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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선, 성곡미술관 facebook

출생

1951, 서울

장르

회화, 조각

홈페이지

www.suhyong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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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사람들_01, 1984-1989

캔버스에 유화, 69.5 x 48.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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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선의 역사 그리기 : 기억의 인드라망

기억의 흔적

또 마주치고 말았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털어 버리려 했건만,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예상치 못하게 다시 맞닥뜨려 피할 도리가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단단한 그물 속에 갇혀 버린 것만 같다.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의 비참한 최후는 시간이 갈수록 아물기는커녕 더 깊어만 가는 아픈 상처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남는 방법은 모른 척하며 슬쩍 외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용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종은 십대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가 숙부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가서 채 스물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서용선은 1986년 우연히 영월에 갔다가 단종의 비극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후,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룬 미술 작품이 없다는 것을 무척 의아하게 여겼다. 이후 자신이 그 일을 맡아야겠다고 나서서 부지런히 자료를 수집하고 사방으로 흔적을 찾아다니며 작품 제작에 힘을 쏟았다. 그는 단종에 대한 그림을 통해서 인간의 권력욕, 야만성, 비극성 등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벌써 30년 가까이 된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다. 엎질러진 물처럼 원래대로 주워 담을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고칠 수 없다. 또한 쏘아버린 화살같다. 화살이 날아가 버리고 활시위는 텅 빈다. 과거는 흔적도 없이 금방 사라진다. 서용선이 역사를 그리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고난은 시작된 셈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눈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 그림일진데 역사란 것은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사건의 흔적과 기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 인물과 장소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그렇다면 서용선은 역사가가 되기를 꿈꾸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림이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사실을 기초로 과거를 이야기 하지만, 서용선은 그림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건드린다. 그가 역사를 어떻게 그리는지 최근에 제작한 작품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자.

 

사건의 재구성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단종이 억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서용선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 화면에 재구성한다. 이것에 해당하는 첫 번째 작품은 <처형장 가는 길>이다. 얼핏 보아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렵지만 제목이 실마리가 된다.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육신이 주인공이다. 화면 가운데서 두 마리 소가 달구지를 끌고 가는데, 목에 칼을 쓴 죄인이 실려 있다. 옆에는 백골처럼 흰 주검이 놓여 있고, 오른 쪽 아래는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묻어 주었다는 김시습이 승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와 대칭으로 왼 쪽 위에는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과 정순왕후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밑으로 궁궐 속에 한 무리의 대신들이 보인다. 다시 오른 편 위에는 단종이 유배갔던 영월의 관풍헌과 자규루가 서있다. 시간적으로는 단종 복위운동에서 사육신의 처형, 김시습의 시신수습과 출가, 단종의 유배 등이 압축되었고, 공간적으로는 궁궐, 한강변, 영월이 연이어 펼쳐진다. 서용선은 시공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시각적으로 일관된 화면을 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장치를 동원한다. 우선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휘어져 흐르는 푸른 강줄기는 영월의 동강에서부터 시작되어 남한강으로 합류하고 다시 노량진으로 흘러든다. 등장인물들은 죄수와 단종 부부를 제외하고 하나같이 꼿꼿한 자세로 서있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배우들처럼 사건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조형적으로는 선명한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시각적 밀도를 높여준다.

<백성들의 생각_정순왕후>(2)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오른편에는

폐위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간 단종이 붉은 곤룡포를 입고 서있다. 단종을 등지고 있는 여인이 정순왕후인데 어린 남편을 멀리 떠나보내고 홀로 동대문 밖의 작은 초가집에서 지내던 시절이다. 평민처럼 옥색 저고리와 보라색 치마를 입었고, 인근 동네 아낙들이 생계를 도와주는 장면이다. 농부차림의 백성들이 뒤편 밭고랑을 배경으로 서성거리고 있다. 이 경우에는 서로 격리된 공간과 등장인물간의 신분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지만, 비슷한 자세로 서있는 사람들의 상호관계로 인하여 화면 속의 사건들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렇다고 서용선이 이질적인 시공간을 항상 결합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화면을 분할하여 몇 개의 사건을 열거하는 방식도 여전히 사용한다. <단종 부부>(3)에서는 가운데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과 정순왕후가 새로 임금 자리에 오른 숙부 세조를 마주보고 서있다. 여기서 뒷모습만 보인 세조는 왼편 위쪽 구획에서 정면을 보고 서있다. 밑에는 그가 죽이게 될 사육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 오른편 위에는 영월 풍경이 보이고, 아래에는

김시습이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이다. 마치 만화처럼 네모난 구획으로 개별 사건을 나누어 놓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선명한 색상의 넓은 면이 일정하게 배열되었다.

<안평, 동학사>(4)의 경우는 위의 두 유형을 절충시켰다. 바탕을 색면으로 구분했지만 별도의 경계선으로 구획을 나누지는 않았고, 인물이나 건물이 색면을 넘나들기도 한다. 이 작품은 계유정난과 안평대군에 대한 것이다. 그림의 가운데서 붉은 곤룡포를 입은 세조의 일당이 모의하는 중이고, 아래쪽에는 김종서가 말을 타고 지나간다. 왼편 위 안평대군의 거처에서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있고, 오른편 중간에는 승려가 된 김시습이 앉아 있다. 그 아래로는 계룡산의 동학사 풍경이 보인다. 역시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기와지붕과 넓은 색면이 개별 사건들을 하나의 화면으로 엮어준다.

이렇게 복잡한 시간과 공간을 한 장면으로 뒤 섞는 이유는 얼핏 보면 별로 상관없는 작은 일들도 실제로는 밀접하게 얽혀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차적으로 시간을 파악하고, 지리적으로 장소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정돈하는 경우에 해당할 뿐이다. 눈으로 사건을 바라 볼 때는 마치 사물이 거울에 비추어지는 것처럼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와야 한다. 같은 일에 휘말린 사람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동시에 등장하여 총체적인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계유정난에서 단종의 죽음까지는 짧은 시간에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반면 단종이 죽고 나서는 영월 청령포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기억들이 생겨났다. 서용선의 그림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변증법적으로 교차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려낸 것이다.

