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적인 사랑의 담론
어릴 때부터 붓을 쥔 홍지윤에게 시서화는 하나이고, 그 자신과도 하나가 되어 있는 듯하다. 그것은 진정 하나였기에 여럿도 될 수 있었다. 거리와 무대, 화폭과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망라하는 홍지윤의 자유분방한 작품은 ‘퓨전 동양화’라고도 불리는데, 무슨 이국적인 메뉴판 같은 이러한 꼬리표는 그녀의 작업(=삶)이 곧 ‘퓨전’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한문으로 씌여진 추상적 화론으로 첩첩이 쌓여있는 심오한 동양화의 세계에서, 시를 짓듯이 노래하듯이 온몸으로 풀어내는 홍지윤의 작업은 아마도 작품을 발표하는 매순간들이 금기를 위반하는 장이었으리라. 그러나 홍지윤은 동질성에 역행하는 이러한 이질성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을 또 다른 반감과 저항으로 맞대응하는 여성 투사 같은 심각한 부류는 아니다. 작품에 분명하게 보이듯이, 그녀에게는 태양과도 같은 강한 긍정과 낙관의 힘이 있다. 현실의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에게 가해지는 압박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음에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완전히 충실했다면 후회할 일도 없는 것이다. 칼리그래피 스타일의 디자인이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홍지윤은 편안한 듯 솜씨 있는 아름다운 한글 서체로 시를 써왔다. 시는 작업의 출발이고, 작품 곳곳에 이런 저런 형태로 착상한다.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는 ‘구름이 꽃으로, 꽃이 새로, 새가 사람으로, 사람이 사랑으로, 사랑이 꿈으로...’라는 작가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됨 없이 흘러간다. 꽃과 새, 사랑과 꿈같은 이미지를 물들이는 색의 범위는 전통색인 오방색과 무지개빛 총천연색을 넘어 형광 빛 인공광원까지 이른다. 특히 최근작에 등장하는 색동 꽃과 색동 새는 전래의 소재 및 색감과 팝(Pop)의 그것을 종합한다. 색동 바탕에 거대한 꽃이 둥 떠 있는 작품 [Life is colorful](2010) 연작에 나타나듯, 물감을 듬뿍 묻혀서 쓱쓱 그어진 직선과 곡선, 그리고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폭발적인 색채 에너지가 있다.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몇 개의 획이 꽃의 형상을 취하며, 수직 또는 수평으로 그어진 몇 개의 선이 바탕을 만든다. 형상과 바탕은 꽃잎과 새의 날개처럼 그 국면만 다른 동일한 계열을 이룬다. 작품은 대개 여러 개의 패널들이 느슨하게 붙어있는데, 다채롭지만 혼란스럽지 않고 자신의 작품 어떤 단편과 만나도 어울릴 듯 호환성이 있다. 자작시는 물론, ‘사랑한다고 말할 것 그랬지....님은 먼 곳에’같은 유행가 가사,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상의 시 등이 화면 위, 또는 그 사이사이를 누빈다. 홍지윤은 예술이 ‘학문이나 기법이기 보다는 영혼, 눈빛, 별빛, 달빛이 미래의 언어’라고 확신한다. 오랫동안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결코 손쉽게 내려진 것만은 않은 이러한 결론은 정전주의에 내재된 가부장적 어법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함의 발로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깊이에 대한 표면의 대응인데, 마침 실체와 본질의 기나긴 시대를 넘어, 표면(들)로 이루어진 시대가 도래 했다. 그녀는 어릴 때 그림을 시작하여 동양화과 박사까지도 마칠 만큼 한 우물을 파왔지만, 2001년 당시로선 낯설었던 ‘연세 디지털 헐리우드’ 과정을 통해 다양한 부류와 다양한 트임을 만들어왔다. 오랜 시간 지필묵을 체화했던 몸은 바로 여성의 몸이다. 그리고 그 여성은 사랑과 사랑이 야기하는 역설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2011년 ‘한국화의 재발견’(성남아트 센터)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2012년 인천 아트플랫폼에서도 전시되었던 작품 <봉별(逢別)>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을 색다른 시공간 속에 맥락화한 작품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애니메이션부터 패션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로 종합한 홍지윤의 근래의 대작이다. 작가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고전과 모던의 틈을 살아간 사람, 이상, 그의 이상이자 자화상인 금홍과의 만남과 이별은 불협의 극한에 이른 장소인 금홍의 방에서 여러 번의 봉별을 치루고 끝내 파한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1930년대 지식인과 기생의 만남이 이루어진 기생 금홍의 방을 채운 것은 골동품 같은 가구와 인테리어, 잔뜩 멋이 들어간 여성의 소품들이다. 나무 인형처럼 만들어진 이상과 금홍의 상이 대조적이다. 색동과 꽃으로 알록달록 장식된 여성과 초췌해 보이는 남성 지식인상이 식민지 시대의 얼굴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러한 주제와 형식에서 매춘과 사랑과 예술의 동일성을 확인했던 근대의 공감각주의자 보들레르가 떠오르지 않는 바도 아니다. 장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려진, 검은 바탕에 가득 핀 꽃은 화려하면서도 죽음의 그림자가가 짙다. 