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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아트선재센터

출생

1961, 과천

장르

회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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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두해의 유희, 1982

꼴라쥬, 캔버스위에 유화, 91 x 11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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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회화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지난 30여 년간 회화라는 장르를 고집하며 작업에 매진해온 김지원은 대상과 이미지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1990년대 말부터 그림에 대한 그림 그리기인 <그림의 시작-구석에서>(1994~2004), 일상적 풍경을 동일한 사이즈로 그린 <34x24>(1995~2001), 전국 각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슷한 모양의 벽을 통해 사회를 풍자한 <비슷한 벽, 똑 같은 벽>(1998~2007, 2013~), 일상의 풍경을 기묘하게 나타낸 <일상>(1995~), 사물을 확대해서 그린 새로운 정물화 <정물화, >(1999~2004), 비닐 위에 그림을 그려 빛과 그림자를 드러내 캔버스 안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 <비닐그림>(2000~2002), 대표작인 <맨드라미>(2002~), 그리고 <이륙하다>(2002~), <풍경>(2002~) 연작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기에 대한 고찰

김지원이 캔버스에 그리는 대상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일상적이다. 2002년부터 시작해 같은 주제를 13년 동안 작업해 온 <맨드라미> 연작은 작가가 2000년대 초반에 강원도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방문하게 된 한 분교에서 맨드라미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시작하게 되었고 <이륙하다>, <풍경>, <일상> 연작에 등장하는 작업실, 거실풍경, , 바다풍경도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소재들이다. 주변 환경이나 사물을 선택하는 것은 김지원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나타나는데, 1981년에서 1988년까지 작업한 <어떤 이야기> 연작이나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제작한 <심리적 도상> 연작에서 방독면을 쓴 군인이 황량한 거리에 서 있는 장면이나 집안에서 바라본 야경, 찢겨진 가족사진, 텅 빈 회색 지하도, 거리에 서 있는 탱크 등 그는 자신이 목격한 당시 암울했던 사회적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김지원이 작업 초기에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메시지를 지향했다는 사실과 이후 사물을 선택하고 그리는 과정이 자신에게 가져다 주는 메시지를 받기 위해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과거 평론에서 언급된바 있지만 소재의 변화와는 별개로 김지원은 자신이 마주한 주변 상황이나 일상적 대상을 보는 것에 충실하였고 그것을 캔버스에 담아냈다는 것은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김지원의 보는 것 그리고 보여지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는 사회 현상에서 실내 풍경을 거쳐 정물에 이르게 되고 심지어 작은 일상의 사물을 대형 캔버스에 확대해 원래 모양과 기능을 인식하기 어렵게 하는 작품도 있었다. 그리는 대상의 변화는 그의 작품은 조금 더 정교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그는 사회적인 메시지의 전달에서 대상 자체의 특징을 섬세하게 드러내는데 집중하지만 시각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김지원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소재 자체에 대한 의미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린 의도 혹은 태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아가 그려진 대상과 작가의 의도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게 한다. 따라서 그림이 그려진 이유, 동기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해답을 추적하는 과정이 김지원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회화(繪畵)란 미술의 가장 오래된 장르로서, 여러 가지 선이나 색채로 평면 상에 형상을 그려 내는 조형 예술이며 기본적으로 캔버스라는 이차원의 평면에 물감으로 덧입혀진 형식을 갖는다. 회화에는 회화의 독자적인 본질과 수단이 있는데, 회화는 모든 물질을 포함한 3차원적 세계를 언제나 2차원적 재료 위에 묘사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 .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2차원 평면은 2차원 안에서 쉽게 복제할 수 있지만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것은 많은 결정을 수반한다고 했다. 재현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또는 그리는 것과 그려지는 것 사이의 관계는 작가만의 언어와 코드, 관계성으로 이루어 지고 이것을 규명하는 것이 현대 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3차원을 양식화하고 해석하는 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3차원을 2차원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화가의 상태, 생각 즉, 본 것 혹은 기억한 것을 2차원의 언어로 어떻게 환원시키느냐가 중요하다. 김지원은 묘사를 버리고 풍경이나 대상 중 일부를 선택한 후, 생략, 과장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 속 세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한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세계가 된다. 실제로 김지원의 작품들은 그 묘사가 명확하지 않으며 특정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례로 <맨드라미>를 가까이서 보면 물감이 두텁게 캔버스 위에 올라가 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선들이 겹쳐져 있으며 눈 앞에 있는 것은 물감들의 덩어리인데 한 발 물러나서 보면 그 형상들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재현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물감을 평면에 쌓아 올려 회화가 일루전임을 단박에 깨닫게 하는 김지원의 회화는 그림의 허망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화가는 그림의 옆구리를 봐야 한다고 회화의 평면성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며 회화가 결코 현실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맨드라미를 맨드라미로만, 바다 풍경을 단지 바다로만 볼 수 없게 되며 보는 사람과 그림 사이에 끊임없는 질문과 답의 미끄러짐이 반복해 쌓여 그림을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본 것, 혹은 기억하는 것을 그리며 관람자는 완성된 그림을 보게 되는데, 보기-그리기-보기의 순환구조로 이루어지는 회화의 작용은 작품과 관객 사이의 연결 고리를 강화한다.