인물의 호출

사건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수레바퀴의 중심축처럼 한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서용선에게 단종이야말로 비애의 원천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단종은 어린 소년 왕으로, 무력한 상왕으로, 유배지의 노산군으로, 청령포 차가운 강물 속의 주검으로 등장한다. 숙부의 야욕에 먹이감이 되고, 어린 왕비의 그리움이 되고, 김시습에게는 회한이 된다. 그래서 붉은 곤룡포를 걸친 수염이 나지 않은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얼굴은 대개 무표정하지만, 때로는 거칠게 처리되어 표정 없이도 격한 분노의 감정을 나타낸다. 김기창이 그린 <단종영정>과 비교해보자(5). 단종이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이곳에 살던 추익한이란 선비가 종종 머루를 따다가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 흰 백마를 탄 채 태백산으로 가는 단종을 길에서 만났다. 그런데 추익한이 처소에 가보니 단종을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는 단종의 귀신을 본 것이다. 김기창은 이 전설을 그릴 때 단종을 혼백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편안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서용선이 불러낸 단종은 섬뜩하고 무섭기만 하다.

단종의 곁에는 종종 정순왕후가 함께한다. 정순왕후는 송씨 집안의 딸로 15세에 단종과 혼인하여 18세에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65년을 과부로 더 살다가, 82세에 세상을 뜬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의 임금이 어좌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단종을 유배지로 떠나보내고 서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작은 초막을 마련해 스무 해를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영조대에 단종이 복위되자 이곳에 정업원 옛 터라는 비석을 세워 정순왕후를 기렸는데, 실제로 정순왕후가 머물던 곳이 정업원은 아니었다. 이는 후대의 구전에 따른 것인데, 그만큼 왕비의 흔적은 희미하게만 남았다. 서용선은 피비린내가 자욱한 궁궐 속에서 어린 부부가 서로를 의지하며 나란히 있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단종이 유배를 떠난 후에는 앞서 보았듯이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을 한 화면 속에 표현했다. <송씨부인>(6)의 경우 단종이 동강을 바라보며 서있는데 어쩐 일인지 청령포의 건물 안에 정순왕후가 들어앉아 있다. 단종은 영월에 있고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 있어야 하지만, 남편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이런 환상을 빚어낸 모양이다.

단종의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 세조도 서용선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단종과 비교해 보면 세조의 얼굴이 나이든 것을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다. 표정도 개성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세조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 서용선이 뉴욕에 있었을 때 길가에서 주운 광고지 위에 그린 <세조>는 인터넷에서 찾은 세조의 이미지를 참고로 했다. 이것은 면류관을 쓴 세조는 모습인데, 20세기 초에 발간된 선원보감 에 수록된 상상에 의한 초상화다. 서용선은 스페인어로 통신회사 광고문이 적혀 있는 종이를 재활용하고, 특히 얼굴부분은 전날 먹었던 라면봉지를 뒤집어 만든 은박지를 오려 붙여서 그렸다. 흉폭했던 세조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낯설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조선시대에 세조의 어진은 그가 묻힌 광릉 인근의 봉선사라는 사찰에 봉안했었다. 덕분에 임진왜란 때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더불어 병화를 피할 수 있었던 단 두 점의 어진이 되었다. 전란 후 세조 어진은 한성의 영희전에 모셔졌고, 한국전쟁 때 후대의 다른 임금의 어진 수십 점과 함께 부산 창고에 옮겼는데, 1954년에 화재로 말미암아 소실되고 말았다.흥미롭게도 세조 어진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근대 화가 김은호가 1928년 세조 어진을 모사하는 장면에서 희미하게나마 뒤편에 서있는 세조 초상화를 볼 수 있다(2). 이처럼 세조의 모습은 지우려 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묘한 역설 속에 있고, 서용선도 한 몫 거들고 있는 셈이다.

단종의 이야기가 이광수, 김동인의 소설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세조 역시 그의 모습을 알리는 데 대중문화가 큰 역할을 한다. 최근 개봉했던 <관상>이라는 영화에서 잘 생긴 배우 이정재가 연기하는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는 독특한 매력이 넘친다. 사냥과 강무를 통해 자신의 용맹함을 자랑하는 호협한 사나이로서, 풍성한 가죽털옷을 걸친 채 말을 타는 건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나약한 단종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세조를 은연중에 선망하는 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서용선의 <세조>는 비현실적이기에 오히려 참모습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란 겉모습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므로, 차라리 알아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바꾸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세종과 양녕>(9) 역시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단종을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의 암투는 결국 세종의 자식들이 서로 편을 갈라 죽고 죽인 것이다. 어찌 아비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와중에서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알려진 양녕대군은 세조를 부추겨 조카를 죽이도록 만들었다. 서용선의 그림에서 위대한 군주 세종대왕도 없고, 권력에 초탈했던 왕자 양녕대군도 볼 수 없다.

서용선의 단종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던 그였지만 세조의 폭거에 통분하여 서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되었다. 김시습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단종과 사육신에 관련된 일화를 남겼다. 서용선은 그림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모습으로 김시습을 표현한다. <보위(단종과 수양)>(10)에서 세조와 김시습의 얼굴이 하늘에 둥둥 떠있다. 서로를 용납할 수 없었던 두 인물을 해와 달처럼 대비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김시습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주기도 하였기에 그의 행적에도 의문은 남는다. 그가 말년을 보낸 무량사에는 초상화가 한 점 전해 오는데, 서용선을 이를 주목한다(3). 단종에 대한 일이라면 전국을 샅샅이 뒤지는 그에게 핵심 인물 중의 하나인 김시습의 모습을 알려주는 초상화, 그것도 자화상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서용선은 무량사를 방문해서 이 작품에 대해 알아보고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가 자화상일 가능성은 적으며 후대에 임모한 초상화로 여겨진다. 김시습의 본 모습은 어떠했으며 본심은 무엇이었는지도 여전히 아리송하다.

