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의 패턴
19세기 러시아의 문예평론가인 체르니셰프스키(N.G.Chernyshevskii, 1828~1889)는 “생활을 재현해내는 것은 예술의 일반적인 특징이고 그의 본질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일상과 주변을 반영한다는 것은 예술의 고유한 본질적 특징 중에 하나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사회와 문화를 담아내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미술사에서는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일상적 관점 이후, 20세기 미술을 통해 일상의 사물과 사건은 예술의 주요한 주제와 관점으로 인식되어 왔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주변환경과 일상을 기록하려는 목적을 넘어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거시적으로는 사회와 문화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주변 환경을 읽어내고 있다. 그러나 일상에 주목한다는 것이 단순히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느냐, 그것이 단지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하는 점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상원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현대인의 일상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며 단순히 미시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의 일상적 구조까지 확대하는 접근을 통해서라는 전제 하에서 다루고 있다. 특정한 일상의 모습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성격으로서의 일상성에 주목했던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일상성 논의를 바탕으로, 단지 일상의 표면들을 그리는 데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회전체의 성격을 조망해볼 수 있는 도구로서의 일상의 모습을 읽어 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상원은 그의 회화 작업을 통해 오랫동안 일상 속에서 보여지는 현대인의 패턴을 관찰해 왔으며, 특히 여가생활에서 발견한 공통된 패턴에 주목하였다. 작업은 우선 공원이나 산, 수영장, 스키장과 같이 현대인들의 휴식과 레저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수집된 이미지는 부감적 시점이나 파노라마 시점으로 조합하여 거대한 공간을 포함한 대형회화로 제작이 되거나, 패턴화 된 개개인의 형태를 드로잉하여 애니메이션으로 편집되기도 한다.
사회학적으로 생활시간은 수면, 식사와 같은 생리적 ‘필수시간’과 사회적 존재로서 노동, 참여와 같은 사회적 ‘구속시간’, 그리고 이 두 필수적인 시간을 제외한 자유로운 시간으로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선택시간’으로 나뉘고 있다. 여가, 즉 이 자유로운 선택시간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용되는가에 따라 이 자유시간에 펼쳐지는 활동의 질은 각각의 개인적 취향을 넘어, 사회적?문화적인 배경을 포함한 사회문제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시간 감소와 레저시간 증대로 ‘여가’는 심리학이나 사회인류학적인 연구과제를 넘어, 정책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연구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가 이상원이 현대인의 ‘여가생활’에서 발견한 공통된 패턴은 이러한 정책적 배경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근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여가활동은 정책적(강제적)으로 발전되었는데, 통행금지의 해제, 해외여행의 자유화, 프로스포츠의 대중화, 레저타운정책 그리고 2004년부터 시작된 주5일 근무제도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단시간에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사한 노동조건의 일반인들의 여가를 대중화, 대량화 그리고 획일화 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원은 이러한 환경에서 ‘여가’의 개인화, 사유화와 같은 본질적 특성과 대중화, 획일화로 나타나는 가시적 현상 사이에서 포착되는 아이러니한 차이를 발견하고 현대인의 생활패턴(Pattern of Life Style)을 유희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차림으로 공원에서 조깅을 하거나, 유사한 모습으로 스키를 타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이미 개별적 특성을 잃고 익명의 대중을 대표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반복된 행위는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종합적인 움직임에 가까우며, 대중 혹은 무리의 요소로 보인다. 즉, 여가활동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개념은 매우 주체적이고 사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패턴으로 표현되는 순간, 바로 객관적이고 공공적인 행위가 된다. 이것은 개인의 생산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소비적인 면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원이 선택하고 읽어내려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 때문에 그의 회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감성과 관념을 배제한 채 관찰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표정이 제거된 익명의 ‘어떤 이’로 표현이 되어있다. 이상원의 회화는 대부분 내려다보는듯한 시점으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다른 레벨에 위치해 있어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화면에서도 각각의 인물은 복합적인 시점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는 시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의 ‘낯설게 하기’가 회화에 적용이 되어,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장면들을 지루하지 않고 약간은 특별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즉, 매우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사건과 행위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공공성을 강조하려는 약간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최근 이상원은 작업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해나가고 있다. 회화작업을 근간으로 하지만 이러한 기본 평면으로 움직이는 화면을 연출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 'Run Project'는 공원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각각 반복적으로 조깅하는 사람을 그려낸다. 그리고, 익명화된 수많은 사람들의 회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펼쳐내어, 마치 커다란 벽지(Wall paper)를 보는듯한 패턴으로 표현한다. 이 회화 이미지들은 또한, 유사한 행위를 하는 다수의 이미지를 중복시켜 마치 한 사람이 조깅을 하는 하나의 영상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편집한다. 다시 말해, 회화라는 평면중심에서 설치작품과 영상작품으로 확장되며, 또한 가능한 어떠한 장르와도 융합하여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최근 국립국악원의 공연 '피리그림'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회화영상이라는 새로운 시도로서, 음악과 미술, 그리고 공연예술이 조화롭게 구성된 복합예술로서의 가능성으로 보여주었다. 이상원이 시도하는 작업영역의 확장은 그가 주목하고 있는 일상의 소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상에서 발견한 현대인의 생활 패턴들을 주변 환경에서 읽어 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는 그가 발견한 일상의 패턴을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특정한 문화공간이 아니라, 도심의 거리, 공원, 스포츠매장과 같은 생활공간에서의 감상을 가능하게 하였다.
