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Project with Korean Art Museum
로그인  |  회원등록  |  English    Contact us

아티스트

Home > 참여작가 > 상세보기

photo

김준, 가일미술관

출생

1966, 서울

장르

사진, 미디어

홈페이지

www.kimjoon.net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Email

Drunken-Dom Perignon, 2011

Digital print, 120×192cm

이전
다음

김준의 작업 - 페티시, 숨 막히는 살들의 향연

인간의 몸은 자기표현의 도구다. 그 원형적 이미지를 바디랭귀지 곧 몸짓언어에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문신과 바디페인팅과 피어싱이 더해지면서 일정한 장식성과 함께 그 이미지는 단순한 자기표현에서 나아가 좀 더 뚜렷한 시각정보 내지는 시각적 기호의 형태를 얻는다. 저마다의 몸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꾸미는 과정을 통해서 몸이 표현의 최전선이며 언어와 기호의 파사드로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문신은 특히 가부장적 제도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남성문화와 관련이 깊다. 예컨대 하면 된다는 문구가 새겨진 문신은 밀어붙이기 식의 군사문화를 풍자한다. 그리고 애인의 은밀한 신체 부위에 숨겨놓듯 새겨 넣은 하트 모양의 문신은 애인을 소유물처럼 사물화하는 성적 페티시를 반영한다. 또한 야쿠자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용 문양의 문신은 위협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하면 다양한 유형의 하위문화에서 문신은 정상성문화에 대항하는 비정상성문화의 아이콘으로, 일종의 저항적인 제스처로서 의미기능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스티커 문신에 이르기까지 문신은 몸에 대한 금기와 터부의 경계를 넘어,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이제 하나의 뚜렷한 모드로서 자리 잡았다. 문신은 이렇듯 자기표현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이 아로 새겨진 문화적 기호이며, 시대적 욕망이 기입된 욕망지도다. 김준이 문신에 주목하는 이유이며,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이기도 하다.
김준이 문신을 소재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중반이니까 이제 벌써 10년 세월을 훌쩍 넘겼다. 처음에 그는 문신을 새겨 넣기 위해 일종의 유사 살덩어리를 만들었다. 천이나 인조가죽 속에 솜이나 스펀지를 넣어 빵빵하게 부풀린, 부분적으로 박음질한 오브제를 만든 연후에 그 위에 각종 문신을 새겼다. 그리고 이후 컴퓨터상에서 몸을 그리고 문신을 덧입히는 식의 마우스 페인팅을 거쳐 완성된 이미지를 디지털프린트로 출력하거나 영상 이미지로 투사하는 방식으로 진화한다. 오브제 작업이 흡사 실제의 살점을 보는 것 같은 이질감과 이물감을 느끼게 한다면, 일종의 가상 이미지에 바탕을 둔 미디어 출력물은 상대적으로 더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육감적이고 섹시하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김준의 작업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문신이라는 특이한 소재도 그렇지만, 특히 문신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해석이다. 즉 그의 작업에 나타난 문신은 흔히 볼 법한, 상식으로 굳어진 컨텐츠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아디다스, 스타벅스, 구찌, 크라이슬러, 페라가모, 아르마니, 크리스찬 디오르, 프라다와 같은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물신화된 기호들이, 붉은 악마와 특정의 정당과 같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념과 신념이,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팬 동우회에 반영된 하위문화의 취향이, 슈퍼맨과 같은 만화책에 반영된 유년시절의 추억이 문신으로 아로 새겨진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신념, 어떤 기호, 어떤 취향에 길들여진 저마다의 의식화된 문신을 새겨 갖고 있다. 이 문신들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이며 시대적인 욕망의 지표들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때로는 그들의 무의식에마저 파고든 욕망을 일종의 의식화된 문신이며 사회화된 문신의 경우로 본 것이다.
의식화된 문신은 의식으로 굳어진 문신이다. 여기서 문신은 의식의 외화 즉 의식의 물적 형식이다. 그 의식에 욕망이 탑재되면 의식이 물화되고 욕망이 물화된다. 욕망이 사물형식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나는 페라가모를 욕망한다. 이 말은 내가, 내 의식이, 내 몸이 페라가모를 욕망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욕망의 물적 형식은 내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내 몸에마저 그 생생한 흔적을 남긴다. 페티시즘 즉 물화 즉 비물질의 물질화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렇게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내 몸에 아로새겨진다. 3D를 이용한 디지털프린트로 나타난 실사에 가까운 정교한 이미지는 이렇듯 내 몸에 아로새겨진 욕망의 문신을, 그 문신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컨텍스트를 효과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리고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페라가모를 향한 욕망은 몸에 상표 고유의 로고와 디자인으로 아로새겨지고, 나아가 피부에마저 고유의 질감으로 전사된다. 그래서 내 몸 자체가 페라가모로 둔갑하고, 상품처럼 제시된다. 