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과 일탈의 미학 -정현의 작품에 대하여-
정현은 파리에서 돌아오면서부터 왕성한 작업을 펼쳐보였다. 이토록 치열한 작업의 진행을 주도해가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는 일이다. 92년 원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97년 원화랑, 98년 프랑스 문화원의 개인전이 이어지다가 2001년 금호미술관, 2004년 김종영 미술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잇따른 미술관 개인전은 어떤 정점을 장식해주고 있는 인상이다. 최근 8년 사이 세 개의 주요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정현의 작업이 갖는 분출하는 에너지와 주도한 창작의 집념이 어떤 공감을 이루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본다. 이는 결코 우연한 행운은 아니다.
파리에서의 귀국 후의 그의 작업은 석고로부터 시작된다. 흙으로 만든 덩어리를 각목이나 삽과 같은 기구로 내려쳐 볼륨과 날카로운 단면을 만들어 이를 주물로 떠내었다. 이들 작품은 비교적 조각 본래의 양괴에 충실한 것일 뿐 아니라 소재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문맥에 밀착된 것이었다. 흙덩어리를 주물고 각목이나 삽으로 일정 부분 강한 물리적 반응을 가하여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을 묘출해준 것들은 때로는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때로는 묵상하는 인간상으로 나타났다. 설명적인 부위와 날카롭게 깎아 내린 단면을 대비시킨 이들 인간상은 기념비적인 내연을 지닌 것으로 로댕의 발자크상이나 부르델의 배토벤 상을 연상케 하였다.
그가 에콜 데 보자르 시절 추구해보였던 형해화 된 인간상에 비하면 풍부한 볼륨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미이라에 가까운 깡마른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난 보자르 시절의 작품이 갖는 선적인 것에 비하면 양괴적인 요소가 되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일정한 시기를 두고 환원과 일탈이 주기 화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적인 작업에 이어 양괴적인 작업이 나타나다가 다시 선적인 작업이 등장하고 이어 양괴로 다시 환원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때로는 이들 선적인 요소와 양괴적인 요소가 하나의 작품 속으로 융화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침목에 의한 군상 계열이 이에 속한다.
그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전에 집중적으로 선보인 침목에 의한 작품은 그의 조각하는 태도 또는 조각에 대한 독자한 인식을 가장 극명히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긴 공간에 진열된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마치 진시황의 토용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땅 속에 파묻혀 오랜 세월 지하에 있던 흙으로 만든 병사들이 밖으로 들어났을 때의 그 장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땅의 열기가 능히 몇 천 년을 견디어온 역사의 도저한 무게를 감당한 것이었는데 정현의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그러한 역사적 유물과 비교되면서 인간과 산업사회, 인간과 근대문명의 치열한 대결과 화해의 기념비적 형상으로 인상된 것이었다.
정현이 침목에 관심을 기우린 것은 꽤 오래 되었다. 그의 말처럼 침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것을 재료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방치된 상태로 놓아두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를 재료와의 만남이 단순한 사용자와 대상으로서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순치되는 일정한 시간을 경과한 후(그는 약 10년 간 놓고 보았다고 한다)에 작업에 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발견이 곧 창작이 될 수 있는 내역을 말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은 발견하는 것도 창작이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침목을 발견한 순간 이미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인가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란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그의 말은 침목을 단순한 재료, 물질로서 본 것이 아니라 인고의 세월을 한 몸에 지닌 인간의 역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침목의 군상이 그토록 강열하게 어필해오는 것은 침목이 버려진 재료의 사용이란 점에서도, 조각으로 다루기에는 적절한 재질이 아님에도 이를 극복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고의 역사로 다가왔기 때문에 감동을 준 것이었다.