 

 

세계(世界)를 드러냄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김지원 자신만의 언어로 2차원의 평면에 드러내는 작업을 위해 그는 묘사를 버리고 오로지 캔버스 속의 현실임을 인식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김지원은 하나의 대상을 선택한 후 철저하게 관찰, 분석하여 작품을 제작하는데 그가 지향하는 회화에 대한 탐구란 회화의 형식적인 본질을 규명하며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를 연구하며 자신만의 방법과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리기는 단순히 본 것을 재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는 능동적인 과정을 통해 은폐되어 있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世界)를 드러낸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맨드라미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 바다풍경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며 비슷한 벽을 통해 사회적 모순에 대해 발언한다. 구체적으로, <풍경>(2002~) 연작에서 작가는 파도가 아닌 파도를 움직이게 하는 바람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대상과 만나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으며 느껴지지만 잡히지는 않는 성질의 것이다. 그는 그림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결국 파도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바람을 그려내었다. 김지원에게 그림이란 바람과 같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다음날에 보면 잡히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밖에 없는 허망한 것이다. 바람을 그리며 회화를 이야기하는 김지원만의 독특한 회화적 언어는 여타의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륙하다>(2003~) 연작은 작가가 여행을 떠나면서 마주한 공항의 텅 빈 활주로를 보며 구상한 작품으로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앞으로 떠날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작가는 비행기 활주로라는 특정한 장소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회색 빛의 활주로나 실제로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는 트랩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 공간이 발현하는 낯선 분위기를 잔잔하게 드러내고 있다. <비슷한 벽, 똑같은 벽>(1999~2008, 2013~) 연작에서는 어설픈 조경, 조악한 돌덩이들,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의 벽들이 자아내는 부실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현대사회가 가진 획일성, 내실보다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관습, 인식하고 있지만 이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김지원의 대표작 <맨드라미>(2002~), 연작은 작가의 작업실 정원에 맨드라미를 심고 일상에서 맨드라미를 보고 계절에 따라 피고지는 그리고 새벽부터 밤까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작업실 앞에 수북하게 핀 맨드라미를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고 함께 호흡한 시간들은 김지원에게 맨드라미가 단순한 꽃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으로 확장,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의 생명이 가진 희로애락(喜怒哀樂), 화려하게 피었다가 서서히 저물어가며 때로는 처절함을 경험하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계와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순간과 더럽혀지고 닳아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을 맨드라미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화려한 것은 잠깐이고 흐르는 시간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의 유한함을 그의 맨드라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수없이 많은 맨드라미를 보고 있노라면 화려하게 만개한 꽃보다 으스러지고 시들어 가는 꽃에 더 시선이 가게 되고 회화적 작용을 통해 작품과 관람자의 연결고리가 견고해지면서 작품을 통해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을 그리며 회화를 이야기하고, 활주로를 통해 시간을, 벽의 이미지로 사회의 획일성과 부조리를, 맨드라미를 통해 인생의 굴곡을 이야기하는 김지원의 작품은 그것이 캔버스 위에서만 존재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스며들어 있다. 화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명확히 질문해야 하고 인식된 이미지는 그의 뇌와 기억 속으로 들어가 저장되어 있다가 화가의 손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며 시각 예술의 목적 중 하나가 바라보게 하는 것, 주의를 집중하게 만드는 것, 우리로 하여금 그렇지 않으면 보지 않았을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인데 김지원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놓치고 있는 것들을 선택해 그려나가며 화가의 역할에 일관되게 충실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의 벽

누군가에게 흰색 종이가 주어지고 그림을 그리라고 요청 받는다면 잠깐이라도 당혹스러움을 경험할 것이다. 화가는 텅 빈 캔버스 앞에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 고민하고 그 결과 캔버스와 화가 사이에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회화는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기에 이른다. 회화는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장르이자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장르와 결합하여 변화와 확장을 시도하지만 김지원은 이러한 흐름과 상관없이 지난 30여 년 간 전통회화를 고집하고 그리기회화에 대한 꾸준한 탐색의 과정을 거쳐 주변의 대상과 환경을 캔버스에 담아오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회화의 위기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그는 그릴 것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했을 뿐 더러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수 십, 수백 개의 연작을 제작할 만큼 다양함과 꾸준함으로 작업을 지속해 왔다. 사실 그린다는 행위는 작가 김지원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며 그의 작업은 매일매일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갖고 있는, 그 어떠한 상황에도 그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 일종의 근육이 켜켜이 쌓여 있다.

 

김지원의 작품세계는 그가 제작한 수많은 작품만큼 다양한 결이 존재한다. 김지원의 다른 연작들보다 호흡이 긴 수 백 개의 <맨드라미>들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모양과 기능의 생명체와 같이 다름과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며 <비슷한 벽, 똑 같은 벽>의 많은 벽들도 시각적으로 상이하다. 김지원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에 근거해 그리지만 캔버스 내부에는 현실 너머의 차원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호크니의 말처럼 그는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발언하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계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과거에 암울했던 사회를 그리며 비판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면 이후 작업을 통해서는 더 깊은 사유와 통찰로 작업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림의 벽을 완성해 나간다.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의 제목인 그림의 벽은 그림으로 둘러 쌓인 벽이자 캔버스 자체이며 그림의 대상이 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 벽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언제나 넘나들 수 있고 변형 가능한 유동적인 벽이다. 김지원은 자신의 시선이 머무는 일상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고 그의 그림이 전시되는 공간은 그림으로 둘러 쌓인 벽이 되며 캔버스는 세계를 담은 또 다른 벽이 되는 동시에 작가의 고뇌와 사유가 담겨 있는 장소가 된다. 그의 그림이 담아내는 세계를 통해 우리는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하게 되고 오랜 시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존재해온 회화라는 장르가 지닌 매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최지아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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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 그림 속에 혁명하나

1999년 김지원은 '갑자기' 그림의 시작구석에서전을 연다. 이 전시는 1994년부터 진행한 <그림의 시작구석에서> 연작을 선보인 전시였다. '갑자기'라는 부사는 '시작'이라는 말에 연유한다. 이미 이 연작과 함께 여타의 연작(<비슷한 벽, 똑같은 벽>(1999), <일상>(1995), <무거운 그림, 무거운 풍경>(1998), <메모형식의 서로 다른 크기>(1997) )을 진행한 작가가 '시작'을 알리는 전시를 선보이니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그림의 시작구석에서> 연작과 여타의 연작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연작이 상호 연동하거나 충돌하며그림의 시작구석에서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그림의 시작'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후 김지원의 작업은 작가가 발화하는 '현실적 논평'에서 그리는 과정에서 캔버스가 발화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캔버스와 작가의 소통의 산물이 된다. 그 주요 대상은 '맨드라미' 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초대형 함선, 공항 활주로, 비행기 트랩에 집중한다.