이번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은 안견이라는 화가다. 사실 안견은 단종과 직접 관련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같은 화가로서 서용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은 1447년 도원에 대한 꿈을 꾼 후, 이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몽유도원도>(4). 이후 3년이 흐른 후 안평대군은 현재 부암동 부근에서 꿈 속의 도원 모습을 발견하고 무계정사를 지었다. <몽유도원도>에는 여러 인물의 시문이 덧붙여졌는데, 이들은 후일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운동에서 입장을 달리하며 비극에 휘말렸다. 앞서 살펴 본 <안평-동학사>에는 그림을 그리는 안견이 보이는데, 그의 앞에는 <몽유도원도>가 똑같이 그려져 있다. 서용선의 작품에서 이렇게 극사실적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객관적인 사실에 충실하려는 의도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산수화의 걸작에 대한 오마주일 수도 있다. “그림 속의 그림은 피바람이 불기 직전에 아름다운 복사꽃의 향기를 퍼뜨려 사람들을 취하게 만든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이다. 단종에 대한 사건도 등장인물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재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서용선은 여러 인물을 호출한다. 하지만 그림 속의 인물들은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심지어는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한 그림 속에 같은 인물이 두 번 세 번 등장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꿈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당혹스러움은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이것은 주인공이 아닌 단역을 맡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말 못하는 인형처럼 꼿꼿한 자세로 무리지어 서 있을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목숨이 걸린 엄청난 사건이지만, 정작 인물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혹시 이들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기 때문인가.

 

장소의 재현

사람이 머물던 곳에는 흔적이 남아있고 기억이 서려있다. 서용선은 사건이 공간을 떠나서는 실체가 있을 수가 없고, 역사는 장소와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고 스케치를 하는 것이다. 그에게 단종이 최후를 맞았던 영월은 중요하다. 하지만 단종이 영월 땅에 머무른 것은 다섯 달에 지나지 않는다. 12살에 왕이 되고, 일 년 반이 지나서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다시 일 년 반 후에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서 일 년을 지낸 후, 영월에 유배를 와서 다섯 달 만에 죽은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가 17살이다. 단종은 짧은 생애의 대부분은 궁궐에서 지냈고, 왕의 대우를 받았던 것도 궁궐이다. 하지만 궁궐에서 단종의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 백 여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왕이라고 불렸지만, 남은 것은 그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영월의 작은 무덤 뿐이었다. 오히려 전설과 민담과 야사가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이에 서용선은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죽고, 무덤까지 만들어진 청령포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이것만큼은 실체가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물처럼 같은 장소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2006년의 스케치를 기초로 그린 <청령포1>(13) 색면을 위주로 기하학적으로 경물을 배치한 다른 청령포 풍경과는 다르다. 동일한 장소라도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 본 <안평-동학사>에는 안평대군의 거처가 등장한다. 이 장소는 최근 옥인동에 있던 아파트가 철거되면서 오래된 돌다리가 발견된 곳이다. 사람들은 이 다리가 바로 안평대군 집에 있던 기린교라고 추정하는데, 서용선은 이를 주목하여 <비해당>을 그렸다. 서용선은 같은 돌다리가 등장하는 정선의 <수성동>을 예로 들면서, 정선 역시 이 장소에 얽힌 어두운 역사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그렸을 것으로 여긴다(5). 결국 돌다리에서 시작하여 안평대군과 안견을 거쳐 단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작은 돌다리는 거대한 역사를 되살리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경자바위>가 있다. 얼핏 보면 풍경화처럼 보이는 이 작품도 단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순흥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천의 커다란 바위에는 한문으로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순흥은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유배되었던 곳인데, 여기서 소백산 고치령을 넘으면 바로 영월이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로인해 순흥의 많은 백성이 희생되었고 순흥도호부는 폐지되었다. 이때 죽은 시신을 죽계천에 수장시켰는데 밤마다 귀신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했다고 한다.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글자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제를 올리니 그때부터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개울가 바위의 글자 하나에서 단종에 얽힌 비극을 연상시키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밖에도 서용선은 세조가 들렀다는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김시습이 머물렀던 부여 무량사와 그의 영당이 있었던 노강서원, 세조를 모욕했다고하여 부관참시를 당한 김종직이 올랐던 함양 학사루 등을 찾아다니며 그림에 옮겼다. 때로는 계절감도 표현되어 있는데 <무량사>,<동학사>의 경우 눈이 내린 풍경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계룡산 동학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시습이 이곳에서 사육신을 위해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단을 만들었다. 나중에 세조도 직접 들러 자신으로 인해 희생된 단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사육신 등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주어 초혼제를 지내게 한 후 초혼각을 짓게 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후대에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희생자들의 신주를 모셔 놓았다.

서용선의 작품에 대하여 임홍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초혼>에는 동학사 숙모전을 찾아간 장면이 나온다. 마침 건물이 공사 중이라서 한편에 치워놓은 수 십 개의 위패함 중에서 김시습, 엄흥도의 것을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뚜껑을 열어 속에 있는 신위를 살펴본다. 마치 귀신을 찾는 것 같은 오싹한 장면이다. 거슬러 올라가 1986년 영월에서 겪은 강렬한 체험은 서용선으로 하여금 신령을 접한 무속인처럼 단종의 비극을 그림으로 그려서 해원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아내어 그림으로 기록해 오고 있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산과 나무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분이 아니라 역사를 지켜보는 증인인 것이다.

 

인드라의 그물

작가 최인훈은 1960년에 장편소설 광장 을 발표한 후에 최근까지 열 차례에 걸쳐서 새로 고쳐 썼다. 서용선도 단종의 이야기를 198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리고 있다. 그림이라는 매체의 특성때문에 같은 작품을 계속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려낸다. 그러나 반복한다고 내용이 심화되는 것일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서용선은 단종의 비극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아내고 확인했다. 그러나 사실이 하나씩 더해질수록 진실과는 멀어진다. 잘게 부수어진 그릇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고 원래의 모습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하나의 사실은 또 다른 사실과 만나면서 매번 의미가 달라지고, 한 인물이 다른 인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때마다 모습이 바뀐다.

