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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애영, 환기미술관 facebook

출생

1964, 충주

장르

설치, 미디어

홈페이지

www.yunaiyo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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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Garden(전시전경_아시안 아트웍스 갤러리), 2014

조명 설치,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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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꿈' 작가 윤애영


 I

어느 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닌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자신이 장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이다. 장자는 사색에 잠긴다. 조금 전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 자신이 장자인지 몰랐다. 꿈에서 깨고 보니 자신은 장자이다. 꿈에서 깨어난 자신은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는 묻는다.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장주몽접(莊周夢蝶), 유명한 장주(莊周)의 나비(蝶)의 꿈(夢) 이야기이다.

 

수천 개의 아틀리에

윤애영 작가의 아틀리에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아틀리에는 점점 더 많아 질 것이다.


전파상 아틀리에 / 우선은 그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자칭 ‘전파상’ 아틀리에부터 소개하기로 한다. 카페가 여기저기 눈에 많이 띄는 15구의 어느 넓은 정원에 한편으로는 커다란 아파트가 그리고 이 아파트와 마주하여 문화성 소속의 4개의 아틀리에가 나란히 있다. 첫 번째 아틀리에는 루마니아 작가가, 두 번째 아틀리에는 프랑스 조각가, 세 번째 아틀리에는 바로 윤 작가의 아틀리에이고, 네 번째 아틀리에는 더블린에서 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튀니지 출생의 프랑스 작가 아틀리에이다. 네 명의 예술가들은 비록 서로 국적이 다르고 작업방식도 많이 다르지만 예술이야기, 삶이야기를 나누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들 가운데 윤 작가는 가장 젊을뿐더러 이곳 아틀리에의 입주기간(2002년)도 가장 짧다. 이웃 아틀리에의 한 작가는 윤 작가가 아틀리에에 입주하기 前, 한 할머니 화백이 그 곳에서 오래 작업하셨는데, 그 분은 피카소의 친구였다고 한다.

윤 작가의 아틀리에로 들어가면 3면의 벽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조금의 여유 공간도 없이 상자가 가득가득 쌓여있다. 상자에는 전시되었던 작품들이 분해되어 담겨있다. “상자 속에 작품들이 숨 쉬고 있어요. 가끔은 이 상자들을 열어 맑은 공기도 쉬게 해주고 손볼 곳은 살펴서 돌봐줍니다."라고 윤 작가는 말한다. 매 전시 후에는 대형 상자가 6개 혹은 7개가 나오고, 그동안의 전시에서 생긴 수많은 나무 상자는 지하 창고에도 그리고 갤러리나 미술관의 보관창고에도 있다. 또한 집 안에 조그마한 여유 공간이 있는 곳에는 작품의 한 부분이었음직한 오브제들이 마치 숨바꼭질 하듯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저의 全생애 그리고 저의 생활은 이처럼 나무상자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수많은 나무상자들 속에 있는 작품들이 계속 숨 쉴 수 있도록 돌봐주는 것도 비디오 작가의 중요한 한 역할이라는 윤 작가의 말이 단지 아틀리에에 있는 상자들만을 볼 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필자가 윤 작가님께 아틀리에를 보고 싶다고 하자, “저는 전파상밖에 안하는데요."라고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 아틀리에에서는 전기 작업이라든가 컴퓨터 작업, 그리고 소품 등을 실험해보고 세부적인 것은 설치를 해보기도 하지만, 실제로 본격적인 작업은 전시장에서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면의 벽이 상자로 뒤덮여 있는데, 신비하게도 한 면의 벽 반쯤은 아무 장식도 없이 하얗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데, 이 벽도 결국은 벽이 아니라 스크린이었다. “이 벽에다 비디오 프로젝트를 합니다.” 윤 작가의 설명은 커다란 창문의 양쪽에 걸쳐있는 낯선 두꺼운 검은 커튼에 대한 궁금증도 동시에 풀어주었다.


