보다 현실을 우위에 두는 태도는 경험적, 과학적 지식의 결과이다.

 

한성필 작가가 트롱프뢰유 회화작품들과 사진의 표면(파사드) 사이에서 찾아내는 연관성은 현실과 환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트롱프뢰유의 역사는 주변 환경과 유사한 인상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환영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현실의 절대적 닮음(analogon)으로서 3차원적인 공간, 건물, 풍경, 자연 속의 물체 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환영의 구축방식은 세밀한 표현, 외면적 표상, 조명, 관점, 그리고 색감 등으로 다양하다. 트롱프뢰유는 모든 이상과 환상을 디지털기술로 구현하는21세기 기술의 최고봉, 즉 환상의 세계인 가상현실(VR)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트롱프뢰유나 가상현실에서 우리는 환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깊고도 단단한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롱프뢰유에서 흔히 얻는 깨달음은 그 어떤 시각적 기교나 조작도 쉽게 파악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 수초만에 눈앞의 장면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해도, 관객들은 여전히 작품을 즐길 수 있다.

파사드 프로젝트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트롱프뢰유의 거대한 실체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노출하여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환영이나 모방으로서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작품을 재차들여다 보면서, 관객들은 피사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구도, 빛과 시간, 렌즈 등 작가가 촬영을 위한 선택, 아날로그적 조작때문에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을 연출하는 건물들과 도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가림막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작가가 관객을 속이고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3자로서, 관객은 시각적 허구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일상적 삶에서의 속임수들을 그저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될 수도 있다. “속임수도 언제든지 미학적 쾌감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시각적 인지에 치중한 오늘날의 문화가 현실이나 진실에 대한 인지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는 21세기적 특성으로 볼 수도 있다. 작가의 프로젝트는 진짜에 대한 호기심이 가짜에 대한 우리의 무지만큼이나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진짜가짜간의 간극 속에서, 두 양극간의 거리를 좁혀주는 다층적 요소들을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다.

 

한성필 작가의 다른 작품인 “Memories and Traces” 또한 건축물, 풍경, 그리고 도시 환경에 대한 작가의 고찰과 연구를 다룬다. 이 연작에 속한 일부 작품들은 거대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로 잘라낸 듯한 철거 건물의 잔해를 보여준다. 파사드와 나란히 놓고 보면 더욱 더 흥미롭다. 파사드 연작이 건물의 허구적 외면을 보여준다면, “기억과 흔적은 건물의 내면이 마치 진정한 현실이기라도 한듯 외연 그 너머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시각적 요소를 총합하여 시적표현으로 엮어내는 작가의 역량을 볼 수 있다. 늘 떠도는 여행자, 그러나 뚜렷한 목표를 지닌 방랑자, 예술가이자 사진가, 모험가, 또는 사색가내가 아는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사진 촬영이라는 과정을 예술적으로 즐길 수 있는 한 사람으로서, 비평이나 사회적 비판이라는 잣대에 얽매이지 않는다. 작가의 사진 작품들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자 사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서사를 표현해 낸다.

 

1)박평종, 이미지의 놀라운 마술 Exhilarating Magic of Images ,한성필 개인전 평론, 층위 사이로, 갤리리잔다리, 서울 (2010).

 

아궁후얏니카제농 (인도네시아 반둥공과대학, 미술디자인학부, 시각예술연구프로그램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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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의 미학

우리가 극지방과 같은 인간에게 혹독한 환경에 매료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래 전에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이 물음에 대한 고전적 답변을 내놓았다. ‘숭고버크에 따르면 숭고란 우리에게 고통과 위험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어떤 압도적 대상이다. 버크는 숭고의 체험을 부정과 긍정의 양가적 감정으로 설명한다. 즉 어떤 거대한 대상에 압도당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끼나, 그 공포의 이면에 모종의 기쁨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공포속에서도 느껴지는 그 기쁨의 정체는 무엇일까? 칸트는 그것을 존재의 확장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압도적 대상 앞에서 먼저 공포를 느끼지만, 그 위협을 심리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감각적 한계를 넘어 무한성의 영역으로 고양된다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감각적 쾌락’(Pleasure)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적 열락’(Delight)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한성필 작가를 극지로 데려간 것도 숭고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남극과 북극을 찍은 그의 사진들은 18세기 낭만주의 화가들의 풍경화들, 특히 독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Caspar David Friedrich) 작품 <빙해(The Sea of Ice 1823-24)>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들 아래 파묻힌 북극 탐사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은 그 무서운 하얀 입으로 인간의 가소로움을 간단히 집어삼킨다.