서용선이 단종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가 사건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주요 인물들을 호출하고 장소를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모두 사실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가 목표로 삼는 것이 역사의 복원은 아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독일 적군파를 작품의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데올로기와 폭력에 주된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조형적 문제에 대한 예술적 실천을 주제로 했다. 마찬가지로 서용선의 관심도 역사에 있는 것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드라(Indra)의 그물을 떠올리게 한다. 인드라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하는 인도의 신인데, 그의 궁전에는 투명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이 드리워져 있다. 제석천은 이 그물을 무기로 사용하는데, 그물을 흔들면 환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적을 물리칠 수 있다. 그물코마다 달려있는 무수한 투명 구슬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반영되고, 다시 수많은 구슬들은 서로서로를 비추어준다. 마치 여러 개의 거울이 마주보며 무한대로 형상을 반사시키듯이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緣起法)과 같은 것이다. 즉 이 세상 모든 현상은 한 개의 구슬같이 완전함을 갖추고 있지만, 결코 다른 현상들과 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다. 세상의 일들과 사람들은 투명 구슬들처럼 서로서로 빛을 반사하면서 거대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화엄경 에서 설명하는 인드라의 그물, 즉 인드라망(因陀羅網)의 비유는 서용선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서용선은 단종 이야기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단종 주변의 사람들이건, 한국전쟁의 민초들이건,철암의 광부들이건, 베이징, 멜번, 뉴욕 등지의 시민들이건 모두 다 사람과 세상과 역사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서용선이 지독할 정도로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의 삶과 죽음, 시간의 순간과 영원, 공간의 연속과 단절은 투명 구슬처럼 서로 서로를 반사하면서 더욱 밝은 빛을 만들고 그 속에 묻혀 버린다. 이렇게 서용선의 그림은 기억의 인드라망이 되어 수많은 꽃으로 장엄한다는 화엄의 세계를 보여준다.

조인수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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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정치학

최근 서용선은 매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교직을 사퇴하고 더욱 자유로워진 탓인지 유럽과 미국, 중국과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며 작가로서의 시선을 넓혀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과 주제의 관심은 여전히 세상 사람의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만드는 여러 종류의 풍경이랄까? 작가는 끊임없이 인간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릇, 사람이 하는 일에 정치적이지 않은 게 있을까? 서용선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여기저기에 머문 작가의 시선은 작품이 되어 우리에게 어떠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암시해준다. 그 메시지가 특정의 구체적인 정치성을 띠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그린 사람과 도시, 또는 그 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풍경들은 우리의 시선을 거기에 머물게 하는 힘이 있으며, 애매모호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듯 매우 함축적이다.

 

서울의 삭막한 기계적 도시풍경과 아니면 조선시대의 단종과 얽힌 영월의 역사적, 정치적 풍경을 제작했던 작가는 이제 그의 시선을 외국으로도 돌렸다. 그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머무는 곳곳의 특정한 장소의 사람과 풍경을 그림으로써 좀더 다양하고 폭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예를 들어, 뉴욕 맨하튼의 카페, 거리, 지하철의 풍경들, 또는 분단의 상징처럼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베를린의 도시풍경들은 매우 정치적이다. 지극히 심화된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지닌 맨하튼의 사람들과 그들이 모여 별의별 꿈을 다 꾸는 허상과 실존의 스팩테클한 도시, 뉴욕은 매우 욕망적이면서 또한 정치적이다. ,서의 분단과 함께 경계에 의한 통제, 억압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역사와 정치의 도시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가가 어떠한 정치적 태도나 신념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 알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림과 마주해 스스로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질 수는 있다. 지역과 문화와 정서는 다르더라도 각각의 도시에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드의 다양한 삶의 표정들, 하다못해 지하철의 역사와 분단의 건축물에도 역사와 함께한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 서용선은 이러한 표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가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가 바라본 사람과 풍경은 단순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실존과 역사의 정치성을 담고 있는 대상이다. 작가는 그것이 자신의 그림에 함축되기를 바란다. 때문에 서용선의 그림은 인문학적이다. 그는 언어가 아닌 시각적인 형상으로 인문학을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 그 이야기는 결국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다. 제도, 관습, 국경, 도시, 생산, 소비 등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풍경을 만드는데 그 주체는 역시 사람이다. 이러한 과점에서 보아도 서용선의 그림은 매우 인문학적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는 남자>로 집약되는 자화상 시리즈는 작가도 그 사람속의 일부분임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화가로서의 자아를 둘러싼 외연과 심리적 내연이 충돌하는 긴장감이 충만하다. 표현주의적 전통과 정서로 그려진 짐승 같은 자신의 모습은 이러한 충돌과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형상화의 한 전략아다. 어쩌면 화가로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자신에게 던지는 궁극적이고 숙명적인 질문일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은 없다. 단지, 우리는 실존과 상황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뉴욕도 베를린도, 그리고 서울도 실존과 상황이 조금 다를 뿐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케익을 사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 그 풍경의 정치성을 망각한 채 하루가 지나가고 오늘 같은 내일이 온다.

정영목 (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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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서용선의 도시그리기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 이 전시는 2007년 이후 최근까지 7, 8년간 그가 해온 여러 작업들 가운데, 도시 사람들과 풍경들을 주제로 한 작업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작가 서용선의 또 하나의 뮤지엄 급 전시이다. 알다시피, 최근 몇몇 미술관들에 의해 일련의 서용선 전시들이 개최되었다. 예컨대,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기념으로 고려대학교박물관이 개최한 <기억재현, 서용선과 6.25>(2013. 6. 25 - 8. 25)에서 시작하여, 작년 파주에 위치한 아트센터 화이트블록미술관의 <역사적 상상_서용선의 노산군 일기>(2014. 5.2 - 7.27), 강릉시립미술관과 한국미학예술학회가 공동 주최한 <아르스 악티바>전의 제3<서용선_풍경과 문화적 기억>(2014. 5.31 ~7. 1), 조선일보미술관이 제 2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으로 연 <서용선의 신화’, 또 하나의 장소>(2014.11.6 11.16) 등이 그것들이다.

 

마치 미리 의도되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일련의 전시들은 한국전쟁, 역사적 비극, 신화, 풍경, 도시 등을 토픽으로 내걸어 각각의 층위로 나누어 서용선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물론 이것들이 지금까지 서용선이 마주해 온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작가 활동 내내 지속되어 온 자화상, 15년 가까이 해 온 폐광도시 철암 그리기, 최근 몇 년간 파 들어가고 있는 서울 북촌 그리기 등. 서용선의 작가적 행보는 세상의 다채로움만큼이나 널려있고, 이들 전시에 포함되지 않은 장르들도 여전하다. 하지만 불과 2,3년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그것도 미술관급 전시로 한 생존 작가의 작품세계가 이렇게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는 사실은 누가 뭐래도 눈길을 끌 만한 일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과제적(problematic)이라는 징표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화단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든 덕분에 이제 화가 서용선의 예술세계에 대한 스케치 한 장을 거머쥐게 될 것 같다.

 

 

I.

