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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우, 성곡미술관

출생

1969, 서울

장르

사진, 퍼포먼스

홈페이지

www.kyungwooch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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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e Editors #1, 2014

피그먼트 프린트, 160 x 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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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대화 -천경우 의 퍼포먼스 작품들에 대한 생각들-

두 사람이 악수를 한다 이런 인사법은 많은 나라들에서, 주로 서구에서 흔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몸짓으로 상대방에 개방적 자세와 존중을 나타내 보인다. 처음 만날 때에 이런 식으로 손을 잡으면서 두 사람은 약간 가까이 서면서도 동시에 적당히 필요한 거리도 지킨다. 악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여러 의례 행위 중 하나이다. 관습이 된 행동들은 우리가 이웃들과 지내는 방법을 분명하게 새겨줄뿐더러,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들을 제어한다. 한국 출신 작가 천경우 는 이런 맥락들에 관심을 갖고, 여러 작품들에서 이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일상의 행동들과 몸짓은 그 동안 천 작가가 십년 전부터 시작해 왔던 퍼포먼스들의 출발점이다.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과정인 이 퍼포먼스에는 개인들 또는 여러 무리가 공연할 수 있다. 이 퍼포먼스는 관중에게도 적극적으로 열려 있다.

 

2009년 여름에 퍼포먼스 작품인 'Greetings'가 브레멘 미술관(Kunsthalle Bremen) 앞 광장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20명의 사람들에게 퍼포먼스 참가자들 중에서 짝을 고르라고 청했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이들이었다. 곧장 그들은 20분 동안 손을 내밀고 악수해야 했다. 맞잡은 두 손에 비닐 랩을 말아 서로 뗄 수 없게 연결했다. 다른 요구사항은 없었다. 사용한 수단들은 아주 간단한데도 서로 인사하는 몸짓에서 예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강렬함과 가까움이 담긴 순간이 생겨났다. 이 때에 천경우 는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내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의식적 지각을 중요하게 여겼다. 참가자들은 낯선 이에게 어떤 상태로 마주서 있는지를 몸으로 체험해야 했다. 상대방에게 처음 말을 건넬 때 어떻게 하는지, 자신의 눈길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어떤 느낌인지, 꼭 잡은 손의 따뜻함이 어떤 느낌인지 그런 것을 체험해야 했다.

 

이미 2년 전에 천경우 작가가 실행한 퍼포먼스 'Versus'는 비슷한 착상을 따르지만 효과에서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이 퍼포먼스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여러 나라들과 여러 도시들에서 볼 수 있었다. 뉴욕, 바르셀로나, 취리히 등을 거쳐 이제 서울에서 마지막 퍼포먼스를 치렀다. 진행 과정은 매번 똑같았다. 참가자들은 서로 마주세운 긴 의자에 앉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머리를 짝의 어깨 위에 대고 15분 동안 이 자세로 있었다 눈을 감고 가능하면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외부에서 보자면 이 무리들은 명상에 빠진 고요한 섬같이 보였다. 뉴욕 타임즈 스퀘어는 이 퍼포먼스가 달리는 차와 보행자로 가득한 대도시의 분명한 반대상이 아니겠느냐 보았다. 이 장면은 얼른 보기에 조화롭게 보일뿐더러 공동체 속에서 화해하는 것 같다고 오해되지만, 참가자들에게는 규칙에 따라 수행해야 할 과제였다. 작가로부터 요구된 신체적인 접근은 친구들과 지인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낯선 이들에게는 자기를 알려주지 않으려 신경 쓰고 그러다 보니 저절로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런 경계를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특별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체험한다. 그런데 이 순간에서 생각해 볼 거리가 또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방뿐 아니라 자신도 더욱 강렬해진 지각의 대상이 된다.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에 예민해지게 되고,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에도 예민해 지며, 심장 박동 소리, 신체들의 피곤한 부담에도 신경이 쓰인다. 많은 이들이 만날 때 갖게 되는 이런 아주 가까운 느낌을 매우 긍정적이라고 느꼈다. 한편 그러한 상황에서 엄청난 내적 긴장에 눌려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을 파악하고자 천 작가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서로 다른 나라와 문화권에서 실행했던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사람을 뜻하는 한자 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한자의 모양은 앞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지만 또한 두 사람이 서로 기대서 서로를 받쳐주고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이 퍼포먼스의 출발점이다. 이 퍼포먼스는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자신을 단점과 장점, 소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로서 다시 바라볼 때, 반대편에 서 있는 다른 이와의 만남은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천경우의 예술은 이에 대한 예이다. 사람들이 함께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생각에 빠지는 자리가 생겨난다. 물론 이 자리는 잠깐 동안만 있다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고 만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며, 이야기를 쓰지만, 이런 것들은 그런 순간들을 불충분하게 기록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기록들은 기억 속에 다양한 흔적을 남기며 계속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늦어도 1960년대, 1970년대 전위 예술 운동 이래 퍼포먼스는 예술적인 행위의 형태로 국제적인 예술 창작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구성요소가 되었다. 앨런 캐프로의 해프닝이나 다양한 플럭서스 행사와 콘서트들 그리고 요셉 보이스의 프로젝트들 또 보이스가 남긴 유명하면서도 그만큼 오해되는 "누구나 예술가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기, 사회 참여 그리고 예술과 삶의 일치는 이런 맥락에서 그저 중요한 몇 개의 핵심어들일 뿐이다. 천경우의 퍼포먼스는 개별적으로 뜯어보면 이런 역사적인 입장들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그런 하나의 발전의 연속선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그의 퍼포먼스들은 그를 국제적으로 명성 있게 만든 특수한 형식의 사진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천 작가는 연작의 사진들과 개별 사진들을 작업해 왔다. 그 중에는 상대적 흐릿함을 보인 인물사진들도 있었다. 이러한 효과는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 아니 며칠 동안이라는 전례 없이 긴 노출시간의 결과이다. 긴 노출시간이 19세기 사진의 초창기 기술수준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면, 천 작가에게는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적인 예술적 고민의 결과이다. 천 작가는 사진들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려 들지 않는다. 보통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천 작가에게는 시간과 지속의 체험이 결정적이다. 사진은 이를 위해 적합한 보조수단이다.