정현이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대부분 버려진 , 용도가 폐기된 질료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버려진 질료란 상당 부분 산업 쓰레기일 것이 분명하다. 침목이 그렇고 아스콘이 그렇고 막돌이 그렇고 철근이 그렇다. 그것들은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다가 용도가 다한 것이다. 버려졌다는 것은 용도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질료들이 정현에 의해 발견되고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작업장에는 이렇게 버려진 산업 쓰레기들이 새로운 삶의 탄생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정현만큼 재료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조각가도 많지 않다는 것은 그의 전체적인 작업의 맥락을 통해 볼 때 새로운 재료의 만남과 대결 또는 순치의 과정으로 엮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과의 부딛침은 물질과의 만남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함인데 때로 격렬한 대응의 형식을 띠는 경우는 물질의 내면에 잠자는 본성을 일깨우기 위한 조치이다. “침목 작업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침목 그 자체의 엄청난 에너지에 주목해 왔었다”는 말은 침목 속에 잠겨있는 에너지란 본성을 어떻게 끄집어 낼 까의 접근이기도 하다. 침목은 길게 이어지는 레일을 받쳐주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침목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감지했다는 것은 침목이 지닌 역사성에서다. 단순히 레일을 떠받치고 있는 물질이란 사실 외에 오랜 시간을 두고 지탱해왔다는 시간의 두께가 겹쳐진 것이기도 하다. 용도가 폐기된 침목은 레일을 받쳐주는 기능이 폐기되었을 뿐 그것이 지닌 인고의 시간의 두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무게에 다름 아니다. 다른 폐기물에서도 이 역사의 무게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재료가 지닌 이 특별한 내재율이야말로 다른 조각가들에서 엿볼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조각 일반의 재료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대부분이다. 청동에 의한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재료가 생경한 것들이다. 과연 이런 재료로 작품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때도 있다. 창작에 앞서 발견이 그에겐 더욱 의미 있는 과정이 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살아 있음 그 자체, 날 것,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가 그의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요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생한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나타내려는 의도나 다듬지 않고 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대담한 제시는 지금까지 조각이 시도해온 변형시키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체의 방법적 논리에 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일탈의 조각이 갖는 의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종영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주로 아스콘에 의한 작품이 중심을 이루었다. 침목이 철로 밑에 깔려있었던 질료라면 아스콘은 길바닥에 누어있었던 것이다. 침목에 못지않게 아스콘 역시 엄청난 시간의 무게, 역사의 겨를 지닌 물질이 분명하다. 침목이 조각의 재료로 발견되는 것보다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욱 예상되지 않는 일이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로 선택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그는 날것에서 오는 생명력, 거칠고 팽팽한 표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했음이 분명하다. 아스콘이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막돌이나 석탄 덩어리를 그대로 조각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대담한 선택의 문맥에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래 위에 설치된 아스콘 덩어리는 공중에서 내려다 본 산맥의 한 단면 같기도 하고 땅에 누인 인간의 모습으로도 유추되었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무덤 속의 미이라처럼 응고된 형상을 띤 것이었다. 다른 어떤 질료보다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까.
조각가로서 정현은 조각에 못지않게 많은 드로잉을 남기고 있다. 드로잉은 그에게 있어 조각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드로잉의 연장선상에서 조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종이에 연필로 하는 것도 있고 골타르와 같은 끈적끈적한 질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드로잉은 대체로 인간상 또는 인간의 신체 부위에 집중되었다. 일회적이기 때문에 드로잉은 다분히 직설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최근의 드로잉은 질료자체가 형태를 대변하듯 날카로운 필선 자체가 존재감으로 현전하는 것들이다. “가을을 지나 누렇게 누워있는 풀들을 철판에 드로잉했다. 착색된 철판을 철근, 톱으로 긁어내거나 자동차 뒤에다 철판을 메어서 자갈밭을 끌고 다니면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럽고 우연한 흠집들이 산화되어 녹으로 바뀐 이미지 작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드로잉은 날카로운 필의 획, 형태보다 달리는 필의 획이 먼저 나타난다. 그린다는 행위에 앞서 그려지고 그린다는 행위보다 먼저 마무리된다. 물질에 강하게 부딛침으로 들어나는 필의 획이 갖는 날카로움이 날카로움 그 자체로 현전한다. 어쩌면 이는 그의 조각에서 들어나는 형태를 앞 질어 질료 자체가 들어나는 경우와 일치한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양괴적인 것과 선적인 것의 부단한 반복 현상처럼 수평적인 것과 대비적으로 수직적인 것의 반복현상도 지적할 수 있다. 아스콘에 의한 수평적인 형상에 비해 그가 최근 시도하고 있는 버려진 철근에 의한 수직적인 형태는 전반적으로 수직적 의지의 상승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미 수직적 형상은 현대미술관의 개인전 때 분명히 들어났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기둥들은 그의 미래의 작품이 지닌 의도를 흥미롭게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작품은 폐기된 철근에 의한 수직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이 솟아오르는 형상은 최소한의 형태로서의 조각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가까스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조각이기도 하고 조각이 아니기도 한 경계 선상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형태이기도 하고 형태가 아니기도 한 간극 속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 그것이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온통 전 공간을 거대한 탄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오광수(미술평론가)
하찮은 것과 폐기물에 담긴 인체 혹은 생명성-정현론
몇 가지의 풍경 혹은 버려진 것들과의 만남
2006년 10월,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장 홀, 오랜 세월동안 숱한 기차들을 온몸으로 떠받들었던 침목(枕木)들이 서있다. 그들은 허허벌판에서 누워있다가 뭔가의 계시를 받았는지 미술관 안방으로 달려와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들의 함성은 과천의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일생을 마감한 이들 침목에게 다시 생명성을 부여한 이는 정현,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침목을 높이 3미터 정도로 다듬어 도열시켜 놓았다. 이들 40개의 구조물은 드넓은 공간을 압도하면서 미술관의 상식을 깨트렸다. 조소작품하면 으레 청동이나 화강석 같은 고상한 재료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통용되는 미술판에서 하나의 파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침목은 한마디로 선로의 토대로 질주하는 기차를 위해 헌신했던 것, 남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죽이면서 희생이라는 미담을 자아냈던 것, 사용될 때나 폐기될 때나 인간사회로부터 무심한 대우를 받는 하나의 나무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침목은 폐기물처럼 버려지는 존재로 추락하고 있다. 이 폐기물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 이가 있으니 바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정현이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켜 준 자리가 바로 미술관 회고전이었다.
