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의 역사, 또는 묘사 속의 서사
앞이 안보일 정도로 폭설이 휘몰아치는 날, 일산의 작업실에서 본 공성훈의 바다풍경은 더욱 냉랭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태풍이나 폭설 같은 대규모 기상현상은 인간을 더욱 자신 안으로 움츠러들게 하고,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미소한 일부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한다. 제어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자율성을 구가하는 듯 질주하는 현대문명 또한 대지의 얇은 표면 위에 얹혀진 취약한 존재로 상대화시킨다. 악천후를 비롯한 기상현상은 인간이 그어놓은 인위적 선들을 무화시킨다. 그것은 그의 작품 '눈바람'(2011)처럼, 하늘과 땅, 또는 바다의 경계조차 사라지게 한다. 공성훈의 최근 작품들에는 우리나라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광대한 시공간의 지평을 담아낸다. 2011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풍경들은 낯설지만 이국적이지는 않다. 풍경 안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관광객이겠지만, 장면들은 아늑한 휴양지 같은 분위기가 없다.
작가에게 감흥을 주었던 실재하는 장소에서 출발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중화되어 있다. 장면 속 시간은 공간보다 더욱 불확실하다. 태종대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 제주 해안가에서 돌 던지는 아이들이 나오는 작품은 밤인지 낮인지 모호하다. 그의 바다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푸르게 칠해진 것 같다. 또는 시퍼렇게 멍이 든 듯 창백하다. 형상이 없는 그림에 비한다면 지시대상을 알아볼 수 있지만,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지구상, 역사상 어디에나 있는 돌, 물, 하늘, 사람들일 뿐이다. 그렇다고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 꺼낸 것은 아니다. 공성훈의 작품은 현실과 밀착하면서도 현실로부터 빠져나가는 미묘한 차원, 그 경계 선상의 게임으로 인해 흥미롭다. 작품의 소재가 된 그 자체로 멋진 풍경들은, 근·현대 미술에 있어 작품의 진정성의 기준이 된 작가의 창조성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며, 소재주의라는 상투성에 매몰될 위험을 감수한다.
그는 현실을 중시하지만, 그것은 그 다음을 보여주기 위한, 또는 말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지대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전유나 탐닉, 시각적 소비의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작가가 숨겨놓았을지 모르는 의미를 찾아내 읽기 보다는, 관객의 상상력으로 다시금 씌여지도록 여백을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거나 키치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적이다. 드높은 하늘, 파도치는 바다, 깊은 계곡은 언뜻 보기에 그린 것인지 사진으로 찍은 것인지 모호할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계에 충실한 고전적 미가 아닌 낭만적 숭고를 자아낸다. 그러나 관객이 무한정 감정이입하기에는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그의 풍경은 전통적 낭만주의에 내재된 종교적 초월성이나 막연한 신비주의와도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전시 작품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바다 풍경은 압도적인 시공간의 힘을 전달한다. 여러 매개를 거치는 미디어와 달리, 회화적 직접성으로 구현된 바다는 상징적으로 코드화 할 수 없는 현실계와 비교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파도는 형태이자 힘이다. 힘은 형태를 만들어내고 또한 형태를 와해시킨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으며 묶어둘 수 없다. 매순간 밀고 밀리는 파도는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으로 채워진 공간이 된다. 작품 '파도'(2011) 시리즈는 매순간 형세를 달리하는 하얀 물거품을 내는 파도들의 면모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거친 붓질 자국이 표면에 남아있는 바다 풍경은 세계를 보는 투명한 창과 매체의 물질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쿠르베의 후기 바다 풍경화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연결시킨다. 묶여 있는 개나 천박하게 불 밝힌 모텔촌, 진정한 밤이 없는 근린 자연 등이 담긴 그의 이전 작품이 일상적인 풍경 가운데 은유와 풍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최근 그림은 작가의 개입이 줄어들었다. 그는 장대하고 역동적인 자연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의 구경꾼 같은 작품 속 등장인물과 비슷한 태도를 가진다. 익명적인 그들은 비록 뒷모습이지만 심란한 우울함이 묻어난다.
거기에는 예술적인 삶은커녕, 평범한 삶을 살기에도 힘든 어두운 시대의 정서를 읽는 작가의 관점이 드러난다. 바다나 하늘은 한정지을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지만, 그 앞에 서있는 이들은 그러한 현실과 맞서 있는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인 인물들은 아니다. 그들은 현실 속에 깊숙이 들어가 얽혀있지도 않고, 현실에서 완전히 면제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한 발짝 뒤로 빠져 있다. 이전의 영상 설치작품에서 주연배우로 등장하여 자신과 세계에 대해 재미있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발언하려 했던 표현적 방식과 많이 다르다. 공성훈은 ‘설치에서 그림으로의 여정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작업’이었지만, 그러나 ‘내 자신을 표현의 하드 코어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적이다. 낭만주의적 예술가상에서 전형적인, 밑도 끝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창조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필터링’하고 ‘샘플링’하며 ‘느끼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그것은 방관자의 입장이기 보다는, 더 멀찍이 있지만 더 넓고 근본적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의지로 읽혀진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세상을 보는 태도는 보다 냉정해졌고 작업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현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이동했고, 현실의 외관 뿐 아니라 그 원동력 또한 포함한다. 역동적인 자연 현상의 지배하에 있는 하늘이나 바다는 더 근본적인 현실이 표현되는 장이다. ‘바다’라는 전시 부제는 풍경을 이루는 구체적 대상보다는 원소의 차원을 암시하며, 그의 풍경이 단지 자연의 외관이 아닌 자연의 내재적 힘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제주 특유의 시커먼 돌, 계곡. 물, 바람, 그리고 불꽃놀이 장면 등으로 첨가된 불까지, 자연을 이루는 근본적인 원소들이 등장한다. 작품 '눈바람'(2011)이나 '불꽃놀이'(2012)는 모든 것을 유동적으로 만드는 강력한 자연현상이 지배적이다.
작품 '구름과 머리카락'(2012)은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화면 전경에 머리카락을 날려서 원소들의 움직임 속에 인간의 감정이나 몸 또한 섞어 넣는다. 원소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격렬하게 상호작용한다. 그것은 질서가 태어나려는 태초의 풍경, 아니면 다시 혼돈으로 해체 되려는 묵시록적 풍경에 가깝다. 태초와 종말 사이의 가운데 토막은 생략되어 있음은, 현재의 재현보다는 전후의 생성과 소멸에 보다 관심을 쏟는 것이며, 가혹한 시간의 시험 속에서 점차 가속화된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연령대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자연 풍경이 압도적인 그의 작품에서 인간 및 역사는 보다 거대한 자연의 주기 속에 포함되어 있을 뿐, 생략되어 있지는 않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계는 세계 뿐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도 포함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바다와도 같은 원초적 무의식이 내재해 있으며, 그것이 의식과 이성을 추동한다.
어떤 바다 풍경에서는 절지동물로 분한 이전의 괴기스러운 자화상이 튀어나올 듯, 현실계는 계측될 수 없는 차원에 있다. 요즘 작품에서는 심해의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풍경자체가 으르렁거리는 괴물 같다. 어떤 형태도 어떤 색깔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연의 만능 캔버스인 하늘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성훈의 그림은, 현실을 넘어 미혹을 낳는 미디어 지배의 사회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비롯되었을 원초적 힘을 불러낸다. 젊은 시절 공대도 다녔고 여러 미디어를 섭렵해왔던 그에게, 회화는 그 원초적 힘을 다시 끌어내는 유력한 수단이다. 그에 의하면, 작업구상과 과정의 분리와 매뉴얼화가 가능한 미디어 작업에 비해, 회화는 매순간이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그것은 매순간이 도전이며 도약이고, 또한 좌절이다. 그는 회화가 협업보다는 자기주도적인 과정이어서 그만큼 희열도 크고 절망도 깊다고 말한다. 회화는 머리나 손끝으로만 조작되는 미디어 작업과 달리, 손 아니 온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물이라는 주제와 관련시킨다면, 작가는 현실의 바다에서 헤엄치듯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단지 관념적 시각이나 빈약한 개념, 또는 이미 조작되어 있는 인터페이스를 터치하는 손가락 끝이 아닌, 온몸으로 통과하는 현실인 것이다. 시시각각 그 방향과 속도를 가늠하며 나아가지 않으면 익사하거나 뒤로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급류의 이미지는 현실계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이러한 불확실한 흐름 속에 21세기의 화가가 있다. 회화에도 의식적 무의식적 코드화가 스며들어 날렵한 감각성은 둔탁해지고 길들여질 수 있지만, 모든 그림들이 감각적으로 한 번에 휙 잘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림 그리기는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과 비슷하다. 가령 작품 '돌 던지기'(2012)에서는 전경의 아이 셋이 사나운 하늘 아래의 바다에다 돌을 던지고 있는데, 즐거운 놀이인지 무모한 도전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리기는 또한 작품 '낚시질하는 남자'(2010)처럼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낚시하는 사람의 처지와 같다. 붓은 대어를 낚기 위해 밀고 당기는 낚시대와 비교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눈과 손가락 끝만 아니라, 온몸이 현실의 감지기가 되어야 한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파도와 그 위에 펼쳐진 불투명한 하늘은 뭐가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없는 원초적 혼돈 그자체이다. 풍경 속 자그마한 인물상들은 일련의 이야기를 시도하면서 완전한 추상적 혼돈으로 와해되는 것을 저지하려 한다. 풍경 안에 배치된 작은 인물상들은 풍경의 일부이며, 작가나 관객이 풍경, 또는 풍경화를 보는 관점을 공유한다. 뒷모습이나 실루엣만으로 나타나는 그들은 풍경에 비해 비중이 작다. 특히 노을 풍경이 그러하다. 작품 '노을-섭지코지'(2011)는 가족, 연인 등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노을을 바라보며, 지평선 부근에는 작은 십자가가 빛난다. 십자가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교회의 첨탑처럼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기 보다는, 속세의 일부에 파묻혀 있다. 관광객들이 노을을 보는 풍경인 '노을'(2012)에는 대자연이 연출하는 빛의 계열이 펼쳐진다. 공성훈의 풍경은 그의 작업실에서 그릴 수 있는 최대 크기가 150호임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성을 가진다.
