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Project with Korean Art Museum
로그인  |  회원등록  |  English    Contact us

아티스트

Home > 참여작가 > 상세보기

photo

신미경,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출생

1967, 충북

장르

조각

홈페이지

www.meekyoungshin.com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Email

(전시전경_국립공예디자인센터, 슬리포드), 2014

이전
다음

번역되어진 문화 – 신미경의 조각

“철학은 번역 혹은 번역가능성의 논제에 그 근원을 둔다.” 
(자끄 데리다, ‘타인의 귀’ 1982, 120쪽)

신미경 작가의 연작 프로젝트 “트랜스레이션”은 시공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사물의 형태와 의미가 변형되고 다시금 기호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형태, 장식적 모티브 그리고 종교적인 도상들이 문화의 교류를 통해 변형되는 모습에 주목한다. 고대 고전 조각들과 동양의 도자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비누 버전으로 제작한 그녀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 이 두 문화의 “번역” 과정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즉, 그녀는 이 양 문화간의 교류가 각 문화를 영위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미학적으로 감상될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
실상 번역이란 단순한 언어적 행위가 아니다. 번역은 한 문화에서 제시된 표현들이 국가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이동할 때 자연스레 발생하는 의미의 상실이나 이해의 문제들과 연계된 과정 전체를 일컫는다. 따라서 언어를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이 한 대륙에서 또 다른 대륙으로 이동될 때에 해당 문화에 대한 지식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신미경작가의 “트랜스레이션” 프로젝트는 항아리나 조각과 같은 작품들이 기존의 세팅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되었을 때,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이는 마치 미술관이 장소의 이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과거 실용적, 종교적인 기능을 지녔던 유물들을 역사적이고 심미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비실용적’ 문화재로 변모시키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것이다. 
작가는 이때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번역의 산물을 제시한다. 우선 그녀는 박물관이나 개인소장품인 작품들을 비누로 똑같이 재현한다. 그리고 이를 완전히 다른 문화적, 종교적인 환경하에 놓는다. 자신의 작품을 새로운 문맥 하에 재배치 함으로써 각각의 다른 배경의 관객들에게 이 작품들을 재해석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때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과 평가는 그들 개개인이 처한 환경과 장소, 역사적인 배경지식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연유로 번역은 단순한 번역자의 언어 변환 테크닉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점차 국경이 없어져가는 예술영역에 있어 각 문화들간의 상호교류를 통해 보여지는 문화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다문화 현상 속에서 문화적 경계는 점차 희미해지고, 독창성 내지는 개별적인 특성들은 변모되거나 사라졌다. 예술가들 또한 스스로가 보다 유목민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서 그들의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은 하나의 그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없게 되었다.

15년이 넘게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 신미경은 단일한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을 정의 내리지 않는 혼성문화 속에서 작업해오며 다문화를 몸소 실천해 온 작가이다.
그녀는 젊은시절 유럽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리스 고전조각과 로마네스크 조각들을 처음으로 실제로 접하게 되었다 한다. 이때 그녀는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나 심미적인 부분에 있어서 강한 소외감과 이질감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의 작업에 있어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초기 “번역”작업은 미술관에 소장된 일련의 그리스, 로마시대의 대리석 조각들을 비누조각을 제작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조각을 제작하면서 고대 작품의 포즈에 본인의 몸과 얼굴모양을 넣기도 하고 또한 그 작품에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품에서처럼 다양한 색을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2004년에 대영박물관의 Great Court에 전시되었는데, 전시와 더불어 관객들이 작가의 제작과정을 관람할 수 있는 현장 퍼포먼스도 함께 선보였다.