 

<맨드라미> 연작에는 만발한 맨드라미로 가득하거나, 거대한 맨드라미가 있다. 그렇다고 맨드라미가 배경을 등지고 서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맨드라미의 존재여부를 떠나 화면 전체가 그 자체로 맨드라미이다. 얼핏 보면 이는 거대한 대상의 크기에 연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면에 얽혀 있는 녹색과 적색, 그리고 흰색은 만발한 맨드라미에 조응한다. 그리고 그 위에 날카로운 것을 긁어 흔적을 남긴다. 막막한 텅 빈 캔버스에서 출발하여 맨드라미 정원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붓을 놀리고, 색을 덧댄다. 그들은 서로 만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맨드라미가 캔버스에 안착한다. 그리고 그 향기가 진동한다. 그것은 맨드라미의 향기이면서, 나아가 텅 빈 캔버스와 그 앞에 서 있는 작가의 대면에서 발생하는 향기이다. 즉 김지원의 붓질은 맨드라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맨드라미를 매개체로 세상과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작가 자신의 오감을 캔버스에 구현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맨드라미 그림 속에 혁명하나

맨드라미 그림 속에 연정하나

맨드라미 그림 속에 독사 한 마리

맨드라미 그림 속에 욕망 한 덩어리” 

이대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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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벽, 무거운 그림

화가김지원의 이번 전시는 오늘날 본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 관계들을 매우 콤팩트하게 덜어내어 제시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간명하게 말해서 본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 거리를 만드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반면에 그린다는 것은 대상으로 다가가 거리를 좁혀가려는 내적인 동기를 함축한다. 특히 현대적인 의미의 작가들은 언제나 세상에 대한 조망과 내면으로의 침잠, 이성적인 이완과 감각의 밀착 또는 시각적 통제와 통감각의 반응 사이를 연계하고 매개하고 결합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그리하여 때로는 보이는 세계를 팽창시키거나 또는 넘어서거나 아니면 그 세계 아래 깊이 탐색할 수 있는, 개안開眼의 통로들을 기적적으로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적 삶이 요구하는 감각의 분업체계에 저항하는 대가로 대부분 자신의 일상생활을 심각하게 마모시키게 마련이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예술행위를 관통하는 시각적 원심력과 촉감적 구심력 사이에서 찢겨져 나가 자기 육체 자체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하기도 한다. 이들이 좀더 편한 길을 택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히 어느 한쪽으로만 달라붙을 경우 아이디어 생산자이거나 솜씨 좋은 장인이 될 수는 있지만 정작 화가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좋은 화가는 잘 보는 것과 잘 그리는 것 사이의 재빠른 왕복운동, 거의 동시 발생적이라 할 만한 그 왔다갔다함을 얼마나 지치지 않고 버티어내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무릇 좋은 화가란 그 관계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전문가이며, 두 극점 사이의 불가사의한 화해를 믿는 신앙인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김지원은 회화 속에 내재하는 간극들을 매개하기 위해서 그 자신 카메라 렌즈가 되기로 결심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렌즈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 자체가 됨으로써 보고 그리는 일을 동시에 수행하려 한다. 카메라-그는 예술사진가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애용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의 카메라 대신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카메라를 모조한다. 특히 여러모로 간편하고 경제적인 스냅사진의 용도를 전용轉用하여 그림의 내재적 모순들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경로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선 그가 선택한 대상이 기념할 만한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라 흔해 빠진 벽면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서울,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비개성과 몰환경의 벽들을 스냅사진 식으로 그려내면서 작가는 그림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층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먼저 멀리서 롱샷으로 잡을 때는 벽이 놓여져 있는 위치와 조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공간적 의미맥락들로 인해서 도시환경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가 풍겨나게 된다. 어설픈 조경과 키치처럼 보이는 돌덩이들, 그리고 그 앞에 가로놓인 차량통제봉은 이 풍경이 조악하게 획일화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를 잡아낸 것임을 알게 한다. 이 때 풍경 속의 담벽들은, 그것에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마련인, 육중하고 두터운 안정감을 결여하고 있다. 그 대신 수평이 잘 맞지 않게 아무렇게나 그어진 벽돌의 선들은 마치 얇은 합판 위에 그려진 줄무늬처럼 완전히 부실하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 벽들의 전모가 드러나는 그림들을 계주繼走하다 보면 어떤 강력한 막screen의 존재가 감지된다. 전시장 가운데를 가르는 비닐막 벽그림은 바로 그 투명성 때문에 예상외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 막은 말할 수 없이 허약하지만 동시에 아무리 찢어도 계속 나타나는 겹겹의 층(다른 벽그림들과 그림자들이 중첩되면서 저절로 생겨난)을 형성하고 있어 이것이 일종의 환경처럼 고착되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형 건축물의 붕괴가 만성화 될수록 우리사회 깊숙이 내장되어 있는 그 붕괴의 구조체를 파괴하기는 어려우리라는 비관론과 맥을 같이 한다. 그 때문에 태연자약한 풍경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 삶의 뻔뻔한 구조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튕겨져 나오려는 거의 초현실적인 일탈의 욕망들이 그의 풍경화에서 일관되게 감지되는 지도 모른다. 예컨대 김지원의 그림들 가운데서 멀리는 88년도 개인전에 등장했던 해태흉상의 풍경화([어떤 표정]), 좀더 가까이는 무궁화 무늬가 돌출 되어 있는 가로등을 그린 그림([무거운 그림, 무거운 풍경] 연작, 1999)이 부분적으로 이 관심사를 공유한다.