주변의 사소한 일상에서 현대인의 패턴을 읽어 내는 이상원의 특별한 관찰력은 일상적 행위의 나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 구성원인 개인의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의 모습을 좀더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작가 이상원은 회화를 근간으로 타 영역과의 소통에 대한 시도와 실험을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성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자신만의 시각 찾기
화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도입할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대상에 내재된 특성과 의미를 해석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하거나 추상화하기도 한다. 사실적인 표현의 경우에도 대상에 근접하여 특정 부위에 집중하여 정밀한 묘사를 할 수도 있고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세부묘사보다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자신의 고유한 조형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작가 이상원은 작품의 소재를 찾기 위해 우리의 일상에서 사람들이 군집된 장소를 관찰한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하여 모여든 수영장 속의 인파나 바닷가의 해수욕 인파, 공원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나 겨울 스포츠를 대표하는 스키장에 운집한 스키어들이 그가 관찰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 작가는 이러한 인파의 군집에서 일상적인 삶의 고달픔뿐 아니라 이를 해소하려는 휴식과 여가를 동시에 발견한다고 말한다.
미술의 역사를 살펴볼 때 도시인의 삶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인상파 시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린 대상은 당시 유럽에서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도시에 집중되는 생산시설과 여가시설, 그리고 그 시설에서 노동하고 휴식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낙관적인 생활태도와 그들의 환경에 관한 것들이었다. 모네가 그린 거리 풍경과 드가가 그린 극장 안의 관람객이 그랬으며 르노아르가 그린 야외 무도회가 그랬었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적의 환경에 군집하여 생활하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에 의해 그들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호칭을 얻기도 한다. 산업화 이후 인간의 삶은 전원적인 농촌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로 많은 사람들의 집중을 초래하였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집중된 도시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낼 수 있는 단일한 성격을 벗어나 수없이 다양한 사정과 사연이 얽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부대끼며 거대한 도시의 삶을 엮어내서 마치 도시 자체가 살아있는 거대한 유기체처럼 진화하고 창조하며, 소비하고 소멸한다.
한 장소에 군집한 개체들은 구성원간의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이상원의 화면에 들어온 사람들도 상호 단절된 고립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삼오오 어울려 대화하고, 갈등하고, 협동하면서 전체 화면을 구성한다. 작가가 구성하는 화면은 이러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화면에 담기 위하여 캔버스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개별 인물의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으며 한 화면에 이들 모두의 행동을 관찰하는 유용한 방법은 부감법적인 시각일 수밖에 없게 된다. 평균적인 사람의 눈높이에서 군중을 관찰하는 것은 인물의 중첩에 의해 그 개체 하나하나의 속성과 행위를 파악하기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상원의 작품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는 소곤소곤하는 속삭임과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 동료를 부르는 외침과 위험에 처한 사람의 비명, 아이의 칭얼거림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등이 들리는 듯하다. 화면을 관찰하는 관람자들에게 과연 그들의 대화와 외침은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우리가 이상원의 작품에서 친근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와 소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듯한 파노라마적 광경을 펼쳐 보여주며 그들의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따뜻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작가의 손길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계훈 (미술평론가, 단국대학교 교수)
모더니즘 이후, 그리고 라이프스타일