최근에 들어서서 작가는 그리스 로마 조각들에서 동양의 도자기들을 비누로 제작하는 데로 관심을 돌려 마치 이 도자기들이 역사박물관에 있었던 것처럼 기관이나 상업갤러리에서 전시하였다. 이때 많은 동양의 도자기들 중에서 작가는 특별히 고대 중국의 도자기를 비누작업의 소재로 선택했는데, 이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서 특수 제작된 장식적인 작품들이었다. 
도자기를 일컫는 ‘차이나’라는 명칭의 기원은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소개되면서 부터 비롯되었다. 이 시기 중국 도자기는 유럽인들에게 매우 희귀하고 값비싼 것으로 간주되었다. 
과거 중국에 대한 먼 거리감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이국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게 하였고, 이러한 인식은 중국문화를 장식적인 디자인과 모티브의 형식으로 서양인들에게 ‘번역’ 되어지게 되었다. 18, 19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수출된 도자기들은 서구인들에게는 중국문화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도자기들은 일반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서는 한번도 사용 된 적도, 심지어 선보여진 적도 없었다.  오히려 화상들이나 무역상들이 서구인들의 입맛에 딱 맞는 이러한 종류의 장식적인 도자기들을 공급하면서 중국에 대한 환상과 잘못된 인식을 부추긴 셈이다. 
 
신미경 작가의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수출 도자기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문화적 산물인 도자기가 “재배치” 과정을 통해서 잘못된 해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사 중국양식이라 불리는”chinoiserie” 또한 19세기 유럽의 장식미술에서 비서구적인 형태, 장식적인 모티브 들로 표현되며 많이 선보여졌다 
“번역” 프로젝트를 함에 있어 신작가는 작품 자체 뿐 아니라 작품의 설치와 전시의 방법을 통해서도 도자기 항아리들이 ‘번역’된 것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즉, 그녀는 기존의 항아리 전시에 이용되는 상용 받침대 대신에 특수 제작된 포장용 상자를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항아리를 반사 광택의 스틸 판재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때 도자기들의 받침대에 붙여진 운송 라벨들은 이 작품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장소로 이동되면서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고 또한 ‘번역’되어짐으로써 그 작품의 이동기록을 만들어 낸다. 
또한 작가는 고대중국과 한국의 다양한 형태의 전통 도자기 모양을 실험했는데, 이들중 일부는 장식문양이 없이 단색조의 파스텔 컬러들로 제작되어 색다른 조합과 배치를 선보이며 전시되었다. 세부 묘사에 대한 작가의 열정과 고도의 숙련된 완성도를 통해 탄생한 비누조각들은 백자, 청자 그리고 나아가 유리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원본에 대한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작품 자체 내에서 균형적인 리듬과 비례가 함께 이뤄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2007년에 대영박물관에서 있었던 전시는 이러한 사실의 좋은 예가 된다.
당시 한국백자 ‘달항아리’ 전에서 작가는 그녀의 조각재료인 비누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이때 그녀는 비누 고유의 성질들이 자신의 번역에 대한 입장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생각했다. 즉, 브론즈나 돌과 같은 일련의 견고성과 영속성을 상징하는 조각재료들과는 달리 비누의 가변성은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잘 변하는 비누의 성질은 한때 불변하는 것이라 간주되던 문화에 대한 생각에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부드러움과 무른 성질은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재료로 상징되던 조각재료들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입장을 취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비누라는 대상은 우리가 밤낮으로 사용하면서 삶을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되어왔다. 또한 우리의 살갖과 직접적으로 맞닿으면서 다른 조각재료가 갖지 못한 친밀함을 가져다 주었다. 비누는 사용함에 따라 닳고 마침내는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특성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데, 작가는 이러한 성질 속에서 방랑자적이고 영구적 거처가 없는 자신의 삶의 형태를 반추한다. 또한 비누는 향을 지님으로써 다른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적인 속성을 갖는다. 