방향을 돌려 벽 가까이 다가가 한껏 클로즈업한 화면들에서는 스트록이 두드러지고 모더니즘 회화에서 흔히 보는 격자들이 부각된다. 그러나 이 그림들을 단순히 평면성에 대한 오마쥬로 보기에는 대부분 4호 크기 안팎으로 너무 작다. 그렇다고 거꾸로 회화적 평면성에 대한 반발로 보기에는 색채나 붓질의 표현방식이 지나치게 중성적이다. 다시 말해 물질의 제도에 굴복 당한 흔적이나 거꾸로 그 권력의 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패러디적 어법 모두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대신 물질과 부딪힐 때의 순수한 시각체험이 강화되면서 그간 퇴화되어 있던 손끝의 감각적 쾌락이 복원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이를테면 이 클로즈업 그림들은 우리가 잊고 있던 어린 시절 크레용의 촉감을 되살려 낸다. 크레용이 도화지 위에 미끄러지면서 만들어 내던 자동기술적 미로들의 흔적들과 함께 그 미로들을 제어하려는 주체의 수많은 설렘과 주저와 성의가 기억 저편으로부터 색출된다. 그런 점에서 이 연작들은 [들꽃처럼](1991)에서 한껏 개화한 화려한 꽃들의 인서트이자 [일요일](1990)에서 뿜어지는 초록색 스프링쿨러 물줄기의 오버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김지원의 그림들이 풍경의 비판과 감각의 풍경이라는 회화적 극단 언저리에 뭉쳐져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김지원은 양극단 사이에 관심이 있다. 양단간의 손쉬운 대조와 극적인 효과에 익숙해져있는 다분히 한국적인 시각의 관성에 반발하면서, 그는 그 사이를 여러 차이들로 채워넣으려고 한다. 같은 거리의 벽을 다른 크기로 그린다든지, 같은 거리의 그림을 다른 각도로 잡아낸다든지, 같은 거리와 같은 각도의 그림을 다른 재료로 그려낸다든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바라보는 거리와 확보된 시야 그리고 그것을 그려내는 육체의 움직임과 물질의 혼합들 사이에서 다양한 조합-순열을 만들어냄으로써, 비슷하지만 똑같고 똑같지만 다른 벽들이 무수히 생겨나게 된다.

물론 이 [비슷한 벽, 똑같은 벽] 연작은 빛과 대기의 변화에 따라 매 순간 흔들리던 인상파적 붓질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간에 따른 대상의 움직임과 현대사회의 속도감을 따라 잡아내려고 애썼던 미래파의 중첩된 스틸 이미지들을 닮아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는 달리 같은 대상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숙련함으로써 김지원의 그림은 궁극적으로 회화적 유연성과 전면성을 재입력하려는 쪽에 가깝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벽-그림들을 투시하면서 우리는 그림의 안팎이 뒤섞이고 재현과 표현이 헷갈리며 나아가 일루전과 평면성의 경계가 생각만큼 높지 않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들이 인덱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회화의 가소성flexibility 그 자체가 된다. 이처럼 그의 작업들은 회화적 대립항들 사이에 마치 CT 촬영사진처럼 차곡차곡 끼여든다. 그럼으로써 납작해질 대로 납작해진 회화의 운명에 볼륨을 주려는 소망을 갖는 것이다.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한동안 그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독특한 이중구조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다.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진 풍경들과 그 위에 느닷없이 얹혀져 있는 검은 음영의 도상들은 그림 속에 일정한 긴장관계를 만들어 낸다. 잠든 도시 위에 기다랗게 누워있는 거인의 음영을 통해서는 잃어버렸던 메트로폴리탄 신화가 되살아나고([도시 - 심리적 도상], 1994), 길 위를 가로질러 앉아있는 개들의 도상에서는 초현실적 기운이 감지된다([], 1994). 그런가 하면 작은 인형 크기로 줄어든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실내 그림들은 소인小人의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실내], 1994). 이처럼 각각의 효과는 차이가 있지만 배경 그림 위에 마치 다른 이미지들이 그려진 셀룰로이드를 슬쩍 얹어 놓은 듯한 이 작업의 원리는 그대로 유지된다. 당연히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두 장의 겹쳐진 그림들 각각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의미층이다.