도시 작업은 이 시리즈 전시들 중 가장 늦게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도시적 삶은 화가 서용선에게 어떤 다른 관심사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다.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이르다. 등단도 도시 그림들을 통해서였다. 청년기부터 도시 그리기를 과제로 삼았던 그가 <소나무> 연작으로 눈길을 끌던 1980년대에 이미 첫 개인전으로 도시사람들 연작을 발표했다.

 

도시적 삶의 동경에서인지 아니면 반대로 그에 대한 불편한 심사에서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 중반 학창시절 그가 그린 몇 점의 <넥타이 맨 남자>들도 도시 그리기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625 한국전쟁이 훑고 지나가 다 깨어지다시피 한 서울 변두리, 그것도 전쟁과 관련하여 한 많은 사연들이 얽힌 미아리라는 경계지대에서 성장한 그에게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체가 세상살이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갈등의 표출이든 화해를 위한 시도이든, 백색 모노크롬이 한국의 화단만이 아니라 미술대학에서 미적 판단기준을 넘어 하나의 명령같이 지배하던 시절, 그러한 이미지와 형상에 대한 욕구를 표출시키는 그림을 그리는 일도 매우 착잡한 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분명히 짚을 수 있는 것은 화가 서용선이 화필을 든 이후 도시 그리기를 작업 목록에서 내려놓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시는 그리기가 시작된 지점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는 장소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노산군의 정치적 비극 작업에 몰입하고 있을 때이든, 아니면 지리산 오대산 같은 자연 풍경 깊숙이 들어갔을 때이든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도시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두발로 딛고 서야 하는 대지 그 자체였다. 그런 점에서 도시적 삶은 서용선의 예술의욕이 촉발된 태생적 모태이자 목적 자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도시라는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자 한 그러한 그의 작가적 태도가 1980년대라는 정치사회적 격동기에는 때로는 불온함으로 때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서울의 도시 팽창이 극에 달한 1990년대에 들어서선 그의 작업은 개별화되고 고립 소외되어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탐구로 받아들여졌다.

 

 

II.

그렇다면 지금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가 와 있는 곳은 어디쯤일까? 그리고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 것일까?

 

우선 이번 전시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지리적으로 태어나 터 잡고 살아온 서울 그리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해 뉴욕, 베를린, 베이징, 토쿄, 멜버른 등 지구촌 도처의 메트로폴리스 풍경이나 거기에 몸담고 욕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넓혀져 있다. 어떤 이유로든 이곳들은 최근 수 년 동안 한두 번 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적게는 한두 달, 많게는 5, 6 개월 씩 머물렀던 장소들이다.

 

내가 아는 한 인문학적인 관심이나 상상력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풍경들에서 그러한 내러티브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 흔하디흔한 개념적인 접근이나 혹은 지적 분석 자취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적 삶의 생태에 관한 문학적 리포트로 더더군다나 관광적 취미나 민속학적 관심으로 읽히는 것도 아니다. 이 작업들에선 청년기에 그가 그렸던 서울 모습에 묻어나던 고립감이나 소외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미학적 설득력이나 인문사회학적 발언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각각 다소 시간 차이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어느 도시를 그린 그림이든 서용선의 이번 도시 그리기에서 불가사의한 기운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하나의 거대 시장으로 묶여지는 지구촌에 작동되며 우리의 삶을 조건지우는 그 에너지 말이다. 그의 도시 그리기는 풍경이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가로지르는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이 힘들을 향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들은 우리의 눈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고 만다. 그것들은 때로는 표현적 터치와 강렬한 색채로, 때로는 그와 달리 구조와 질서로 다가서지만, 이른 바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가로지르는 알 수 없는 그 무엇들은 작가의 몸 체험이자 신체적 전율을 통해 비로소 우리들 앞에 진실의 증거나 부정할 수 없는 리얼한 기록들로 다가선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곳곳의 도시들의 삶은 그의 손에 의해 물질적 증거로 남는다. 자본주의 시장 메카니즘으로 시스템화 되어 가는 도시와 지구촌에서 때로는 자본시장, 주식시장 같은 것에 직접 눈길을 돌리기도 하고, 보드리아르가 이야기 하는 초현실적이기 조차 한 도시의 기호-이미지, 미디어풍경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 작업들은 그래서 단순한 도시 찬가나 예찬, 혹은 그에 대한 정서적 판단이나 사회학적 크리틱들과도 다르다. 극도로 추상화된 교통, 통신, 화폐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되 그렇다고 뚜렷하게 그것들을 설명하거나 감각도 할 수 없이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의 우리들에게 그의 작업들은 우리들의 일상이 얼마나 허접스럽고 비본질적인지를 몸으로 고지한다. 그 하나 하나는 그 도시들 안에서 살며 우리들이 꿈꾸고자 하는 유토피아와 현실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 꿈과 현실 사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감각하게 해 준다. 겉보기에 표현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가 마주한 인물들이나 풍경들은 정서적으로 읽히기보다는 중립적이거나 판단이 중지된 채 다가선다. 정서적 등가물로 읽히거나 주관적 취미 판단으로 다가서는 대신에 오히려 도시적 삶의 현실이나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메카니즘들이 스스로를 노출시켜 진실을 리포트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도시그리기는 판단에 종사하기 보다는 다만 그리기를 통해 세상을 비추는 자신의 살갗과 몸을 노출시킬 뿐이다.

 

이제 그의 도시 그리기엔 겹겹이 누적된 삶에 대한 통찰이나 현실 체험이 묻어나는 듯하다. 소나무연작, 노산군 일기에서 시작된 역사적 삶을 화두로 한 작업들, 625 한국전쟁 같은 민족사의 비극들, 신화나 자연 풍경들, 철암그리기나 소밥갤러리 프로젝트 같은 예술 공동체 운동, 백령도 드나들기 등을 거치며 쌓인 체험들. 그러니까,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가 단지 현실 참여적이거나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일방향적 반응으로 읽히지만은 않는 것은 비단 시대의 분위기 때문이랄 수만은 없다.

 

 

III.

이제 작가의 관심이 향하는 곳은 인간들이 행복을 꿈꾸며 함께하는 도시, 즉 인간이라고 하는 운명 공동체가 거주 장소로 꾸려가는 비켜갈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지구촌의 도시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즐겁게 하기는커녕 그것들은 때로는 어색해하거나 불안하기 이를 떼 없는 세계로 이끄는 그 무엇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를 위기감으로 혹은 긴장으로 인도하곤 하는 지극히 불안정한 모습들이다.