이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재료를 선택한 작가의 태도는 한편으로 이탈리아의 예술운동 아르테 포베라와 닮았다. 아르테 포베라운동은 기존의 고급예술운동에 반기를 들고 나온 예술 사조로서 많은 예술작품들이 값싸고 대중적인 소재로 제작되었다. 일반 금속들을 금으로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와도 같이 작가 신미경은 이러한 평범한 재료들을 값진 그 무엇으로 변형, 아니 ‘번역’한다. 
한편, 비누는 일반적으로 깨끗함을 상징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작가의 번역- 화장실 프로젝트는 그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작가는 공공미술기관과 박물관 화장실 안에 비누로 만들어진 불상을 가져다 놓고 일반인들에게 사용케 함으로써 비누조각이 닳아 없어지게끔 유도한다.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마치 역사적 유물마냥 갤러리들에 전시한다. 
이때 관람객들은 이 프로젝트의 가장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즉, 작품을 완성시키고, 작품 각각의 출처를 만들어 낸다. 이점이 바로 실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화장실 프로젝트의 비누작품과는 달리 유물은 한때는 일상에서 쉽게 사용되어졌던 기능적인 사물이었다가 만져지면 안 되는 보존 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역’ 작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작가 신미경은 끊임없이 번역 작업을 행하는 이유에 대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언어로 작품 뒤에 감추어진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유추해 낼 필요에 따른 것이라 이야기 한다. 이때 번역작업은 원본의 형태와 그것에 대한 해석이라는 상관관계에 주목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진품에 대한 논의, 고유성, 복제 등등의 이슈들을 통해 작품과 관객과의 비판적인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오늘날 형태인식기술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3차원 대상을 원본과 똑같이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신미경 작가의 섬세한 수공적 기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이야기하듯이 원본에 대한 유령이라 말할 수 있는 복제라기 보다는 원본에 대한 대리 품에 가깝다. 로마인들은 한때 그리스 조각 상들을 모사하면서 원본과 똑같은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 조각의 원본과 똑같이 완벽한 형태의 조각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미적 역량을 함께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작품들은 그리스 시대의 원본을 능가하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기원이나 문화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미적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이를 넘어서서 대중들에게 통용되는 문화적 관습들과 동시에 각 개개인의 성향과 그들이 느끼는 개별적인 생각들을 표현하고 드러낸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어떠한 문화 전반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술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감성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특히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다른 문화의 관객들이 작품을 대면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신미경의 번역프로젝트는 이러한 창조적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작가는 조각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번역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각은 그 자체로서 번역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형태로 압축해서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한 단면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푸트넘