 

많은 경우 그는 스튜디오에 사람들을 초대해서는 촬영하는 동안 자신에 대해 말해 보라고 청한다. 하루 일상이 어떤지 (Six Days, 2003),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In/finite, 2006) 말해보라고,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에게는 자신의 외모를 상상해 보라고 (Believing is Seeing, 2007) 작가는 청한다. 아무 말 없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사진작가와 인물 사이에는 전례 없는 결속 관계가 생겨나서는, 서로에 대한 지각, 집중 그리고 반성에 흔적을 새긴다. 이는 무언의 대화로 사진 속에 압축된 형식으로 새겨지며, 주의 깊게 사진을 보게 되면 그러한 무언의 대화가 전해진다. 천경우는 사진을 위한 퍼포먼스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튜디오에서 가졌던 경험과 만남은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행동들로 확장된다. 실제로 천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들은 서로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퍼포먼스, 영상, 사진, 설치는 다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에 대한 조건이 되며 때로 혼종 (混種) 형식이 생겨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영상 작품의 근간은 퍼포먼스이다. 'Perfect Relay: Citius, Altus, Fortius(2012)' 는 런던 올림픽에 맞춘 전시회를 계기로 제작되었다. 작품의 제목이나 맥락은 운동 경기에서 갱신되는 최고 기록을 짐작케 하지만, 이는 작품의 주제가 아니다. 소재는 무엇보다도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이다.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변화가 그런 일상적인 행위들을 방해하면서 전혀 새로운 경험의 대상으로 바꾼다. 천경우는 여러 나라 아이들을 불러서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세게라는 올림픽의 익숙한 표어를 각각 자기 나라말로 종이에 쓰게 한다. 연필은 마치 계주경기의 바톤처럼 전달되어서는 첫아이에게 다시 돌아간다. 그런데 아이가 다른 손으로 글씨를 써야 할 순간, 생겨나는 어려움은 특이하다. 보통 금방 할 수 있고 또 대단히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도, 이 때에는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작가는 성취해내겠다는 중단되지 않는 의지와 열정을 가로막으면서 이 상황의 이면을 보여준다. 부족함과 실수는 생산의 동력이 되며, 예술적인 노동을 위한 동력만은 아니다. 이것들은 새로운 깨달음과 창조적인 과정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는 이를 통해 관용에 대한 효과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굽히지 않는 성과 사회의 원칙에 대한 대안으로 경쟁 대신에 들어서는 것은 서로 나누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체험이다.