카페 아틀리에 / 윤애영 작가는 아틀리에 주변 카페의 개?폐점 시간을 모두 알고 있다. 카페가 문을 열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카페에 홀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놓고 장시간 사람들 혹은 풍경을 바라본다.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웃기도, 인상을 쓰기도 때로는 슬퍼하거나 노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옆에 혹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저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관심밖에 있지요. 그럴 때는 제가 마치 꿈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흔히 꿈속에서 나 자신은 안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요. 또한 카페테라스에서 행인들이 저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면 제가 잠들어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결국 제게 카페는 꿈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입니다."

이처럼 카페는 윤 작가에게 끊임없이 장자의 나비의 꿈을 체험하게 하는 장소이다. 이러한 '꿈속의 현실' 혹은 '현실의 꿈속'인 카페에서 그는 구상을 하고 글을 적고 계획을 짠다. 구상이 잘되면 잘될수록 카페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진다. 보통사람들은 일이 급하면 급할수록 작업실에 머물러 일을 하지만, 윤 작가의 경우는 반대로 카페에 가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그러나 그에게 단골 카페는 없다. 카페 종업원 혹은 주인이 그를 의식하게 되면, 그 때부터 장자는 단지 장자일 뿐이지 더 이상 나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 아틀리에 / 전시가 있을 전시장 자체가 윤애영 작가에게는 아틀리에이다. 카페 아틀리에에서 영감과 구상을 하고, 전파상 아틀리에에서 세부적인 실험과 편집을 하고, 마침내 작품이 전시될 전시장에서 작품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단시일에 끝나는 작품부터 여러 달이 꼬박 소요되는 작품도 있기에, 규모에 따라서, 미술관 혹은 갤러리의 전시장은 베르니싸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윤 작가의 아틀리에이다.

이러한 여러 아틀리에 가운데에서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아틀리에는 바로 '삶'이라는 아틀리에이다. 윤애영 자신, 가족, 지인들, 하물며 지나가는 행인들, 나무 한 그루와의 만남,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삶의 매 순간들은 그의 작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재료이기 때문이다.

 

파리. 뿌리 깊은 나무에서 피는 영원한 꽃

비디오 설치 작가로서는 미국이 더 유혹적인 나라가 아니었냐는 질문에 윤 작가는 설명한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는 새로운 것을 바로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과 같이, 특히 파리와 같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에 새로운 것을 건설한다는 것은 오랫동안의 신중한 숙고 이후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새로운 것을 위해 수천 년 된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건설한다 할지더라도 이미 기존해있는 문화재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니 비록 새로운 것이 있더라도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제가 도불할 당시에, 파리에 비디오아트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기계가 낙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도 방금 말씀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예 기계가 없는 곳에서는 새로운 기계를 곧바로 수용할 수 있지만, 이미 구식기계나마 잘 사용해왔던 곳에서는 익숙해진 구식기계를 내던지고 낯선 새 기계를 도입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도불을 결정한 이유는, 뉴욕과 비교하여 파리에는 새로운 것은 적지만, 그 대신 이곳에는 뿌리가 깊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가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저는 뿌리 깊은 의식이 있는 유럽을 선택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한번 꽃이 피면 영원한 꽃이 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에 접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파리의 삶에서 크고 작은 많은 희비가 겹쳤지만, 윤 작가는 새로운 문을 두드리는데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다. 주어진 매 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결국은 문이 열린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기에, 작업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충실하려고 애쓰고 또한 그러기에 매순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저는 놀 때도 최선을 다해서 놀고, 작업할 때도 최선을 다하고, 모든 일을 할 때 역시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춤추는 자가 되지 말고 춤 자체가 되라’는 인도의 신비주의 철학자 까비르 말처럼,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삶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이들이랑 놀면서도 아이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아이들 자체가 되어 놀 때 너무도 즐겁습니다." 하물며, 윤 작가는 잠을 잘 때도 기쁨으로 얼른 잠들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잠을 자면 그곳에 예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 작가는 알 수 없는 새로운 미지의 문을 항상 두드리고 그 문 뒤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기뻐 놀라워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문을 두드린다. 그의 "작업은 창조라기보다는 발견"이라고 한다. 완전한 ‘無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단어이고, 삶의 신비를 찾는 여행자로서 자신의 작업은 ‘새로운 문 뒤에 있는 발견’과 같다고 한다.