이상원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원거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우리의 군상이다. 과거 히에로니무슈 보쉬나 우첼로, 브뤼겔처럼 한 사람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을 멀리하고 인간사를 객관화시켜 무언가의 의미를 불어넣고자 할 때 종종 쓰인 방법이다. 인간에 대한 묵시적 시각을 담거나 전쟁과 기아에 대한 공포, 우의와 교훈을 표현하고자 할 때만 인간은 객관적으로 대상화 되었다. 반대로 왕이나 유명한 인물, 성서의 내용과 신화를 그릴 때에는 철저히 주체를 중심에 부각시켜 주관적 심상과 센티멘탈리즘, 낭만적 극화의 스포트라잇을 부여했다. 따라서 지금 보면 다빈치나 뒤러, 라파엘이 보쉬나 브뤼겔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원이 지금 이 시대, 특히 시장주의와 상업주의의 예술 속에서 살아남기 편리한 후자의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전자를 택한 이유를 묻는 것은 그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는 이 시대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묻는 것으로 네러티브의 첫마디를 던진다. 첫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무도 더 이상 역사나 이상, 혹은 이념이 무엇인지 묻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따져 물으며 추구하는 일이란 자기를 이해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의 맥락을 이해해야만 하는 혹독한 과정이다. 이 커다란 대아(大我)의 ‘나’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나(I)’이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알파벳 ‘I’가 상징하는 이상(Idea)이나 이념(Ideology)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의 현실이자 낭만이었다. 반면 지금 세대 사람들은 소문자 ‘i’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정 우리는 이데아에서 벗어나 작은 ‘i’의 인터넷(internet) 속에서 정보(information)를 찾아 해갈하며 아이팟(i-pod)의 음악소리에 파묻히거나 이미지(image)에 사로잡혀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고 있다. 즉 자기 삶의 최대만족을 일(work)에서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life-style)에서 찾는 현상이 바로 이 시대의 삶이다. 이 라이프스타일을 이끌어주는 두 개의 수레바퀴는 시간과 취미이다. 그리고 이 수레를 이끄는 동력은 당연히 경제적 여유이다. 이 동력을 얻기 위해 모두들 각자의 모든 에너지를 기꺼이 발산한다.
이상원은 내가 알기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새로운 풍경의 문제를 예술로 끌어들인 거의 첫 번째 작가이다. 라이프스타일, 즉 누가 보람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가라는 문제보다는 과연 누구보다 경제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멋진 삶을 꾸려보는가라는 화두는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온 긴박함이지만, 사실 이 용어는 예술가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이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예술의 역사를 도식해 보자. 원래 예술이라는 용어는 협소한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라는 용어가 훨씬 보편적이었다. 문화영역은 의미의 영역이었으며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애써왔던 가상적 형식의 노력으로 이해하면 간편하다. 이에는 예술(art)과 제식(ritual)이 대표적인 주축이었으며 그 누구라도 언젠가는 체험하며 두려워할 죽음이나 비극과 같은 존재론적 곤경에 대한 대항마였다. 이때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통합체를 이루려는 수단이었고 종교는 각각의 시대마다 문화의 통합체를 이루려는 추구였다. 이 통합체를 해하려는 대상에 대해 종교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 후 서구에서는 아우슈비츠가 동양에서는 제국주의가 각자의 종교를 무력화시킨다. 더 이상 종교 내 문화는 존속치 않고 기성의 규범과 양식을 타파한다. 이 새로운 시도를 우리는 모더니즘이라 배웠다. 모더니즘은 부르주아 세계관에 대한 맹렬한 반발이자 20세기 서구와 동양의 창조적 기치와도 같았다. 테마로서 규범 특히 부르주아 규범에 대한 반발, 양식적으로 심리적 거리의 소멸, 내용과 형식보다는 미디어 자체의 추구 등 세 가지로 크게 요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 규범이란 그리스 시대의 문화우위론의 바탕으로 비롯된 기독 로마 문명의 카테고리이며, 양식이란 모름지기 이 규범을 상식으로 삼아 모든 예술을 미적으로 극화시킨다는 내용과 형식이다. 당연히 이 상식과 상식의 틀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발생하며 생각하며 학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동양에서도 유불선 사상 내의 규범과 상식 아래 진행된 문화라고 보면 서구와 그 과정의 역사가 별반 다를 바 없다. 다만 모더니즘의 승리의 아이러니는 규범을 장악하던 통치계급이 자신들의 반발이던 모더니즘을 수용하며 따랐다는데 있다. 통치계급이, 보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사회 엘리트들이 자신들에 부합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 새로운 여력도 에너지도 이유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엘리트들은 모더니즘에 보기 좋게 복수를 한다. 