침목의 작품 제목은 <무제>, 하지만 그들 침목은 인간의 하체를 연상시킨다. 작은 삽입물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영락없는 인간의 하체이다. 이들 하체는 중요한 부분인 몸통을 생략했고 특히 머리부분을 방기했다. 재료가 안고 있는 인고(忍苦)의 세월과 숱한 상처는 우아함과 거리가 먼 버려진 나무에 불과했다. 거칠고 볼품없는 나무토막, 그것은 어두운 색깔과 함께 상처투성이로 고단했던 세월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침목이, 평생을 누워만 있던 나무들이, 이제 떼를 이루어 같은 방향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체를 잃은, 아니 상체를 버린 체 무엇인가 상징성을 자아낸다. 이들 구조물은 물질화되는, 날로 육신화되는 인간사회를 반영한다. 영적(靈的) 세계는 방출당하고 육적(肉的) 세계만이 득세를 하는 세태를 연상한다. 그것도 너무 육중하여 때로 위압감을 자아낼 정도이다. 상체가 없는 이들 우람한 하체의 도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4년 6월, 장소 김종영미술관, 포장도로를 덮고 있다 용도가 끝나 폐기된 아스팔트 콘크리트(아스콘)가 미술관의 전시장 바닥을 차지하고 있다. 도로포장의 폐기물을 미술관으로 끌고 온 사람은 바로 정현이다. 그는 김종영미술관이 선정한 ‘오늘의 작가’로 주목을 받아 기념 개인전을 개최한 것. 이 전시에서도 작가는 고상한 작품 재료들을 외면하고 폐기물을 이끌고 온 것이다. 아스콘은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검은 찌꺼기를 일컫는다. 이는 도로포장용으로 즐겨 사용되어 도시를 온통 검은 색의 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공사 등의 이유로 포장도로가 파헤쳐질 때, 아스콘은 폐기물이 되어 처치곤란의 푸대접을 받는다. 이들 버려지는 폐기물을 작가는 수습하여 다시 생명성을 부여했다. 검은 덩어리를 적당히 자르고 손질하여 바닥에 늘어트려 놓았다. 이는 다도해의 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물론 누워있는 인체의 모습이다. 모래 위에 자리 잡은 폐기물, 재탄생의 현장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강인한 생명력을 환기한다. 인공미(人工美)의 전형으로 자랑하는 교토(京都)의 용안사(龍安寺) 석정(石庭), 그것은 모래밭을 갈퀴질하여 남은 선 위에 크고 작은 열 다섯 개의 돌들을 적당히 배치한 인위적 정원이다. 일본미의 상징 혹은 선심(禪心)의 조형적 발현으로 상찬의 목소리가 크다. 돌의 배치가 마음 심(心)자와 같다더니 근래의 한 연구에 의하면 돌의 배치가 카시오피아 별자리와 같아 아예 우주의 정원이라고 격상시키려 한다. 모래와 돌의 배치,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의미부여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 일본미를 그런 식으로 집약 표현할 수 있다니! 그런 미를 좋다고 해야 할까, 싫다고 해야 할까,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모래 위에 놓여있는 돌덩어리들, 한쪽은 너무 고상한 척 폼을 잡아 자꾸만 현학적으로 접근하여 인간의 땀 냄새를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모래 위에 놓여 있는 폐기물 아스콘으로 이루어진 모습은 인간의 존재 혹은 물질의 본성을 반추하게 한다. 그 같은 본질에 내포된 덕목은 바로 인간의 내음이다. 그 중에서도 용도 폐기되어 버려진 것들, 모양도 볼품없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 이렇듯 추하고 쓸모없는 것들에게 다시 생명성을 부여하다니! 정현의 작품은 바로 인간 형상 즉 생명성의 회귀에 연결된다.