그의 풍경은 인간이나 역사에 비해 더 많은 비중을 둔 자연의 몫을 보여준다. 작품 '나무'(2011)는 화면 전체를 뒤덮는 늘어진 나뭇가지와 뒷면에 희미하게 지나간 비행기 지나간 자국을 대조한다. 거기에서는 인공적 사물이 긋는 선과 자연이 긋는 다양한 선이 비교된다. 작품 '형제 바위'(2011)에서 암벽으로 전경을 막아놓고 중간에 뚫린 하늘 아래의 형제바위는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지나간 흔적을 무심히 바라본다. 비행기는 전경의 큰 암벽과 대조되는 눈부신 빛으로 인해 공중 폭발한 것 같은 모습이다. 막강한 화력과 속도로 전쟁과 경쟁을 낳는 현대문명의 총아가 그어 놓은 선은 마치 바다 위로 배 지나간 자국같이 순간적일 뿐이다. 그것은 암벽이나 나무처럼 자연이 만들어낸 선보다 일시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에 포함된다. 역사는 서술되지만, 자연은 묘사된다. 공성훈의 작품은 정밀한 묘사 가운데 서사를 끼워 넣는 방식을 통해 자연주의와 리얼리즘 간의 오랜 반목과 대결을 종합하려 한다.
한국 미술계에서 회화는 한 극단에 너무 큰 이야기(메타 서사)가, 다른 한 극단은 지엽말단의 소소함 사이에 자리하곤 했다. 전자는 80년대의 민중미술에서, 후자는 2000년대 미술시장을 휩쓸었던 극사실주의 계열의 그림에서 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역학관계 또한 비슷하다.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세대가 그 중간에 있다. 공성훈의 최근 작품에서 풍경은 자연주의적 묘사에, 인물은 리얼리즘적 서사에 근접한다. 가령 바위로 둘러싸인 심연을 그린 작품 '폭포'(2010)나, 움푹 파인 계곡과 폭포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남자를 그린 '폭포에서 담배 피는 남자'(2012), 무한한 시공간의 주름을 간직한 암벽 아래의 심연을 내려다보며 한 남자가 웃통을 벗고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작품 '담배 피우는 남자-태종대'(2011)는 묘사와 서사 간의 역학관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심연 가장자리의 등장인물은 실연이나 파산으로 인해 자살하기 일보 직전일까? 비행기구름과 형제 바위, 또는 나뭇가지가 나오는 풍경 또한 분단의 현실 같은 것이 떠오른다.
공성훈의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두 가지 근본적인 태도와 형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깊이의 문제, 다른 하나는 표면의 문제이다. 서사(narration)는 깊이와, 묘사(description)는 표면과 관련된다. 전자는 리얼리즘에서, 후자는 자연주의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양극 사이의 역학관계가 있다. 두 유형의 대조 항은 상호보완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자연적 요소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자연주의적이다. 사진기의 도움도 얻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관찰은 순간적인 기상현상이나 물질의 흐름을 정확하게 기록하게 한다. 그것은 자연의 한 단면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에 충실하다. 반면, 등장인물들은 자연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적 요소로, 시대를 보는 작가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마틴 제이(Martin Jay)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scopic regimes of modernty)에서, 문학이론가 루카치(Lukács, György)가 리얼리즘 소설과 자연주의 소설을 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서사와 묘사의 구별을 미술사에 적용한다. 마틴 제이에 따르면 리얼리즘은 전형적이고 본질적인 깊이를 다룬다. 서사는 어떤 문학적 텍스트의 단편적이고 개별적 사실들을 넘어서 있는, 의미에 대한 어떤 전형적 의식을 산출한다. 총체가 아닌, 단편에 머물러 있는 자연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 논리를 루카치에게서 상당부분 빌어왔던 한국의 1980년대의 진보적 문화담론의 예에서 발견된다. A. 아이스테인손(Astradur Eysteinsson)은 『모더니즘 문학론 : 그 개념에 대한 연구』(The Concept of modernism) 에서, 루카치는 모더니즘이 ‘실재의 객관적 총체성’을 적절히 반영하는 것에 실패 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쪼개진 표면’을 ‘매개되지 않은’ 방식으로 반영했다고 본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실재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며’ 모든 내용면에서 주관적이 된다. 루카치는 모더니즘이 현실의 왜곡, 즉 세계를 묘사하면서 혼란을 창출한다는 점, 수용자들에게 지각상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루카치는 모더니스트들이 사회현실을 악몽으로 환원시키고 사회현실을 불안에 찌든 부조리한 세계로 묘사함으로서, 우리의 전망을 박탈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리얼리즘에 입각한 루카치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전망에 갇혀 있다. 그것은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이며 보수적인 양식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학사의 논쟁을 미술사에 적용시켜 볼 때, 미술의 중요한 장치인 원근법은 주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원근법도 두 가지가 있다. 통일된 공간을 강조하는 남구의 원근법과 여러 시점을 가지는 북구의 원근법이다.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 의하면, 캔버스의 2차원적 표면보다는 오히려 3차원적 공간을 강조하는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와, 형태들을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 시각적 깊이에로 환원시킴 없이 그 형태들의 다양성을 묘사한다는 면에서 오로지 표면에만 관심을 두는 자연주의가 비교된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알베르티의 창문 맞은편에 있는 세계는 ‘일종의 무대, 즉 그 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텍스트에 근거한 의미 있는 행위들을 연기하는 공간, 그것이 서사적인 미술’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구 미술은 평평한 캔버스 위에 묘사된 대상들의 세계가 우선시 된다. 이 대상들의 세계는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감상자의 위치에는 전혀 무관심한 세계이다. 게다가 이 세계는 알베르티의 창문이라는 틀 내에서 전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확장한다. 1980년대 비판적 리얼리즘이나 사회적 리얼리즘에 많이 사용되었던 서사적 장치는 무엇인가를 발언하기 위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전형적인 배우들을 불러들였다. 공성훈의 최근 작품에도 배우는 여전히 나오지만 화면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다. 그것은 차라리 방관자적인 관객을 더욱 닮았다. 반면 자연주의적 관심은 극대화되어 있다. 무대를 이루는 공간과 그 안의 배우보다는, 세계의 유동적인 표면들에 대한 관심이 강하다. 관객의 시선은 바위의 주름에서 주름으로, 파도의 물거품에서 또 다른 물마루로 끝없이 이동한다.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으로 세팅된 공간 속 형태보다는 세계를 이루는 다채로운 질감을 중시한다. 그것에 원근법이 있다면 다중심적인 북구적 원근법이며, 특히 역동적인 바다 풍경은 바로크적 시각과도 비교될 수 있다. 마틴 제이는 같은 논문에서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rin)의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르네상스의 명료하고 선적이며 견고하고 고정된 그리고 평면적이며 닫힌 형식, 즉 고전적인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바로크는 회화적이며 깊이감을 주고 초점이 모호하며 복합적이고 열려있다. 공성훈의 작품에서 기상 현상이나 바다 같은 유동적인 표면들은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데카르트적 전통의 단일시점에 의한 기하학, 즉 멀리서 신의 시선으로 본 동질적인 3차원적 공간이라는 환영을 거부한다. 이러한 시각체제에 의해 세계는 더욱 불투명해졌고, 유화 매체의 물질성은 강한 촉각성을 낳는다. 물질로 불투명해진 표면들은 해독을 요구한다. 바로크적 시각은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 했기에 멜랑콜리를 낳는다.
공성훈의 작품에서, 표면에서 표면으로 시점의 정처 없는 이동을 만들어 내며 형태면에서 고정될 수 없는 바다, 그리고 이름붙일 수 없는 무한한 계열을 가지는 블루는 이중으로 멜랑콜리하다. 바로크 시대의 회화처럼,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린 흔적들인 물질적 표면은 매혹과 혼란을 동시에 야기한다. 유력한 지점에 의해 한 번에 파악되는 세계가 아니라, 반복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세계는 동일자의 시각 대신에 몸을 타자로 복귀시킨다. 그러나 복귀된 몸은 화면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인물은 익명적이다. 경계가 불확실해진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은 수수께끼를 강화할 수도 있고, 맹목적인 유동성을 한정지어주는 어떤 은유적 이야기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 주체는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원근법의 중심에서만큼이나 의미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거나 해체되지는 않는다. 화면 속 그들은 나지막한 수평선들이 지배하는 저지대의 장면들에 작가가 소심하게 배치해 놓은 유일한 수직적 요소이다. 이 무명씨들은 매우 작지만 응집력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지만, 보다 유력한 일부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리얼리티와 예술의 불가분한 길항(拮抗)관계에 대하여
리얼리즘(Realism)은 단순히 문예학적 형식이나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 그 이상이다. 리얼리즘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사물과 환경에 대응하는 태도이며, 정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리얼리즘은 다양한 관점을 갖는다. 리얼리즘에는 자연과학적,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의 탄생이 사회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나타났으며 -역사적인 사례로서 콩트(Auguste Comte)나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의 과학적 철학과 이에 뒤따른 회화의 사실주의의 탄생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리즘은 자연과학적 객관성을 추종하는 새로운 학문적 태도와 가깝다. 19세기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였던 쿠르베도 자신을 가리켜 사실주의자일 뿐 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하였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현상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하는 엄격한 사실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리얼리즘은 또 다른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 물론 이 인문학적 리얼리즘도 유물론적 객관성과 비판적인 검증을 내포하지만 더 나아가 사실에 대한 인간의 심리와 정서 그리고 감수성까지 포함한다. 사실주의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반성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필자의 신념으로 공성훈을 바라보면, 그의 사실주의는 종점에 가깝다. 그가 설치나 영상작업을 수행하든 혹은 전통적인 방식으로서의 회화를 제작하던지 그에게 리얼리티는 예술과 현실을 잇는 최후의 구명선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성훈의 작품에 반영된 현실성, 즉 리얼리티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메타-모방(Meta-Mimesis)라고 할 수 있다. 그 근거로는 그가 취한 방식이 기존의 이념 속에서 설명하기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외견상 혹은 표면상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작가의 태도에 기인하며, 더 나아가 현대사회와 시각문화를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인 ‘시물라크르(Simulacre)’를 그것과 동일한 전략으로 폭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예술이라는 ‘인공’으로 인공적인 현대사회와 풍경을 비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공성은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예술의 소비행태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는 공성훈의 은밀한 메시지에서도 비롯된다.