 

최근 작품인 'Gute Nachrichten(2012)' 은 이러한 의미에서 국경과 문화, 시간대를 넘어서서 한국의 서울과 독일의 브레멘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시킨다. 천 작가는 수년 간 이 두 도시에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20명의 브레멘 시민은 기꺼이 받고 싶은 좋은 소식(Gute Nachrichten)을 적어내도록 요청 받았다. 20명의 서울 사람들은 이들이 말한 소망들 중 자신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소식을 골라낸다. 퍼포먼스 당일에 참가자들은 생중계 영상을 통해 처음으로 서로 만난다. 그렇지만 말은 나누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차례로 독일인 상대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하고, 독일의 파트너들은 이에 따라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면서 좋은 소식을 상징적으로 전한다. 바로 이 순간 이 두 사람들 만이 서로를 보며 어떤 소망에 서로 하나가 되는지를 알게 된다 나이, , 살아온 과정에 상관없이. 자기 인식은 여기서 어느 한쪽에서만 일어나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천경우의 작품은 사람이 서로 살아가는 가능성에 대한 조건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휴머니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서구 철학과 동양 철학의 생각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그는 조화와 동형성이라는 단순한 세계상을 다루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말없는 몸짓을 예술로 변화시키며 이 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가치를 알아본다. 그의 작품들은 서로 다르고 반대되며 약점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에게 이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모순된 상태 속에서 풍부함으로 파악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경우가 이해하는 예술의 과제는 우리의 지각 능력을 날카롭게 하고,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키며,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변화가 가능하도록 여기게 하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의 손을 잡는 몸짓 하나에서 시작한다.

잉고 클라우스 (Weserburg-Museum für moderne Ku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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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과 자아의 울림

 

시간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 알버트 아인스타인(Albert Einstein)

과거는 현재보다 조금 더 희미한 상태이다.”

- 아서 밀러(Arthur Miller)

"사람들은 시간이 어떠한 결과를 얻기 위한 철저한 진행 상황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시간은 비 선형이고, 비 주관적인 시점이며, 마치 왔다 갔다 하며 빙글빙글 도는 큰 공과 같다."

- 영국 공상과학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의 열 번째 닥터, "Blink"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 때 사진이 거의 완성되는 것은 보통의 이치이지만, 나에게 그 순간은 단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며, 나와 내 앞에 앉아있는 대상의 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그려나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 천 경 우

 