* 하찮게 보이는 것과 생명성 부여
대학시절 정현은 사회 현실과 무관한 모더니즘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학생시절의 회의감은 방황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는 학생운동의 현장을 지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급미술’의 메카라는 프랑스 유학의 길을 선택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귀국전은 의외의 작품으로 채워 관심을 이끌었다. 인간을 주제로 설정했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인체의 아름다움이 무시되어 있었다. 팔등신의 미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수의 이탈리아 출신 작가들처럼 고급 석재를 이용한 우아한 인체도 아니었다. 형상을 무시한 것 이외 그가 택한 재료는 마닐라 삼과 석고를 이용한 이른바 ‘상품 가치’가 없는 초라한 인간들(?)이었다. 기왕의 프랑스 출신과 다른 이같은 출발은 정현의 작가활동에 무엇인가 파격을 기대하게 했다. 그의 주제는 인간, 이는 청년세대부터 장년세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탐구 사항이다. 더불어 선택되는 재료는 고급 재료가 아닌 한물간 싸구려 혹은 폐기물같은 볼품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이루는 재료는 침목, 아스콘, 석탄, 막돌 같이 하찮은 것들이다.
정현은 같은 돌이라 해도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은 고급석재보다 아무데서나 쉽게 주을 수 있는 막돌을 즐겨 선택한다.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는 이른바 쓸모없는 돌덩어리다. 이들 막돌은 모양도 없지만 결조차 일정하지 않아 다루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불규칙한 성질의 돌을 통하여 작가는 우연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 작업과정에서 조형성을 구축하게 된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지를 고집하기보다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상호 조화의 접점을 찾는다. 이는 탄광에서 직접 구입한 석탄덩어리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제멋대로 생긴 석탄덩어리와 시간을 지내다 보면 언제가 나름대로의 형상을 도출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들 볼품 없는, 다른 조소작가는 결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하찮은 재료와 교감하면서 새로운 생명 탄생의 길을 모색한다. 작가는 말한다.
“청동이나 대리석만이 완성된 조각작품의 재료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조각가들이 석고를 쓰지만 이를 습작 재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석고가 주는 풋풋함도 좋았다. 돈이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침목, 아스콘, 막돌 모두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이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들 시련이 있는 것들이고, 폐기처분되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같은 생생한 속성이 마음에 들었다.”(국립현대미술관 발행의 도록에서)
정현은 별 볼일 없는 것들, 특히 시련이 있으면서도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속성에 애정의 눈길을 주었다. 시련과 날 것, 이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자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폐품이지만 거대한 에너지가 녹아있는 듯 보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폐기물이었던 침목이 이제 하나의 인간으로 승화되는가 하면, 하나의 역사로까지 부상되어 에너지의 원천처럼 부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침목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그는 다시 말한다. “98년부터 침목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작업을 해보니 침목의 속성은 안 보이고 나만 보였다. 이것은 내가 재료와 맞붙거나 재료를 이기려고 한 것이다.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내 의욕만 강했던 것이다. 침목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으려면 침목의 좋은 속성을 잘 이해하며 놀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상성과 물질성, 정신과 몸 그 어느 쪽으로의 극단적 환원이 아니라 조화로 보면 좋겠다.” 정현은 확실하게 자신의 진로를 깨닫고 있었다. 거기에는 재료와 더불어 놀며 친화하는 자세, 작위적 형상의 부여 즉 만들어지는 의미보다 자연스럽게 함유되는 상징의 세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상처받은 인체 혹은 인간 본성의 모습
별 볼일 없는 재료를 다루는 작가는 작업과정도 우아할 수 없다. 거친 재료는 과도한 노동력과 때로 과감한 접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체작업은 유미주의의 관점에서건 리얼리즘의 관점에서건 나름대로의 형상을 존중해왔다. 구태의연한 아카데미 분위기의 작업은 본질과 무관하게 나약함을 안기기도 한다.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속성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같은 번민은 무엇보다 형태를 부시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추상미술의 교지를 받드는 것도 아니면서 형태를 삭제하고 생략하는 작업은 무엇인가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점차 작가는 재료를 거칠게 다루면서 혹은 난폭하게 처리하면서 나름대로의 형상을 만들었다. 일견 그들 작품은 가공되지 않은 원광석처럼 보인다. 하나의 돌덩어리나 석탄덩어리처럼 특별한 가공의 흔적을 ‘남발’하지 않는다. 재료의 속성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가공만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육성처럼 날 것의 상태를 동경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날 것이 주는 신선함,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출발지점이다. 거기서 야성(野性)의 싱싱한 메시지를 습득한다. 이는 장식적으로 예쁘게만 꾸미려는 보통의 조소작품과 차별상을 갖는 하나의 변별점이기도 하다.