 

“수많은 형용사를 동원하여 산딸기의 맛을 설명하더라도, 직접 그 맛을 보아야만 그 새콤달콤한 맛을 느끼듯이, 제 작업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작품 속으로 들어가 숨 쉬고 호흡하며 관객들 각자의 상상력이 어우러질비로소 제 작업이 완성됩니다." 윤애영 작가는 그의 작업으로, 그리고 그의 꿈속으로 관객들이 들어오기를 그래서 더 이상 관객이 아닌 바로 작품 혹은 꿈속의 주체가 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작업을 할 때, 윤 작가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전체적인 구성은 가지고 시작하지만, 어떤 정형적인 틀을 정해놓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미리 규정해놓고 이를 따라 한다면, 과거의 내가 작품을 하는 것이지, 작업을 하며 창작과 발견의 환희에 젖어있는 현재의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작업을 할 때 ‘손' 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나를 조정하고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도 존중합니다."

 

<심연 Abysse>

前아트프레스 및 르몽드 미디어아트 평론가인 장 폴 파르지 Jean-Paul Fargier가 지적한대로, 조와 윤은 “남성&여성, 빛과 그림자 그리고 고풍적 상징과 현대적 신호"로 나타나는 갈등과 화합의 이중주를 오랫동안 연주하며 공동작업을 해왔다. 99년 이후부터 윤애영은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한다. 이중주를 연주하다가 독주자로 새로 태어나기위한 끝없는 고통과 빈자리의 공허함은 <심연 3D>(2000)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2천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 프랑스 파리시에서 기획한 전시로 파리의 까르나발레 미술관에서 열렸던 “3차원의 파리 Paris en 3D" 전시의 초청 작품이다. 이 전시는 첨단의 테크놀로지 예술의 역사와 이 시대 미래의 영상을 대표 할 수 있는 입체영상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전시장 안에 낯설게 놓여있는 하나의 커다란 배럴통을 발견하게 된다. 이브의 자손인 인간은 호기심에 못 이겨 통 속을 들여다본다. 배럴통 양쪽으로 마련된 입체안경을 끼고 통 안을 쳐다본다. 작품 "심연"은 입체영상으로 제작되었으며, 깊이가 1미터밖에 안 되는 배럴통 속을 쳐다보는 순간, 관람객은 끝이 없는 심연과 공허를 마주치게 된다. 입체영상으로 처리된 육체는 배경과 분리되어 관객들 눈앞에 허상으로 떠다닌다. : 마치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상"을 연상시키는 한 남자가 파리의 어두운 골목에서 혹은 세느강 위에 떠돌고 있다. 혹은 웅크리고 앉은 한 여자가 파리의 밤하늘에서 공기보다 더 가볍게 부유하고 있다. 장 폴 파르지가 "윤애영은 비록 200 리터짜리 통이 아닌 작은 찻잔을 사용했을 지라도"심연"을 잘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듯이,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상 오브제에 심연을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3차원적 단순한 일상세계를 통해 허공의 침상에서 잠을 자는 듯한 심연의 끝, 한 없이 깊기만한 심연의 나락에, 4차원적 영혼상태를 구체화시켜 표현해 냈다.


<비밀정원 Secret garden>

2000년대 초부터, 윤애영은 나무를 나타내는 작업을 많이 했다. “저는 나무가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우리들 영혼과 같다고 느낍니다. 언젠가 좌절되고 삶에 지쳐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늘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하늘과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무가 제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바라보았던 나무의 가지는 거의 잘리고 하물며 기둥까지 잘렸는데도, 남아있는 가지 끝으로 새 순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가지가 잘리고 기둥이 잘리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데 말입니다."

 

<비밀정원>은 바르셀로나의 메트로놈 재단 초대전(2001)에서 처음 보였고,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국립미술관(2001), 프랑스 쌩퐁스아트센터, 바스노르망디 현대미술센터(2005)에서 재연되었다. 500m²전시장의 전체 공간이 하나의 작품으로 설치었으며, 작품을 감상하기위한 여러 갈래의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관객들은 신비의 산책에 초청된다. 정원에는 야생에서 피는 화려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애쓰지 않는 청순한 꽃 마가렛트가 가득 피어있고, 매화꽃으로 만발한 나무가 발견된다. 마가렛트 사이사이 혹은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투명한 스크린들이 걸려있고, 그 위에는 더 이상 2차원적 평면이 아닌 3차원적 비디오 영상들이 마치 어슴푸레한 기억과도 같이, 혹은 우리 자신의 영혼의 흔적과도 같이 너울거린다.