[신도시의 그림자](1997)는 이러한 이중그림의 작업원리가 가장 추상화되어나타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위에 포개놓은 그림이 그전의 오일스틱으로 그려진 검은 도상들에서 유채로 그려진 장식적인 꽃무늬들로 바뀌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작품 안에서 생겨나는 깊이감이 더욱 또렷해진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단순히 내러티브의 형성이나 질료의 이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의 서로 다른 존재론적 층위에 의해서 깊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앞서의 경우 그 깊이를 메우는 것은 독자의 심리적 이해이거나 작가의 육체적 작업이지만, 나중의 경우는 일루전에서 평면성에 이르는 회화의 역사적인 퇴적 그 자체가 깊이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렇듯 메타레벨의 깊이와 중층의 시야를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김지원의 그림들은 여러사람이 지적한 대로 그림에 관한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인의 의미 또한 명백해진다. [거실에서] 연작(1995, 1996)에서 작은 인물들이 보고 있는 것은 거실 풍경이 아니라 실은 거실 풍경화였다. 마치 벽 시리즈를 그릴 때의 작가모습처럼 서로 다른 각도와 다른 거리와 다른 높이에서 거실 공간을 조망하고 있는 인물들은, 프레임 밖의 세계를 떠나 회화의 거인국으로 불시착한 소인들에 다름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소인들은 김지원 자신이 되기로 결심했던 카메라의 심벌이며, 나아가 [홍수-사진 찍기](1995)[숨은 그림찾기](1996)의 카메라를 든 인물들은 중의법으로 그려진 소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김지원은 거인국의 비유를 들어 일상의 세계보다 회화의 세계가 더 거대하다고 발언하고 있는 것일까. 알다시피 거인/소인의 비교는 절대적인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인 크기에 관한 것이고 특히 크기의 극적인 대조감을 한껏 증폭시키기 위해서 도출된 하나의 상황이다. 거인의 거실에 불시착한 난쟁이들은 작가 자신의 일상적인 인지적 범주를 넘어서는 커다란 경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캐스팅되었다. 따라서 그림 안에서 소인들이 하고 내뱉는 한숨은, 우리가 종종 위대한 자연의 힘과 마주할 때 저절로 나오는 탄식처럼,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미학에서는 미적인 대상과 인간 사이의 조화가 결여될 때 특히나 인간이 그 대상에 압도당하면서 동시에 그것과 대결하려할 때 생겨나는 이러한 정조를 숭고라고 부른다. 그런데 숭고와 인간 사이의 부조화는 곧바로 인간의 상상력으로 하여금 그 크기의 격차를 채우도록 요청한다. “광활한 지평에서는 시선이 멀리까지 뻗어 갈 수 있으며 그러한 시야의 무한함을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고 또 관찰대상 자체의 다양성 속으로 몰입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숭고는 곧 자유의 이미지인 것이다.(<현대미술, 그 철학적 의미>, K. 해리스 저, 서광사, P 72).

그러나 대부분의 김지원 그림에서는 숭고의 대상이 위대한 자연이 아니라 비속한 일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자연이 사라지고 도시가 들어서며 풍경이 줄어들고 풍경의 복제물들이 팽만한 현대적 삶 속에서는 말 그대로 도시가 자연이고 풍경의 복제물이 풍경이다. 따라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양식 있는작가들은 의당 넓은 의미에서의 일상을 조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숭고의 대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경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김지원은 숭고의 시선으로 바로 그 일상을 겨냥하리라 결심한다. 그렇게 되자 한없이 축소되기만 하던 그림의 영토와 끝없이 협소해지던 작가의 시야가 급회전하여 순간적으로 커다란 공간 하나가 뻥하고 열리게 된다 - 마치 난쟁이가 거인국의 경계에 뛰어든 것처럼. 이 공간 안에서는 풍경은 물론이고 익숙했던 사물들마저 낯선 대상으로 변신하여 우리 감각을 쉬지 않고 자극하게 된다. 심지어 약 2미터의 크기로 그려진 컵의 위풍이 대변하듯([무거운 그림, 무거운 풍경] 연작, 1998) 정물 자체가 숭고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결국 거인국의 비유는 크기의 문제보다는 이념의 문제와 연관되며, 이념의 단순한 효과보다는 그것의 작동기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김지원은 회화의 존재론적 우위보다는 회화적 체험을 원용한 일상의 전도顚倒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상의 풍경이 그려진 캔버스들을 조립해서 만든 비행기([그림의 시작- 구석에서] 연작, 1999)는 다시 선회하여 우리 삶 속에, 다소간 불안하게, 착륙하게 된다.

그것이 영원히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캔버스에 실려있는 실존적 무게 때문이다. 이번 벽 시리즈 연작에서 김지원은 광명단이라는 이물異物발견된 재료로 끌어들이고 있다. 쇠가 녹슬지 않도록 발라주는 이 도료는 물감보다 물리적으로 더 무겁다고 한다. 같은 양의 물감보다 더 무거운 광명단으로 그려진 그림은 한편으로 작가의 윤리적인 채무감을 고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의 대 사회적 역할을 제안한다. 중력重力에 매우 민감한 이 무거운 그림들은 결국 그림이란 세상보다 느리게 가는, 궁극적으로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자의 몫임을 시인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야말로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이미지의 시대에 그 지체된 자리를 끈질기게 버팅기며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우리 시각의 방부제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고 위로한다. 아마도 이것이 벽을 그린 풍경화들 그리고 그런 풍경화들로 이루어진 전시장의 풍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우화의 결말일 것이다.

백지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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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시작-구석에서, 예술이 되다 만 것들과 더불어

화면 위에 보이는 것은 실재하는 공간과 사물처럼 보일 뿐이지, 화면 위에 실재하는 것은 물감뿐이다. (...) 그러나 천천히 측면으로 이동해 보자. 완전 측면에서 그림이란 수직선 하나뿐이지 않은가? 이 지점이 회화의 불행이기도 하고, 행복이기도 하다.” 2003년 경 김지원은 자신의 작업노트에 이런 글귀를 썼다. 그즈음 그는 별 것 아닌 작은 물건들을 극단적인 시선의 클로즈업을 통해, 엄청난 규모와 초현실적인 양태로 탈바꿈시키는 <정물화, > 연작을 그렸다. 예컨대 먹고 버린 복숭아씨가, 240개 조각으로 나뉘어 촬영됐다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뇌 사진만큼이나 가공할만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식의 비상식적이고, ()양식사적인 정물화다. 그런데 앞선 작가노트의 물감수직선 하나, 이렇게 옮겨놓으니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éamont)의 시에 나오는 우산과 재봉틀만큼이나 그 조합이 이질적이고, 그 시기 작가가 그린 정물화만큼이나 현실적 균형관계를 유추하기 힘든 화두들로 읽힌다. 하지만 여기 화면 위 물감과 하나의 수직선은, 푸코(Michel Foucault)니켈 도금된 수술대라 이름붙인 인식의 체계, 즉 세계의 잡다하고 서로 다른 존재와 사물들이 이성의 단일한 질서로 분류 배열되는 서구 합리성의 체계 위에서 의도적으로 엉뚱하게 조우한 사물들-표상들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이광래 역, 말과 사물, 서울: 민음사, 1997, pp. 13-14.