 

그렇지만 그가 읽어내는 이 풍경들은 동시에 더불어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 없이는 입증해 낼 수 없는 세계들 아닌가?. 그의 도시 그리기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진실, 혹은 현실에 맞닥뜨리게 하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인간의 삶이란 정작 무엇인가, 인간 존재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의 작업들은 여기에 몸담아 살고 있으되 결코 시적으로 거주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그래서 그의 도시 그리기는 우리를 역설적으로 행복한 삶의 공동체를 향한 도시 꿈꾸기라는 미학적 열망으로 다시 전환시킨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대로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가 다름 아니라 이 세상에 시적으로 거주하는방법에 대한 탐구이자,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며” “죽을 자로 하여금 사유하고 시를 지으면서 집을 짓는 길찾기에 다름 아니라 생각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최근 그는 또 다시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역사와 바로 그 장소로 회귀하고 있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이나 조선 중기 겸재 정선 등이 둥지를 치고 살았던 땅인 서촌, 즉 경복궁 서켠 인왕산 북악산 자락을 탐구하고 있다. 그렇게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인간 세상을 향한 그의 염원은 시공간적으로 오늘도 다시 반복되며 순환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2009 올해의 작가>(2009. 7. 3 9. 20)이 총론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면, 최근에 개최된 여러 번의 뮤지엄급 서용선 전시들은 마치 그 각론들 같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우선은 작품세계가 지닌 풍요로운 해석 가능성과 그리고 방대한 작업량, 그 둘 중 어느 것 하나만 결핍되어도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소나무에서 시작하여, 작가 자신의 숱한 얼굴들을 그린 자화상들, 노산군 일기에서 그린 숱한 사람들 예컨대 김시습, 단종, 엄흥도, 세조, 김종서 같은 역사적 인물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구성하는 스탈린, 처칠, 맥아더 같은 전쟁신들, 그리고 그 안에서 영문도 모르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숱한 민초들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렇지만 삶의 본질로부터 멀어진 서울, 베를린, 뉴욕, 멜버른 풍경들 속을 살아가는 운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 여러 풍경화들 속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이 작업들은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한 작가로서 작가 서용선이 마주했던 현실이 다름 아니라 미궁에 찬 인간들의 삶의 세계, 공동적 운명을 짊어진 인간들의 존재 그리고 그 삶의 조건들에 다름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

 

그것은 결코 한 낱 문학적 서사가 아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을 에워싸 일깨우는 현실이며, 살갗으로 파고드는 현상학적 신체적 현실이다.” 이제 어느덧 세상과 삶을 향해 던지는 삶의 예술가 서용선의 시선이 방사하는 긴장감은 시에 가깝고, 그 양적 볼륨은 어느덧 마치 대하소설 같은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인범 (상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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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선

뉴욕 유니언 스퀘어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멜버른의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 브란덴부르크문 주변 풍경은 서용선의 서른 여섯 점의 회화와 여섯 점의 조각으로 재탄생 되어 학고재에 전시 중이다. 서용선의 화풍은 입체파와 야수파, 표현주의가 혼합된 것으로 초기에서 중기로 이어지는 근대미술의 발현이 한데 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화풍에 대한 그의 고집은 뿌리까지 서양화된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와 궤를 달리한다. 한국 현대미술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니멀 추상이 지배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설치미술과 미디어 아트와 같은 전형적인 현대미술 분야가 점령하고 있다.

 

서용선은 1980년대 초반에 미술계에 발을 들인 이후 지금까지 현대미술의 시류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으로서의 표상이라는 미술의 근본적인 주제에 집중했다. 소수집단, 도시화, 역사에 대한 관심은 그의 작품 활동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자 프로젝트(2002)”에서는 국경을 넘는 이민자 문제를 다뤘고, “철암 그리기(2001)”를 통해서는 폐광촌을 부활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서용선이 조형예술가들의 모임인 할아텍(HALARTEC)에 합류한 이후 진행된 것이다. 또한 15세기 조선시대에 열 두 살의 나이로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묘사한 수많은 회화와 소묘에서 보여지듯, 어린 왕을 지키려다 참혹한 죽음을 맞은 충신들에게도 주목한다.

 

 

서용선, 14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2010,

캔버스에 아크릴, 56 1/2 x 90 3/4”.

 

최근 전시회에서 선보인 <14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2010)>에서 지하철역 벽의 격자무늬 타일 배경과 강렬한 수직, 수평의 선들은 암울하고 음산하게 묘사된 네 명의 남자들과 대조를 이루며 지나치게 이성적인 듯 보인다. 멍하니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들은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자세로 캔버스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쇠라의 <서커스 사이드쇼(1887-1888)>가 연상될 정도로 뛰어난 균형미를 이룬다. 회색과 푸른색이 주를 이루는 <지하철-다운타운행(2010)>은 지하철의 눅눅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분위기와 뉴욕 지하철 6호선 승객들의 경직되고 언뜻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자세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지하철 연작에 등장하는 군상들의 긴장하다 못해 절망스러운 표정은 도시 소수집단의 힘겨운 투쟁을 시사한다. 서용선은 지하철을 타고 시내와 시 외곽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맨해튼의 부르주아 계급부터 도시 외곽의 이민 노동자 계급에 이르는 자본주의 계급구조 내에서의 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완성한 작품 <브란덴부르크문(2006)>의 중앙에는 위에서 내려다본 브란덴부르크문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영웅처럼 서 있는 소련군 병사의 동상이 문을 가로막고 있다. 이 동상은 브란덴부르크문 근방의 티어가르텐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침공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1945년에 전사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동상과 문 뒤편에는 연방의회 의사당의 스케치가 보인다. 이런 이미지들 아래에는 작가가 베를린에 머무르던 시절 신문에서 접한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와 교도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작가 내면으로부터의 연상물과 상징물들을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희생된 익명의 타자에 대한 서용선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가로운 풍경에 거대한 절망을 새긴다.