하지만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숭고의 대상이 아니다. 19세기 초만 해도 자연은 인간에게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극복하기 힘든 무서운 힘이었지만, 오늘날 자연은 외려 기술로 무장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폭정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극지 역시 오래 전부터 과학적, 산업적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지금은 약간의 돈만 있으면 누구나 선택하여 갈 수 있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 오늘날 숭고한 것은 외려 인간이 이룩한 것들이다. 오늘날 우리를 경외의 감정에 빠뜨리는 것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너머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와,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국가의 통제력마저 무력화시키는 세계 자본주의체제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작품들, 특히 그의 <시카고 상공회의소 II (Chicago, Board of Trade II, 1999)>는 디지털시대의 이른바 기술적 숭고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한성필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시 자연의 숭고함이다. 그는 왜 이 시점에 낭만주의적 자연 숭고를 다시 불러냈을까? 사실 극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우리에게 그리 새롭지 않다. <내셔널지오그래픽>과 같은 다큐멘타리 잡지를 통해 그런 이미지들을 일상적으로 수없이 접한다. 심지어 IMAX와 같은 장치를 통해 극지의 장관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접할 수도 있다. 그런 시대에 자연 숭고를 다시 소환하는 데에는 자칫 시각적 클리셰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한성필의 작품에서는 다큐멘터리라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위해 시각적으로 착취당하는 자연에 위엄을 되돌려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의 작품은 아무리 인간의 탐욕이 거대하고, 그의 기술이 위대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유한하며 프리드리히의 작품 속의 탐사선처럼 언젠가 대자연에 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성필이 극지에서 체험한 숭고의 감정은 공간보다는 시간에 관계한다. 그의 작품들은 극지의 눈과 얼음 속에 응고한 시간을 보여 준다. 내린 눈이 겹겹이 쌓여 생긴 층들은 그 위로 흘러간 무수한 시간의 결들을 보여준다. 거기서 그는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의 영원성을 본다. 비록 극지를 북극을 공간적으로 정복했을지 몰라도, 그 안에 응고된 시간의 규모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미약하고 왜소한 존재일 뿐이다. 작가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준다. 극지에서 위스키를 마실 때, 그곳에서 채취한 얼음을 집어넣으면, 마치 응고된 세월이 풀려나오는 듯이 수많은 기포가 올라온단다. 오래된 얼음일수록 물론 기포는 더 많이 생기는데, 그것은 같은 두께라 하더라도 오래된 얼음은 세월의 무게로 압착되어 더 많은 공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란다. 극지의 얼음이 영겁의 시간을 품고 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작가의 또 다른 확장된 시선들은 한때 인간이 그곳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다 버리고 간 건물과 장비들을 보여준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것들은 벌써 눈과 얼음 속에 파묻혀 버렸다. 할 포스터(Hal Foster)라면 그것을 정지된 폭발이라 부를 것이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언캐니효과의 하나로, 가령 빠르게 움직이던 것이 갑자기 정지하거나,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효과다. 회전하는 발레리나의 정지 사진. 관목 숲에 잡아먹힌 기관차의 사진.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런 이미지들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 매력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거대한 뱅골 보리수의 뿌리에 파묻혀 버린 캄보디아의 따 프롬 사원(Ta Phrom)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떠올려 보라. 눈 속에 파묻혀 버린 장비와 얼음으로 막혀버린 터널의 사진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언캐니(Uncanny)’의 바탕에는 죽음의 충동이 깔려 있다. 내게 한성필의 작품은 일종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다.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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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드 프로젝트

보수공사의 현장을 가리던 차단막이 거대한 화폭으로 다시 태어났다. 과거에 차단막은 뚜렷한 실용적 목적을 갖고 오로지 사물의 세계에 속했다. 그것은 어지러운 공사 현장을 공공의 시선으로부터 가리려고 설치한 물건이다. 하지만 그 막 위에 이미지를 올려놓자 그 물질적 속성 위에 의미의 층위가 얹혀지면서, 그것은 이제 시각적 환영을 투사하는 가상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파사드는 사물이 아니라 미디어가 되어 거리를 걷는 대중과 소통을 하려 한다. 대형출력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일종의 공공미술이라고 할까?