1. 예술의 본질은 인공성(人工性)?
서양의 예술철학에서 예술(art)은 일찍이 기술(라틴어로는 ars, 그리스어로는 techne)의 한 방편이었으며, 이러한 분류로 인하여 자연과 대립 관계를 이룬다. 자연에서 소재를 얻어 자연을 대상으로 모방하는 행위와 결과로서의 예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라서, 모순되게도 비창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근세 초 예술(특히 조형예술)을 자유학예(ars liberales)의 경지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고 다시 한 번 18세기 바뙤(Charles Abbe Batteux) 등에 의해 순수 예술(fine art)로 정의함으로써 예술은 창조적인 행위와 그 창조를 실천하는 ‘천재’적인 예술가로써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이후 이 정의 혹은 정언은 수많은 이견에 대립하였으며, 또한 순수라는 미명 아래 조형예술의 근거였던 공예(manufacture)적 속성을 잃게 만들었다. 공예적 속성을 잃었다는 것은 자연의 가공으로서의 예술적 본질을 잃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공예성을 잃었던 것은 예술뿐이었다. 과학과 기술은 오히려 예술이 버린 이 개념을 확대발전시켜나갔으며, 이제 미술은 그들에게 부족한 형식을 기술로부터 차용하는 처지에 놓였다: 비디오를 비롯한 모든 영상예술이나 다양한 설치(installation)에서 사용되는 장치나 재료들은 기술적 차원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공성훈은 소위 순수미술을 교육받았지만, 그 개념의 제도 속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 후 그가 선택한 행로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공과대학에 재입학한 공성훈은 거기서 예술이 버린 기술을 배웠다. 그가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간을 기억하면서 했던 말이다: “학교 다닐 때쯤을 생각해보면, 발이 지상에서 한 30센티쯤 떠서 다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하고 나니 허망했습니다. 화가가 되려고 하는데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서야 할이지 막막했거든요. 그래서 뭔가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미술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유일하게 물질을 다루는 예술인 미술을 제대로 하려면 뜬구름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는 미술대학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공예성을 공과대학에서 익혔으며, 더 나아가 순수라는 미명의 관념론이 아니라 실천과 비평을 겸비한 경험론적 태도를 견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테크놀로지에 착안한 영상이나 키네틱 등의 설치작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개입은 그의 회화작업에서 나타났다. 자연을 재현하는 것, 즉 모방론의 한계와 극복을 위한 노력이 현대미술의 기본적인 태도와 본질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본질에 상응하는 여러 노력이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르의 개척과 스타일의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와 다른 시대적 독창성으로서의 모더니티(modernity)를 생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공리이다. 이 공리 속에서 공성훈은 20대의 젊은 청춘을 고민했을 것이며, 꾸준한 실험과 전시로 이 고민을 노출시켜왔다. 그 고민의 원인들을 들춰보면, 공성훈의 진로에 대한 계기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우선은 80년대 한국미술계의 상황이다. 제도화된 미술은 추상이거나 구상이거나 형식논리에 빠져 있었다. ‘순수’라는 허울로 미술은 단순히 조형적 질서 속에 부여된 감각적인 미를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데, 이를 가리켜 공성훈은 ‘평면성’이라고 가름하였다. 이와 대비되는 영역이 ‘리얼리티’였다.
추상화의 기형적 발전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사실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탈정치성이 아니라, 현실과의 무관한 고도의 관념성이었다. 모노크롬(mono chrome)의 극단적인 추상화와 같은 것들은 한국에서 원래 내재되어 있어야 할 근성을 잃어버리고 장식이 되어갔다. 이 장식은 일반인에게는 4차원에 가까운 관념적 언어로 옹호되었다. 미술은 그야말로 색, 형, 질료만 남은 박물(博物)이 되어갔으며, 이러한 박물들은 미술시장에서 또한 비현실적인 가격과 말로 포장되어 거래되었다. 예컨대 제도적인 미술계에서 미술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모더니즘의 이념을 지우고 형식만을 취한 것이다. 이즈음에서 미술은 현실과의 관계, 즉 ‘리얼리티’를 상실했다. 물론 당시 미술의 탈정치성을 비판하며 등장한 민중미술이란 것도 있었다. 제도적 미술이 지닌 형식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펼쳤던 이 제도권 밖의 미술은 리얼리즘을 존재론적 이념으로 삼았다. 군사독재정권의 반공과 산업 이데올로기에 억눌린 사회 속에서 현대작가들이 운신할 사유의 영역은 좁을 수밖에 없었으며, 거의 동일한 생각과 그 결과를 재생산해내는 현실에 대한 첫 저항이었다. 물론 민중미술을 실천한 작가들도 거의 대부분은 제도적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이 취한 방식도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발전된 양식을 수용하는 한계를 동시에 노출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삼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은 기존의 미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해 줄 가능성을 여는 것이었다. 실제로 팝아트나 즉물적 표현주의와 같은 방식들은 민중미술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실험되었다. 공성훈의 학창시절은 이 두 미술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그는 그 경계선 위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민중미술도 아카데믹한 제도권의 미술도 그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 공성훈은 기술(=인공성)에서 현실을 여는 열쇠를 찾으려고 하였던 것 같다.
2. 설치 및 영상작품: 실용과 외부적 목적을 상실한 기계들
현대미술이 20세기 중반부터 펼친 독특한 역사적 현상으로 지목되는 것 중 하나가 설치미술(installation)이다. 과거 조각이라는 입체적인 조형 장르에서 발전된 형태이지만, 재현적인 성격이나 만들어진 조형물의 자율적인 존재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탈피하여,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 그리고 상황에 더 치중하는 양태를 띤 것이 이 설치미술이다. 임시적 혹은 반영구적인 구조를 설치함으로써 정해진 공간을 현실의 중립적 상태에서 예술적 의미로 재설정하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나아가 설치미술은 퍼포먼스, 해프닝 등과 같은 극적인 성격들과 대지미술이나 환경미술 등과 같은 공간개념의 재 정의를 동시에 반영하는 장르였다. 공성훈에게 설치는 그가 경험하고 의식한 세계의 재구성으로서 보편적인 가치를 갖지만, 그 이면에는 기계, 문명, 제도와 같은 개념들을 물리적인 상황으로 치환하려는 의도로서 수렴되어질 수 있다. '블라인드'는 커튼을 대신하는 현대적인 도구를 그 정해진 용처에서 가져와 작가 자신의 조형적 조작을 통해 다른 의미체로 전환시킨 것이다. 도대체 이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의미를 지시하려는 것일까? 우선 그의 설치작업은 전기로 추동되는 운동이 있다는 점에서 키네틱아트(Kinetic art)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변화가 단순히 물리적 운동뿐만 아니라, 시각에서의 환각적 운동까지 동반한다는 점에서 옵아트(Optic art)까지 포함한다. 여기에는 근원적으로 움직임 혹은 시간을 몸체에 연계하려는 모빌(mobile)의 차원까지 끌어안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60/70년대의 현대조각의 발전을 잇는 계승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겠다. 그러나 공성훈에게 이러한 문제는 기계적 환경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혹은 무의식)을 반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블라인드는 그가 선택한 샘플 중에 하나다. 어떤 것, 이를테면 형광등이나 주방용 집기 같은 것이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지만, 블라인드는 차단과 투과를 동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평면적이면서도 공간 속에 침투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탁월해 보인다. 그가 창조한 이 블라인드 조각-설치는 블라인드 결을 스펙트럼처럼 순차적으로 형광페인트로 도색하고 그 뒷면은 알루미늄 테이프를 사용하여 반사효과를 주었다. 이 블라인드는 의도한 바에 따라 특정한 구조를 가진 형상이 되며, 전기모터로 인하여 가동된다. 기계적 움직임과 반사되는 빛이 명멸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여기서 작가는 리터러시(Literacy)를 제거한 의미의 진공과 함께 ‘인스턴트’한 감상태도 등을 도출하였다. 이 기계(=작품)들은 다니엘 뷔렌의 무의미한 선(線)과 빅토르 바자렐리의 착시 그리고 알렉산더 칼더의 운동을 종합해 놓은 현대미술의 혼성물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공성훈은 그 이전의 현대미술에 대한 독학을 수료한 것을 증명하듯이 이것들을 전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윽고 작가는 개념을 보편적 정의와 맥락에서 떼어내 임의적으로 분해·조립하여 새로운 의미체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열중하면서 동시에 ‘쓸데없는’ 설치-해프닝을 펼쳐나갔다. 그 중 하나인 '예술은 비싸다-입장료 받기'에서 그가 작성한 작품의 논리적 흐름도(flow chart)는 예술 소비의 행태와 메커니즘을 분석한 보고서이다. '자판기로 작품팔기' 따위도 예술작품을 고급 소비재로 정의하는 사회와 제도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전광판이나 자판기를 제작하여 전시장에 설치하였다. 공성훈은 공과대학에서 익힌 기술적 장치들을 활용하면서 그런 조형예술의 허구 - 이것은 조형예술을 둘러싼 담론의 허구일 수도 있다 -를 공격하고 현대미술을 재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고안한 기계들이며, 그 기능을 전환했을 때 파생되는 의미론적 가치들이다.