 

<비밀정원>이 설치된 전시장에서는 보물찾기하듯 이러한 영상을 찾아다니는 사람, 숲속에서 거닐듯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 하물며 나무 밑에 편안히 누워 휴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 꿈속에서 산책하듯이 산책을 합니다. 어떤 길은 막혀있기도 어떤 길은 열려있기도 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나무사이에, 꽃틈 사이에 있는 영상들을 발견하기도, 때로는 그냥 지나쳐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영상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어느 길이 막다른 골목인지 관객들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작가는 관객들이 정원을 거닐며 가지게 되는 수많은 상상력과 감정들이 보이지 않는 이슬이 되어 내려 앉아,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꿈속으로의 초대

“작품의 주제를 어떻게 찾으시냐"는 질문에 윤애영 작가는 “마치 우리가 어떠한 주제의 꿈을 의식적으로 꿀 수 없고 꿈이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저는 주제를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제가 제게 다가옵니다.”라고 대답한다. “꿈은 만질 수 없지만 생생한 경험입니다. 저는 또 다른 어떤 시간 속에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꿈속에서는 제가 동시에 프랑스에 있으면서 한국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새가 되어 혹은 물고기가 되어 ‘이중적, 삼중적 동시 공간체험'이 가능하며, 또한 어린 시절과 현재 자신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역시 ‘이중, 삼중적인 시간체험'이 가능합니다. 여러 공간을 난다는 이러한 사실도 한번 깨어나면 영원히 잊혀버리는 또 다른 우리의 중요한 실존이자 현실이라고 봅니다. 제게 꿈속의 삶은 저의 또 다른 이중의 삶입니다.” 윤 작가는 한 때 인도의 신비주의자 리즈니쉬나 신비주의 철학자 까비르에게 심취했었으며, 이 세계에서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관심의 주 대상이었다. 그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좋았고, 그것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더욱 좋았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고 한다’ (까비르, 천국으로 가는 시 中)는 것은 마치 ‘군중 속에서 고독’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너무나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는 세상에 비물질적인 것이 외면당하고 있다. 세상에 사람이 점점 가득차 가는데도 사람들은 더더욱 외로워하고,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한다.

 

현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의 망각’을 말했듯이, 윤애영 작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종류의 ‘망각’을 일깨우고자한다.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노력과 경탄을 통해 동물이나 기계와 구분되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점차적으로 망각하고 있다. 꿈과 신비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지나치게 대상화함으로써, ‘신의 죽음(니체)’에 이어 ‘너무나 이른 인간의 죽음(미셸 푸코)’을 맞이하게 되었다.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후 현대문명에 이르기까지 ‘ready made’로 표현될 수 있는 우리의 세계는 시공간적으로 ‘hic et nunc(지금 여기)’라는 즉각성, 현재성에 함몰되어 ‘언젠가 혹은 다른 어느 곳에’라는 신비성, 초월성, 무한성을 잊어버렸다. 어린 사과나무 묘목에게 지금 당장 사과를 맺으라고 요구하는 결과론적 사고, 혹은 사과 열매를 맺을 때까지 목적론적으로 기다리는 ‘hic et nunc’의 시대를 윤애영은 거부한다. 반대로 그는 사과묘목의 여린 아름다움에 신기해하고 감탄하며, 뜨거운 햇볕과 눈보라를 이겨내며 자라고 있는 사과나무를 꾸준하게 지켜보며 순간순간을 놀라운 눈으로 관찰한다.

 

그렇다고 윤 작가가 현대 문명을 거부하며 복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녀는 우리에게 ‘익숙한'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낯설어진' 신비의 세계로 초대한다. ‘문명'과 ‘신비'의 우위를 가려 양자선택을 강요하는 이원론적인 도식이 아니라 ‘문명의 언어로 신비'를, ‘첨단 테크놀로지로 꿈을 시각화'하는 노력을 윤애영은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평론가 장 폴 파르지는 “윤애영은 가장 현대적인 작업을 하면서 사고가 테크놀로지에 점령되어 인간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오히려 테크놀로지를 넘어선 단계에 와있다"고 말했다.