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 체계에 대한 위반 혹은 난센스를 실험한 로트레아몽이나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같은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상징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작가 김지원이 생각하는 그림의 실재이다. 즉 화면 위에 칠해진 물감, 그리고 그림이 얇은 평면이라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확인할 수 있는 종이나 캔버스의 옆면 혹은 그 수직선이야말로 회화의 환영과 가상, 신화와 이데올로기, 가장과 신비한 비밀을 벗겨 내버리고도 남아있는 그림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김지원이 그림을, 단지 화가의 붓질에 따라 표면에 물감이 발린 현실의 납작한 사물에 불과하다거나, 3차원이나 4차원 같은 공간의 다양한 차원들이 눈속임만으로도 어느 정도 탁월하게 실현되는 2차원 수직 평면일 뿐임을 강조혹은 폭로하는 입장에서 그 같은 회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입장은 실제로는, 20세기 초중반 형식주의 모더니즘 회화가 추구했던 방향이거나, 20세기 중후반, 앞서의 모더니즘 미학을 공박하면서 회화의 객관적 미술 내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적 현실차원을 누설하고자 했던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의 그것이다. 전자가 추상의 텅 빈 캔버스로 귀착했다는 사실, 후자가 창조적 이미지 불모(不毛)의 지적 게임들과 혼성모방 이미지만 난무하는 기생적 화면으로 마감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 경우, 김지원의 그림들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그림에 대해 주장하는 바들이, 지금 격렬한 공감각적 파생실재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 고도 디지털 영상 시대에 회화를 무조건 보수하려는 자기 지시적 정의(self-referential definition)도 아니며, 그림의 필요충분조건을 창조 없는 창조나 패러디 인용 전유 해체적 합성에 때려 맞추는 이완된 태도도 아님을 눈치 채게 된다. 그럼 김지원 그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그림의 실재로 꼽은 물감-그림의 물질성하나의 수직선-그림의 평면성은 작가의 개별 그림들에서 어떤 상태가 되는가? 혹은 이제까지 어떤 다른 이미지, 개념, 소재, 작가 의도 등을 걸치며 출현해 왔는가? 우리가 이하에서 논하려는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아니다. 하지만 가능한 질문이자 가능한 답이기는 하다.

 

불명료한 마음, 예민한 바디

김지원의 작가론을 쓰기 위해 작가의 포천 작업실을 방문한 그날 밤에 확인한 메일 박스에는 북쪽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작가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거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었다. “아까이야기 중에 강샘 이론적인 머릿속이 무언가 명쾌해지는 거 같다 하셨는데 꼭 명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작업실에서 그림들을 보다가, 언뜻 뇌리에 떠오르는 김지원 미술의 구도 같은 것이 있어 그리 말했던 것인데, 작가는 그 이론적 머리라든가 명쾌함이라는 것이 못내 불편했던 모양이다. 메일을 보며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을 당시에는 나 또한, 아주 정직하게 말해서, 이 작가의 작가론이든 작품론이든 어떤 것도 쓸 수 없다는 말인가?’라는 불편한 의문이 들었다. 동시에 김지원 자신이 미술이론이나 비평 언어의 명료한 단언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그 미술의 본질, 달리 말해서 논리를 초과/탈주해 있거나 말을 넘어/이탈해 있는 이미지들의 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것은 아주 많거나 반대로 거의 없어 보였다.

2010월간미술6월호에 이영욱 전주대 교수는 김지원 그림 그냥 읽기라는 글을 썼다. <아티스트 리뷰>란에 쓴 글이니 만큼, 분명 그 글은 비평의 성격과 기능을 띠고 있을 텐데, 제목에는 그냥이 바로 그냥 직설적으로 들어가 있고, 본문에는 작가노트에서 인용한 문장과 그림들의 여러 제목과 필자의 단상이 성글게 짜여있다. 이영욱, 김지원 그림 그냥 읽기, 월간미술(2010, 6월호), 서울: 월간미술사, 2010, pp. 109-111.

거의 ()’에 가까운 글로 읽힌다. 그 글을 읽으며 나는 약 두 달 전 있었던 예의 작업실 방문과 메일을 상기했고, 이렇게 말하면 묘하게 들리겠지만, 김지원의 그림과 그것을 그냥 읽기한 이영욱의 글이 꽤 조화를 이룬다고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말하자면 명쾌한 논리로 작품을 개념 틀 내에 질서 짓는 비평의 독주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경계하는 작가의 작품론으로, 이영욱 식의 접근법은 김지원의 회화와 자신의 글 양자에 비평의 점잖은 거리감은 물론, 시적 의미의 풍요까지 얹어가며 성공했다고 본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갑자기, 아마 독자들에게는 사적으로 들릴만한 작가와의 에피소드, 그리고 다른 필자의 글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 그러니까 메타 비평이라 할 수 없는를 밝히는 이유는, 주관적 감상도 내면의 어떤 심정을 고백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내게는 김지원의 그림들이 가시적으로 내비치는 그 표면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모티브들, 그리기의 방법과 효과, 감각적 질과 미적 경험 요소들이 작가가 원하는 만큼, 또한 필자 이영욱이 그렇게 조응했던 만큼 분석적 읽기를 무화시키거나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지점이 있음을 인정할 의도밖에 없다. 저기 앞에서 내가 김지원 그림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이 아니라 가능한 답을 찾아보자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요소들에 기인했다.