여기서 기계란 들뢰즈(Deleuze)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기계란 고정된 본성을 가진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성분이며, 그 관계 안에서 변하는 속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기계가 예술작품이 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이 마땅히 지녀야 할 관계성을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공성훈에게 기계들이란 예술작품일까? 칸트(Kant)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체의 목적 외에는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는 순수한 물적 상태가 예술작품인데, 공성훈의 설치작품은 예술적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 즉 메시지를 담는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작가가 경험한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다. 만약 단순하게 자본주의와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이테크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언어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이 설치작품들을 해석한다면 작가의 메시지는 이제 은유적이며 보다 중층적인 의미구조로서 인식된다. 쉽게 말하자면 작품이 표출하는 말은 교묘하게 다의(多義)적이다. 기계들은 보다 정교한 수사학과 의미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이며, 또한 언어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수사학적 구성을 위해 공성훈은 비트겐슈타인 식 혹은 ‘꺽기도’ 식의 언어유희를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유희를 개념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가 실험한 개념유희는 설치와 해프닝에서 적절하게 활용되었고, 마지막으로 그의 회화작품에서도 적지 않은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3. 세상을 그리다 혹은 말하다
공성훈의 그림은 깊게 오래 보아야 한다. 짧은 감상에서는 놓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타 작가의 작품들도 예의상 오래 봐주어야 마땅하지만, 그의 작품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리얼리티는 여기서 시각의 문제로 환원되고, 이 시각은 현실과 가상 혹은 인공에 대한 변별력과 비판력에 대한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의 회화작품들은 얼핏 사진처럼 보인다. 적어도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각정서는 디지털카메라가 포착한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감상이 깊어지면, 의외로 화면의 피부가 매우 강하게 회화적 행위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현실을 모방한 리얼리티와 더불어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벌인 행위와 의도의 사실을 동시에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볼 때에 조금 긴 시간이 요구된다. 공성훈은 대상을 깊게 그리고 정밀하게 본다 혹은 그렇게 보기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이것을 그는 작품을 통해 강요한다.
18세기 낭만주의 회화에 주요 이슈 중 하나가 숭고미(The Sublime)에 대한 도전이었다. 자연의 위대함은 범신론적인 종교였고, 인간의 발길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듯한 풍경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풍경화들은 과거 인간과 역사의 배경으로서 풍경화를 성화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시기를 주목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시대상황을 알 수 있다. 프리드리히의 시대는 산업혁명의 불꽃이 유럽 전역에 퍼졌던 시기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원이 되어갔으며, 개척과 개발의 대상으로 변해갔던 시기이다. 그런 시기에 나타난 낭만주의의 풍경화들은 자연을 신으로 보았다. 즉 범접이 불가능한 스스로의 주체로서 자연은 당시 자연과학과 산업이 바라보던 객체로서의 자연에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지금 자연은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간혹 자연은 인간의 이성과 방어력을 우습게 넘어서며 파멸의 힘을 보여준다. 매번 인간은 그 앞에 속수무책이며, 또한 매번 자연의 위대함을 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또 인간은 자연을 소비하는 일상으로 돌아가 그 위대함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
공성훈에 의한 최근의 풍경화들은 구도에 있어서 프리드리히를 많이 닮았다. 그 유사성은 구도뿐만 아니라, 그림에 담긴 정서도 비슷하다. 물론 시대적 상황과 환경은 다르다. 프리드리히가 그리는 자연은 초월적이며 숭고미를 지닌다. 반면 공성훈의 자연은 인공적이며, 그 숭고미 또한 인공적이다. ‘벽제의 밤’이란 주제로 5번 이상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 그가 그린 자연이란 인간의 이기와 편이를 위해 ‘조작’된 환경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차이는 구체적이 된다. 프리드리히는 적막하고 삼엄한 슐레지엔의 산맥이나 북해의 해변을 찾아다녔던 것에 비해 공성훈은 단지 자신이 거주하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하면 되었다. 간혹 호수나 계곡 혹은 바다나 하늘을 그린 그림들은 프리드리히나 공성훈에게서 공통적으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지극히 독존적인 현상을 보여주곤 있긴 하다.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그리고 언제든 인간의 기대와 희망을 간단히 무시할 것과 같은 절대성이 풍경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공통적이다. 그것에 대해 신앙적 태도를 프리드리히가 보여주었다면, 공성훈의 태도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시선을 노출시키는 부분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전자가 자연의 신적인 현현에 천착하고 있었다면, 공성훈의 태도는 자연의 불확정적 운동과 인간의 근시안적 자연관을 대비시키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성훈의 수사학이 드러난다. 공성훈이 그린 풍경화들은 인공적인 요소들로 채워질 때가 많다. 간혹 그 사이에 드러나는 자연이나 '근린자연'이란 제목으로 제시된 풍경들을 보면, 자연은 마치 신의 음모처럼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 풍경 속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삶, 즉 먹고, 마시고, 배출하는 모습들이 암시적으로 그려져 있다. 불안한 환경 속에서 인간들은 오히려 태연작약하다. 그리고 그들이 설정한 인공적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기계적인 삶을 소비한다. 역설과 모순을 격한 태도로 노출시키는 힘은 공성훈이 가진 능력이다. 약간은 하드보일드한 태도가 있지만, 격한 감정은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시니컬한 정서로 가라앉혀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구조가 회화의 수사학을 이룬다. '벽제의 밤' 주제로 발표된 작품들은 추하고 음습하고 괴기할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 하다. 대개 사실주의를 천명한 작가들이 보여주는 정서의 단순성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약간 복잡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회화의 수사학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며, 공성훈은 그렇게 현실을 경험하고 재현한다. 그리고 이 역설(paradox)은 사실에 사실성을 더함으로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으로 만드는 아주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4. 디스토피아를 창조하다
모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는 나름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다못해 자국민과 타 민족까지 비극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던 독일의 나치(National-Sozialismus: 국가사회주의)도 그들의 유토피아를 상상하였으며, 심지어 이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그리고 없을 그런 세계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든 유사한 상태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한국사회의 현대사를 잠깐만 돌아보아도 이러한 의도와 실천을 찾아볼 수 있다. 온갖 개발로 점철된 나라는 인공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정신병에 가까운 신념에 사로잡혔다. 국민은 유토피아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을 건설하는 기계가 되었다. 즉 수단으로서 인간은 ‘노동력’이거나 ‘인적자원’에 불과했다. 그러한 99%의 기계들은 1%의 지배층들의 목적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아 열심히 살고 먹고, 교미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을 해결하고자 가장 인공적인 자연환경을 만들어놓았으며, 그곳에서 욕망을 분출하고 살았다. 공성훈에게 이러한 환경은 ‘근린자연’이란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근린(近隣=neighbourhood)자연은 이러한 이념과 그 이념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놓은 현대적 환경이다. 근린이란 거리상 이웃된 무엇이며, 물리적인 거리의 가까움과 더불어 친근성 등 심리적인 상황까지 발전할 무엇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근린공원’이라는 것이 있다. 백과사전적 정의로는 “근린거주자 또는 근린 생활권으로 구성된 지역생활권 거주자의 보건·휴양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함으로 목적으로 설치된 공원”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서 또다시 근린거주자와 근린 생활권이란 개념이 전제된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삶과 환경을 제도화하기 시작한 즈음에 배태된 이 현상들과 개념들은 현실을 목적과 수단으로 분류하고 재 정의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그 힘은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사고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자연과 욕망의 결합체로서의 근린자연에는 자본주의와 배금주의에 오염된 인간성을 감추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런 모습들을 작가는 특유의 사실성으로 노출하고 고발한다. 모텔, 개농장, 지역축제, 관광지, 개발을 나대지, 인공호수 등등에서 현대사회의 정치성을 읽어내고 있다면 그 관계성은 관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치적인 언사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사실주의의 윤리강력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사실주의의 속성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더불어 판단을 강요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며 또한 불온하다는 느낌마저 소거되지는 않았다. 공성훈의 발언은 충분히 정치적인 의혹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로 전달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불순하기 때문이다. 이 불순함은 우리가 이미 그의 영상과 개념작품에서 익히 경험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불순한 정치성은 주변적이다.
5. 리얼리즘을 넘어서.......