이 복수는 자신들이 더 나은 사상이나 예술형식을 발견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을 자신들의 주특기인 경제와 상업의 올가미에 몰아넣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라이프스타일은 기존의 규범에 개의치 않고 사는 삶, 규범의 질서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무심함, 즉 모더니스트와 같은 삶을 일컫는 용어였다. 이러한 예술가나 누릴 수 있었던 삶은 최근의 젊은 세대들에게 확산되었고 이들은 기존체계에의 편승이나 반발이라는 이원적 양태를 새롭고 극적으로 개발해냈다.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도 외롭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는 예술가까지 도리어 이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수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믿고 학습했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가 있는지에 대해서 사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러한 정황에 대한, 이러한 시장성에 대한 반격과 재반격의 지리멸렬일 뿐인 것 같다. 다만 글로벌리즘이라는 자유경제론의 찬양용어가 문화계에 침투해있을 뿐이다. 경제학자 슘페터(Joshep Shumpeter)의 “재화의 교환은 성배의 값싼 대체물이다(The stock exchange is a poor substitute for the Holy Grail)”라는 문구처럼 모든 사상과 기치는 경제라는 괴물에 몰려있으며 이념과 믿음은 괴물에 대체되어있다. 현재 예술의 화두 역시 경제용어 글로벌리즘이다.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다. 미적 가치나 규준이나 출생지도 없고 다만 스톡 교환만 되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예술시장이 이미 단일화되었기때문이다. 사실 예술의 형식과 의미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 같이 진보한 학자 역시나 이미 피로감을 드러낸 예술을 가리켜 아름다움/아름답지 못함이라는 이원론적 코드 내에서의 소통의 관철이라고 규정한다. 즉 입에 맞는 음식,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가리는 것이지 음식을 섭취하면서 몸에 좋고 자연과 신에 감사하는 마음의 괴테 고전주의는 지금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예술이 자율권을 갖게 되면, 다른 영역이 그것을 보증하지 않고 스스로 보증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고립과도 다르며 그렇다고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도 아니다. 더 이상 예술은 가능성이 확장된 영역을 미적으로 조절해서 사회를 회복하려는 야심을 갖지 않는다. 이제 예술의 기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상원은 물론 위에서 내가 말한 재미 없는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나 역시나 모르고 살아왔던 이 시대의 정황과 언제나 묻고 싶었던 이 시대 예술이 지니는 의미를 이상원의 회화는 극도로 잘 유도해주었다는 기쁨을그의 관람객과 함께 하고 싶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상원의 회화는 모더니즘의 3대 악명과는 완연히 다르다. 첫째 미디어에 극도로 집착하는 모더니스트가 아니다. 둘째 엘리트 규범에 대한 반격과 재반격의 기치로부터 자유롭다. 셋째 심리적 거리의 제거, 즉 직접적 노출 및 감각에의 직접적 호소를 자제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을 차례로 명상한다. 산과 바다, 풀장, 리조트, 연이 날리는 한강, 스키장에서 모두들 즐겁게 보이며 무엇을 고민하며 왜 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알 필요가 없다. 너무 편해 보이고 유쾌하며 서로 방해 받지도 구애 받지도 않는 평화로움. 우리 이전 세대가 꿈꾸어 봤을 법한 풍경. 그러나 이러한 풍경을 가능케한 놈, 글로벌리즘이라는 괴물의 그림자를 이상원은 은연중에 연출한다.
대문자 ‘I’의 ‘대아’ 혹은 ‘자아(self)’에서 소문자 ‘i’의 인터넷(internet)과 아이팟(i-pod)이 주는 고립(isolation)으로의 이행과정과 나아가 에고(ego)의 대문자 ‘E’가 갈수록 이-머니(e-money)나 이-캐피탈(e-capaital)과 같은 경제(economy)에 심적으로 혹사되어(exhaust) 간다는 염려를 이상원의 회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뿐일까? 정말이지 회화에서 통례적으로 볼 때 사람들을 작게 그리며 원거리 시점을 적용한 사례의 회화들은 무언가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쉬의 회화에는 신이 내리는 경고라는 해석과 그가 악마의 숭배자라는 두 가지 해석이 동전처럼 따라붙는다. 피터 브뤼겔의 회화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우화라는 해석과 당시 신권에 대한 조롱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우첼로의 전쟁화는 전쟁의 공포와 이에 대한 우려라는 해석과 당시 집권자를 전쟁신으로 묘사했다는 이중적 해석이 뒤따른다. 역시 이상원의 그림에서 나는 평화로워 보이며 유쾌하기까지 한 그의 화면에서 더욱 치열해지는 내 다음 세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아픔이 보인다.
이진명 (미학, 큐레이터, 아트스콜라 상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