천경우는 글로벌시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현재 살아가는 작가의 전형적 예라고 말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한국과 독일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모두가 그의 거처이자 무대이며, 이를 통해 그는 양쪽의 문화에서 받은 영향을 그의 작품 안에 온전히 그만의 언어로 구현해 낸다. 최근 그의 작업은 퍼포먼스, 영상, 설치, 사진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표출하며 더욱 과감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개념과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작가 천경우에게, 사진을 찍는 과정은 스스로에게 감각적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경우에게 부여되는 자유란, 그가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볼 때, 모든 사물 혹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형체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된 것으로 이는 평범한 일상과 지루함으로부터 온 자유이다. 이론적으로 자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하는데, 인과관계의 엄격한 규칙에 따르는 자유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공간과 시간, 창조적 존재, 그것들을 그려내고 또 다시 그려내는 것, 마치 미로의 회화에서 등장하는 소용돌이 무늬와 거의 유사한 데카르트사상/뉴턴 사상으로부터 온 자유가 있다. 한국 사람이지만 독일에서 오랫동안 살며 다양한 일상의 체험을 하며, 그곳에서 자주 너무도 많은 규칙과 제약으로 둘러 싸인 삶이란 숨막힐 듯한 것이라고 느낀 작가는, 자유가 그의 삶을 구해줄 생명줄 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결과된 모든 사실을 상정하는 이 철저한 인과관계는 서양 철학의 근본이 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인과관계는 시간이 항상 앞을 향해 가고, 어떠한 원인에 의해 도출된 결과이자 또 다른 결과를 위해 원인으로 변화하는 우주와 같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동반한다는 식의, 즉 겉으로 보기에 매우 상식적인 이 이론은 아주 멀리까지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 이론에 동의한다면, 우주는 두 가지 형체 중 하나를 취하게 된다. 하나는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 확연한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간이 뒤로 앞으로 가는 무한한 것(원인-결과-원인-결과의 과정이 양방향으로 무한대로 이끄는)이라는 주장이다. 첫 번째 유형은 진화하고 변화하는 우주를 말한다. 이것은 우주가 탄생하여 지난 시간의 과거를 경험하였고, 미래에 죽음을 겪게 된다. 두 번째 유형은 본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우주이다. 이것은 변화하지 않고, 어떻게 모든 것들이 무한히 거대하고 무한대로 오랜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서구 이론가들은 이 두 가지 유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창조-종말론과 같이 유한성을 인정하는 성경적 유형에서부터 무한하고 정적인 우주를 주장하는 유형은, 우주의 대 충돌로 인해 탄생하여 열사로 종말을 맞을 우주를 하나의 유한적 유형의 보며 정당성을 주장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우주를 바라보는가에 대한 이 두 가지 유형이 철저한 인과관계에 의해 발생하였기 때문에 전혀 다른 두 가지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말하는 근본적 시간은 같고, 즉 그 시간이란 일 차원적인 것이며(시간은 과거 혹은 미래의 한 방향이지만 좌/, /하의 차원은 아니다), 단 방향이며(시간은 오직 앞으로만 전진하며 뒤로는 절대 가지 않는다), 만약 시간을 무한히 잘게 쪼갤 수 있다면 수많은 시간 속의 한 순간은 그 바로 앞에 있는 시간의 중첩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회화나 사진과 같은 이미지는 무한히 잘게 쪼개진 시간 안의 공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짤게 쪼개진 시간 안의 장면을 소유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에이치 쥐 웰(H.G.Well)타임머신에서 소개된 시간여행의 개념이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위에서 언급한 인과관계가 문제제기 되었다. 예를 들어, 만약 한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서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게 과연 가능하긴 한가?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사건의 원인이 되기 위해 결과가 원인이 되고 이 순환적 인과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변화하여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내용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서 독립되지 않고, 그 둘은 매우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직선은 아니며 곡선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시간과 공간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이며, 곡선/반복 상태이다. 영국의 유명 공상과학 드라마 닥터 후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왔다 갔다 하며 빙글빙글 도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상식과는 정반대인 전문 지식인 것 같지만, 이 시공간의 복잡한 이야기는 우리의 영혼, 삶의 기억 그리고 공간과 시간을 지각하는 방법을 반영한다. 이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기억이 인간의 뇌에서 감각적 경험을 재창조하고, 그것은 시공간의 한 부분에서 중첩된다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우리 개개인이 갖는 주관적 과거란, 태어나서 현재까지 우리의 시공간의 부분들에서 중첩된 기억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과 윌리암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에서 언급하는 자폐아 벤지의 이야기는 이 이론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기억은 시간을 통한 경험의 병합이며 이 각각의 기억의 층들은 독립적이지도, 각각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개인적 경험과 기억이 이렇게 복잡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기억은 얼마나 더 복잡할지 상상조차 할 수 조차 없다. 공간, 시간, 자신, 기억, 그리고 이것들의 복잡한 상호 소통은 천경우의 중점적 관심사 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에서 그는 자신, 타인에게 서로가 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이해하고 찾기 위해 사진, 설치, 퍼포먼스 등의 매체를 총동원한다. 세상은 점차 공간과 시간, 나와 그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 소통에 대해 소원해지고 있다. 개인은 타인 혹은 자기 자신에 의해 점점 소외되고 고독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악기나 관악기가 협주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공명음을 내듯이, 천경우는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신이라는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공명의 정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는 특별한 상황에서의 경험이나 정점을 찾는 것이 아닌, 매일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 음악을 듣는 것, 손을 잡는 것, 백지에 낙서를 하는 행위처럼 그저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천경우는 초기에 사진매체에서 출발하여 현재 영상, 설치, 퍼포먼스 장르를 기본으로 작업한다. 그가 영상매체를 이용하는 것은 단지 사진매체의 일반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도 있으나, 퍼포먼스나 설치를 도입한 것은 그에게 있어 꽤나 이례적으로 보인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사진에서 출발한 다양한 매체로의 확장에 대한 질문에, 작가는 ‘’사진을 찍는다라는 과정자체가 퍼포먼스이며 설치의 전체 장면을 담고 있는 것이다.’ 