더보기

당신네 말로는 무어라 말하나요?

손을 씻으려니, 화장실 세면대 옆에 비누로 만든 불상이 놓여있고, 조각상의 표면을 문질러 거품을 낸 뒤 수돗물에 헹구라는 안내문이 적혀있다. 작품의 일부가 내 피부는 비누에 닿아 씻기고 깨끗하게 되는 대신, 조각상은 이전 보다 작아질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종의 전율을 느끼며 비누로 손을 씻는다. 조각 작품으로 손을 씼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한국 작가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 화장실 프로젝트에 일부나마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들은 결국 화장실의 세면대 옆자리를 떠나 갤러리와 박물관 등으로 옮겨져서 닯아진 상태로 전시될 것이다.

비누는 상당히 독특한 구성물인데, 피부에 좋거나 청결과 상관 없어보이는 지방과 재, 또는 산화 칼륨과 혼합된 동식물성 지방이라는 두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누는 ‘비누화’라는 과정을 거쳐 더러움을 제거하는 동시에 정제 역할을 하는 물질로 변화한 화학반응의 결과물이다.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과 알칼리, 계피유의 혼합공정은 BC 2200세기 경 바빌로니아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비누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은 이슬람 문화에서 전해진 것으로서, 오늘날의 비누는 중세시대에 아라비아의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고대의 비누는 씻는 용도로 만들진 것은 아니었다. 비누는 조각에서 흔히 사용되는 재료는 아니지만, 조각의 마무리 단계에서 (마감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누는 특성상 주조도 가능하고, 모델링도 할 수 있고,새길 수도 있으며 심지어 표면에 그릴 수도 있다.  2)신미경은 눈부신 솜씨로 이러한 모든 기술을 터득하였는데, 중요한 점은 작가가 목적에 대한 뛰어남 감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서양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씻음’은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로마 시대 유대(CE 26 - CE 36) 지방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손을 씻은 행위는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씻음’ 의식이다. 빌라도는 복음서 (마가,마태,누가, 요한)에 언급되었는데, 이 중 마태복음에  ‘예수의 운명에서 손을 씻다’ 라는 구절이 있다.‘무언가로부터 손을 씻다 To wash your hands of it’ 은 ‘회피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서양식 표현으로 일반적인 관용어구로 지금까지도 흔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신미경이 강조하듯이, ‘씻는다’는 행위는 여성의 일로 간주된다.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깨끗하다는 것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여성의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손은 다 씻었지만, 또 다른 감정의 전이(轉移)가 일어났다. 내가 손을 씻기 위해 만진 조각상은 복제품인 동시에 실제 종교적 성상의  ‘번역’본이기도 하다. 이 조각의 일부를 닳게 하여 나의 몸이 깨끗해졌고, 성상을 만짐으로써 축복을 받는다. 이는 성도들이 정결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모 마리아상에 입을 맞추어 그 발이 광택이 날 정도로 닳는 것이나, 불교 신자들이 극락에 가기를 열망하거나 평탄한 삶을 기원하며 불상의 머리를 만지는 행위로 인해 불상의 표면이 닳는 행태와 거의 유사하다. 이렇듯 전세계적으로 모든 종교는 성상을 만지거나 씻음을 통해 정결해지는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씻고 만지는 행위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단순한 행위인 듯 하지만 사실은 실용적이고 화학적이며 역사적일 뿐 아니라 문화적이고 성별과도 관련된 매우 복합적인 일이다. 신미경 작가는 이러한 예술적인 프로젝트를 ‘트랜스레이션’ 이란 용어를 통해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면 신미경이 말하는 ‘트랜스레이션’ 즉 ‘번역’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움베르트 에코는 그의 저서 “생쥐인가 들쥐인가, 협상으로의 번역” (3)에서 번역의 기준을 정립한 바 있다. 그가 첫번째로 언급한 것은 ‘본래 뜻대로 번역하기’(즉, 한 언어를 있는 그대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4) 신미경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몸을 웅크린 아프로디테 2002 (이하 아프로디테 2002)’를 살펴보자. 이 조각상은 대리석처럼 제작된 비누조각으로 나무와 철재로 된 뼈대에 비누를 주조하고 조각한 작품으로 크기는 90x90x70cm이다. 이는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115 x 74 x 58 cm 크기의 복제본을 다시 루브르에서 주조한 것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 이 로마시대 복제본은 비엔나의 비너스라고도 불리며, 200 -240 BC 사이에 활동했던 디오달라스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상 이 조각상의 포즈는 여러 버전으로 복제되어 왔는데, 그 중 대부분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프로디테 2002 는 작가가 미의 여신이 목욕하는 중 누군가의 방해를 받은 순간을 표현한 널리 알려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캐스팅한 것이다. 여기에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수도 있겠으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이것이 한 언어를 있는 그대로 다른 언어로 옮긴 “본래 뜻대로 번역하기”인가 하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가정은 옳지 않다. 종교적 의식이나 일상 의례와 분리된 독립된 미학으로서의 조각은 전적으로 서양식 개념이다. (5) 신미경 작가가 서울대학교 재학시절부터 배우고 기술을 습득하고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서양식 조각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동경예술대학교로 유학간 김복진에 의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고, (6) 일본은 이 전통을 메이지 유신 초기에 주로 이탈리아를 통해 받아들였다. 내가 신미경의 아프로디테 2002를 ‘본래 뜻대로 번역하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한국과 영국에서 교육받고 작업해온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서양의 이미지를 동양적 형태로 번역함으로써 인체를 미의 기본 범주로 여겨온 서양식 전통에서 유래한 여성 조각상의 개념을 번역한 것이다.