20세기 미술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실적 재현을 경험하였다. 굳이 표현의 양태를 사실주의라고 정의하지 않더라도 미술은 여러 방식으로 사실성을 보여주거나 이것과 결부되어 있었다. 사실성(혹은 현실성)을 떠난 미술은 장식품이 되거나 아니면 조형의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공성훈에게 있어 ‘사실주의’는 미술에서의 공리를 넘어서는 정언적 명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형식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단순히 그가 사용할 여러 방법론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성훈은 사실주의라는 형식 자체를 자신의 작업을 위해 혹은 작업의 매뉴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언어는 사실을 보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살펴보면, 공성훈에게는 여러 해답이 존재한다. 그의 답에는 임기응변적인 요소들도 있어서 작가가 지닌 사고의 순발력을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숙고와 교정을 통해서 정련된 것들도 있다. 일단 그의 작품에 붙여진 제목을 살펴보면 이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미술에서의 제명(제목 붙이기)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가령 일련번호나 색 혹은 구성의 특징을 간단하게 기술한 이름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현대미술 속에서 유행했던 것이며, 이는 말레비치나 칸딘스키부터 미술의 음악적 opus개념을 대입한 이후 관념의 형식주의에 천착했던 역사를 반영한다. 모더니즘의 이상주의적 익명성은 이런 미술의 태도에서도 읽혀진다. 마치 개체들은 구조에 대해 구성성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보다는 - 이름 또한 전체가 부여한 아주 가벼운 개별성에 불과하지만 - 주민등록번호, 군번, 학번, 전번, 주소지번 등으로 그 정체성을 결정하였다. 공성훈에게 제목은 작품의 의미를 결정짓는 의미심장한 요소이다. 제목은 작품을 개별화된 단일체로 만든다, 즉 고유한 것으로 결정하는 힘을 지녔다. 예컨대 '개방과 국수'에서처럼 개집 안에 놓인 국수를 바라보는 관객은 이것이 개념과 현실 차이를 가로지르는 막연한 거리감 속에서 사유를 유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혹은 현실은 있는 그대로일 수 없다. 이것들은 감각에 의해 왜곡되고 언어에 의해 정리되며, 또한 정치적으로 수정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성훈의 개념유희와 회화는 언어가 가진 힘에 의존하여 기존의 언어로 규정된 현실을 본래의 현실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한다. 제목은 작품으로 전달된 현실 혹은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사유의 프로세스를 재가동하게 한다. 그러니까 공성훈의 작품은 결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결론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반성하게끔 하는 계기와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6. 파편화된 결론
필자가 마지막으로 위의 제목을 들어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는 공성훈의 작업을 종합하기에는 필자의 지적 능력이 그만큼 상응하지 못한다는 반성적인 실토와 함께 그의 작업이 이러한 파편화를 통해 전략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작업의 진도를 설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의지와 능력대로 다양하거나 일관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 작업의 방향과 스타일의 형성과 전개는 그만이 가진 독자적인 영역이므로 필자와 같은 타자가 월권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공성훈의 작업은 다양하다. 그가 다룬 장르만 해도 앞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하고 변화무쌍했다. 설치작업을 하다가 영상과 영상설치를 하기도 하였고, 개념을 문자 그대로 편집하는 해프닝과 함께 관객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 이것이 그가 선택한 마지막 결정이었다고 보지도 않지만 - 전통적이라 치부할 수 있을 회화작업으로 전시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을 바탕으로 임의적인 다양성이나 방임적인 무작위성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몇 가지의 파편을 정리해 보는 것으로 글의 마무리를 짓는 편이 오히려 확고한 카테고리에 그를 가두는 편보다는 더 낫다고 판단된다.
몇 가지 가능한 의미들로 마무리 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의 작업이 어떻게든 리얼리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는 순수재현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은 그의 그림이나 개념 속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되며, 그의 시니컬한 태도로 인하여 조정된 상태로 재현된다. 그래서 작가 스스로 작품의 제목처럼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것은 기존의 사실과는 다른 사실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성훈이 정의한 ‘회화-회화’는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대안적이다. 둘째, 이 대안들은 현대성을 이루는 몇 가지 개념에 부합하는데,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 혹은 기계로써의 작품들이라는 점과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두처럼 회자되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말, “디즈니랜드는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따로 만들어진 환상의 나라”라는 것처럼 인공적인 예술을 이용하여 인공적인 현대의 풍경과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현실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공작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공작을 통해 비현실성이 가공되는 이 이중적 프로세스와 논리가 공성훈의 독창적 작업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비현실성은 현실 위에 떠있는 관념적 유령은 아니다. 그것이 부단히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한......
김정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0세기, 라는 소년
1.
20세기에 우리 모두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미숙하고, 난폭하며, 어리석었다. 20세기는 소년의 세기였으므로, 우리는 대체로 유치하고, 일정 부분 졸렬하고, 아이답게 교활했으며, 천지난만 했다. 20세기는 홍역을 앓는 소년의 세기였고, 앓는 아이인 만큼 가여웠지만, 무자비했다. 20세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줄지어 가는 개미떼 위에 촛농을 떨어뜨리는 아이처럼,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죽였다. 합리적인 삶을 꿈꾸었던 짧은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자신들의 전 지구적 욕망을 위해 서로의 합리화를 눈감아주었다. 그리고 지리멸렬해졌다.
2.
식민의 끝에서 동족끼리의 대규모 전쟁을 겪고, 제대로 추모되지도 못한 주검들을 등에 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살았다. 생존에서 생활로 넘어가려는 시기, 1960년대의 중반에 태어난 작가에게 20세기는 무엇이었을까? 시대가 바로 상처이자, 욕망하는 기계 같았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소년기’를 맞은 작가에게 그 시간들은 어떻게 각인되었을까? 공성훈의 작업 앞에서 나는 자문(自問)한다. 그러자 ‘근대화’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다시 ‘조국 근대화’라는 박정희 시대의 ‘말’을 덧붙인다. 웃음이 나오지만 입이 비리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맹세’하고, 연도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총화단결해서 잘 살아보세를 염불처럼 외웠다. 그러자 수십 년 뒤 ‘짜잔’하고 일산에, 장흥에, 여기에, 저기에 혼성모방형 ‘러브호텔’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러브호텔처럼 생긴 예식장이 생겨났으며, 그런 구조의 집들과 공원들과 거리가 생겨났다. 우리 마음의 기념비들. 공성훈의 작업은 그것을 인화(印畵)한다. 그것들이 만들어진 ‘인공적’이라는 방법론을 원용하면서, 그걸 더 극단적으로 밀어 붙인다. 그것이 작가에게는 매혹이고 혐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업이라는 행위 이전에 작가의 육체에 남겨진 실존의 자국이다. 되풀이 하자면, 공성훈의 작업은 남한의 역사 (여기서의 남한은 남/ 북한의 ‘남한’이 아니라, ‘북’, 없는 진공의 남한을, ‘굳이’ 의미한다.) ‘남한 근대화’의 역사에 대한 진술이다. 작가는 을씨년스러운 시간들을 포개서, 가장 비역사적인 장면에서 역사를 끌어내고, 재구성해서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날렵한 솜씨다.
3.
공성훈은 시간에 날렵하게 대응하는 작가다. 시간에? 아니, 문제에. 이번 전시 팸플릿의 뒤에 적혀 있는 연보를 보니, 이 전시가 열번째 개인전이다. 그 전시들의 제목을 보면서 나는 작가에 대한 내 인상이 맞는 것 같아서 내심 즐거웠다. 작가는 자기가 본 시간에 대해 대응하고, 발언하고 있었다.
91년: 「Blind-work」- 한때 작가는 Blind라고 불리우는 ‘창문가리개’를 가지고 작업했다. 그 중성적인 물질에 무지개 색도 칠하고 둥그렇게 겹쳐 놓기도 하고, 하면서, 작가는 ‘창문가리개’를 가지고 ‘놀았다’ 이 ‘장님놀이’는 놀이의 대상이 Blind였으므로, 그 시절 마구 번지기 시작한 ‘포스트모던’이라는 유행가에 대한 냉소이자, 자신의 작업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알리바이였다. 그는 놀면서 자신의 작가됨에 대한 알리바이를 확보했고, 확보된 알리바이만큼 상처 입었을 것이다. 놀 수 없는데 놀았기 때문에 그걸 견디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반쯤 지워 투명해지거나, 느물댈 정도로 뻔뻔스러워져야 했을 것이다. 그의 세번째 개인전 제목이 ‘발버둥’인 것으로 봐서 그의 태도는 전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93년: 「완벽한 Realty, 완벽한 평면성을 위한 Project」-형용모순, 거짓말. 작가는 문자 그대로 새빨간 거짓말을 통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추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을 구상/ 제시 해보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Realty’, ‘평면성’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우리 미술의 사정, 우리 미술의 난잡한 생태계에서 이 두 단어가 갖고 있는 무게, 뭐 이런 걸 ‘완벽한’ 이라는 수사의 개그로 무력화시키고, ‘Project’라는 유행어를 통해 해체한다, 는 전략. 이건 동시대 미술의 어설픔에 대한 작가의 발언이자, 더 나아가 정말로 ‘완벽한 Realty, 완벽한 평면성’을 구현해 보겠다는 ‘작가적 야심’의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공성훈의 작업 중에 '개방과 국수'라는 것이 있다. 開放과 國粹를 그는 ‘개방-개집’ 안에 뻘쭘하게 놓여 있는 가락국수 그릇으로 바꿔치기 했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플라스틱 개집과 그 안에 퉁퉁 불어터진 국수와 국수 그릇. 이 pun을 pun으로만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작가가 같은 시대의 언술행위에 대해 그토록 심한 모멸감을 표현 했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우리 역사에 대한 회한의 무게가 상당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차가운 시선 밑에 깔려있는 뜨거운 좌절감을 본 느낌이랄까.