어둠이 곧 삼켜버릴 듯한 색은 순간적으로 빛이 된다. 선이자 획이자 꽃잎은 순간적인 응집력을 가질 뿐이다. 또는 우주로 산산이 흩어지려는 해체의 순간 같기도 하다. 그것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붕 떠 있다. 만발한 꽃과 새의 날개 짓에 내재된 사랑의 은유에 종이꽃이나 검은색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은유가 겹쳐진다. 신부의 꽃가마나 장지로 떠나는 상여를 꾸미는 꽃의 이미지에는 사랑과 죽음의 상징적 우주가 공유된다. 홍지윤의 작품에서 여자와 남자의 만남은 사랑과 죽음의 만남처럼 치명적이다. 편지지, 그림, LCD 화면, 이불 위의 자수 등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서체의 글자들은 사랑 또는 죽음의 담론들로 채워진다. 이 조합이 동서고금의 시와 노래를 대부분 채워왔던 그 보편적인 주제이다. ‘그 많던 꽃들 피어났다가 시들어지’(홍지윤)며,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이상)다.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강렬한 순간과 불일치의 드라마가 있다. ‘그녀, 아름다운 꽃’이라는 자작시 제목처럼, 꽃은 홍지윤에게도 여성이다. 그녀에게 ‘꽃은 아름다움과 여성, 생에 대한 환희’를 통칭한다. 또한 ‘역사와 질곡의 삶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기쁨의 순간과 생명체의 치열함을 역설’한다. 홍지윤의 작품의 대표 이미지가 된 꽃은 인간의 희로애락부터 우주와 생명의 생멸까지 포괄하는 주제이지만, 여성이자 작가인 홍지윤에게 꽃은 보다 특화된 이미지로 다가온다. 화려한 색과 에너지로 가득한 꽃의 우주와 조응하는 것은 사랑의 담론이다. 그것은 단지 꽃이나 시로 이러저러한 사랑의 경험과 사연을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문제가 아니다. 금홍과 이상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조차 재현이나 표현의 문제는 아니었다. 작품은 사랑의 강렬함을 나타내는 기호로 가득하지만, 기호가 향하는 것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다. 이 여성-작가에게 예술작품은 그자체가 사랑의 담론인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한 여성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글쓰기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글을 쓴다. 무엇인가를 글로 쓴다는 것은 사랑을 글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담론의 한 시련이다. 작업이란 사랑처럼 시련이자 도전이며, 절망이자 희열이다. 사랑의 언어는 직설적이지 않고 은유적이다. 사랑은 언어가 당면한 의사소통 능력이 시험에 붙여지는 시련과 같다. 홍지윤에게도 사랑은 말해진 그 무엇이다. 그래서 그녀는 틈만 나면 그토록 여기저기에 글을 써댄다. 사랑의 환몽이 실현되는 장인 작품 속, 이런 저런 형식으로 빼곡히 씌여진 글은 히스테리 환자의 지나친 다변처럼 실어증의 또 다른 증후이다. 어떤 시기에 특정한 수신자를 가졌을지도 모를 사랑의 담론들은 일반 관객에게도 읽혀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자체가 그렇듯이 불확실하고 은유적 압축의 상태로 보여진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은유는 융합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 용어가 온전하게 지속되는 비교와는 달리, 은유는 두 부분 중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이원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은유는 변신 또는 공감각이 되고, 은유가 만들어내는 무한화 된 의미는 독특하게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향락으로 전환한다. 흩뿌려진 자아는 오로지 은유로써만 중심이 잡히고 글로 쓰일 수 있다. 홍지윤에게 꽃은 고정된 상징이기보다는 은유이다. 그것은 주체적이고 담화적인 쇄신과 위기의 역학으로서의 사랑의 체험, 그리고 그 언어학적 상관요소인 은유성을 내포한다. 은유로서의 꽃과 시는 표상 불가능한 요소이며, 이 표상 불가능한 것들이 기호들(signes)의 기반이 된다. 홍지윤의 공감각적인 작품은 기호들 사이에 있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사랑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글쓰기의 상태의 하부 구조는 공감각이다. 이러한 교환은 또한 하나의 전염이자 압축이다. 공감각이란 불안정 상태에 있는 언어, 아직은 존재하지 않고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언어 속의 은유이다. 홍지윤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인 여성성 역시 사랑의 은유처럼 표상 불가능한 이타성을 지닌다. 여성은 에로스만큼이나 죽음인 리비도로 활기차다. 상상적인 면에서 여성의 욕망은 죽음에 더 가까이 탯줄로 연결되어있다고 간주된다. 그것은 생명의 모태적 원천이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지윤의 작품에서 생명과 여성의 순환 고리에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연결 고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선영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