에코는 번역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논의하면서 ‘길이’에 대해 언급하는데, 만일 A4 용지에 같은 크기의 폰트로 쓰여진 200장의 원고를 번역했더니 400장의 원고가 되어 돌아왔다면 뭔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위의 예처럼, 신미경 작가의 번역 또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에코는 또한 디즈니에서 번역한 피노키오와 콜로디(Collodi)의 원작에 나오는 피노키오를 대조시킨다. 신미경 작가의 트랜스레이션은 디즈니의 ‘번역’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그녀의 작품은 내용의 재구성이나 원작의 대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코는 관용구를 예로 들면서, 어떤 언어로 된 문장을 다른 언어로 직역하면 의미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같은 의미에 상응하는 관용구로 대체한다면 뜻이 통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즉, ‘농담하다’ 라는 의미의 ‘다리를 잡아 당기다 to pull someone's leg’ 라는 영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탈리아어로 직역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코를 잡아 당기다 to pull someone's nose’ 로 번역하면 같은 뜻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미경의 작품이 이처럼 직역과 의역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간극에 대해 얘기한다는 점에서는 움베르트 에코의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작가는 자신의 동양적 체형을 그녀가 참고로 한 서구의 고전 조각상의 이상적 체형으로 전환시킨다. 에코에 따르면 번역은 “문자 그대로에 충실하지 않아야” 한다. (7) 그는 또한 타당성과 동등성 그리고 충실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신미경의 작업은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에 적합하면서도 이러한 기준에도 부합한다. 에코가 기술한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번역을 ‘협상의 한 형태’라 말한 부분인데, 이는 마치 신미경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신미경의 작품을 마주 한 순간 우리는 발상의 전환, 익숙한 이미지에 관한 미묘한 의미상의 변화, 재료의 변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전환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 2002에서 보듯이, 신미경은 이상적인 여성의 몸에 관한 서양적 관념을 실제 동양 여성의 형태로 번역한다.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 연작 중에는 색조가 들어갔거나 색이 칠해진 고전적 조각상들이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고대 조각상이 실제로는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전통적인 방법과 단색의 누드 조각상에 익숙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가장 대표적 예는 현재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에 보존되어 있는 카노바(Canova)의 영국인 도제였던 존 깁슨 (John Gibson, 1790 - 1866)의 작품, 채색 비너스 (Tinted Venus, 1851-6)이다. 이 작품은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관능적으로 보였으며, 예술을 저급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으며 당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비누에 채색을 가한 신미경의 작품은 19세기에 일어났던 이러한 논란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트랜스레이션 작업에 신비감을 더해준다. 그것은 재료, 즉 비누와 인체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은 현재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조각들이 한 때는 개인 소장품이자 전리품이자 지식과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던 서양적 가치의 상징들은 그 자체로 또는 복제를 통해 교환 및 무역의 메카니즘이 되었으며, 마가렛 비서 (Margaret Visser)가 음식에 대해 논하며 언급했듯 “여성들은 항상 가족과 종족의 조화를 상징하는데 이용되어 왔다. 즉 여성은 결혼을 위해 양도하거나,공유하거나, 훔치거나, 지위를 강화하거나 또는 이러한 것들을 절제하기 위해 사용되는 또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8)모든 번역은 원본에 대해 면밀히 질문을 던지고, 그 근본을 풀어헤친 후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신미경의 작품은 두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다가오는 이러한 차이점을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작가가 품은 원본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 준다.

최근에 작가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트랜스레이션–도자기 시리즈와 트랜스레이션-고스트 시리즈는, 기존의 트랜스레이션 보다는 단순해 보인다.  뛰어난 테크닉을 자랑하는 이 작품들은 일종의 교환 시스템인 서양의 소비 시장을 겨냥해 제작되었던 옛 중국 도자기들을 비누로 재현한 것이다. 때때로 작가는 운송용 나무상자 위에 반사 철판을 올려 놓고 그 위에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고, 조각대 위에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운송과 보존 및 보관의 개념들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조각이나 예술작품들은 전시되지 않을 때 상자 안에 보관되고, 전시될 때에는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좌대나 기단 혹은 진열용 유리 케이스와 같은 기계적(보호) 장치를 사용한다.