97년: 「발버둥」- 공성훈의 작업은 대체로 양가적이다. 코믹하고 비참하다. 이 전시 즈음에 들은 바로는 작가는 벌레처럼 기어가는 자신의 초상을 환등하기 위해 직접 환등기를 만들었단다. 한 80개 정도. 그런 걸 단 한개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일이 얼마만한 노역인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심한 노동이었음은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경제적 문제 등 실제적 문제가 있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그 노동을 하고 있는 자신의 ‘발버둥’을 자벌레처럼 기어가는 영사된 이미지에 겹쳐 보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똑같은 걸 만들어내는 단순 노동과 그 노동의 결과로 보여지는 단순한 영상. 벌레化된 자신을 보여주는 ‘노출증’과 그것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한 반복 노동의 순환. 코믹한 것의 비참함과 비참한 것의 코믹함이 맞물려 있는 고리. 나는 그 순환이 이 뒤로 전개될 공성훈의 ‘밤’에 조금 다른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000년: 「개, 밤」- 글을 쓰려고, 공성훈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싶어서 어느 포털 사이트에 ‘공성훈’이라고 치자 재미있는 글이 하나 떠올랐다. camel이라는 분의 블로그에 있는 글인데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전략)본래 설치미술 분야의 작품 활동을 하던 그가 갑자기 복고적 성향의 회화작품을 선보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술작가이자 평론가인 박찬경이 '공성훈의 배신'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의 그림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순수회화(그는 그것을 회화-회화라 표기하였다)란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가 퍼부은 공격의 내용은 바로 그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맞선 공성훈의 입장은 너무나 확고하며 분명하다. 그는 우선 회화가 브레히트적 의미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박찬경의 비난을 자신이 사용했다는 이른바 '글레이징'이란 형식기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번들거리는' 호마이카 광택제를 입힌 것 같은 고전 서양화의 이상한 유화 표면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나도 이 자리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그림틀 속의 그것은 실물이 아니라 그림이며 가공적 표현물이란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 주었노라고.(후략)”
나는 공성훈과 박찬경이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었는지는 몰랐다. 이 글을 보고, 이 요약된 내용보다는 좀 더 풍부한 말들을 주고받았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왠지 피차 좀 궁색해 보였다. 그리고 그림의 존재 조건에 대한 오해와 곡해의 변주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솔거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그림이 일종의 ‘버츄얼 리얼리티’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고, 그것은 이미-선험적으로-세계를 대상화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공론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왜 이렇게 측은한가.
공성훈이 회화, 또는 회화-회화로 돌아, 혹은 그냥 들어온 것은 앞서 내가 ‘야심’이라고 말한 ‘완벽한 Realty, 완벽한 평면성을 위한 Project’에 진지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 모순이 해결될 유일한 장소로서의 그림이라는 물리적 조건 때문에.
개와 밤은 은유일까? 이만큼 통속적 모티브가 어떤 상징으로 차용됐다면, 그것은 작가가 아직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림의 시운전(試運轉) 중이라고 생각했다. 특정할 수 없는 포괄적 세계의 앞.
두어 번 가본 공성훈의 벽제 집에는 개가 많았다. 그게 작가가 기르는 개인지, 떠돌아다니는 주인없는 개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하여튼. 그림의 대상으로서의 개와 밤. 밤은 집중된 평면이고, 주변에 개가 많으니까, 작가 입장에서는 리얼리티와 평면성(평면성 너머의 공간을 포함한 평면성)을 시험해 보기에 좋은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벽제의 밤」- 작가는 이 제목으로 무려 5번의 개인전을 했다. (2002년 베를린에서의 전시 제목은「Night View around My Home」이었다. 그러니까, 벽제의 밤, 이었다) 매년 1번씩 ‘벽제의 밤’으로 개인전을 한 셈이고, 「개, 밤」까지 이 작업의 범주에 넣는다면 9번의 개인전 중 6번을 벽제와 밤이라는 주제로 한 것이 된다. 대체 ‘벽제의 밤’의 무엇이 작가를 이만큼 집중하게 했을까. 나는 3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본다.
밤의 평면성, 벽제의 사실성, 그리고 ‘벽제의 밤’의 역사성.(집과 가까운 장소라는 편의성도 있겠으나, 그 부분은 생략하자-그게 얼마나 중요한건데, 라는 공성훈의 딴청 피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이유들은 작업에서 순차적으로 탐구되고, 진행되며, 공존한다.
그림이 평면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착시가 공간을 만든다는 것도. 밤은 무한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어둠이라는 벽에 의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뒤틀린 착시의 공간-평면이다.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개의 실존이 이 밤의 평면성을 강화하면서, ‘그림이라는-평면-속의 그려진 공간-속의 밤이라는 평면-을 강조하는 개’라는 기호의 연쇄반응에 의해 ‘가상 평면’, 아마도 ‘환시(幻視)’로 대상화된다. 그림이 환(幻)이라는 상식을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다시 검증한다. 이 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떠안고 있는 노심초사는 이 검증작업의 이면일 것이다. 표면의 광택처리는 그 검증의 기술적인 부분이자, 마침표일테고.
벽제의 밤은 남한의 심리적 투사물 같다. 그만큼 보편적이다. 남한이라는 구조의 實寫적 재현이다. 벽제’는 실제의 지명이고, 가상의 지명이다. 그곳은 변두리인 것도 아니고, 변두리가 아닌 것도 아닌,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비농비도(非農非都) 조차 아닌, 중심이 없어졌기 때문에 중심이 아니면서, 중심 아닌 것도 아닌, 고향 역시 없어졌으므로, 고향도 아니고 타향도 아닌, 그런 공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런 공간의 실재하는 축도(縮圖)다. 너저분한 날(生) 것의 밤. 합리성을 놓쳐버린 근대화/ 현대화는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합리화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게토(ghetto)화 시켰다. '벽제의 밤‘은 그렇게 역사성을 부여 받는다-획득한다.
4.
이번 전시의 제목은「교외․ 여가」이다. ‘벽제의 밤’이 일단락된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는 두드려보던 돌다리를 이제 건넌다. 그 다리를 건너서 본 광경이 교외이고 여가이다. 그러나 전시된 그림들은 전시의 제목에 대한 역설들이다. 그려진 대상들은 만들어진 교외(郊外)-그러니 사실은 교내(郊內)-이고, 즐기는 여가가 아니라 즐겨야 하는 강박적 여가를 위한 장치들이다. 교외로 빠지는 도로가, 거대한 공원이, 모텔들이, 기념비가, 운동장이 그렇다. 이번 전시된 그림 안에서 유일하게 주체 노릇을 하고 있는, 어딘가에서 일탈해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배경은 그가 살고 있는/ 그가 살고 있지 못하는 아파트 단지이다. 작가는 지리멸렬한 시, 공간 속에서 자기 위안을 위해 쉼 없이 운동장을 걷는'운동장', 끊임없이 가족애를 확인하고'호수공원', 자연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호수공원', 그리고 쉼 없이 사랑을 하는-해야만 하는'모텔' 우리의 초상을 떠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위안부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그 인공적인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중첩된 역설. 작가는 혐오하기 위해 인공적인 것을 날 것으로 강조하고, 강조된 날 것의 인공성에 매혹 당한다. 그것이 공성훈의 작업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남한의 모습을 고발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그것에 매혹되는 실존을 통해 혐오하는 방식. 또는 내면 없는 고통의 조립을 통해 외면이 곧 내면임을 입증하는 방식.
거창하게 말해 나는 그것이 20세기의 후반에 남한에서 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상처이고,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20세기라는, ‘소년의 세기’가 남긴 상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광기를 가장한 정상인들의 상행위가 난무하는 지금, 짐짓, 정상적인 체 하면서 차가운 광기를 견디는 작가의 방식이, 그런 근본적인 상처에 정직하게 대응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게토에서, 매혹과 혐오라는 양가적 감정의 순환은 외부가 내부가 되어버린 시대의 광증(狂症)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시점’을 제공한다.
5.
20세기의 악몽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 같은 21세기가 몇 년 흘렀다. 우리는 20세기에 걸렸던‘소년의 주술’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도 그렇고 한반도라는 특정 장소도 그렇다. 남한이라는 우리 몸이 닿는 삶의 공간은 물론, 그렇다. 우리 몸은 너무 빠른 20세기로의 역진(逆進)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공성훈의 작업은 우리가, 우리의 미성숙을 어떻게 기억하면서, 그것을 살아낼 것이냐, 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살아내서 그 ‘미성숙한 합리화’의 역주를 멈추고, 성숙한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인공의 빛 속에서 찾으려 한다. 인공의 빛과 색이 오싹, 하게 아름다울 때는 길 찾기를 위해 그것이 칠해지고, 그 색이 빛으로 비춰지는 순간이다.
황세준(작가)
미술 관계자의 변명 - 나와의 인터뷰 (작가노트)
1. 외도
* 공성훈 을(이하 공을) : 제가 알기로 당신은 지금까지 주로 예술 혹은 미술에 대한 비판 즉 ‘예술에 대한 예술’에 관심을 보여 온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인터뷰에서는 당신의 작업을 일종의 분광기(分光器) 삼아 ‘한국에서 미술하기’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의 스펙트럼을 대충이라도 짚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당신은 이력이 특이하군요.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에 전자공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했네요. 그리고는 다시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군요. 혹시 먹고 살 방편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요?
* 공성훈 갑(이하 공갑) : 당시의 저는 철이 없어서 먹고사는 문제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어쨌든 몇 번 이야기하긴 했지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가 하고싶은 작업의 기술적인 부분을 해결하려는 이유도 있었고, 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체질개선을 하고 싶었습니다.