라고 피력하였다. 한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서있거나, 혹은 사진가가 모델이 서있을 배경이나 촬영현장을 세팅하며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자체를 설치 예술작품의 일환이자 퍼포먼스적인 행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천경우에게 사진이라는 매체는 단순히 현실을 캡쳐하는 것, 진실이나 현실을 단지 목격하는 수단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 자체를 사진 찍는 것 보다, 사진기로 사람을 촬영할 때 그 사람을 촬영하는 행위를 목격하는 것이 더욱 진실을 담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과 주안점은 단지 전적으로 모델의 사진촬영 자체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진 그 자체의 행위를 통해 혹은 카메라를 기준으로 후면과 정면, 공간, 시간 그리고 사진가와 카메라 사이의 인과관계 등을 통해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퍼포먼스 장르 자체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나 열정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과 탐구를 하던 작가로서, 그는 원인과 결과뿐만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의 명백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이자 예술에 의한 감정은 사진은 초상을 찍는다는 개념의 객관적 해석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경우의 작업은 소위 기록 매체라 불리는 사진과 영상에 대한 도전이자 확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안에서 보여지는 퍼포먼스적 요소들이 갖는 흥미로운 양상은 작가가 그것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신기할 정도로 작업의 모든 과정에서 가능한 최대로 그 자신을 숨기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작업의 전체적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이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의 회화의 예술(Art of Painting)’ (1662-1668)에서 작가는 능동적 참여자이지만 작품의 포커스는 모두 모델과 배경에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천경우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거의 의례적이라 할 수 있는 규칙을 적용한다. 예를 들면, 퍼포먼스이자 영상작품인 ‘0(0 minute)’ (2005-2006)에서 약 8-10명의 사람들이 삼층 피라미드형 구조물의 바닥에 앉도록 지시 받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300에서부터 0으로 숫자를 세고, 0이 되었을 때 한층 씩 올라가 앉게 된다. 그리고 맨 꼭대기 층에서 0까지 다 세고 나면 자리를 떠난다. 보기에 간단한 이 규칙은 참여자 개개인이 마음속으로 세는 주관적 시간에 의해 마치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짓과 같은 느리고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주어진 규칙이 아닌 그들의 심리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 참여자들의 움직임(300에서 0을 세는 시간에 의해 높은 층으로 점차 자리를 옮기는)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숫자세기 게임은, 규칙에 의해 진행되며 또한 주어진 공간과 시간 안에서 참여자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창조해내고 또 재창조해 내는 기회를 부여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영상/설치 작품인 침묵은 움직임이다(Silence is Movement)’ (2004)는 침묵 속에서 15명의 아이들이 앉은 채로 7분을 마음속으로 세고 나서 그들이 각자 선택한 사람의 자리로 이동, 기다리거나 앉는 퍼포먼스 이다. 결과는 아이들의 각기 주관적인 7분이라는 시간에 따라 복잡한 움직임, 개인적인 시간인식의 차이와 공간이동 사이가 복잡하게 얽혀 겪는 충돌을 보여줬다. 이러한 특이한 경험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참여 어린이들은 7분을 세는 과정에서 자성 하였으며 또한 끝나는 시점에서는 환희의 순간을 경험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보아, 작가에게 자신에게 있어 작업의 과정은 영상이나 사진 혹은 물질적인 어떠한 매체를 통한 결과도 아니며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참여자들은 작가로서 그에게 가장 중요 것이며 마치 참여자들은 그의 작업의 조종사와 같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의 작업들은 상승적으로 특징적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또 다른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요소는 바로 장시간 노출 촬영 사진이다. 이 장시간 노출 촬영기법은 그 동안 미술사 안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기법이었다. 초기 사진과 은판 사진에서부터 현대의 장시간 노출 필름과 사진작가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장시간 노출 기법을 필요에 의해 혹은 그들의 예술적 선택의 문제로 다루어 왔다. 장시간 노출의 사용은 장면의 준비와 각색 그리고(혹은) 모델의 움직임 등을 표현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 모든 과정은 천경우에게 퍼포먼스로서 작용하였다. 그의 장시간 노출 촬영 퍼포먼스 사진은 그 동안 보아왔던 수많은 장시간 노출 사진과는 달리 단지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지 않고 공간서술방식을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둔다. 그의 작품은 더욱 관조적이다. 그리고 더욱 심화된 방식으로 기억과 대상 자체를 담아내고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의 장시간 노출 사진은 기억을 캡쳐한다고 말하지만, 보통의 사진들은 기억을 포착하지는 않지만 즉각적 찰나를 포착하고 그 포착된 찰나가 곧 기억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천경우의 사진의 경우는 다르다. 한 예로, 그의 가족 사진(Family Portrait)’ (2003)은 가족의 일원들이 각각 그들의 나이의 시간(예를 들어 50살의 경우에는 50)동안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된다.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동안, 나머지 가족의 일원들은 기다리고 있다. 가족의 모든 일원들이 다 앉게 되면, 사진 촬영은 끝나게 된다. 이 전체의 과정은 사실 가족이 한 자리에 앉고, 실질적인 시간 동안 사진 안에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함께 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작업의 또 다른 예인 ‘6(Six Days)’ (2003)6일간 매일 35세의 여성이 작가의 작업실에 들러 그간 그녀에게 있던 이야기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 하는 모습을 장시간 노출을 통해 사진으로 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의 결과물은 한 장의 사진일 뿐만 아니라 6일 동안 대상과 사진가 사이의 경험, 분위기, 생각들의 혼합물이자 총체적 대표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빛으로 그림을 그린다라는 원론적 의미의 사진이라는 단어는 작가 천경우에게는 어쩌면 그릇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딱 들어 맞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지만 mnemono-graphs, 혹은 기억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작가가 인간과 인간의 상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을 보여준다. 천경우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그 어떤 언어나 소통의 매체보다도 더욱 심화된 소통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사진이란, 행동 자체 이자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어떠한 것을 발견해 내고 이를 초상화하는 철학적 정점이다.