사실 미술판에서 인체는 한 물 간 구닥다리 취급을 당해왔다. 이는 표현방식의 문제와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에 기인한다. 인간이라는 주제는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소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있어 인간보다 더 소중한 예술적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해석의 방법과 예술적 반응이 문제일 것이다. 정현은 시종일관 인체를 작품세계의 원천으로 삼으며 인간의 본질문제에 천착하려 한다. 재현적 수준에서 인체를 바라보려는 고답적인 미술동네에서 벗어나 그는 인체를 통하여 정신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한 결과로 형상성이 약화되고 하나의 덩어리로서 본질의 실체만 남게된다. 그의 인체작품에서 언뜻 인체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의 결과이리라.
정현은 콜탈을 사용하여 상당수의 드로잉 작업을 해왔다. 신문지나 골판지 같은 폐지를 사용하여 인체를 형상화하기도 했다. 콜탈은 희석제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여 드로잉의 효과를 뒷받침해준다. 드로잉 속의 인체는 강인하고 생명으로 약동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표현하는 재료와 소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화면효과를 낸다. 두상을 그린 그의 드로잉, 머리위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일종의 기(氣)이다. 어떤 것은 푸른 색의 풀이기도 하다. 생명성을 의미한다.
거친 작업 그러나 섬세한 성품
정현은 섬세함과 거칠음이라는 이중적 요소를 구비한 작가이다. 침목, 아스콘, 석탄, 막돌과 같은 거친 재료를 다룬다하여 거친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아니 그는 의아할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성품을 지닌 작가이다. 그의 특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생선요리의 전문가라는 점이다. 생선 요리의 섬세함은 마치 프랑스 와인의 맛처럼 미세한 미각의 발달을 요구한다. 생선요리의 달인인 정현은 그렇다고 고급생선만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잡어를 좋아한다. 새벽의 노량진 수산시장이 그의 주요 산책처로 부상되어 있는 것처럼 정현은 미감(美感)을 위해 미감(味感)을 훈련하고 실천한다. 그는 잡어회를 좋아하듯 생활 속의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하찮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식당에서 결코 메인 디쉬로 오를 수 없는 잡어 이른바 ‘쯔기다시’를 선호한다. 정현의 예술은 우아하고 화려한 고급요리접시가 아니라 허드레로 내놓는 ‘쯔기다시 미학’과 연결된다. 그래서 그는 폐기물인 침목이나 아스콘으로 인간을, 그렇다, 거대한 주제인 인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형상을 삭제하고 본질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생명성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 탄생에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리라.
2007년 11월, 장소 안산의 경기도미술관. 최근 신축건물을 마련하여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은 건물 입구에 거대한 작품 <목전주>를 구입했다. 17미터가 넘는 6개의 전봇대를 세운 경이적인 대작이다. 작가는 정현, 원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당시 미술관의 입구를 지킨 바 있다. 그후 경기도미술관의 한 기획전에 초대되었다가, 썰렁한 미술관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하여 장기 설치중이다가 근래 구입결정을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하여 쭉쭉 뻗은 이 전봇대는 사찰의 당간지주와 같고 아니면 예전의 성역을 지키던 솟대와도 같다. 분명한 것은 미술관의 랜드 마크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봇대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이제 용도가 폐기된 물건이다. 하지만 이렇듯 거대한 나무기둥도 함께 모여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니 하나의 상징성을 일구어 낸다. 이는 달라스의 현대미술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리차드 세라의 거대한 철판 설치작품과도 다른 분위기를 유도한다. 철판은 계획된 의도에 의한 산업사회의 찬가와 같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동안 굴하지 않고 버팅겨 온 이 땅의 민초들처럼 전신주는 옹골차다. 전봇대 역시 하늘을 향하여 굴하지 않고 계속 일어서는 민초들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서있을 때 아름답다. 누워있던 침목도 우뚝 설 때 아름다음을 선사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또 다른 면모를 환기시키며, 인간 본성의 탐구를 위한 척도노릇을 하기도 한다. 폐기물이나 하찮은 것들을 활용하여 새롭게 인체를 해석하고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정현의 작업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도 주목을 끈다.
윤범모(미술평론가)
彫刻에서 自刻으로 - 정현조각의 자연주의적 서사성(敍事性)을 위하여-
유헌식(문명비평가,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