* 공을 : 체질개선이라니요?
* 공갑 :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발이 지상에서 한 30센티쯤 떠서 다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하고 나니 허망했습니다. 화가가 되려고 하는데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서야 할 지 막막했거든요. 그래서 뭔가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미술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유일하게 물질을 다루는 예술인 미술을 제대로 하려면 뜬구름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 공을 : 당신이 한계를 느꼈다는 뜬구름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 공갑 : 글쎄요. 대학 다닐 때 외웠던 선시(禪詩)가 하나 있습니다.
山是山 水是水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山不是山 水不是水 :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山是水 水是山 :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
山是山 水是水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첫째 행을 깨우치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행부터 익히려고 했던 제 성급함이 못마땅했습니다. 공(空)이 뭔지도 색(色)이 뭔지도 모르면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읇조린 셈이죠. 논리의 극단을 거치지 않은 초논리가 저를 공허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라는 뻔한 사실에서 다시 출발해 보고 싶었습니다.
* 공을 : 지금 하신 말씀은 70년대의 모노크롬 회화, 그러니까 한국적 미니멀리즘 회화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 공갑 : 어느 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사실은 제 자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지금도 제 어휘사전에는 정신, 영혼, 자연, 인간, 자유, 도(道), 기(氣) 등등과 같은 단어들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아니 괄호에 묶여 있다고 하는 게 적절하겠네요. 그런 보편적 용어들은, 외연(外延)에 비해 초라한 내포(內包)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적 배경에 따라서 또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심하게 말하면 착취당하기 쉬운 개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들에 의지하고 있는 미술에 대한 관심 역시 자연스럽게 보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공을 : 비록 모호하더라도 아니 모호할 수밖에 없지만, 보편적 용어에 의지하는 미술은 현실에서 결핍된 것을 이상에 가깝게 현시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초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공갑 : 물론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초월성에 관한 문제에는, to의 문제 이전에 from의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to의 문제에만 과도하게 주목한다면 그 초월성이란 것은 허구가 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개를 들어 별을 보기 전에 제 발이 디디고 있는 곳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만년 전에 반짝인 빛이 던져주는 계시보다 발바닥이 전해주는 대지의 감촉이 훨씬 더 실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결코 보편적 용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가치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예술에서는, 보편적인 가치들이 보다 특수하고 개별적인 용어들을 통하여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본질적으로 시간변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분야인 미술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단편소설이 삶의 단면을 통하여 총체성을 암시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보편적인 가치를 보편적인 용어로 주장하는 방식은 정치나 철학에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 공을 : 그렇다면 당신이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를 관통했던 민중미술에 대한 입장도 궁금하군요. 민중미술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니까요.
* 공갑 : 하지만 민중미술 역시 민중이라는 보편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 공을 : 당신은 추상화(抽象化)의 정도가 높은 거의 모든 단어들을 거부하고 있군요.
* 공갑 : 그런 셈입니다.
2. 스타일 - 일관성
* 공을 : 이제 당신의 실제 작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저번 개인전 기간 중에 열린 포름 에이의 세미나에서 본 슬라이드에 의하면, 작품의 스타일이 일견 산만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더군요. 페인팅이나 목탄 소묘에서 전자 매체에 이르기까지.
* 공갑 : 산만하다거나 다양하다는 것이 문제가 될까요?
* 공을 : 글쎄요. 저는, 예술가의 역할이란 침묵하는 세계에 대하여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답이라는 것이 비록 진리라고 할까 실재(實在)라고 할까 하는 것의 숨겨진 일면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형식이 다양하다는 것은, 형식이라는 것이 작가가 찾아낸 어떤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면, 하나의 예술가로서 당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의 의미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공갑 : 부정은 할 수 없습니다. 저 스스로도, 제 안에 정체성이라고 하는 ‘고정되고 단단한 핵(核)’같은 것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신념으로 삼을 만한 가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만약 저에게 그런 핵이 있다 해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살로 그 핵을 감싼 존재로서 핵이 진동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영화감독은 멜로, 액션, 사극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어도 괜찮고 왜 화가는 문제가 됩니까?
* 공을 : 영화작가와 감독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작가란 명칭을 일종의 가치가 내포된 것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어떤 영화를 단순히 연출했다는 의미에서는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겠지만, 그 감독이 자신의 세계관이랄까 하는 것을 일관되게 천착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관점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바가 가치가 있다면 그 연출자는 작가라고 불릴 수 있겠죠.
* 공갑 : . . . . . .
* 공을 : 따라서, 만약 당신 스타일의 다양함이 일관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전략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편집증적인 것에 대하여 분열증적인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경우도 그런 식으로 볼 수 있을까요?
* 공갑 :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합리성이나 이성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거부를 뜻한다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뒤범벅되어 있는 초현실주의 국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포스트 모던을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체도 모호한데 또 다시 외국에서 빌려온 잣대에 끼워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의 이론적 시각의 표절, 가치 척도의 표절이 작품의 표절보다도 먼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공을 : 이야기가 샛길로 접어들었군요.
* 공갑 : 그렇긴 하지만 한 마디만 더 해야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심지어 피카소조차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작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입체파의 4차원적인 지각체계는 우리에게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동설이 저 쪽에서는 갈릴레이의 목을 날릴 뻔한 사건이었지만, 실학자 홍대용이 주장했을 때에는 중국에 간 우리 사신과 청나라 고관이 재미있는 발상이라며, 안주거리로 삼을 정도의 화제 밖에 되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 공을 : 우리의 시각을 확립해야 한다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 자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입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몇 마디 나누기로 하고 스타일의 문제로 돌아가죠.
* 공갑 : 좋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작업이 제 나름대로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연작을 통해서 추구되는 형식상의 일관성은 아니고, 거리의 일관성이랄까 아니면 위상(位相)적 일관성이랄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술에 대한 예술이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문화나 예술을 바라보는 좌표상의 저의 위치를 가능한 한 원점에 가깝게 하고 싶었습니다. 원점에 서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가까이에서, 제게 항상 낯설게만 느껴지는 예술이나 문화를 간섭하는 여러 힘들의 파동의 위상차를 통하여 미술을 제대로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 공을 : 그렇다면 당신이 미술을 간섭하는 여러 힘들이라고 느꼈던 것들은, 당신의 작품들 그러니까 예술작품자판기라든가 미술관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든가 하는 것들을 통해서 드러난 것으로 본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미술의 제도화, 미술의 상품화 같은 것들이 되겠군요.
* 공갑 : 주로 그렇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미술의 거품을 빼고 싶었던 것입니다.
* 공을 : 현대미술이 사물을 일상적 맥락에서 떼어내어 낯설게 만드는 ‘소격효과(疏隔效果)’를 자신의 중요한 전술로 채용했다고 한다면, 당신의 경우는 미술 자체를 낯설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스타일의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미술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미술의 여러 가지 표현방법을 등가적으로 원용 내지는 차용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당신 작업의 스타일이 다양하게 되었다는 말씀 아닙니까?
* 공갑 :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 공을 : 하지만 당신의 작업을 당신의 작업이게끔 하는 고유한 개성적 스타일, 독창적 스타일의 부재에 스스로 불만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3. 스타일 - 개성
* 공갑 : 대문자 A로 시작하는 미술에 시비를 거는 작업을 할 당시에는 그런 불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제 작업을 보고 미술이 아니라고 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저 자신을 화가로 자칭하기보다는 미술관계자라고 했으니까요.
* 공을 : 매우 자조적이군요. 미술에 대해서 일종의 짝사랑에서 비롯된 애증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어떤 좌절이 느껴집니다.
* 공갑 : 미술이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것이겠죠.
* 공을 : 역사적으로 미술이 중요하게 취급된 시대는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더욱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공갑 : 서구에서는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미술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90년대 들어서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인파가 쇄도하고 매스컴에 미술관련기사가 자주 보도되기도 하고 또 삼사십대의 젊은 작가들의 개인전이 성황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러한 일련의 흐름들이 미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에 걸친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구경거리화, 연예화, 가십화, 상업화되고 있을 뿐인 것 같았습니다. 미술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 진정으로 관계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 공을 : 너무 비관적인 시각입니다. 예술을 수용하는 쪽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척박한 문화적 토양에서 너무 성급한 기대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문화에 있어서는 반대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악화에 물리게 되면 양화를 찾게 되는 거죠. ‘악화의 교육적 기능’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문화나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것은, 비록 그 태도가 적절하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 공갑 :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제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미술이 사회적으로 주변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게도 끊임없이 신화화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술가에게는 거의 무제한의 자유가 용인되고 대중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예술가가 자유롭다는 것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고 책임이 없다는 것은 권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결코 초월적이지 않은 사회, 경제적 논리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신화적인 것들은 뒷켠으로 밀려나서 신기루가 되고 현실적인 작용력을 박탈당합니다. 그리고는 그 질량 없는 외양만이 현실에서 결핍된 것을 가상적으로 보충하는 소비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품이 감상되는 것이 아니라, 포장의 정도가 자본주의 발달의 척도라는 공식에 따라, 화가의 기이한 삶, 돌출행동, 겉모습 그리고 작품의 가격이 감상(=소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작가의 독창적 스타일이라는 것도 그 포장에 붙은 레이블(label)에 불과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 공을 : 오성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를 노래한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예술에 여러 가지 신화적 색채가 덧입혀진 것은 한편으로는 총체적 세속화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도 있습니다. 즉 오염되기 쉬운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실로부터의 적절한 격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 공갑 : 저는 미술의 본모습(体)이 아니라 그 쓰임새(用)를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 공을 : 그리고, 고유한 스타일 없이 한 작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바꿔 말하면 스타일이라는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닐까요?