고온에서 규산염을 가열하여 만든 유리나 도자기를 유기적이고 비유기적인 재료들과의 독특한 혼합물인 비누로 제작하는 것은 한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의 직역을 뜻한다. 이러한 번역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다른 재료를 가지고서도 이러한 작품들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재료에서 오는 이러한 장점은 동시에 작가가 극복해야 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도자기나 유리는 깨지기는 쉽지만 사실상 반영구적인 재료로서, 우리가 배운 선사시대 문화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이러한 도자기류의 유물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정적인 환경 속에서라야 오래 보존될 수 있는 종이처럼, 비누라는 물질 또한 견고하면서도 쉽게 변모될 수 있고 말 그대로 씻겨 없어질 수도 있는 재료이다.

한국은 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도자기 생산국으로서의 위상이 높다. 또한 이러한 유산은 세계적인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는 2007년에 작가와 함께 그녀의 작품인 트랜스레이션: 달항아리 2007 을 전시보기 위해 대영박물관 한국관을 방문했었다. 우리는 제일 먼저 박물관의 소장품인 달항아리 특별전시를 보러 갔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자기였는데, 흥미롭게도 현재 서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 (Bernard Leach)가 대영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신미경 작가의 슬래이드 동문이기도 한 리치는 일본의 미술이론가이자 한국의 예술 특히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한국예술 후원자 그리고 민예운동의 창시자였던 야나기 소에추 (역주 : 야나기 무네요시로도 알려짐) 와 친한 동료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서양으로 건너간 수많은 한국의 도자기들이 서양에 소개될 수 있었다. 나중에, 트랜스레이션: 달항아리 2007 을 보기 위해 전시장으로 올라갔을 때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진품처럼 진열용 유리 케이스에 전시된 또 다른 달항아리였다. 이 작품이 도자기가 아닌 비누조각이라는 것은 작품명을 읽고 나서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래층의 달항아리 유물은 리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작품의 표면에서 그러한 세월의 흔적이나 사람의 손때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다. 신미경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도 이처럼 씻겨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의 본질은 매우 다르다.

신미경의 작업은 보호하고 지켜주고 관리해야 하는 연약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한다. 즉, 우리 자신과 가족, 친구,나아가 주변환경 그리고 문화적인 유산과 함께 문화적인 교류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루기도 힘들 뿐 아니라 유지하기도 힘들다. 당신은 신미경의 작품으로 손을 씻을 수는 있지만, 그녀의 작품이 던지는 의미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Wilcox, Michael, "soap" in Hilda Butler. Poucher's Perfumes, Cosmetics and Soaps ( 10th edition.) . Dortrecht: Kluwer Academic Publishers. pp. 453

(2) Jack C. Rich, The Materials and Methods of Sculp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47, pp 357 - 358

(3) Umberto Eco, Mouse or Rat, translation as negotiation, A Phoenix paperback, Weidenfeld & Nicholson, GB 2003.

(4) ibid, p2

(5) See: Paul Oskar Kristellar, The modern System of the Arts, in Renaissance Thought and the Arts, collected essays, Princeton University Press, New Jersey, 1980, pp 163-227

(6) Kim Pok-yong, Modern Sculpture Responds to International Trends, Korean Arts Guide, Yekyong Publications Co., Ltd, pp 90-91

(7) Umberto Eco, Mouse or Rat, translation as negotiation, A Phoenix paperback, Weidenfeld & Nicholson, GB 2003.p5.

 (8) Margaret Visser, The Rituals of Dinner, the origins of, evolution, eccentricities, and meaning of table manners, Penguin Books, London, 1991.p3

Edward Allington 2009 (c)

에드워드 알링턴

더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