정신영(Art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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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선의 작품세계의 사려 깊은 매력

여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삶을 만끽하고 있다기보다는 견뎌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종종 눈동자가 없는 눈을 하고 있어서 표정을 읽어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겉보기에 언뜻 하나같이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 뒤로, 각자의 내면에 품고 있는 불덩어리들을 저마다의 아우라 속에서 가지각색의 색채를 통해 뿜어내고 있다. 바로 서용선의 그림 속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2009년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화가 서용선은 인물,풍경,역사,전쟁,신화 등 다양한 범위에 이르는 주제들을 다루지만 특히 도시의 인간군상을 그려내는 연작들과 역사 속의 사건들을 시각화하는 역사화 연작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반 일련의 소나무 회화 연작들로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는 80년대 중반부터 역사화와 도시인 연작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들의 실존적 고통과, 팽창하는 도시의 공간적 압박감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반추하고 있다. 작가는 탄탄하게 구조화된 평면과 강렬한 색채의 표현을 통해 인간 실존의 문제를 특유의 조형언어로 승화시킨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작가의 작품세계가 독자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여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아울러 그의 그림을 볼 때 느껴지는 감흥 혹은 감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도 연계하여 해명해보려 한다. 본고가 작가 서용선이 보여주는 작품세계의 사려 깊은 매력을 드러내는 사려 깊은글줄이 되었으면 하지만, 의도대로 될는지는 이제 읽은 이의 판단에 맡겨야겠다.

스스로 의식하든 않았든,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서용선 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 단종과 얽혀있는 역사 속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역사화들은 당시의 인간들에게 새로이 부각되었던 역사적 사명의 기치를 강조한 다비드 류의 전형적인 역사화나 작금의 현실 속에서 자행되는 폭력적 사건들을 고발하는 레온 골럽 류의 동시대적인 역사화와도 다르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수많은 정통 역사화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고 상상해보자. 이 모임 속에서 서용선의 역사화 연작들은 홀바인의 그림<대사들>속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해골과도 같이, 참으로 뜬금없는 모습으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로 지금의 현실은 이내 과거 속으로 흩어져버리면서 부재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곧바로 부재의 상태로 넘어가는 현실을 기억으로 대체하는 것이 역사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역사 역시 상징적 질서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종 재위 시절의 현실들은 공식적인 상징적 질서 속에 자리하지 못했다. 단종대의 역사적 사실들은 한동안 실록이라는 이름 대신 노산군 일지라는 이름을 단 기록으로 존재하였다. 국왕이 승하하면 왕의 업적은 행장에 기록되고 왕의 능은 능지와 산릉도를 갖추게 되지만 단종의 경우 당대에 왕실에서 행장이 작성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능도 조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서용선의 그림들은 공식적인 역사의 상징적 질서로부터 추방되었던 실재로서, 그리하여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하나의 외상적 기억으로 오래 묵혀져왔던 역사의 외상으로서 단종을 둘러싼 사건들을 들춰낸다.

자크 라캉의 개념들을 비유적으로 사용해서 작가의 그림들을 묘사한데서 좀더 나아가, 그 사회적 함의에 대해서도 잠시 짚어보자. 앞서 공식적인 역사의 상징적 질서라 불렀던 바를 알튀세 식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을 정사(正史) 속의 자리로부터 한동안 몰아내었던 역사 속 승자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오래 이어져왔는가를 생각해보면 매우 놀랍다. 알튀세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 일컬었던 매스미디어에서 생산한 텔레비전 드라마들이 이러한 승자의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충실히 재생산해왔던가. 하지만 서용선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만들어낸 드라마들이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승자의 시각에 개인적인 제동을 건다.

물론 단종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 특히 사육신과 생육신에 얽힌 이야기들은 후대에 결국 충()이라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교훈에 귀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져있던 이야기들의 재평가와 그 사적의 정비를 통해 숙종, 정조 등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군주 중심의 봉건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그 시의성이 많이 약해진 비교적 낡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용선의 그림들은 시대착오적인 관념체계를 생명력 없이 반복하여 되뇌는 선전화들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작가가 다루는 내용들이 지난날의 군사정권시절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민족기록화들처럼 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려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이데올로기를 설득하고 주입시키려는 목적에서 그려진, 미학적 성취도에서는 다소 부족한 느낌을 주는 실용화(實用化)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서용선은 작품에 표현주의 양식을 도입한다. 이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교황 초상을 변형시킨 것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은 그 속에 휩싸인 개개의 실존들이 겪어내는 저마다의 고뇌들로 변환된다.

하여 서용선은 저는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을 내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즉흥적이고 표현적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라 말한다. 역사적인 사실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측면에도 내포돼있는 개별적인 개인의 수사학은 표현주의적 붓질이라는 지표적 기호에 의해 드러나는 작가 신체에 대한 지시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는 주로 리얼리즘 전통의 흐름/계보에 자리하고 있으며 흔히 이념이나 교리에 종속되는 목적성 강한 역사화들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기도 하다.

구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회화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보여준 하나의 해결책을 베이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해서 제시한 바 있다. “닮도록 하여라. 단 우발적이고 닮지 않는 방법을 통해.” 즉 들뢰즈에 의하면 화가의 손이 화폭을 누비며 남기는 우발적인 표시와 터치들은 어떤 유형의 행위이자 선택으로 작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쌓인다. 바로 이것들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닮기만 한 단순한 구상으로부터 구원하여 보다 고차원적으로 재창조된 형상이 되도록 바꾸어놓는 것이다. “우선 보이는 대로 선을 그어 놔요자기가 선 하나를 이렇게 잘못 그어도 절대로 이건 잘못 그어지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이게 기준이 되는 거예요나중에라도 이 선이 다른 선과 만나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어 있어요.” 라는 서용선의 진술 역시 지표적인 선묘를 쌓아나가 만들어내는 형상에 관해 베이컨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주의적 붓질은 회화가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으로 현대화의 방향을 잡았던 속에서 평면이라는 회화의 존재조건과 그 물질성을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우리는 거친 붓질을 통해 회화가 지니는 물질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던 대표적인 작품들로 코브라 그룹의 회화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카렐 아펠과 같은 코브라 그룹의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들은 회화의 물질적 성격을 매우 강조하고 화면을 대면한 작가가 남긴 흔적의 폭력성이 극대화 되어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 서용선의 그림은 코브라 그룹만큼 극단적으로 물질적 성격을 강조하지는 않으며, 거친 붓질 역시 폭력적인 감정의 폭발이라는 목적보다는 작품이 주제의식을 위해 방법적으로 구사하는 중용의 태도를 취한다. 서용선의 붓놀림은 코브라 그룹과 같이 대책 없는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의 분출이라기보다는, 영화 <와호장룡> 속에서 한 인물이 체현하듯, 검법에 숙달한 자가 서예에서도 은연중에 뿜어내는 강한 내공과도 같은 것에 가까우리라.