김지원의 최근작을 보면 맨드라미, 초대형 함선, 공항 활주로의 비행기 트랩이 모티브로 잡힌다. 작가는 이것들을 어떤 의미의 구성물로서가 아니라, 또한 어떤 풍경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화면의 전체이자 주인공으로 가시화한다. 200호 크기의 캔버스 전면을 장악하고 있는 녹색과 붉은색과 흰색 물감의 맨드라미 밭, 수직으로 서있는 캔버스의 평면만큼이나 막막하게 감상자의 정면 시선을 향해 갑판을 펼치고 있는 회색과 청색 물감의 함선, 마치 기하추상의 그것처럼 단색조 배경 위로 그 화면을 절개하는 각종 선들이 겹쳐지면서 겨우 그것이 무엇인지만을 암시하는 비행기 트랩. 이렇게 김지원의 모티브들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맥락을 구성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소재 또는 시각적 요소의 역할을 넘어, 그 자체로 시각성(visuality)이자 감각의 현존성(presentness)을 구현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한여름 태양 아래서, 웃자란 잡초와 야생 꽃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풀밭을 어질어질 걸을 때 겪는 눈을 찌르고, 종아리를 까칠하게 긁어대는 빛과 촉각이 맨드라미 그림(<맨드라미>, 2005-2010)에는 진동한다. 또 우리가 약속된 범위나 한계, 종결을 모르고 어쨌든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때, 가령 사하라 사막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아야 하거나, 수용소의 가드펜스가 어디까지 처져있는지 모르면서 무조건 탈주를 위해 뛰어야 할 때 느낄 수밖에 없을 폭력적인 무한의 공간이 김지원의 함선 그림(<무제>, 2009)에 현상돼 있다.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기분과, 습도가 꽉 찬 실내에서 느끼는 답답한 존재감이 지배하는 비행기 트랩 그림(<무제>, 2009)을 거기에 덧붙여야 하고 말이다.

미학적으로 가치가 크지도 않고, 사회적 의식과 직결되는 내용 또한 희박해 보이며, 낭만적 감수성 면에서도 그리 탁월해 보이지 않는 소재들을 가지고, 이토록 우리 지각 기억에 저장돼 있는 어떤 경험들을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상기시키는 시각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김지원 회화의 힘이다. 아니, 비단 이 작가만이 아니라 뛰어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구사했던 그리기의 규정 불가능한 저력이다. 그 힘을 보다 실증적인 언어로 설명하면, 화가의 머릿속에서 불명료한 상태로 있던 주제나 모티브가 물감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라는 예민한 육체와 뒤얽혀 구현될 때, 선긋기와 붓질 같은 수행(performative) 과정을 통해 행사되는 파워이다. 김지원의 물감 묻은 붓은 단지 시각적으로만 유사한 것을 그려내지 않는다. 예컨대 맨드라미가 흐드러지게 핀 것 처럼보이거나,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이보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와는 달리 그의 붓질은, 실제 우리와 외부 세계의 관계를 주도하는 오감(五感), 그리고 현재의 지각 경험과 과거의 기억소, 이 양자를 동시적으로 자극하는 이미지 세계를 단조로운 평면 공간에 구현해낸다. 때로 그 과정은 물감을 덩어리지게 쌓아올리며 형상의 다채로운 질감을 거칠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신경질적으로 물감 피막을 찢어내며 예리한 묘사 선을 그어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순간의 감각적 퍼포먼스를 그림이 완성된 사후에, 그것도 작가 아닌 타인이 언어로 설명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비록 명쾌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김지원 작업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은 그의 회화를 정의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요컨대 작가가 제시한 그림의 실재로서 물감과 평면, 그 단순한 물질적 조건이 내가 제시한 그림의 규정 불가능한 저력으로서 수행성(performative power), 즉 당사자인 작가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해명하기 힘든 복잡한 즉흥의 메커니즘속에서 상호 연동하면서 출현하는 것이 김지원의 그림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것은 비단 그 작가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얘기라고 반박할 것이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바넷 뉴먼이나 애드 라인하르트 같이 물감의 질료적 속성과 2차원 평면이라는 회화의 주어진 조건을 그림의 자체 주제로 탐구했던 다수의 형식주의 추상 화가들은 거기서 제외해야 한다. 또 워홀(Andy Warhol)이나 리히텐슈타인(Loy Lichtenstein)처럼 기계적 이미지 복제 과정을 회화에 도입하거나 모방했던 팝 아트 작가들도 거기에 들지 않는다. 물론 결정적으로, 죠쉬 스미스(Josh Smith)나 로라 오웬스(Laura Owens) 만약 회화가 죽었다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그 죽은 시체 주변을 뒤지는” Nicole Davis, “A New Lease on Painting”, in: Artnet Magazine (February 9, 2005), http://www.artnet.com/Magazine/reviews/davis/davis2-8-05.asp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혹은 개념적으로 기성 회화의 패턴이나 그리기 조건을 분석한 그림을 그리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을 모두 열외 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회화의 수행성은 관념보다 미천한 육체의 흔적이거나, 비과학적인 관습이거나, 탈 신화화시켜야 할 전통이거나, 해체의 참고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지원 같은 작가들, 달리 말해서 여전히 그리기의 우연성, 불확정성, 모호함에서 답답함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이들에게, 그 물감 평면 행위 시간이 카오스처럼 몰려드는 그리기의 역장(force-field)그림의 시작이다. <맨드라미> 연작은 유독 김지원의 그림에서 그런 종류의 쾌락을 감상자가 대리 경험하기 좋은 작품들이다.