 

가상의 파사드는 덧없는(ephemeral) 가면이다. 그것은 잠시 어떤 것의 부재를 보충하다가 공사가 끝나면 그것은 세계로부터 철거될 것이다. 사물의 세계만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부터도. 막을 치우면 그 위의 이미지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퍼포먼스나 설치예술이 후에 자료로만 그 흔적을 남기듯이, 가상의 파사드는 사진으로만 영속성을 얻는다. 한성필은 가상의 덧없음을 미적으로 구제한다. 앗제가 사라져가는 파리의 낡은 구조물을 구원했다면, 그가 구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잠시 그것을 둘러싼 가면이다. 그는 껍데기의 피상성을 긍정한다.

 

어떻게 보면 유형학적 작업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스름 빛 속에 잠긴 영상에서는 기록의 분류학적 냉정함이 아니라 외려 풍경화와 같은 분위기의 아득함이 느껴진다. 여기서 복제의 피상성은 묘하게도 원본의 아우라와 결합한다. 그 분위기는 해뜰 녘 혹은 해질 녘의 진짜 빛과 인공조명이라는 가짜 빛을 의도적으로 섞어놓은 데서 나온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미디어 파사드. 하지만 거기에 사용된 것은 대형 LED화면이나 그 밖에 스스로 빛을 내는 뉴미디어가 아니라, 회화와 사진이라는 고색창연한 올드 미디어다. 사진과 회화는 스스로 빛을 내지 않기에 그의 파사드는 자연광과 인공광이 뒤섞인 어스름 속에서 분위기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사진의 기록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을 구제하는 것이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아니다. 그의 눈은 다른 데에 가 있다. 한성필은 복제를 복제함으로써 재현을 주제화하려 한다. 복제의 복제는 실물과 가상의 차이를 흐려 버린다. 각각 현실과 가상의 차이도 인화지 위에서는 똑같은 가상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몇몇 작품에서는 현실의 건물과 가상의 이미지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굳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작품 속의 가상은 그 뒤에 가려진 실물 못지않게 분위기를 갖고 있다. 진짜 빛과 가짜 빛이 경계선 없이 뒤섞이듯이, 그의 화면에서 가상과 현실은 경계선 없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가상의 파사드는 존재론적으로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그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들어설 것의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은 앞서 존재했던 원본의 복제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 건물의 원형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것은 과거의 복제이자 미래의 기획이다. 앞과 뒤를 동시에 보는 야누스처럼, 그것은 과거를 돌이켜 재현을 하고 미래를 향하여 현시를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의미의 놀이가 발생한다. 사진가는 뷰파인더를 통해 앞으로 실현해야 할 이미지를 탐색한다. 뷰파인더는 사진가가 미래를 향해 이미지들을 던지는 실험적 탐색의 도구다. 미래의 기획이라는 면에서 가상의 파사드 역시 일종의 뷰파인더다. 한성필은 그 건축의 뷰파인더를 다시 사진의 뷰파인더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촬영을 주제화한다. 그는 과거를 향해 복제를 복제할 뿐 아니라 동시에 미래를 향해 기획을 기획하고 있다.

 

그가 찍은 파사드 중에는 복제나 기획이 아닌 것도 있다. 가령 트롱프뢰유(trompe-l’eoil)를 이용한 것이 그것이다. 이때 가상의 파사드는 이미 있었던 것의 부재를 대리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거기에 있지 않을 완전히 새로운 환타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물론 거리를 지나는 현실의 관찰자에게 이 환영의 가상성은 비교적 뚜렷하게 의식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시 사진으로 복제하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져 사진 속의 이미지는 일종의 버추얼 리얼리티가 된다.

 

가상의 파사드는 대체 왜 나타난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다다와 팝아트, 공공예술과 설치예술은 차단막이라는 일상의 사물이 대중을 위한 공공의 설치예술로 간주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건물의 벽에서 난데없이 허구의 영상을 보는 체험은 이미 건물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 위로 영상의 홍수가 흐르는 이 시대의 일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늘날은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흐려지고, 가상과 현실이 뒤섞이고, 시간의 선형성이 무너져 재현이 동시에 기획이 되는 시대가 아닌가.

 

이처럼 최근에 거리에 나타난 가상의 파사드들 속에는 이 시대의 기술적 조건, 문화적 기억, 세계-인간 존재의 변화가 은밀히 집약되어 있다. 한성필이 파사드에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게다. ‘파사드 프로젝트는 내게 벤야민의 파사주(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30년대에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20세기를 읽은 것처럼 그의 <파사드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21세기가 꾸는 꿈을 해독할 수 있지 않을까?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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