인간 존재의 고뇌를 형상화하면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표현주의적인 붓질과 함께 기괴하면서도 거의 엽기적일 정도로 뒤틀리고 왜곡된 형태변형을 구사하였다. 들뢰즈는 베이컨이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하여 그려내기 위해 형태의 기형적 변형을 구사하였다고 파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용선은 오히려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투박하게 형태를 묘사한다. 이런 양식적인 특징 속에서 색채가 가지는 표현의 잠재력이 확장된다. 따라서 작가는 그 안에 잠재된 풍부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뿐이죠. 나는 인물 표정이 무표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림의 형식이 그런 쪽으로 보이기 쉽다는 것까지는 인정은 하죠. 하지만 선과 색을 더 길게 보면 그 그림의 생각들이 경직된 형태만 가지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경직된 부분이 대표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어요. 언젠가 그런 부분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 하여, 피상적으로 경직되어 보이는 형태의 제한조건 속에서 선과 색이 보여준 표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색채가 가지는 잠재력을 강조하는 것은 선배 혹은 스승으로서 앞선 세대작가들이 구현하였던 모더니즘 양식을 극복하려는 오이디프스적 충동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색채의 문제는 70년대 후반 우리의 추상미술을 경험하면서, 더 나아가 동양미술 전반을 생각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백색 모노크롬 회화를 조선백자와 연결시킨 평론도 읽은 듯한데, 조선미술이 전반적으로 색채의 사용이 억제되어온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러한 감각이 현대한국의 사회에도 은연 중 깊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전문적인 현대화가의 의식에도 조선식의 색채감각이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의 색채문화를 새로이 일으켜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기존의 색채관념의 파괴가 필요했습니다.” 라는 작가의 언급에서 그러한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또한 규격화된 현대도시공간이 구현하는 모더니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하는 심리는 과도한 색채와 붓놀림이 억압된 현대 도시문화에 대응하려는 심리적 발산이라는 점에서, 표현주의 회화는 밀집된 현대도시건축 공간과 관계를 가질 것이다.” 라는 말에도 드러난다. 그리고 현대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화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반복강박에도 예술적 아버지를 뛰어넘으려는 오이디푸스적 충동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970년대에 추상미술에 몰두하고 있던 그의 스승들이 민족기록화 작업에도 참여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서 서울이 급격히 현대도시화하기 시작한 70년대에 모더니즘의 논리적 결과인 한국적 미니멀 회화가 출현하고, 국가수호적 기록화가 그려지고, 유신 헌법이 통과된 것은 묘한 인연이다. 라고 진술하는 서용선의 말도 그러한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의 예술적 노선으로 모더니즘 추상을 추구하던 작가들이 민족기록화를 통해 국가의 통제 아래서 시대착오적인 작업을 할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외상으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한 역사화에서 미학적인 성취도를 획득하려는 난제에 도전한 것은 혹여 예술적 스승들이 입었는지도 모르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유와 구원의 길을 구하고자 한 바는 아니었을까?

색채의 해방이라는 목표는 서용선뿐 아니라 베이컨 역시 그 해결을 추구하였던 회회적 과제였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공유하는 이러한 공통점 외에 또 커다란 차이점 역시 발견된다. 삼면화의 형식을 즐겨 활용하였던 베이컨의 그림은, 그 형식에도 이미 드러나 있듯이, 격리와 단절이 열거되는 형태로 그려진다. 이는 삼면화의 형식적인 틀을 갖추고 있는 종류의 작품들뿐 아니라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다루는 베이컨의 그림들이 전반적으로 보여주고 잇는 경향으로 파악된다.

반면 서용선의 그림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평면적으로 분절되어있으되, 상호관계 속에서 재조합되어 전체를 이룬다는 형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서용선의 작품들과 종종 비교되곤 하는 서구 신표현주의 작가들의 회화들과도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다.

여러 평자들이 모더니즘에 반하는 형상성과 서술적인 내용의 회복, 그리고 거친 표현과 강렬한 원색의 구사등의 양식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서용선의 작품에서 신표현주의의 영향을 지적하고 잇다. 또한 작가 자신도 양식적으로 영향 받은 것에 관해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투박하고 거친 형태나 선연한 색채 등의 특성은 민화를 위시하여 불화나 벽화 등 한국의 풍토에서 긴 역사를 거쳐 형성되어온 예술적 전통의 한 축에 분명하게 자리하여 온 것들이며, 인류의 예술에서 크게 보편화된 표현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개별적인 작품들과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동시대에 표현주의 양식을 도입한 작가들의 세계와 구분되는 서용선의 독자적인 세계가 더욱 선명히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우리 시대의 역사화가로 잠시 언급했던 레온 골럽의 그림과 비교해보자. 표현주의적인 양식을 도입하여 역사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점, 그리고 역사의 주변부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민초들의 삶을 시각적인 재현의 장으로 끌어들여 가시의 영역으로 호명하였다는 점 외에, 서용선과 골럽은 심문이라는 주제를 곧잘 다룬다는 점에서도 매우 구체적인 공통점이 있다. 허나 골럽의 <심문>은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디에서나 자행되고 있을지 모르는 폭력의 냉혹한 현실에 대한 고바르의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로부터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거를 두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서용선의 <심문>과는 구별된다. 또한 그림의 소재와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레온 골럽의 그림에서 우리는 배경이 거의 사라지고 인간에만 초점을 맞춘 특징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서용선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길항관계 속에서 긴장을 빚고 상호작용한다. 때로는 건물이나 공간이 인간을 파고들기도 하며, 이런 요소들이 서로 겹치는 관계 속에서 뒤섞이기도 한다. 격자형을 표상되는 현대적 건물이나 도시의 인프라 구조들을 재현하는 것은 고현학(考現學)적인 관심의 발현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현대를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의 유적을 그려내는 둣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그림들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의 유적과 건축 환경 속에서 뒤섞이어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의 신표현주의 작가 레온 골럽이 그림에서 배경이 거의 사라지고 인간에만 초점을 맞춘 특징을 보여준다면, 유럽의 대표적인 신표현주의 작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은 반대로 대개 인간이 부재하고 공간만이 남은 듯한 인상을 준다

김경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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