* 공갑 :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술관계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제 작품이 무언가를 표현하기보다는 발언하기를 원했고 그러자면 상품화하기 쉬운 스타일을 피해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감각적인 스타일을 피해가고 싶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스타일을 한 작가의 고유한 개인성이 물질적으로 형식화된 것이고 이때의 개인성이란 것을 주로 체질이나 신체적 특이성에서 배어 나오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결국 스타일은 흔히 감각이라고 부르는 애매한 것에 의존하기 쉽습니다. 좋은 스타일은 타고난 좋은 감각을 다듬은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미술이 감각에 호소하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각’이나 ‘본능’이라는 개념은 블랙박스적인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어떤 작용을 지칭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물렁물렁한 감각으로는 제가 떠나려는 먼길에 쓸만한 지팡이를 만들 수도 없고 그리고 너무 순진해서 길가에 나 있는 작은 꽃송이에도 유혹 당하거나 속기 쉽기 때문에 믿음직한 안내자가 되기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감각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미술이 시간을 초월해 감동을 주는 근거가 되긴 하겠지만, 스스로 진보하거나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결국 미술에 있어서 감각이란 안고 가야 하는 것이지 결코 앞장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누가 감각 그리고 감각적인 스타일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제게는 마치 사랑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신파조의 순박한 복음처럼 들립니다. 제 감각을 홀릴 만큼 너무도 아름다운 것들은 항상 어딘지 파렴치하게 느껴집니다.
좀 장황하게 설명했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스타일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고안물이나 구조물일 뿐이므로, 그때그때 제 작업의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을 찾아나갔을 따름입니다. 스타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사줄 것도 아니니까요.
4. 매체
* 공을 : 지금까지 당신이 미술에 접근하는 방법을 한 마디로 ‘소거법(消去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타일마저 제거함으로써 당신은 스스로의 ‘작가성’을 증발시키고 있습니다. 즉, 전통적인 유화에서부터 하이테크를 사용하는 작품까지 매우 다양한 스타일들이 그야말로 범람하는 미술계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한 작가 차원에서의 다양한 스타일은 묻혀버리기 쉽습니다. 보다 일관되고 강력한 목소리가 경쟁력을 가지기 유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찾아본다면 당신에게도 스타일들의 스타일, 메타스타일(meta-style)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 있기는 있습니다. 박찬경씨가 말한 대로 직역주의(literalism)라고나 할까요. 대부분의 작품이 말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작품과 제목의 관계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매체에 있어서도 환원적인 입장이 보입니다. 이번 개인전의 작품도 그렇지만 대체로 수작업에 의한 로우테크(low-tech)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당신의 경력이 주는 기대에 어긋나게도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시죠.
* 공갑 : 먼저, 저는 하이테크를 사용할 만한 돈도 기술도 없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초기를 경험하지 못하고 막바로 현대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저로서는, 산업화 초기의 테크놀로지를 체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항상 있습니다. 개인 발명가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 시대의 테크놀로지들이 제 개인적인 능력의 범위에서 다루기도 더 편안하고 신화화되기 이전의 형태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더 정직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블랙박스화한 과학기술, 즉 입력과 출력은 알 수 있지만 시스템 자체는 마법상자와 같은 기능을 하는 첨단 테크놀로지들은 상대적으로 제 개입을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왠지 유토피아의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 같아 꺼려집니다.
* 공을 : 미술에 있어서 매체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간섭하는 적극적 기능을 합니다. 모든 표현이 모든 매체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감성에 호소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촉진시키고 미술의 표현 가능성을 넓혀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테크놀로지 아트의 역할이 아닐까요?
* 공갑 :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테크놀로지 아티스트로 분류되기도 싫고 테크놀로지와 미술을 결합시키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박 겉 핥고 스쳐지나간 문제 중의 하나이지만, 테크놀로지를 미술의 매체로 채용하는 문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제가 ‘외형주의적 과학주의(externalist scientism)’라고 부르는 입장일 것입니다. 과학주의란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오해를 바탕으로 과학의 합리성과 진보에 대하여 맹목적 신뢰를 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외형주의적이라는 것은 가장 나쁜 의미에서 형식주의적이라는 말입니다. 그 신념은 최첨단 매체를 사용하면 최첨단 미술이라는 식의 손쉬운 등식을 만들어 버립니다. ‘新卽善(the newer, the better)’이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이죠. 그리하여 겉모습뿐인 전위주의의 변종으로서 상업적 저널리즘의 선정주의와 영합합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네온은 이미 1930년대에 상해의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고 텔레비전은 1929년에 실용화되었는데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전통적인 회화보다 더 첨단미술일 수가 있습니까? 혁신(innovation)을 가치로 삼는 과학에 대한 열등감에서 미술마저도 첨단을 부르짖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공을 : 아마 그런 식으로 미술을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공갑 : 그래야겠지요.
* 공을 :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더니즘의 기획 중의 하나가 예술과 삶의 경계를 철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요즈음의 비디오 아트나 컴퓨터 아트야말로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 공갑 : 전통적인 미술에서는 그 매체에 익숙해지기까지 상당한 수련과 재능을 필요로 했지만, 비디오나 컴퓨터는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점점 쉬워지고 강력해지고 있는 그러한 매체들은 아마 땅 끝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확산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기호만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질감이 결여된 신호처리(signal processing) 미술에 별 매력을 못 느낍니다. 마치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를 가졌지만 차가운 피가 흐르는 여자를 애무하는 느낌입니다. 물질임을 거부하고 단지 기호(digit)로서 존재하는 미술은 위생학적 결벽증의 징후로 보입니다. 저는 촉각적 관능, 땀 냄새가 나는 관능,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라는 영화의 관능이 더 좋습니다.
5. 변신
* 공을 : 그토록 다양한 작업을 해오면서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떻습니까?
* 공갑 : 항상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렸다면 실력이 늘기라도 할텐데 작업이 매번 바뀌다 보니 뭔가 쌓이질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걸레를 쥐어짜듯 작업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제 작업에 관성이란 없었으니까요.
* 공을 : 대부분의 작가들이 스타일에 고착되어 있는 반면, 당신은 원점에 고착된 채 끊임없이 맴돌며 작업을 해나간 느낌입니다. 원점을 고수하고 결론을 미리 내린 이후에야 작업이 진행되는 방식은 자칫 창작상의 변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영양분이 분석의 칼날에 묻어나가 버리니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릅니다. 비록 당신의 작업이 당신 개인적으로는 소모적이었더라도 우리 미술판에서는 얼마나 생산적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즉 문학비평이 문학에 대한 문학이고 미술비평도 미술에 대한 문학으로서 가치를 지닌다면, 당신의 작업과 같은 미술을 통한 미술미평은 미술로서의 적극적인 가치를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미술을 되짚어보고 반성하는 기능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역할일 뿐입니다. 원점에 선다는 것은 퇴행적이기 쉽습니다. 원점이라는 위치가 전망을 넓혀주기는 하겠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도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서둘러 말한다면, 당신 작업의 생산성은 미술의 전제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담론을 생성해 냈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 공갑 : 제가 그 동안 해온 작업이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비는 시비의 맞대응이 있어야 생산적이 됩니다. 반항의 표현으로 보이는 찢어진 청바지를 상품으로 파는 세상은 시비에 너무도 관대합니다.
* 공을 : 당신의 이의제기가 주로 미술관 내부에서 이루어진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 공갑 : 그럴 겁니다.
* 공을 : 그렇다면, 96년의 MANIF전에서 선보인 풍경화들은 새삼스러워 보였습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공갑 : 우선은 잘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트 페어라는 상업적 공간에서 제 그림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그림이 먼지로 그려진 그림이라도 과연 사줄 것인가 궁금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먼지그림인지 알아 챌 수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굉장히 더러운 그림이었거든요.
* 공을 : 그래서, 팔았습니까?
* 공갑 : 싼 값에 하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 .
* 공을 : 먼지그림 이후로, 당신은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몸을 소재로 말입니다. 이전의 작업들이 자신을 숨긴 채 외부상황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슬라이드 작업들에서는 자의식이 배어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비걸기를 포기했습니까?
* 공갑 : 단지 초점의 이동일 뿐입니다. 분명히 모순적인 상황이 있기는 한데 도무지 그 정체가 표적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였고, 그렇다면 나야말로 그러한 상황이 압박하여 만들어낸 증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미술에 시비걸기가 미안했습니다. 시비걸기에는 너무 허약해 보였으니까요. 시비를 걸고 있는 제가 위악적(僞惡的)인 것만 같았습니다. 위선이 선을 행할 의도의 부재라면 위악은 선을 행할 용기의 부재, 선행의 결과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에서 나오는 비겁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공을 : 어찌 보면, 예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주장하기보다는 자꾸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미술이론이 발달한다는 것이 그 증거처럼 보여집니다. 과거에는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미술가와 미술대중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가능했지만, 오늘날에는 미술의 역할과 정당성에 대해서 작가 스스로가 정의를 내리고 그 결단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업을 꾸려나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당신은 참으로 오랫동안 영점조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발버둥’이라고 이름 붙인 작년의 개인전에서 부유하며 몸부림치는 자신의 변태적인 모습은 영점조정의 마지막 대상으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듯이 보입니다. 상황에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변신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김현도씨의 말대로 당신의 변신이 점입가경에 들어서기를 기대합니다. 상투적인 결론 같기는 하지만, 우리 미술판에서는 좋은 작품이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겠습니까.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 공갑 : 감사합니다. 딴청부리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공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