 

2008. 3. by 심은록 

심은록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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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애영의 비밀정원 ( Secret Garden )

윤애영의 비밀정원 ( Secret Garden ) 인위적인 야광을 발하는 정원이 거대한 어두운 정원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활짝 핀 아먼드 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무 가지 위에는 흐르는 물위에서 공중 부양하는 벌거벗은 작가의 비디오 프로젝션이 투명한 스크린들에서 방영되고 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돌풍과 잘 어우러진다. 방문객은 비디오 프로젝션으로 인공 꽃이 만발하는 정원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 Olesya Turkina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윤애영에 의해 전시된 이번 멀티미디어 설치는 2002년 11월13일부터 2003년 1월15일까지 러시아 국립미술관 Marble Palace 전시관에서 열리게 된다. 윤애영은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젊은 비디오 작가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파리, 바로셀로나, 런던, 마드리드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파리의 FIAC, 마드리드의 ARCO, 한국의 광주비엔날 같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비엔나에 참석을 하고 있다. 그녀는 1990년 초 비디오작가 개척자로 경험을 쌓았던 백남준, Vito Acconci와 이들을 뒤이은 비디오 낭만 작가 Bill Viola, Tony Oursler와 같은 작가들의 세대에 속해있다.
윤애영은 은유적으로 그녀의 설치 "비원"을 꿈이라고 부른다. "긴 나의 꿈속에서 나는 물고기와 같이 헤엄을 치고 새와 같이 구름 안에서 날고..... 나의 영혼은 무엇을 만나려는지... 어디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지... 모르는 체 바람과 함께 비상한다. "정원"은 나의 꿈의 표현이고 나무는 나의 영혼의 이미지이다."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정원"은 꿈이자 환상의 세계로 여기서는 일상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 전체공간은 비디오 프로젝션의 섬광에 의하여 리드미컬하게 분리되어 있고 더구나 "블랙나이트" 의 푸른빛에 의해 넘쳐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평상적인 넓이라던가 정상적인 것들의 법칙이 없다. 나무는 벌거벗은 사람의 이미지 형태로 열매를 맺고 있고 비디오 프로젝션이 닿는 공간들은 꽃들 사이에서 포근하게 어스레한 빛을 발하면서 작가의 꿈들을 소생시키고 있다. 관람자는 갑자기 불가사이한 나라 또는 꿈속에서 자신을 발견한 여행자와 같은 기분이 된다. 여기에서는 물체들이 자리를 바꾸고, 여기서는 정원이 관람자의 혼을 양성하는 영혼을 품고 있다. 이 설치에 대하여 말할 때 윤은 장자(Choan-tsu)의 유명한 꿈을 상기한다. Choan-tsu가 잠을 자면서 사람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나비가 사람에 대하여 꿈을 꾸고 있는지가 확실하지 않을 때이다.
관람자와 작가의 공유된 경험은 "실지" 물체들과 환영 같은 비디오 이미지와 소리들로 채워진 신비로운 공간에서 융합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작가의 인생경험을 반영하는 많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여행자의 이미지는 Krishnamurthy 철학에 대한 윤애영의 열정을 반영하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때에 끝없는 여행"을 한다는 작가의 은유적인 개념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와 꽃들 같은 실체적인 물체들은 논리와 의식의 세계, 물질세계인 "지구"로 작가를 돌려보낸다. 물과 바람 같은 자연적인 소리는 윤애영에 있어서는 "꿈의 정도(royal road of dreams-Sigmund Freud의 말에서 인용)"를 따라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무아의 세계를 상징한다. 윤애영의 멀티미디어 설치 "비원"은 작가에 의해서 다시 또다시 소생하는 과거의 추억을 담고 관람자에 의하여 경험되는 현재와 연결하여 향후 우리들의 꿈에서 아마도 다시 싹 틀 미래의 씨들을 운반한다.       
                             
Olesya Turkina
Curator at The State Russia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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