 

그림의 시작-구석에서

오랜 전 쓴 글에서 작가 안규철은 동료이자 후배작가인 김지원의 독일 유학 시절 그림과 그 이전 한국에서 그렸던 그림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그를 놓아주지 않는 대()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진술에 대한 무거운 의무감,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갈등과 같은 난제들을 유보 (...)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한 사물을 옮겨 그리는 행위가 이 세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새롭게 흥미로운 기회가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스스로의 판단 (...) 다시 말해서, 머릿속에 있는 어떤 메시지를 남에게 전달하기 위한 일차원적 서술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리는 과정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메시지를 받기 위해서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안규철, 움직이지 않는 나에게 경고한다, 2회 김지원 개인전 도록, 서울: 금호갤러리, 1995, 페이지 표기 없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추출할 필요가 있다. 첫째, 김지원의 회화가 앞서 내가 주목했던 그리기 자체의 수행적 과정과 파워에 강조점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메시지를 서술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안규철의 전언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전시를 통해 쉽게 마주치는 김지원의 구체적 지각경험 가득한 그림들, 예컨대 <맨드라미> 같은 그림이 독일에서의 작업에 맹아 상태로 있었다는 점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림에서, 그리는 과정 자체가 그림의 주체인 화가를 반대로 주도하는 그림으로 김지원의 작업 방향이 이행했다는 안규철의 판단은 아마 당시에도 예리한 분석이었을 것이며, 현재 이 작가 그림의 특수성을 오롯이 포괄하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미 나는 그러한 시각에서 김지원의 2000년대 최근작을 비평했다. 그러니 이제 들여다 볼 부분은 과거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진술 혹은 메시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김지원의 그림이다.

아마 이런 분류에 가장 가시적으로 들어맞는 작품은 김지원이 대학 4학년 때 그린 <출근길이 상쾌하십니까>(1987)일 것이다. 5공화국 군사정권 하에서,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운동이 극점에 달했던 그 시기, 김지원은 예의 그림에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방독면을 쓴 채 푸른 아침 출근길에 나선 남자 셋을 그렸다. 방독면의 직접적인 기괴한 형상만큼이나, 그 그림은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고, 소재가 되는 작가의 메시지 또한 자극적으로 읽힌다. 이를테면 한쪽에서는 대의 민주주의 투쟁이,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는생활 투쟁이 팽팽한 가운데, 작가는 그림(과 그 비아냥거리는 듯 한 제목)을 통해 후자에게 냉소적 말을 건넸던 것이다. 당시 성완경은 이에 대해 김지원의 회화는 이처럼 80년대라는 한 시대의 얼굴을 그 세월의 표정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성완경, 김지원의 그림에 부쳐, 1회 김지원 개인전 도록, 서울: 3갤러리&그림마당 민, 1988, 페이지 표기 없음.

고 상찬했다. 하지만 김지원의 이런 시사성 강하고 서술적인 그림은 심광현의 시각에서는,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면서 육체와 화면이 부딪힐 때 나타나는 공간적인 방전, 두께나 밀도와 같은 면이 여전히 희박하다. (...) 그의 그림들은 회화적인 특성보다는 일러스트적인 측면이 강하며, 일종의 경구(警句)적 성격을 지닌 우화와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심광현, 회화의 동요(動搖)’<그림에 관한 그림그리기>의 전략, 앞서 제2회 도록.

하는 한계로 비춰졌다. 두 평자의 비평적 시각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김지원의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그림들이 현실적 논평을 포함했고, 삽화적으로 기능했으며, 상대적으로 회화 내재적인 감각 질을 성취하는 데는 취약했다는 점을 유추한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비평과 논쟁하기 보다는 제3의 해석을 내놓고 싶다. 물론 <출근길이 상쾌하십니까> 같은 80년대 말 그림들, 그리고 대한민국 도시의 인공적이면서 부조리한 일상 풍경을 그린 <무거운 그림, 무거운 풍경> 연작이나 <34×24> 연작, <비슷한 벽, 똑같은 벽> 연작 등 90년대 다수 그림들은 다분히 대 사회적 논평으로 읽히고, 이미지를 사용한 비판적 메시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90년대 중반 그린 <그림의 시작-구석에서>는 김지원이 그림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그림이라는 실재를 형식이자 내용으로, 또는 그 둘이 내재적으로 겹쳐진 구조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 심광현의 보기로 따지면 일러스트 같고 우화적인 이 그림에서 형상은 그림 속 그림, 요컨대 메타 회화적 내용을 구축하기 위해서 동원된다. 그리기는 수직 모서리를 가진 평면 위에 물감 칠을 하는 행위이며, 원근법에 따라 깊이 들어간 듯 보이는 3차원 그림의 공간은 평평한 2차원 화면일 뿐이라는 진술 말이다. 그것이 김지원이 서술적 형상 회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소위 회화 그 자체를 매 순간 그림 위에서 실현하는 지각 경험의 수행성 회화를 만들어낸 그림의 시작이다. 모든 형상이 삽화적인 것은 아니고, 회화적인 특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린버그 식 물질성과 추상 형식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런 이분법적 판가름을 넘어서, 김지원의 <그림의 시작-구석에서>가 시작했고, <맨드라미>가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보이는 제 3의 회화적 사건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미 1960년대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회화에서 만개한 풍요로운 지각경험의 사건이고, 키퍼(Anselm Kiefer)의 회화에서 고도의 복합적 구조로 중층화 된 이미지-텍스트 사건이기도 하다. 이 작가들은 현상, 관찰, 사태 자체, 그리기, 말하기, 느낌, 경험을 그리기 과정 속에서 치밀하게, 그러나 일거에 확보한다. 그 과정의 치밀함과 일거의 단호함이 김지원의 최근 그림들에도 있다. 물론 그와 같은 태도와 힘은 우리가 이렇게 긴 글 속에서 가능한 답을 찾아보려고 했을 때, 처음 들여다봤던 그 최근 그림들이 아니라 역순으로 이제야 논했던 <그림의 시작-구석에서>에서부터 비축됐을 것이다. 작가는 어딘가에서 예술이 되다가 만 것들을 다시 그린 그림이 자기 그림의 내용이라 했는데, 이야말로 예술이 되는 구석(corner, minority)의 시작점이라고 나는 쓰겠다.

강수미 (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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