내 아이덴티티가 통째로 페라가모가 된다. 작가의 작업에서의 신체가 실제보다 더 세련되고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런 비인간 혹은 탈인간화에 의한 것이며, 그 자체 상품으로 둔갑된 인간이며 인격 탓이다. 상품은 항상 현실보다 매력적이고, 이미지는 언제나 실제보다 세련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기획은 세계의 상품화와 이미지화에 맞춰져 있고, 그렇게 상품화되고 이미지화된 세계가 매력적으로 와 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에는 항상 쇠락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상품에는 그런 그림자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본주의의 기획은 있는 그림자를 없는 양 하는 것이고, 그런 만큼 일종의 환상 산업에 기초해 있을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욕망을 발산하는, 그 자체 매력적인 상품을 실현하고 있는 이미지 속 몸들이며 가상의 살들은 바로 이처럼 환상적인, 가상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인간적이고 탈인간적인 현실에 대한 작가의 반응과 코멘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은 유혹적이고, 유혹적인 기제로 치자면 성적 페티시를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성적 페티시를 엿볼 수 있는 작업이 각각 디지털프린트와 영상작업으로 출력된 버블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욕망 혹은 성적 페티시의 이중성 내지는 양가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각각 핑크와 아이보리로 나타난 신체의 색깔이 감각적이고 섹스어필한다면, 신체의 표면 위로 부풀어 오르는 흡사 종기 내지는 종양을 연상시키는 버블이 병적으로 와 닿는다. 에로스와 에로스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타나토스를 하나의 상황 속에 불러들여 조합한 것인데, 아마도 실제로부터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자본주의의 기획에 반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버블을 상징계 사이로 헤집고 들어오는 실재계(실제의 그림자)의 느닷없는 출현으로 보는, 라캉 식의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사실, 욕망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획에 대해서도 작가는 단순히 반응하기보다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를테면 오브제 작업에서의 <지옥도>나, 마찬가지로 불교적 도상을 테마로 한 영상작업 <반야심경>이 그렇다. 특히 불교의 도상이 새겨진 살갗의 표면 여기저기서 분출하고 터지는 크고 작은 분화구를 담고 있는 < 반야심경>이 그러한데, 작업에서 불교의 도상과 욕망을 암시하는 분화구의 상징적 의미가 충돌한다. 불교에 의하면 욕망은 만유의 근본이며 만고의 원인이다. 존재의 본성이며 업의 원인이다. 욕망이 없으면 업도 없다. 그렇다고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욕망 밖에서 욕망을 다스리는 것(아예 욕망 밖 같은 곳은 없다. 욕망은 존재의 본성이므로, 존재 자체이므로)이 아니라, 욕망과 더불어 해탈(다르게는 내파?)하는 것이며, 그 해법은 각자 찾을 일이다.
그런가하면 근작에서 작가는 도기를 소재로 작업의 범주를 확장 심화시킨다. 그 표면에 자본주의의 도상이며 시대적 아이콘이 문신으로 아로새겨진 파편화된 신체 조각들을 무슨 음식인 양 도제 접시에 담아낸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욕망과 특히 성적 페티시와 관련해 꽤나 도발적인 해석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인간을 탐욕과 탐식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식(이를테면 나는 너를 먹고 싶다는)의 보다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의 상품화를 겨냥한 자본주의 욕망이 성적 페티시로 나타난 숨 막히는 살들의 향연을 경유해 마침내 본격적인 만찬의 형태로까지 발전되고(실제로 작가는 전작에서의 주제를 파티로 설정했는데,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덩달아 자본주의의 욕망은 노골화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자본주의의 욕망은 작가의 작업에서 보다 근본적인데, 이를테면 하나같이 얼굴이 없는 신체들이 그렇다. 얼굴 없는 신체는 인격이 거세당한 신체며 익명적인 신체, 그래서 철저하게 상품화를 실현한 신체에 해당하며, 그 자체가 자본의 무차별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본의 무차별성은 일종의 브리콜라주의 형태로도 변주된다. 이를테면 온갖 이질적인 사물의 편린들이 하나의 전체(억지 전체?)로 조합되고 합성된 혼성잡종으로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어떤 대상성을 겨냥하며, 그 자체 가상 실재의 한 경우로서 제안된다. 알만한 리얼리티를 재현하거나 재연하거나 재확인시켜주는 대신,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출하고 새로운 가상 실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만큼 비록 그 외양이 감각적 실제를 닮았지만, 사실은 감각적 실제와는 동떨어진 차원을 향하는데, 그 다른 차원에서 열리는 육체의 향연이 자본주의의 판타지 산업과 닮았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이런 판타지 산업에 단순 반응하는 경우로도 읽을 수가 있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고유의 어법인 무차별성을 전유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를 내파하려는 전략(이를테면 무차별성을 과도하게 적용해 상품화된 몸을 해체시키는 식의)으로도 읽힌다.

고충환(미술비평)

더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