그리고 이 정신들은 작가가 사진과 영상 매체에서 나아가 퍼포먼스, 그리고 퍼포먼스와 설치를 중첩하여 작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짐이 되거나 힘이 되거나(Burden of Support)’ (2005)는 참여자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한 손을 상대방의 어깨에 얹고, 나머지 한 손은 서로 맞잡고 20분간 자세를 유지하는 퍼포먼스 였다. 또한 그의 일련의 작업 버서스(Versus)’ (2007)은 서로 안면이 없는 여러 참여자들이 마주보고 앉아서 상대방의 어깨에 사람 인()’자로 기대어 15분간 침묵을 유지하는 퍼포먼스 였다. 서로간의 채취를 느끼는 접촉을 통해,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의 접촉에서 오는 익살스러운 어색함뿐만 아니라, 자신을 서로에게 비추어보는 시간, ‘관계라는 개념에 대한 통찰, 그리고 현대인의 고독의 벽을 허물도록 고무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또 따른 흥미로운 작품은 고통의 무게(The Weight of Pain)’ (2008), 나바르에 사는 1000명의 주민이 참여하였다. 참여자들은 미리 나눠준 붉은색의 천에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만큼의 돌을 주워 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1000개의 결과물들은 전시 공간에 설치 되었다. 이 퍼포먼스와 설치는 참가자들에게 자신들의 고통의 무게를 측정하고 경험하는 시간을 제공하며, 전시장에 진열된 그들 자신의 고통을 돌이켜봄과 동시에 타인의 고통의 무게를 봄으로써 심화된 개인간의 감정 교류를 경험하게 하였다. 또한 이와 비슷한 경향의 다른 작품인 ‘1000개의 이름들(1000 Names)’ (2009)는 참가자들이 작가가 준비한 음악을 들으며 자신에게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1분간 벽에 적는 퍼포먼스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천경우가 초기에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사진작업으로부터 다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진은 단지 매체일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무형의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책임이라는 그의 고집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의 작업의 확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천경우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그가 맨 처음 작가로서 함께 출발하였던 사진이라는 싱글매체가 시간을 통해 그가 표출하는 창조적 개념과 예술적 열정으로 발전하고 있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이면서도 공공적인, 명상적이면서도 감정적인, 동양과 서양의 감성을 조합함으로써 예술이 각기 다른 문화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 그의 작품의 가장 괄목할 점은 작가 자신은 작품 안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가장 능동적인 참여자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그 동안 재능 있는 예술가를 수식하는 말로 천재적 작가혹은 창조의 신으로서의 예술가를 고유명사처럼 사용해왔다. 하지만 천경우에게는, 사람과 사람을 서로 가깝게 하며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을 서로 소통하여 화음을 이루게끔 돕는 실행자라고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이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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